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새가 사는 숲 오늘의 젊은 작가 43
장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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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치면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이 불행이 무엇의 결과물인지 찾아헤맨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발걸음 하기도 힘든 산속의 기도원에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 내가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까지 거슬러 올라가 끝없는 질문을 해댔다. 이해하고 싶었다. 나에게 닥쳐 온 불행의 원인을.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불행한 기억을 사랑했다. 불행에 집착했다. 마음속 보석함에 불행한 기억을 모았다. 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_p.80


『치치새가 사는 숲』를 절반 정도 읽었을 때 이 책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 적 있는 열네 살 아이의 예민하고 겁 많은 사춘기 소녀'의 심리를 세밀하게 풀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지를 마저 읽고 충격에 빠졌다. 앞서 내가 이해한 소녀의 심리는 다시 해석되어야 했다. 그래서 『치치새가 사는 숲』를 연이어 두 번 읽었다. 이 소설 속 '나'는 20년 전, 자신이 '치치림'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던 열네 살 시절을 떠올린다. '미래를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원인이 결과를 빚는 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반추하게 하므로.(p.45)'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마음 속 불행한 기억을 헤짚는다.


평준화 정책하에 배정받은 원하지 않았던 중학교에서 단짝이 된 달미는 예쁘고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소위 '노는 애'였다. 자신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예쁜 달미가 결국 자신을 버리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거라는 생각에 불안하면서도 뿌듯했다. 둘은 커플로 곰 모양 젤리 모양 비즈를  핸드폰에 달았다. 이게 문제였을까.  여상을 졸업하고 경리로 취업한 언니의 생일날 미역국을 싸 들고 회사를 찾아갔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시골길을 한참 들어간 
언니의 회사 식당에서 언니는 미역국을 보며 '미역을 먹으면 예뻐진다는 것은 세뇌당한 것'이라며 끝까지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그후 언니는 용돈을 빌미로 봄옷을 가져다달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언니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네 입에 소고기를 넣어 주는 게 아까운 거야. 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사랑하지 않으니까 안 때린 거야. 사랑하지 않으니까, 때릴 마음도 안 드는 거겠지." _p.44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부모님은 전교 2등을 했다고 자랑해도 '마취 크림 좀 갖다 줄래?'라고 말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IMF로 경제력을 상실한 부모는 고작 중학생 딸에게도 밥값을 빌미로 아르바이트를 주선했고, 공부를 잘했던 언니도 대학이 아닌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하교 후 친구들이 김밥천국에서 떡볶이를 사 먹을 때 문밖에 서서 아이들을  기다려야 했다. 예쁘다는 말 대신 인내심이 좋다는 말을 들어왔고, 자신을 먹이기 위해 소고기를 사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차장님은 집 앞에 체어맨을 세워두고 나를 기다렸고, 나에게 '예쁘게 생겼다'고 말했다. 함께 떡볶이를 사먹지 못하고 김밥천국 앞에서 기다리던 날들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예쁘게 생겨서, 친구들이 질투해서 왕따를 당했을거라고 말했다. 내용과 관계없이 위안을 받았다. 그렇다면 무관심의 반대말은 사랑일까? '엄마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장님은 나를 사랑한다. 차장님은 나를 때렸다. 내 입에 '고기를 먹이고 싶었는데 다른 것도 먹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차장님이 내 머리를 다정하게, 너무나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잘했어.


항소심에서 변호인은 말을 바꿨다. 대가를 제공하지 않은 게 우리가 연인 관계인 근거라고 했다. 차장님은 내게 소고기를 먹였지만 돈은 주지 않았다. 그게 사랑의 근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엄마는 나를 사랑한 걸까? _p.161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고통의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산다고 말한다.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회상한다. 열네 살의 나는, 생존했다. 그렇지만 벗어나지는 못했다. '세상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 탓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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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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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단 1초도 가지 않는다. 빛을 켜는 순간."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 북서부 항구 도서 생말로(Saint-Malo)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의 요새였다. 독일 해군 400여 명이 주둔했고 연합군의 폭격에도 끝까지 생말로를 사수하고자 했으나, 1944년 8월 17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미 연합군에 의해 대규모 폭격을 당해 도시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다.


