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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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는 많지만, 그중 위화 작가를 향한 마음은 특별하다. 부전공으로 중국학을 공부하면서 처음 읽었던 위화의 작품은 암기하듯 외웠던 중국의 근대 대격변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그중 『인생』이라는 작품을 너무나 좋아했다. 『인생』은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마을 사람들은 집 안의 솥까지 빼앗긴 뒤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고 농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홍수까지 겹쳐 최악의 기근이 찾아든다. 그때 현장 부인이 출산 중 출혈이 심해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아들 유칭이 차출되어 피를 수혈해 주게 되는데, 의사의 무지로 아이의 몸속 피를 모조리 빼 죽고 만다. 핏기 없이 창백하게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푸구이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원청』 추천평에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라고 썼다. 그중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라는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원청』은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1900년대 초반 신해혁명기를 배경으로 쓰였는데, 마을의 부유한 도련님이었던 린상푸는 우연히 마을을 지나는 한 남녀를 집에 들이게 된다. 마을의 유일한 관리였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베를 짜며 부지런히 린상푸를 돌봐주시던 어머니도 그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병으로 여읜 후였다. 그들은 남매이며, 여동생은 샤오메이 오빠는 아창이라고 밝혔으며 그들은 원청이라는 아주 먼 남쪽 도시에서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린샹푸는 내심 샤오메이가 마음에 들었는데, 다음 날 여자는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오빠는 곧 돌아오겠다며 여동생을 부탁학하고 먼저 떠났다. 샤오메이는 린샹푸 곁에 머물며 건강을 되찾았고, 혼인을 맺었다. 그러나 데리러 오겠다는 오빠 아창이 돌아오지 않자 샤오메이는 근심에 절에 가서 공양을 드리겠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메이는 린샹푸가 지닌 금괴의 일부를 가지고 떠났다.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잊지 못한 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연마하던 중 샤오메이가 돌아왔다.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샤오메이는 '왜 금괴를 가지고 떠났는지' 묻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용서를 구했다. 린샹푸는 더 묻지 않고 다시 샤오메이를 받아들였고, 그해 여름 딸을 얻었다.


​"당신은 돌아왔지만, 금괴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데다 어디 두었는지도 말하지 않았지요.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더는 묻지 않을게요. 다만 당신이 또 말없이 떠난다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 _p.81


​린샹푸는 아이를 두고 또다시 떠난 샤오메이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샤오메이는 원청이라는 아주 먼 남쪽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양쯔강을 건넌 뒤에도 600여 리를 더 가야 하는 그곳은 강남 물의 고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원청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 지나온 마을 중 아창이 말한 원청과 가장 비슷한 곳은 시진이었다. 원청은 실재하지 않으며 아창과 샤오메이의 이름도 거짓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상푸는 시진으로 돌아가 샤오메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한다.


위화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대의 변혁 앞에 개인의 운명과 삶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시대 속에서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헤어나가는 평범한 인간을 세세하고 숭고하게 그려낸다. 사실 린샹푸의 삶을 보며 우리는 과거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어 신해혁명기를 겪은 한 인물이라고 여기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먼훗날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도 누군가는 코로나 전염병으로 탈세계화와 고립주의 시대 또는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경제 침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더 가치있는 것을 찾고, 더 옳은 것을 쫒으며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리 가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해낼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위화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화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대의 변혁 앞에 개인의 운명과 삶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시대 속에서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헤어나가는 평범한 인간을 세세하고 숭고하게 그려낸다. 사실 린샹푸의 삶을 보며 우리는 과거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어 신해혁명기를 겪은 한 인물이라고 여기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먼훗날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도 누군가는 코로나 전염병으로 탈세계화가 본격화된 시기 또는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경제 침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주어진 삶에서 더 가치있는 것을 찾고, 더 옳은 것을 쫒으며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아무리 가혹한 운명에도 각자 이 삶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위화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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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행방 새소설 3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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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현장에 있던 유치원생을 비롯하여 초등학생과 인솔교사 23명이 사망했다. 화재는 2층에서 시작되었다. 불은 단 20분 만에 건물 전체로 옮겨붙었고, 화재 진압 후 잿더미로 변해 버린 건물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고 당시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은 없었고,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는 작동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자고 있던 건물은 컨테이너를 얹어놓은 불법 건축물이었다. 유치원 캠프로, 초등학교 수련회로 아이들을 이곳에 보냈던 부모는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리고 2014년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진도 부근에서 침몰하였고, 침몰 중에도 선내에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에 따라 머물렀던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날 여객선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 325명이 탑승해있었다.


