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마음 - 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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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리 계획된 경로를 밟아 차근차근 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전환의 욕구나 필요가 닥쳤을 때, 대부분 먼저 ‘방황기’를 겪는다. 그 방황기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 우연히 마주친 기회들이 전환의 경로를 제시한다.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로 안에서 마주치는 경험과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선호와 기준에 따라 하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어쩌다 전환의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_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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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경험을 통해 써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얼핏 보아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에 맞춰 자기 일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만들어내는 탁월성은 전문성으로 치환되지 않더라도 굳건한 디딤돌이 되어준다. _p.169


 

 

요즘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최고의 덕담’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라는 말이다. 얼마나 흥미로운 말인가, 적게 일하는데 심지어 많이 벌라니 최고의 덕담이 아닐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해서 일을 배울 때는 선배들의 '칭찬' 한 마디에 자존감이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어떤 날은 실수 하나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시무룩해있기도 했다. 내가 준비한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좋은 책이 많이 팔렸다고 느끼면 너무너무 신났고 기세등등했다. 나에게 '일'이란, 재미있는 놀이같았다.

경력이 차츰 쌓여가고 이직도 여러번 하게 되면서 나에게 '일'은 나의 자존감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해본 적도 없는 SNS를 개설해 운영하기도 했고, 독자와의 만남이나 서포터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도 많았고,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다. 때때로 이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최대치인 것 같아, 라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도 했다. 나는 그게 진짜 내가 일을 잘해서 그런 줄 알았다(ㅋㅋㅋㅋ)

지금 생각해보면, 서툰 내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믿어주신 많은 선배님들덕에 많은 것들을 새롭게 도전해볼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즐거워하며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땐 잘 몰랐지만, 좋은 분들이 늘 계셨고 내 실수는 모른 척 넘어가주고, 더 많은 격려와 칭찬으로 키워주어 잘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던 중, 딱 한 번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생각대로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던 적이 있다. 난 늘 일이란 잘 진행되는 건 줄 알았는데, '일'이라는 것 외에 여러 복잡한 관계와 이기심들로 인하여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후 나에게 '일'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었다. 그 전에는 더 잘하고, 더 인정받는 게 좋았고 만족감이 있었다면, 그 만족감이 일의 가치일까 고민해보게 되었다. 이제는 성취감만으로 달려가기에는 힘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돌아봤을 때, 나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는 '사람'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전부 서로 다른 회사에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것을 물어봤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들, 이직을 준비할 때마다 추천해주고 도와주셨던 상사분들. 사실 일이라는 것이 한 회사에 내가 기여하여 '매출'을 올리는 행위지만, 나는 이 전에 너무 코 앞만 보고 달려갔던 것 같다. 그래서 곧잘 일욕심으로 다투기도 했고 내 의견을 우겨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서로 도와가며 함께 달려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때때로 어린 후배들이 일로 서운해하고, 투정부리는 일이 생기면 '저 친구는 예전에 나처럼 아직 혈기왕성하구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선배들이 날 기다려주었듯 나도 기다려줄 때인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일'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간단하다. 그것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이라기 보다,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는 것이라기 보다 서로가 함께 일하면서 일로 인하여 서로가 성장하고, 성취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도움없이 나혼자 잘나서 탁월하게 잘 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함께 의견을 나누고 화합할 때 더 많은 시너지가 나기도 하니까.

지금은 아직 경력이 얼마 안되어 내 앞가림도 힘들지만, 나에게 '일하는 마음'은 여전히 탁월하게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내 선배들이 나에게 해주었듯 누군가가 스스로 탁월하게 잘한다고 느끼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동행해주는 일도 하고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고민했었지,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일하는 내 마음'을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일했을 때부터 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도 많고, 즐거웠던 기억도 많겠지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해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다. '일하는 마음'에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가 '일에 대한 철학'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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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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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상에서건 나처럼 생활력이 약하고 결함 있는 풀은, 사상이나 무엇도 없이 그저 스스로 소별해 갈 뿐인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도 조금은 할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내가 살아가기 힘든 사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이것이 도대체, 사상일까요? 나는 이 신기한 말을 발명한 사람은 종교인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주점에서 솟아난 말입니다. 구더기가 끓듯이 어느 틈엔가, 누가 먼저 말했다 할 것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전 세계를 뒤덮고 세계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_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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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리에게 죄가 있는 걸까요?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죄일까요? 오직 그런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를테면 유다의 인척들처럼 굽실거리며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다니. _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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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박해지고 싶었습니다. 강인하게, 아니 난폭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늘 어찔어찔 현기증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마약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잊어야 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상냥함을 거부해야 한다. 누나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_p.147

기우는 해. 사양.