📻 단파 13.10
프랑스 파리, 마리로즈는 매일 밤 라디오를 듣는다. 빛과 어둠에 대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알려주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독일 졸페라인, 아버지를 잃은 베르너는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산다. 베르너는 쓰레기장에서 주운 고장 난 라디오를 재조립하여 프랑스에서 송신하는 과학 방송을 몰래 듣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마리로즈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다 전쟁을 피해 생말로로 피신하고, 통신 기계를 다루는 능력으로 나치에 눈에 띈 베르너는 청년 정치 교육원을 졸업하고 독일군 무전병이 되어 생말로에 투입된다. 마리로즈는 자신이 즐겨듣던 단파 13.10 채널을 통해 『해저 2만 리』를 읽어 주며 비밀 메시지를 연합군에 전달하고, 독일군은 마리를 찾기 위해 베르너를 동원한다.

"저들에게 감탄하지도 말고, 설득당하지도 마. 내면의 영혼이 변하면 안돼, 알겠지? 오빠가 듣는 한심한 라디오 방송처럼, 같은 주파수를 유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 마치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제목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무엇일까? 마리로즈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런 마리로즈가 혼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시를 모형으로 제작해서 길을 익히게 도와준다. 에티엔은 과거 전쟁 영웅이지만, 전쟁 트라우마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베르너는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으로 군인이 되었지만, 능력 없는 자를 가차 없이 도태시키고 잔인성을 강조하는 그곳에서 벗어나고싶어한다. 이들뿐아니라, 전쟁에 참여하고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둠'의 감옥에 갇혀있다. 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둠은 단 1초도 가지 않는다. 빛을 켜는 순간.'


⠀“사랑은 죽음보다 오래가지. 그래서 내 딸은 어둠이 아닌 빛 속에 살아”


마리로즈에게 빛은 사랑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마리로즈를 위해 거리를 모형으로 만들어주는 아빠, 어떤 고문에도 딸을 지켜내는 사랑. 베르너에게는 정의이다. 군사학교에서 부조리한 폭행을 당하고,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에티엔에게는 신념, 마크네 부인에게는 가족일 것이다. 어떠한 처참한 현실에서도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밝혀주는 것. 사실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하고 살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사랑, 신념, 우정, 믿음. 그래서 이 작품을 읽고 보는 동안, 모두가 눈 감고 침묵하는 시대에도 자신을 지켜주고 밝혀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So how, children, does the brain, which lives without a spark of light, build for us a world full of light?
그렇다면 빛의 불꽃 없이 살아가는 뇌는 어떻게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라는 말 안에는 한 개인과 개인의 삶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무참히 사라진다. 개인은 사라지고 이념과 욕망만이 남은 이 전쟁에서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가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를 제작한 숀 레비가 연출을 맡았고, 마리로즈 역에는 실제 시각 장애가 있는 아리아 미아 로버티가 참여했다. 책과 드라마를 통해서 아름다운 문장과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가장 중요한 빛은 보이지 않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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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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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광증을 퍼뜨리는 아포(芽胞)로 가득찬 지상 세계. 지상은 인간에게 범람체가 끊임없이 창궐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범람체에게 지상을 빼앗긴 채 지하로 숨어들었다. 햇볕이 들지 않아 더이상 식물을 키울 수 없고, 계절을 느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지하로. 지상은 범람화된 온갖 동물들의 사체와 그것들에 얽혀 자란 덩굴, 그리고 사체를 양분삼아 인간의 키만큼 자라난 거대한 형형색색의 범람 산호로 가득했다. 이 세계에서 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이다. 잃어버린 지상을 되찾기 위해 그곳에 파견된 사람들. 인간의 자아를 파괴하는 범람체들이 정복한 지상을 되찾기 위한 임무. 태린은 누구보다 파견자를 꿈꾸고 지상을 갈망했다. 파견자로 지상에 다녀 온 이제프는 노을의 황홀한 빛깔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반짝임을 태린에게 알려주었다. 태린은 언젠가 자신도 파견자가 되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탐사하기를 꿈꿨다.


이제프는 태린에게 지상을 주고 싶었다. 노을과 별들을 주고 싶었다. 언젠가 태린이 파견자가 될 수 있다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갈망을 증폭하는 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지상을 되찾아와야 했다. 별과 노을과 바다가 있는 행성은 다시 인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 _p.313


김초엽이 상상하는 미래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독자인 나 자신이 얼마나 이 세상을 인간 중심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최근 사람들이 지구의 환경 문제를 거론하며 '지구는 망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류는 망할 수 있지만, 지구는 새로운 생명체를 길러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인류는 지구를 자신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여기고 소유하고자 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인류의 전쟁이나, 핵폭탄 또는 소행성의 충돌 같은 사건으로 소멸될 거라고 단순하게 상상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상상해온 형태의 지성 생명체가 아닌 범람체가 지구를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외계인은 우리가 기대한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 예를 들면, 음악이 외계 생명체라면, 그래서 우리 주변을 파고들어 함께 공존하고 있는거라면?