『밤의 행방』의 주인공 주혁은 부실하게 지어진 수련원으로 캠프를 보낸 뒤 황망하게 딸을 잃은 인물이다. 유난히 캠프를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던 수아를 설득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보낸 터였다. 뼈가 다 여물지 못한 아이들은 고온에 녹아 뼛조각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주혁과 영주의 아이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엔 누구의 아이도 있을 수 있었고, 누구의 아이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주혁의 누나는 그들이 왜 이 슬픔을 함께 견뎌내려 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끼리 보듬고 격려해줘야지. 누나가 울분에 차 말하면 주혁도 똑같이 되받았다.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까 안 되는 거야. 똑같이 후회하고 똑같이 증오하고 똑같이 절망했는데 무슨 수로 서로를 보듬어? 무슨 수로 서로를 용서하느냐고!"


『밤의 행방』은 주혁이 '선녀 보살'인 누나의 법당에서 기거하는 중 기묘한 일을 겪으면서 시작된다. 용한 점쟁이가 되기 위해 산속으로 기도를 떠난 누나를 배웅한 후 기묘한 나뭇가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요, 아저씨. 저 좀 보실래요? 마누카 꿀을 반 스푼 타주시면 피로가 좀 풀릴 것 같네요.” 주혁은 황당했지만 나뭇가지와 티격태격하며 정이 들고, 우연히 점을 보러 법당에 들른 사람들의 죽음을 맞추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절박하다. 가출한 딸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 직장 내 성희롱으로 모욕을 견디고 있는 사원, 부모의 학대로 고통받고 있는 남매와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에 원인을 알고자 하는 언니까지.


작가는 모든 사람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받았을 씨랜드 화재 사건을 시작으로 '인재(人災)'라는 이름하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 지금 이 순간에도 탄생하고 있을 밤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 대하여. 주혁이 그랬던 것처럼 유족들도 고통과 증오와 죄책감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속에서 아이가 마땅히 누렸을 무탈하고 평범한 미래를 끊임없이 상상했을 것이다.


"제가 유년기에 복이 있었군요. 아뇨,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별다른 일 없이 이 나이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으면 그게 복이죠. 부모에게 학대당하거나 이웃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지도 않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가스통이 폭발해 몸이 산산조각 나지도 않았으니 운이 좋았네요. 요즘 같은 세상엔 운도 복이죠."


최근에 나는 삶이 '권태롭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의 일상에서는 내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도, 내 인생의 방향을 뒤흔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어떻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죽음이 당연하고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만들어진 죽음을 피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약 누군가에게 죽음이 길을 잃어 찾아온다면 "따뜻한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것만으로도,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새날이 밝아올 수 있음을,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어줄 수 있음을" 서로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인재(人災)는 여전히 모두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내가 될 수도 있었고,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겪을 수밖에 없었을 일이기에 그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마음이 전달되었기를, 이제는 용기를 얻고 새날을 살아갈 힘이 생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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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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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방영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 – 알쓸인잡」에서 가장 큰 소득은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는 매주 '인간'을 주제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 문학 작품들을 소개했지만 그중 심채경 박사가 '전쟁'이라는 인간의 흑역사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커트 보니것'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SF 작가로 만 알고 있었던 보니것은 실은 참전 군인이자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이며, 이후 자전적 경험을 소설 『제5도살장』에 담아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를 통해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기록했다.



금요일 저녁, 방송을 보며 이 책을 주문했고 주말 동안 『제5도살장』을 단숨에 읽었다. 나에게 낯선 '드레스덴 폭격'이 궁금해서 넷플릭스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드레스덴 폭격」을 찾아보았고, 트라우마를 연구한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을 읽으며 그의 삶을 조금은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세계 2차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니것은 최전방에 파견되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제5도살장에 수용되었는데, 당시 공업이 발달했고 엘베 강변의 피렌체로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드레스덴은 아직 한 번도 폭격을 받지 않아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다. 1945년 2월 13일부터 사흘간 연합군의 주도로 도시 전체에 폭격이 시작되었고 도시는 불타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작전은 군사 시설이 아닌 시장이나 민간 거주지를 향한 민간인 폭격이었고, 쏟아지는 폭격에 도시는 1000도 가까이 불타올라 시체들은 녹아내렸다. 보니것은 지하 3층 고기 보관소에 숨어 겨우 살아남았고, 달처럼 완전히 비어버린 도시에서 시신 수습과 도시 재건에 동원되었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은 보니것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이 사건에 대해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실제로 책이 출간된 것은 1969년, 전쟁이 끝나고도 20년 넘게 지난 후이다.