지금은 '인간은 모두 다 똑같다',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무척 익숙하지만, 과거 계급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 황족 계급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 후 급격하게 사회가 변하면서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부둥켜 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평민으로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출간 후 많은 화제를 낳았고, 몰락해가는 상류층을 칭하는 '사양족'이라는 말이 유행을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판 『벚꽃 동산』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사양』에는 다자이 오사무만의 특별한 지점이 있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사양』의 소개 문구에 등장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논란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떤 분은 '반페미니즘'이라고 느끼기도 했다고 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어떻게 느끼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일본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정형화되어 있는 것 같다. 각종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볼 때 여성의 모습이 여전히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일본인의 성향과 더해져 내게는 이 작품 속 '최후의 귀부인'인 어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런 문화를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1947년에 출간된 이 작품 속 '가즈코'의 모습은 시대적으로 앞서간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이라고 나는 느꼈다.

가즈코는 애정없는 결혼을 통해 한 번 아픔을 체험했고, 지금은 몰락해가는 집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평생을 살아온 집을 팔아 지방 산 속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해본 적 없는 밭일을 하고, 가진 옷들을 팔아 먹을 것과 바꾸어 살아간다. '최후의 귀부인'인 어머니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어머니지만, 경제력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전혀 무방비이며 전쟁에 참여했던 동생 나오지는 마약과 술에 기대어 살 뿐이다.

'귀족'이라는 계급만으로 살아갈 수 있던 시절이 지나 이제는 고귀한 척하는 '귀족'이라고 수근대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들은 사회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사람은 모두 똑같다'고 하는 민중의 말에 자괴감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가장 먼저 정신적으로 몰락해 간다. 해소되지 않는 정신적 갈등으로 마약과 방탄한 생활을 이어가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섬세한 감수성은 오히려 더 절망에 이르게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귀족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동생 나오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가즈오는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가슴에 걸린 무지개'로 표현한 가즈오의 사랑은 사실 '사생아와 그 어머니'로 불리는 상황이지만 가즈오는 사랑을 이루는데에 낡은 도덕은 뛰어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에하라에게 기대어 남은 생을 살아가기 보다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먹 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생 나오지의 자살로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즈오가 가지는 삶을 향한 욕망과 생명력은 단연 돋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체호프의 『벚꽃 동산』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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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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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니우스. 이건 어머니가 아들한테 주는 충고인데, 움은 움이라는 것, 그리고 움은 움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모든 움은 맨움을 정부로만 볼 뿐이야. 움이 흥미를 갖는 것은 그것뿐이야. 움이 단지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 페트로니우스. 너의 가엾은 작은 막대가 그녀를 흥분시키는데, 더구나 어둠이 내리면 움이 단지 수다로 만족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거야. _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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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가되고 싶은 것이 될수없다고 했니? 내말은, 네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거야.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어. 네가 아이를 갖는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밖에 할수 없는거야. 잘들어라, 페트로니우스. 어렸을 때 나도 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단다. 바다의 낭만, 그것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는거지...'

여동생이 그를 비웃었다. 그녀는 페트로니우스보다 한살반 어렸지만 늘 그를 못살게 굴었다.

'하하하 맨움은 뱃사람이 될 수 없어. 너는 아마 선실 보이나 남자 선원, 아니면 남자 타수가 되겠다는거구나? 우스워죽겠다. 바다에 가는 맨움들은 창남이나 팔루리안 뿐이야.' _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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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이와 놀아주고 보살펴주느라고 스물 네 시간 내내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어머니처럼 정해진 노동 시간이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일에 대해 임금을 지불받지도 않는다.

