-
-
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제목 <사랑 없는 세계> 와 책 표지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사랑 없는 세계>는 일본에서 나오키상과 서점 대상을 모두 수상한 첫 번째 작가인 미우라시오의 최신작이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한 등장인물들의 일상이 평온해 보이고 애기장대라는 식물의 세계에 푹 빠져든다.
특히 '애기장대'라는 식물 이름이 친숙하게 와닿았다. 대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 분자생물학 연구실에서 이 애기장대를 가지고 실험재료로 많은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기장대는 135 염기쌍의 다세포 진핵생물인데 상대적으로 작은 게놈을 가지고 있다. 분자생물학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식물이다. 꽃의 발생, 굴광성 등의 연구는 대부분 애기장대로 실험하여 학계에 발표한 사례가 많았다.
이 책에서 애기장대를 소재로 한 두 주인공의 대화가 매력적이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조그마한 양식당에서 일하는 후지마루와 식물을 연구하는 모토무라. 후지마루가 연구하는 식물에 대해서 전공 용어를 써 가면서 심도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공감을 느끼면서 내가 식물학에 관련한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유전자의 아주 작은 차이로 모양이 달라져요. 하지만 어느 것이 뛰어나고 어느 것이 열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모두 애기장대고, 다 챔버 안에서 잘 살아가려고 해요. "
얼굴 생김새나 체형이나 피부색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다. 저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더 잘 살아보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p. 75)
사람의 유전자는 아주 복잡할 것 같이만 단순히 4개의 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의 조합 차이일 뿐이다. 식물,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4개의 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나는 지금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생활하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세네갈 동쪽에 위치한 사하라사막의 작은 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의 피부색은 유난히 검고 체형은 우리보다 훨씬 크다. 한국에 비하면 이곳의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모래폭풍이 심하게 불 때면 전기가 끊어지고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하루하루를 분투하고 있다. 단순한 유전자 염기의 배열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르지만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똑같다.
식물을 연구하는 일이 너무도 좋아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토무라, 그런 그녀에게 반한 엔푸쿠테이하는 음식점의 배달원 "후지마루"는 그녀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사랑 없는 세계에 빠져 식물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모투 무라는 그의 고백을 거절한다. 이게 로맨스 소설인데 설마 여기서 끝?
이 책의 470쪽이나 되는 방대한 소설책인데, 일반 소설이 주는 위기, 절정의 전개 과정이 없다. 독자들의 흥밋거리나 반전 같은 요소들이 것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장점은 식물 연구활동의 전문성이다. 모토무라가 애기장대의 연구를 통하여 사랑의 감정이 없는 식물을 사랑하게 되고 그 세계에 빠져든다는 독특한 소설이다. 아마도 작가는 인간이 사랑이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 같다.
모토무라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는 세계를 대하는 후지마루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 서로가 열정을 기울이는 세계는 달라도 언제끼지나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모토무라는 하고 있었다. (p.124)
모토무라는 항상 연구에만 빠져있는 후지마루의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몰아친다. 아마도 늘 함께해서 언제나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미우라시온은 실로 전문가 수준의 분자생물학 조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 사중변이체 애기장대는 265분의 1의 확률로 생긴다. 이런 희박한 확률임에도 불구하고 모토무라는 계속해서 사중변이체를 구하기 위해 애기장대를 교배하고 또 교배한다. 조금만 후지마루에게도 신경을 써 주면 좋을 텐데.
"나는 밥을 재빨리 혼자서 먹고 남는 시간에 애기장대의 씨앗을 한 알이라도 더 많이 채취하고 싶다."라는 후지마루의 독백이 애절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