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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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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전에는 내가 '세대'라는 말을 이토록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대'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서야 내가 무심결에 '세대'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청년 세대', '우리 세대'와 같은 말부터 '요즘 세대', '기성세대', '90년 대생', '386세대' 등 너무도 많은 '세대'를 특정 지어 분류하지만, 세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해보았던가. 공통의 의식과 풍속을 공유하는 특정 연령층을 지칭하는 말, 세대. 특히 가장 화두인 (나를 포함한)'청년 세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현재의 '청년 세대'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 흐름은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해온 억압과 불평등에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군대, 성범죄, 포르노, 성별 할당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남성 청년 집단의 반발을 초래하는 공적 결정이 이어지면서, 정권이 페미니즘과 결탁해 20대 남성을 역차별한다(p.94)'고 느끼는 부류도 존재한다. 또한 80~90년대 '밀레니얼세대는 가족 간 사회 경제적 지위와 라이프스타일의 편차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영유아기부터 계층화된 사회화를 경험하여 가족 배경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나타나는데(p.97)'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과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옛말이 되었고, 가족의 경제력이 자신의 경제력이 되어 피부로 느껴지는 기회의 불공정성은 청년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삼포 현상은 청년들 내에서도 계급과 젠더의 균열선을 따라 이질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저학력, 저소득, 낮은 가족 배경의 남성들에게, 고학력, 고소득, 높은 가족 배경의 여성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었다. 저학력 남성들이 결혼뿐 아니라 결혼 밖 친밀성 관계조차 만들어 가지 못하고 고학력 여성들이 결혼을 보이콧하고 있는 독특한 젠더 비대칭성이다." ─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중에서

현재의 청년들은 여전히 '경계'에 있는 것 같다. '개인'을 강조하는 밀레니얼 세대지만 여전히 부모 세대에 분리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기성세대는 청년을 향해 패기 없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포기'하는 것을 먼저 배운 우리는 절망감 위에 멈추어 있는지도 모른다.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토로가 영화로, 학자들의 진단으로, 청년들의 한탄으로 쏟아지는 시대이지만(p.177)' 어른이 되지 못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만족과 행복을 찾고 있다. 그것이 누군가 말하는 성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세대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해왔다. "경제 부흥기에 살았던 기성세대들이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혹은 "90년대 생들은 왜 저럴까?" 내 기준에 누군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러나 《한편》이라는 짧은 인문 잡지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던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586세대까지는 여성차별이 극심했으나 현재는 그러한 차별이 사실상 소멸한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p.89)'고 여기는 20대 남자의 목소리, 여성이라는 이름에 갇혀있는 자신으로부터 저항하고자 하는 탈코르셋 세대,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586세대 정책결정권자·연구자들과 전혀 다른 언어로 사고하는 청년 세대의 목소리들. 좌절하고 투쟁하고 더디게 성장하면서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

특히 나처럼 인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세대'를, 현시대를 고민해볼 수 있었다. 다음 호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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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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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어서 좋습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없었던 분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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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동의 - 지금 강조해야 할 것
밀레나 포포바 지음, 함현주 옮김 / 마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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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해군본부 고등군사법원 특별부(재판장 송창식)는 부하 여군을 강간한 두 명의 해군 간부에게 1심에서 각각 징역 10년(ㄱ소령)과 8년(ㄴ대령) 원심을 뒤집고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ㄱ소령은 직속상관이고, ㄴ대령은 함정의 최고 책임자인 함장이었다. 2심 재판부는 이러한 권력관계 대신 “호감인 줄 알았다"라는 ㄱ소령,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라는 ㄴ대령의 진술만 채택했다. 피해자가 왜 추행 당시 곧바로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는지, 상사가 저녁에 숙소로 불러도 왜 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은 사라졌다.



"당심 법정에서는 당시 간음행위에 관한 상황을 직접 재현하면서도 키스할 때 자신의 팔을 잡았던 사실 이외에는 자신은 누운 채로 그냥 피고인의 범행을 지켜보고 있었다며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바, 다른 폭행 내지 협박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 판결문 중에서



국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 사실에 대하여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는가.'가 재판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2008년 4월, 서울고법 심상철 부장판사는 성폭행 당시 여성이 스키니진을 입었던 사실을 들어 "사건 당시 피해자가 밑단이 좁아 벗기기 힘든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청바지가 가지런히 말린 상태로 놓여 있었던 점을 보면 강제로 벗겼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 내려져 논란이 일어난 이후 2019년 여군 사건 판결까지 재판부의 인식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성폭행 피해자는 가해자의 '암묵적 동의로 여겼다'라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저항하였는가'를 증명해내야 성폭행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지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리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여성에게 NO라는 의사 표현을 가르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라는 의견에 무척 동의했었다. 사회는 여성에게 원하지 않는 성관계나 성희롱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게 NO라는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 그 외의 모든 상황은 YES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성관계 할 의사가 있을 때 YES라는 '성적 동의'를 받았는지가 사회적으로 통용된다면 어떨까? 처음에 언급했던 해군 사건의 경우 재판부는 피해자가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저항을 표현하였는지'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 즉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얻었는지에 주목한다면 사건이 달리 보이지 않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미디어에서는 호감의 남녀 사이에 '손잡아도 돼?'라고 묻는 남자를 용기 없는 남자인 것처럼 표현했던 기억난다. 그리고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 문학 작품 속에서 박력 있게 키스하고 손을 잡는 행위가 '남자다움'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렇게 여기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은 분명 달라졌다. 저자는 동의의 1단계는 '물어보기'라고 확실하게 짚는다. "손잡을래? 키스할까? 계속해도 괜찮아?"



