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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지난해 말다툼을 벌이다가 연인 관계였던 황예진 씨를 폭행해 숨지게 한 이 모 씨가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특히 이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판결이 나올수록 그 사건의 주변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자주 상상해 본다. 만약 가해자에게 어린 여동생이 있다면, 그는 이 사건 이후 삶이 어떻게 변할까, 이날 출동했던 경찰은 자신들이 돌아간 후 신고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땠을까, 남겨진 피해자의 가족들은 앞으로 남겨진 자신의 삶을 위해 어떤 분투를 하게 될까. 우리에게는 쉽사리 잊힐 사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자신의 생애를 가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상황을,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
"은정동 이동아파트 화재 사건은 열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오후 3시경에 발생한 사고 당시 11층부터 14층에 머물고 있던 주민들은 거의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불에 타거나 질식해 숨졌다. 그렇게 느닷없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오후 3시에 집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 노인들과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초등학생들이었다. 12층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탈출했다고 하는데, 과실 치사 혐의를 받고 감옥에서 일 년을 살고 나왔다. 나이가 많아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우리를 포함해 유가족들은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유원』은 십이 년 전 화재 사고가 일어난 아파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다. 위층 할아버지가 피우던 담배꽁초에서 시작된 불길이 아래층까지 옮겨붙자 집에 있던 언니는 물에 적신 이불로 유원의 몸을 감싸서 11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살렸다. 결국 언니는 유원을 구하고 죽었고, 11층에서 떨어진 유원을 온몸으로 받아 낸 아저씨는 다리가 부서져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언니와 아저씨,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십이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기적의 소녀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겁기만 하다.
"언니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해." 많은 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였던 언니가 자신을 구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여전히 자신을 '화재 사건의 생존자'나 '이불 아기'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을 구하다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종종 찾아와 부모님께 매번 큰돈을 빌리며 모습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삶을 빚졌다는 죄책감, 고마워해야 할 언니와 아저씨를 향한 미움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 가게 했다. 그런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 주었다”
책을 읽고 나면 밑줄 그었던 문장을 쭉 정리해 보곤 하는데, 흩어진 문장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키워드를 고르자면 '내가 나로 이루어지게 된 어떤 이유들'(p.128)과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유원을 지금의 유원으로 이루어지게 만든 이유들, 수현을 수현이답게 만든 많은 이유들, 그리고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지난 시간들. 수현은 늘 정당하게 돈을 벌지 못하고 유원을 구한 자신의 선행을 통해 구걸하고 돈을 얻어내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며 성장했고, 유원은 자신을 바라보며 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과 고마워해야 할 언니와 아저씨에 대한 모순된 감정에서 느끼는 죄책감에 외톨이로 성장하지만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성장은 서로가 서로를 부축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론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에 대해 착각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생각이 나 선택을 무한하게 긍정하는 것이 자존감이 아니다. '내가 나로 이루어지게 된 어떤 이유들'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모르겠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고, 온전히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자신을 바라보며 언제나 언니를 떠올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나를 구하기 위해 다리가 부서져서 너무 고맙고 죄송하지만 아저씨의 존재가 너무 무겁다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목숨 값을 지불하고 있는 부모님 때문에 온전히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수현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온전히 누리게 된 자신의 삶을 선물해 준 언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게 되었고.
“언니, 하나도 안 무섭지?” “응.”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언니의 용기를 닮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이 문장이 찬란하다. 이 시간들을 지나 자신의 생애를 누린다고 표현하게 된 유원이의 감정이 너무 벅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