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두 운동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제 그만 쉬고 싶을 때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힘을 쥐어짜내다 보면 목표 거리나 기록을 아주 살짝이나마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점, 둘 다 내 몸을 발견해나가는 일이라는 점,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면 쉬워지기도 한다는 점, 목표 지점이 보이면 나도 몰랐던 젖 먹던 힘이 난다는 점이다.
내 인생에서 자전거는 충분히 많이 타보았고 자전거로 다양한 장소를 가보았으니 이제 달려볼 차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달리기를 하며 어떤 한계에 부딪치고 어떤 환희를 느끼고 무엇을 배우고 쌓아갈지 나도 궁금하다. 풀코스 마라톤까지는 무리고 하프 마라톤까지는 도전할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앞날은 모르는 일, 처음 이 동네에 와서 동네 마실용 장보기용 자전거를 살 때는 내가 헬멧을 쓰고 팔당을 달리게 될 줄 몰랐듯이.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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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예정된 이별은 예기치 못한 이별보다 견디기 어렵다. - P166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보면, 가끔 슬리퍼 위에 수놓아진 미피 네 마리와 눈이 마주친다. 남은 반찬은 랩이 아니라 접시로 뚜껑을 덮어 두는 편이고, 멸치 국물은 몇 번을 내 봐도 맛이 안 난다.
밤에는 점점 더 외로움이 쌓여 갔고, 도무지 감딩이 안 될 때는 긴코 씨에게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어 본다. - P171

낯선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본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하루 맞이하게 되는 나날들을 그럭저럭 해치울 뿐이었다. - P172

일요일에 같이 식사를 하고 경마장에 가자는 말도 들었다. 상대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아무리 허둥거리고 걱정하고 기대해 본들 결국은 흘러가는 대로 되겠지.
후지타 때처럼 그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거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다. 그렇게 열렬한 사랑은 이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노력하면 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 P173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뭐든 시작해 보는 건 자유다. 이제 곧 봄이니 조금은 무책임해지더라도 눈감아 주기로 하자. - P174

전철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역으로 나를 싣고 갔다. end. - P177

함께 실린 단편 <출발> 제목 그대로 젊은이의 새로운 출발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신주쿠 서쪽 출구 근처에 위치한 회사에 근무하는 청년은 자기가 ‘중심‘이라는 말을 몇 번씩 중복해야 어울릴 법한(도쿄의 중심, 신주쿠의 중심 …), 특별한 지점에서 일해 왔다는 사실을 낯선 타인의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발견한다. 주위 현실에 대한 관점이 뒤바뀌는 순간이 이 작품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나는 과연 어떤 장소에 있었는가? 그에 대한 인식이 청년에게 다음 장소를 지향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준다.

- 작품 해설 : 고단한 정신을 환하게 밝히는 긍정의 미학 - 노자키 간(평론가) - P216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특징은 젊은이 같은 노인과 노인 같은 젊은이의 대비다. 젊은이가 노인을 부러워하고 노인이 젊은이보다 건강하다는, 어딘가 색다르고 독특한 플롯에서 현대의 감춰진 이면을 선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를 읽어 낼수 있지 않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느 광고 카피처럼 진정한 젊음은 외면보다는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열린 마음과 유연성, 긍정의 힘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일 것이다.

- 옮긴이의 글 : 담백한 롱 테이크에 담긴 청춘의 자화상 - 이영미 - P221

이 책에 실린 또 하나의 단편 <출발>은 제목 그대로 젊은이의 새로운 출발을 그리고 있다. 출발, 희망과 기대가 가득한 단어다. 지금의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상 또한 돌이켜보면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꿈으로 부풀었던 출발이었다. 주인공은 수없이 스쳐 지났던 신주쿠 역의 흡연 구역에서 낮에 우연히 만난 여자가 별생각없이 툭 던진 말을 듣고서야 자기가서 있는 장소와 의미를 재인식한다. 즉, 우리에게 두 가지 출발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에서 첫걸음을 내딛는 일반적 의미의 출발과 세계를 다른 각도와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자리와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는 출발. 우리에게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는 듯하다.

