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예정된 이별은 예기치 못한 이별보다 견디기 어렵다. - P166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보면, 가끔 슬리퍼 위에 수놓아진 미피 네 마리와 눈이 마주친다. 남은 반찬은 랩이 아니라 접시로 뚜껑을 덮어 두는 편이고, 멸치 국물은 몇 번을 내 봐도 맛이 안 난다. 밤에는 점점 더 외로움이 쌓여 갔고, 도무지 감딩이 안 될 때는 긴코 씨에게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어 본다. - P171
낯선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본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하루 맞이하게 되는 나날들을 그럭저럭 해치울 뿐이었다. - P172
일요일에 같이 식사를 하고 경마장에 가자는 말도 들었다. 상대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아무리 허둥거리고 걱정하고 기대해 본들 결국은 흘러가는 대로 되겠지. 후지타 때처럼 그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거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다. 그렇게 열렬한 사랑은 이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노력하면 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 P173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뭐든 시작해 보는 건 자유다. 이제 곧 봄이니 조금은 무책임해지더라도 눈감아 주기로 하자. - P174
전철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역으로 나를 싣고 갔다. end. - P177
함께 실린 단편 <출발> 제목 그대로 젊은이의 새로운 출발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신주쿠 서쪽 출구 근처에 위치한 회사에 근무하는 청년은 자기가 ‘중심‘이라는 말을 몇 번씩 중복해야 어울릴 법한(도쿄의 중심, 신주쿠의 중심 …), 특별한 지점에서 일해 왔다는 사실을 낯선 타인의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발견한다. 주위 현실에 대한 관점이 뒤바뀌는 순간이 이 작품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나는 과연 어떤 장소에 있었는가? 그에 대한 인식이 청년에게 다음 장소를 지향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준다.
- 작품 해설 : 고단한 정신을 환하게 밝히는 긍정의 미학 - 노자키 간(평론가) - P216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특징은 젊은이 같은 노인과 노인 같은 젊은이의 대비다. 젊은이가 노인을 부러워하고 노인이 젊은이보다 건강하다는, 어딘가 색다르고 독특한 플롯에서 현대의 감춰진 이면을 선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를 읽어 낼수 있지 않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느 광고 카피처럼 진정한 젊음은 외면보다는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열린 마음과 유연성, 긍정의 힘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일 것이다.
- 옮긴이의 글 : 담백한 롱 테이크에 담긴 청춘의 자화상 - 이영미 - P221
이 책에 실린 또 하나의 단편 <출발>은 제목 그대로 젊은이의 새로운 출발을 그리고 있다. 출발, 희망과 기대가 가득한 단어다. 지금의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상 또한 돌이켜보면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꿈으로 부풀었던 출발이었다. 주인공은 수없이 스쳐 지났던 신주쿠 역의 흡연 구역에서 낮에 우연히 만난 여자가 별생각없이 툭 던진 말을 듣고서야 자기가서 있는 장소와 의미를 재인식한다. 즉, 우리에게 두 가지 출발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에서 첫걸음을 내딛는 일반적 의미의 출발과 세계를 다른 각도와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자리와 상황에서 다시 시작하는 출발. 우리에게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는 듯하다.
- 옮긴이의 글 : 담백한 롱 테이크에 담긴 청춘의 자화상 - 이영미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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