"바깥에는 불이 폭풍처럼 번지고 있었다. 드레스덴은 하나의 거대한 화염이었다. 이 하나의 화염이 유기적인 모든 것,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 미국인들과 경비병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연기로 시커멨다. 해는 약이 바짝 오른 작은 핀 대가리였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표면 같았다. 광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은 뜨거웠다. 그 동네의 다른 모든 사람이 죽었다. 뭐 그런 거지." _p.221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낼까? 끔찍한 경험을 한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하고 싶어서 잊는 방법을 선택할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나 자연재해, 고문,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지닌 사람은 끊임없이 그 기억 속에 머문다. 『몸은 기억한다』에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처음 그 일을 겪었던 당시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때의 냄새를 맡고 그때의 신체감각을 똑같이' 느낀다고 말한다. 보니것은 고통스럽고 지난 일로 잊어야 하는 기억을 자꾸만 되풀이하는 자신의 상태를,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며 왔던 길을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에 비유했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들 한다. 나도 물론 앞으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전쟁 책을 끝냈다. 이번 것은 실패작이고, 실패작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금 기둥이 쓴 것이니까.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_p.37


빌리는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눈을 깜빡여 1958년으로, 1961년으로, 또 1957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정오를 울리는 사이렌에도 그는 기겁했고, 눈을 감자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시 정신의학에서는 PTSD나 트라우마를 정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쟁 이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인해 술에 취하거나 급작스러운 분노를 표출하고, 꿈으로 반복되는 기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명확히 진단하지 못했다. 빌리도 미국으로 돌아와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중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갔지만, 의사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YMCA 수영장 맨 끝 깊은 데 던지고, 그랜드 캐니언 가장자리에 데려간 것 때문에 빌리가 박살 나고 있다고 여겼다.



​"트랄파마도어인은 주검을 볼 대 그냥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도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트랄파마도어인이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을 한다. '뭐 그런거지.'" _p.44


​"자, 이 모든 싸움의 대단한 결말은 무엇인가? 유럽은 수많은 보물과 2백만 명의 피를 낭비했고, 다투기 좋아하는 기사 몇 명이 약 백 년 동안 팔레스티나를 소유했을 뿐이다." _p.30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의학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제5도살장』을 통해 짐작해 보자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 같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현재'를 상실하고 자꾸만 과거의 기억으로 반복해서 끌려가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인식도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보니것은 이 책을 쓰면서 현실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인식하기 시작한다. 비록 드레스덴에서의 일을 글로 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고 대면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이 소설을 써냈고, 그것이 과거의 일임을 스스로에게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가 "자, 이 모든 싸움의 대단한 결말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전쟁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전쟁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생생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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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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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쓴 것을 뜻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소설 중에는 작가 자신이 작품 속 인물로 등장하면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예를 들면, 박상영 작가나 민병훈 작가, 그리고 『중급 한국어』의 문지혁 작가도.주인공 문지혁은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현지에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다 귀국하여 대학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결혼을 하고 지방의 대학 강사직을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러 차례 시험관 시술을 통해 딸 은채를 낳는다. 신춘문예에 꽤 응모했으나 당선된 적은 없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출간된 소설은 독자에게 “조잡하고 애매한 소설이며… 주제 실종에 무엇보다 더럽게 재미가 없습니다.”라는 평을 듣는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되어 있을 거예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죠. 진짜 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결말에 변화가 들어 있어야만 해요. 작품의 주제, 작가의 최종 메시지가 거기 들어 있으니까요." (38)


나의 삶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까? 『중급 한국어』는 '자서전'을 쓰는 글쓰기 수업 커리큘럼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총 15주간 자서전 쓰기와 글쓰기의 기술을 배우고, 이후 세계 고전문학 『변신』,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성장과 사랑, 죽음과 고통을 바라본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것들이자 문학작품의 영원한 주제들. 첫 수업에서 그는 ‘일상→(극적) 비일상→일상’이라는 이탈과 귀환을 통해 A가 A′가 되어가는 소설의 원형적 구조를 설명하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일상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는 하루하루에 글을 쓰고 고치고 읽고 고치는 되풀이의 연속일 뿐이다.