성적 접촉과 동의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우선, 섹스를 제안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한창 섹스를 하는 중이더라도 그 상대방에게 정말로 (계속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확인할 것, 명백히 관심 없어 보이는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 것,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손대지 말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상대방도 그것을 원하는지 확인할 것,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동의를 강요하지 말 것 등이다. ─ 19p


내가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저자가 주장하는 '성적 동의'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에 반드시 backlash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뭐야, 이제 여자한테 관심도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성관계할 때마다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라는 조소 어린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YES'라고 말하는 성적 동의가 사회적으로 공유된 행동 지침이 된다면 충분히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2006년에 박카스에서 ‘젊음, 지킬 건 지킨다’는 주제로 광고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이 광고에서 청년은 노약자석이 비어있는데도 앉지 않으며 “우리 자리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그 광고가 방영된 후 사람들은 '노약자석'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쩌면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성적 동의'가 낯선 개념이고,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될 수 있지만 모두의 인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면 보다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특히 커플이나 부부가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아이에게 성교육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는 교사와 부모가 있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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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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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의 유명한 이 문장은 이 시대 청춘들의 불안과 떨림을 기록한 성장 소설의 가장 상징적인 문구가 아닐까. 『데미안』에서는 내면의 선악 가운데서 고민하던 소년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자신을 뛰어넘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의지를 품는 과정을 그리며, 그 과정 가운데 겪는 불안과 고뇌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헤세는 이러한 불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데미안』은 특별했던 2019년의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2019년이 갖는 의미와 꼭 어울리는 책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데미안,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내 속에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129)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꽤 불안했고, 내 안의 질문들이 많았다. 사춘기를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 직업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해오는 긴 시간들에도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서른이 넘어 느닷없이 찾아온 내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은 꽤 버거웠다.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해왔지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는 몰랐고, 세상에서 무엇을 가치있는지는 고민했지만 내 삶의 의미와 가치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스무 살 즈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는 기존에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나 '나'를 찾아가고자 했다면,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데미안』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사실 한 번도 보살핀 적 없었던 내면의 성향들을'(p.140) 들여다 보게 했다.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모두가 그들의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자기들은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p.182)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 익숙하게 반복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알고, 인식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나를 이루고 있던 익숙한 삶의 법칙들이 서른 해가 지나고자 더이상 나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인간은 왜 불완전한 모습으로 함께 모여 사는 걸까, 나의 고된 노동과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가장 가치있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의 수많은 물음표에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 안에 솟아나는 수많은 질문 속에서도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이러한 질문은 딴 세상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원래 삶은 그런 것이라고, 의미같은 것은 없다며 돌아서서 익숙한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내 자신의 일이었던 것이다.' (p.66)



올해 내가 찾은 수많은 답들은 오랜 시간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고민하고 리뷰로 남겼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 반드시 있을거라 생각한다. 우리의 내면 속에 지닌 많은 질문들은 각자 살아온 삶의 경험과 내면의 성향에 따라 찾아가는 길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길은 반드시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만약 누군가 그 길 위에 있다면 『데미안』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문학이, 예술이 우리 삶에 많은 영감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2019년은 특별했다. 그리고 나는 2020년에도 수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그 시간들이 어렵기만 했을까?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기는 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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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탄생 100주년 기념판)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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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서점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호밀밭의 파수꾼』를 주문했는데 책이 파본인 것 같아요."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되어 있으나 번호도 쓰여있지 않고, 그 어떤 카피 한 줄도 없이 책 제목과 작가 이름만 쓰여진 표지를 받으니 잘못 인쇄된 것으로 보인 것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표지에는 작가 사진 또는 작품 내용을 상징하는 그림을 사용하는데, 현재 출간된 총 363권의 책 중 유일하게 표지 그림이 없는 작품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민음사에서 첫 출간된 2001년 초판본에는 표지 그림과 작가 약력이 있었으나 작가 J. D. 샐린저의 요구로 지금의 표지로 변경되었다.


표지만으로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J. D. 샐린저를 떠올리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51년 『호밀밭의 파수꾼』 이 출간되었을 당시, '홀든 콜필드는 불만이 너무 많다'며 ’기성세대는 홀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삐딱한 태도, 부정적인 시각에 공감하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사실 돌아보면 나 또한(누구나) 홀든과 같은 시선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무언가 이해하고 납득시켜주기 보다는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말하는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과 모두가 그렇듯 공부하고 대학가서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거나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미성년자이고, 미성숙한 그 어디쯤에서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는 홀든 콜필드가 여전히 내 안에도 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네가 겪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민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아.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거야. 나중에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줄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네가 그 사람들에게 배웠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너한테서 뭔가를 배우게 되는 거야." (p.250)



흔히 홀든 콜필드와 같이 불평 가득하고, 시종일관 삐딱한 태도로 행동하며 거침없이 비속어를 내뱉는 예민한 아이를 우리는 '문제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도 홀든은 '문제아'로 낙인찍혀 수차례 퇴학을 당한다. 하지만 콜필드는 거의 모든 과목에 낙제점을 받지만 작문에는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가식적이고 속물적인 세상에 불만을 쏟아내지만 세상을 떠난 동생과 막내 동생 피비에게는 한없이 여린 마음을 내보인다.



지금도 우리 곁에 수많은 홀든 콜필드가 머물고 있다. 그 아이는 단지 말을 안하기도 하고, 학교를 종종 빼먹거나 퇴학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믿을 수 없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청소년 범죄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비춰진 우리 어른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이제 탄식하고 염려하지 않는다. "소년법을 폐지해서 처벌받게 해야한다!",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건 폭력을 행사하건 내버려두자."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른들에게 손내밀 수 없었던 누군가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너무 쉽게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이게 최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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