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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스케치북
상현 지음 / 고래인 / 2023년 7월
평점 :
상현님(@sang.ted)의 그림 에세이를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내면의 단단함'이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한 마디의 말조차도 오래 생각해놓고 내놓는다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대체로 먼저 뱉어놓고 후에 생각하는 경솔하고 유약한 사람이라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첫 도망은 바로 열여덟 살에 학교를 그만둔 일. 집안 사정, 나의 미래, 몸과 마음의 건강 모든 것이 서서히 위태로웠던 나이에 홀로 창밖을 보며 지내던 시간이 1년쯤 지나자 자신만의 정답을 발견한다. 오랫동안 스스로 결심한 마음과 말들을 골라 '나 학교 그만두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엄마는 그간 버티고 있었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그렇게 학교를 벗어난 후, 스스로 나름의 성취를 찾는다. 건강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하고, 적고 건강하게 먹으려 노력하며 몸을 만들었고, 한 밤부터 동이 뜰 때까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신문 배달을 한다. 아직은 어린 나이, 모두가 동일하게 걸어가는 경로에서 도망을 택했지만, 주저앉아 삶을 내팽개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골몰하며 마음을 다졌을 시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이 말을 떠올리며 나는 때때로 내가 살아지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돌아본다.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들에 몰두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덧 마흔을 넘기고,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된 것 같겠지만 이 전보다 성장하고 내면이 성숙해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나만의 길을 가고 있나?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뙤약볕만큼 뜨겁게 부딪히며 내달렸던 그 어린 날이 아련하고,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며 나의 열기를 식혀 주었던, 선선함과 촉촉함이 더 선명하다. 어쩌면 여름이란 계절은 그 한가운데를 지날 때보다, 지나간 후에 더 애틋하고, 그리워지는 계절이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종종 꺼내어 추억할 생각이다. 생애 가장 여름이었던 그 해를."_p.118
호주 북부의 작은 휴양지에 있는 리조트에서 하우스맨으로 일하던 워홀 시절을 저자는 '여름'에 비유한다. 침대만 겨우 들어가는 아파트에서 친구와 지내며 수십 장의 이력서를 돌리고,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다채로운 영어 욕을 들으며 하루를 견디던 시간. 지나치게 뜨겁고, 지나치게 생기 넘치는 조금은 버거운 계절. 나에게도 지나치게 뜨겁고 버거웠던 시간이 있다. 대학원에 갈 계획이었지만, 내 모자란 재능과 가정 형편을 생각해 바로 취업을 했던 첫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을 해내는 즐거움도 컸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에는 미련이 남아있었고, 외면하고 싶은 처지와 불안한 미래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온몸으로 휩쓸리던 그때가 있었다. 나에게도 그 시간을 지나치게 뜨겁고 생기 넘쳐서 조금은 버겁던 그 여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꿈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였다. 꿈은 우연한 순가에 나타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고, 무엇이든 될 것만 같은 따뜻한 희망을 건네기도, 때론 한계를 마주하게 하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차갑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젠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라는 답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나 명료한 정답이 되어 주길 감히 바라지 않는다. 걷다 보면 작은 빛을 내듯 밝아 온 힌트들을 발견하며, 그저 무언가를 해 나간다. 그것은 생애 동안 맴돌며, 나를 천천히 만들어 갈 테니까." _p.258
좋은 에세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는 잊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금 꺼내볼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글이다. 『작은 스케치북』이 그랬다.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던 열여덟 살의 나, 우연인 듯 운명인 듯 우연히 입사했지만 지금까지 마케터의 길을 걷게 했던 첫 직장 생활, 퇴근 후 술 한잔 기울이시던 아버지에게 늘 술을 마시지 말라고만 했지, 술 한 잔 따라드리지 못했다는 후회의 순간, 항상 확신하지 못하고 '내 길이 맞을까?' 의심하면서도 지금까지 한 길로 걸어온 삼십 대의 시간들.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도, 나약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적어도 내 삶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도망의 길을 선택한다면 언젠가는 꽤 거대하고 멋진 하나의 여정이 되어 있지 않을까.' 비틀거릴지언정 적어도 나만의 속도로 온전히 자신을 마주할 때 삶을 단단하게 디뎌갈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