카버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사랑했던 작품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하나의 죽음이 있다. 여덟 살의 스코티. 부모는 아이의 생일을 맞아 빵집에 가서 우주선과 발사대가 그려진 맞춤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러나 하필 스코티는 자신의 생일 아침 차에 치이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부부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빵집 주인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대고, 아이의 죽음 이후 빵집을 찾아간다.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당한 부모는 자신들의 분노를 빵집 주인에게 쏟아붓고, 빵집 주인은 주문해 놓고 찾아가지 않은 진상 고객에게 맞서 싸운다. 그러나 주인은 곧 부부의 사연을 알게 되고 부부에게 시나몬롤빵과 커피를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따뜻한 빵을 건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주인은 이들에게 '검은 빵'을 내어준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검은 빵.


"인생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우리는 실망스러운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결국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바로 거기에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자라는 동안 나는 삶이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고, 친구를 얻고, 원하는 대학과 장래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삶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실패나 좌절을 견디고, 내 욕망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을 견디고, 또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는 것. 아마 각 사람마다 삶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있겠지.



문지혁 작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둘째를 가지면서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단어들을 익히고 정의 내리는 과정을 통과한다. 나 스스로 정의 내린 삶의 가치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삶의 풍부함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어떠한 결과가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내 삶을 이루고 있으니까. 그러나 살다가 어떠한 고통과 불운을 겪고 나면 나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또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과정이 아닐까.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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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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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삶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력해진 인물이 있다. 「유령의 마음으로」에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자친구 정수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끝났음에도 헤어지지 못하는 '나'와 「빛이 나지 않아요」 음악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지방으로 떠밀려 온 '나'가 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로 나무가 되어버린 한 남자(「여름은 물빛처럼」)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여러 차례 인공 수정을 하며 지쳐가는 희애(「낯선 밤에 우리는」)도. 그들의 마음은 뭐랄까, 생기를 잃어버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은 묵묵히 살아내지만 마음이 죽어버린 상태.


"너는 당황한 것보다도, 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유령이 입을 열었다. 실망한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유령이 카운터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12쪽)


삶을 살아낸다기보다 버티고 있다고 여긴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내 마음이 모든 것에 무감해졌다. '이후로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76쪽) 세상에 그다지 크게 놀랄 일도, 설렐 것도 없게 되었다. 『유령의 마음으로』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앞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 나타나고, 해파리에 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해파리가 되고, 내 집에 모르는 남자가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되어도. 자신의 아픔에 골몰하느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주변의 타인에 대해 마음의 거리를 두고 무감하게 버틴다. 임선우 작가는 『유령의 마음으로』에 실린 여덟 개의 단편을 통해 각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포착해낸다.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실망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국 체념이 되니까.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태도는 내가 유령을 순순히 내 삶에 받아들이게 되는 데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4쪽)


「유령의 마음으로」의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은 그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유령은 내가 슬픔에 잠길 때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고, 기쁠 때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정수를 보며 정수와의 사소한 추억을 떠올리는 내 옆에서 눈물 흘리는 유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낯선 밤에 우리는」은 지난 2년 동안 임신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인공수정을 하고 있다. 성관계는 숙제가 되고 생리는 실패가 되는 일상이 지속되었을 때 금옥을 만난다. 신촌역 4번 출구 앞에서 자기 몸만 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전도하는 금옥과 병원에 가는 날마다 밥을 먹었다. 호르몬 주사로 예민해지고, 시험관 시술로 온종일 시달리고 나면 금옥의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들에게는 상황을 변화시킬 행운도, 많은 이들의 격려도 없지만 내 마음처럼 나를 꼭 안아주는 유령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뚝딱 밥상을 차려주는 금옥으로 인해 스스로 부정해왔던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다섯 평짜리 방 안에서만큼은 아이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저 요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설렘을 갖고 지켜보다가 맛있게 먹는 것. 그것이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부였다." (124쪽)


전문가들은 우울하거나 무력감에 빠졌을 때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빛이 나지 않아요」의 지선 씨는 해파리가 되고 싶어 했지만 끝내 해파리가 되지 못했다. 몸은 해파리가 되었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지선 씨는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빛나고 있을까? 스스로 질문하다 보면 깨닫는다. 실패하고 떠밀리게 되었지만, 내가 빛나는 모습은 따로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여덟 편의 단편 속 '나'는 조금씩 변화한다. 처음으로 정수의 병원을 찾지 않고 미뤄 둔 집안 청소를 하며 자신을 돌보고, 포기했던 음악을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난다. 가족들에게 떠밀려 시험관 시술을 했지만 달력 속 가족의 생일이 표시된 파란 동그라미에 자신이 속하지 않은 것을 보고 삶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들을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아주 작은 응원의 목소리가 아닐까. 살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 투성이지만, 기운을 낼 수 없는 누군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은 작가의 조심스럽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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