- 옮긴이의 글 : 담백한 롱 테이크에 담긴 청춘의 자화상 - 이영미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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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를 저으며 나의 슬픔이 점점 냄비 속 카레로 녹아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 P131

왠지 모르게 지쳐 있었다. 쌓일 대로 쌓인 혼잣말에도, 여름과는 다른 파란 하늘과 아이들의 가느다란 다리를 바라보는 것에도, 단조로운 산책길을 걷는 것에도, 그 뒤에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와의 생활에도.
메마른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얼굴을 덮었다. 봄에 자른 머리카락이 꽤 많이 길었다. 계절이니 몸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만 변해 갔다. - P133

제대로 된 생활 같은 건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에 넣었다가 내던지고, 내던져지고, 정작 내던지고 싶은 것은 언제까지고 떨쳐 내지 못해서 내 인생은 온통 그런 것들로만 이뤄져 있다. - P136

다른 사람과의 인연은 미덥지가 못하다. 나는 누군가와 단단히 연을 맺는 게 불가능한 모양이다. 혼자 살아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겨지는 게 아니라,
한 번쯤은 내가 먼저 떠나 보고 싶었다.
이 집에서 나갈까?
단호하게 인연을 끊고,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래도 거기에서 또다시 새로운 관계가시작되겠지.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또 파국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런 의미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인생도 끝나게 될까. 눈앞에 있는 이 할머니는 과연 그런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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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는 순간,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싫지는 않았다. 인공적이고, 달착지근한 그리운 냄새. 갑자기 외로워졌다. 그리움 뒤에는 언제나 이런 허전함이 밀려든다. - P14

엄마가 턱을 괴고 귀찮다는 듯이 되물었다. 턱에 파묻힌 손톱끝의 매니큐어가 벗겨져서 보기 흉했다. 나랑 같이 살 때는 매니큐어 같은 건 칠하지 않았다. 이왕 할 거면 완벽하게 예쁘게 해 줬으면 싶었다. 딸의 눈으로 본 엄마는 그녀가 목표로 삼는 것에서 왠지 늘 벗어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엄마가 바라는 딸의 이미지에서 그만큼 벗어나 있겠지.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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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매는 내내 겨울을 살다 갑자기 봄의 한가운데로 내쳐진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렇게 화사해도 좋은가 싶게 꽃들이 낭자했다. 검고 무거운 옷을 입고 꽃그늘 아래 앉은 자신들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소포 같았다. 그래도 봄이 좋긴 좋구나. 이 와중에도 꽃을 보니 웃음이 나오잖아. 첫째가 말했다.

- 오늘의 할 일 - P9

첫째와 셋째는 학창시절 내내 춘자나 추녀 같은 별명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딸이 짓궂은 놀림을 당하고 동시에 울며 돌아온 날 어머니는 세 딸을 나란히 앉혀놓고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어머니의 구술에는 본인의 체념과 딸들을 향한 미안함이 덜녹은 설탕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 오늘의 할 일 - P11

인연따라 모인것은 인연따라 흩어지니
태어남도 인연이요 돌아감도 인연인걸

사십구재가 시작되기 전 스님은 자매에게 한글로 풀어쓴 발원문 책자를 나눠주었다. 소리가 클수록 영가도 부처님도 잘 들을 수 있으니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으로 크게크게 따라하십시다. 그러나 막상 독경이 시작되자 셋째는또 울음이 터져버려 단 한글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 오늘의 할 일 - P13

찜질기와 부항을 비롯한 다양한 물리치료기가 셋째의 몸을 어루만졌다. 오직 감정 없는 그것들만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위로했다.

- 오늘의 할 일 - P18

겨울이 자매의 집에 머물다 간 시간은 정확히 얼마였을까? 겨울이 사라진 뒤로 자매는 한번도 그 존재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살면서 한번쯤은 문득 조그만 머리통이랄지 말랑한 볼 같은 것을 떠올린 적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잡초 뽑듯이 기억을 털어내버렸다. 자매는 각자 어른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겨울에 관한 기억은 고향집 다락방에 처박아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는 떠올릴 일이 없는 기억이라고. 아니, 거짓말이다. 자매는 각자 엉뚱한 시간과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을 통해 겨울을 만난 적이 적어도 한번은 있다.

- 오늘의 할 일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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