지상 어딘가에 범람체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도 죽지 않는다고. 썩어가는 것들을 먹을 수 있으며, 그들 자체가 부패하는 것들의 일부라고. 그들 각각은 지상에서 독립적 의식을 가진 개체로, 그러나 때로는 전체의 일부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자아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약간은 남아 있다고 했다. 여전히 삶이라는 이야기였다. _p.36



『파견자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사람도 아니다'라고 혀를 찰 때는 그 사람의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인데, 어제까지만해도 함께 지낸 평범한 사람이 외형이 변이되고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생명체로 변해버린다면 나는 상대를 인간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범주는 어디까지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동그란 머리와 긴 팔다리를 가진 외형을 지니고 언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자아를 지녀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아란 착각이야.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착각. 너희는 단 한 번의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해 보아서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의식이 단 하나의 구분된 개체에 깃들 이유는 없어. 우리랑 결합한 상태에도 너희는 여전히 의식을 지닐 수 있어. _p.241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류는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을 포함하는 종에서 진화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인류는 변화에 적응하며 지금과 다른 변이가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김초엽이 상상한 늪인은 범람화되어 처리해야할 인류의 적이 아닌 신인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파견자들』를 읽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상상과 질문을 하며 인류의 미래를 그렸다. 정의내릴 수 없는 상상의 범주이지만, 그렇기에 김초엽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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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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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결핍을 느낀다. 그래서 최근 방영 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가 육아를 조언하는 방송임에도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불안하고 애정을 원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타국에서의 일 년』을 통해 이창래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 재미 한인작가, 디아스포라 문학, 경계인. 그가 느껴왔고 작품으로 표현했을 결핍이 느껴졌다. 그러나 『타국에서의 일 년』에는 작가 자신을 상징할 유색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화자인 틸러는 부유한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뉴저지 주의 던바에서 자랐고 대기업 관리직에 있던 아버지 덕에 재정적으로도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틸러는 자신이 어디에도 소속도지 못했다는 부유감을 느끼는데, 틸러가 느끼는 결핍은 주류가 아닌 인종이나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무한히 펼쳐지는 허무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던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에서 나온다.


우리 엄마가 마침내 도망쳤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이 점점 붕괴하고 있다는 걸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나이였다. 나는 엄마도 나름대로 괴롭고 까다로운 존재이며 나를 위한 엄마'봇'이 아니라는 걸, 엄마가 이미 다른 곳에 있다는 걸 느꼈다. _p.301


틸러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는데, 친구의 부탁으로 하게 된 골프장 캐디 아르바이트에서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인 퐁 로우를 만나게 된다. 그는 거대 제약회사 베이더가스의 화학자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여러 감미료를 개발하여 요거트 아이스크림, 핫도그 프랜차이즈 등을 운영하며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이 우연한 만남에서 틸러를 눈여겨보던 퐁은 자신의 사업체에서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부유하고 지적이며 자신과 달리 모든 면에서 노련한 퐁에 매료되어 그를 따른다.


“네 안에는 어떤 절박함이 있어, 틸러. 일종의 허기가 있지.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해?” 퐁은 틸러 내면의 결핍을 눈치챈다. 그리고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던 틸러의 장점을 지지해 주는 퐁에게 자신에게 결핍되어있고 선망하던 모습을 발견한다. 퐁은 사업차 동료들과 해외 투자 여행에 틸러를 자신의 조수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고, 초라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망쳐 퐁을 따른다.


 상대가 퐁이었기에 나는 그를 믿었다. 희망이 솟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진부한 중국 분위기에 혹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조화를 생각하라는 서구의 헛소리에 대한 옹호라거나, 아니면 그냥 한심할 정도로 결핍된 나의 핵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내가 퐁에게 쉽게 동조한 건 그가 건넨 말이 자기 그룹에 속한 우리 모두를 향해 보이는 뿌리 깊은 어떤 경향, 근본적으로 너그러운 어떤 경향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_p.97


『타국에서의 일 년』를 읽으면서 문득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떠올랐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내면이 단단해지고 새로운 내가 된다는 의미일까. 이전처럼 서툴고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하지만 실제로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나'는 없을지 모른다. "내 안에서는 성숙의 과정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아졌느냐고? 그랬으면 좋겠다. 더 관대하고 현명해졌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쪼개서 까 보지 않는 한 무엇이 정말로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부유하던 틸러는 타국에서 보낸 일 년 이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에 속해 있다는 것,'(p.16)을 받아들인다.


“나는 바다에 붙어 조류에 휩쓸리는 단 하나의 조개였다. 고립되었다가 물에 잠겼다가 거친 파도에 두들겨 맞았다가를 번갈아 겪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상관없었다. 나는 온전히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았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어려워하면서 자신만의 벽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그 상처를 부정할 필요도, 극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자신의 자리는 과거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있으며, 사랑을 나눌 사람들이 지금도, 주변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 속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모든 과정은 우리를 한 뼘 더 자라게 한다. 사실 틸러의 삶은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세상에는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달콤함이 주어져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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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안전가옥 오리지널 27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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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내가 구입한 책은 조예은 작가의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단 한 권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서점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겠지만, 도서전에서 먼저 만날 수 있는 책이라는 말에 안전가옥 부스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퉁퉁 부은 다리를 벽에 올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일 근무를 위해 일찍 자고 싶은데, 뒷이야기는 궁금해서 한참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 탓에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 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얼마 전 읽었던 『만조를 기다리며』와는 확연히 다르게 경쾌하면서도 음침한 이야기. 4년 전 출간된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를 떠올리면 훨씬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에피소드가 풍부해짐을 느낄 수 있다.


"둥근 그릇에 소복이 담긴 꿀떡들. 참기름 냄새를 향기롭게 풍기는 반지르르한 표면. 그 안쪽의 달콤한 꿀과 깨 사이에 복어 독과 청산가리가 숨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떡을 먹었고, 누군가는 먹지 않았다.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꿀떡의 소에는 테트로도톡신, 청산가리, 비소 등 범죄영화에서 볼 법한 독극물 홉합액이 섞여 있었다. 총 아홉 명이 사망했고 열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사망자 중에 화영의 엄마가 있었다." _p.36


야무시 최고급 아파트 '씨더뷰파크'에서 누군가 독이 든 떡을 이용해 테러를 일으켰다. 정해진 대상이 없는, 문 앞에 놓인 떡을 먹느냐 아니냐의 선택으로 사람들의 생사가 갈렸다. 이 사건으로 아홉 명이 사망했고, 용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그가 왜 이런 범죄를 벌였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씨더뷰파크에 살던 도하는 도현보다 시험을 못 본 탓에 화장실에 갇혀있다 혼자 살아남았다. 화영도 엄마를 잃었다. 씨더뷰파크 한정혁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엄마는 그날 떡을 먹고 사망했다. 그래서 화영은 알고 싶었다. 평소라면 절대 떡을 먹지 않는 엄마가 왜 그날 떡을 먹고 죽었는지. 복수 외에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화영과 왜 도현이 아닌 자신이 살아남았는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며 도하는 방황했다.


​“돈은 때론 구원이 되기도 해.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단다.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있거든.” 돈, 나를 구할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 엄마가 씨더뷰파크 펜트하우스에서 일했던 건 그곳이 엄마의 시간에 가장 높은 금액을 지불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화영이 엄마를 보러 갈 때마다 허리를 한껏 비틀어 숙여야 하는 건 돈이 없기 때문이다. 화영은 한정혁의 화려한 봉안당을 떠올렸다.
“그 구원, 제가 살게요. 얼마예요?” _p.126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의 '씨더뷰파크'는 무수한 욕망을 딛고 세워졌다. 이 도시의 부동산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도하의 아버지와 자신의 시장 임기에  재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땅 아래 묻힌 진실을 외면한 한정혁. 오갈 곳 없는 가출 청소년들을 팔아 돈을 버는 영진과 돈만 주면 어떤 살인이든 실행하는 킬러. 이들의 욕망을 보고자란 아이들에게 삶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고 돈을 훔치고 목숨을 빼앗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 자들은 행복할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죽여왔던 영진과 킬러는 죽은 자들의 악의에 삼켜지고, 정혁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자신의 분신 도현을 잃는다. 그래서 남겨진 '도하는 불쑥 부모님이 죽던 날 갇혀 있던 욕실을, 화영은 엄마의 장례식 후 홀로 보낸 고시원에서의 밤을 떠올렸다. 흙냄새만큼이나 지독한 외로움이 그들의 사지를 옭아맸다.'(p.249)


이들이 끝내 찾고자 하는 것은 진실만이 아닐 것이다. 누가 이들의 부모를 죽였는가보다는 이를 통해 자신들이 왜 살아남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찾고 싶어 한다. 삶을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자신에게 미래는 의미가 없다고 여겼던 화영과 도하가 스스로 단단해져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서로의 온기 때문일 것이다. 수챗구멍처럼 악의에 가득한 땅 위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 끝내는 또다시 사람을 믿고 마는 것, 그것이 조예은이 만드는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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