가사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제안은 실제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물론 맨움이 움과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한 일에 대해 맨움이 돈을 받아야 한다고 심각하게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것은 여전히 일이었다. _p.293


 

 


최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만큼 화두가 되는 주제도 없는 것 같다. 그 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82년생 김지영』이 흥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자라오면서 이런 일도 있었지'하고 과거의 일을 다시 경험하는 책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책이 페미니즘의 대명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쨋든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내가 이 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어쩌면 당연하게 여기면서 지냈던 많은 상황들이 사실을 공평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이 전에 <SBS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한 남성이 모르는 여성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끝내 그 여성을 포함한 무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다. 사실 그 재연 영상을 보고 있을 때는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이야기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공포 혹은 성폭력의 상황을 반대로 설정하여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그 지점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체계가 완전히 뒤바뀐 가상의 세계 이갈리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책으로 1977년 출간된 이후,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학 이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과 여성 운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훌륭한 여성학 교과서이기도 하다. 현재의 남성(Man)과 여성(Woman)을 여성(Wom), 남성(Manwom)이라는 단어로 설정하여 거울처럼 지금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여성'의 불편한 지점들을 바꾸어 여성들에게는 '인식'을 남성들에게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트로니우스(Manwom)은 열 다섯살의 맨움으로 메이드맨 무도회에서 움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껏 꾸미고 참석한다. 맨움들은 그 곳에서 움의 선택을 받지 못해 '부성보호'를 받지 못하면 고된 노동에 혼자 살아남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 맨움에게도 거절의 선택권이 있다고는 하나 현실적으로는 누군가에게든 선택받아 그 움의 아이를 키우고 싶어한다. 그리고 '메이도터'라는 움을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페트로니우스는 당연히 남은 생을 '메이도터'의 부성보호를 살며, 아이를 키우고 살 것에 꿈이 부풀어 있다. 하지만 교사 올모스를 통해 점점 '부당함'을 인식하게 되고, 움의 하우스바운드(남편)으로서 부성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페트로니우스는 여러 폭력적인 상황을 만나는데, 어두운 시간 숲을 걷다 여러 명의 움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과 메이도터에게 부성보호를 받고싶지 않다고 했을 때 폭력(가정폭력)을 당하는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있었고, 그 전에도 있었음을 서서히 인지하게 된다. 또한 자신들이 움의 그늘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과 집안일에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그러는 사이 사회적인 활동은 전혀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맨움이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농장을 가꾸는 작은 일부터 움들이 스스로 해보려 노력하고, 많은 맨움들이 이러한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맨움 해방 운동을 진행한다.

물론 '현재'와 비교한다면, 조금 극단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과거에는 분명 이러한 것들이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시되었을 때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읽은  『사양』에서는 귀족의 계급이 몰락하면서 겪게되는 이야기로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말하는 '평등'이라는 말이 사실은 아주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구나!라고 느꼈다면,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남녀의 평등이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 온 불균형으로 인하여 '평등'이라는 말은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균형이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왜 균형을 이루지 못할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 계급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가 고개 숙이고, 차별을 감내하면서도 순종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다면 알 수 있다. '사람'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영원히 완벽한 균형과 평등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은 계급이건 남녀건 누군가 불균형 상태에 놓여있다면 그의 상태와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전히 고전처럼 읽히는 것 같다. 짐작할 뿐이지만, 상대가 겪었을 불편을 헤어려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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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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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혹시 아이 낳고 싶어? 아까 아기 침대를 유심히 보길래."
남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단호히 말했다.
"아니, 예전엔 낳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랑 닮은 아이가 나랑 비슷하게 사는 거 상상만 해도 싫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의 팔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 「세븐 어 클락」 중

 

 

 

 

 

미진도, 사라도 그리고 나도 기어이 끝을 보고 무너져 내려야만 이 시간을 지나갈 수 있는 건가. 끝이 보일 때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끝이란 게 있긴 한 걸까. 아니, 어딘가에 발을 담그긴 한 걸까. 간절히 하고 싶은 일도, 진실한 사랑도 찾지 못했다. 나의 청춘은 지루하고 애매하기만 했다. 특별히 일어난 일도 없는데 나는 때때로 아프고 지겨웠다. 이럴 바엔 자고 일어나면 스무 살쯤 늙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 「이케아 소파 바꾸기」 중

 

 

슬픔의 재료로 사용해 평생 우울하게 살 것인가, 더 큰 열정의 조미료로 사용할 것인가는 내 마음이었다. 이제 죽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영순의 머리가 호두 껍데기가 깨지는 것처럼 단번에 열리는 느낌이었다.  ─ 「계약 동거」 중 

 


 

 

 

김의경 작가는 『쇼룸』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20대 청년부터 50대의 노년까지 '이케아' 혹은 '다이소'라는 특정 공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모양의 '지금'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케아'에 들어선 수많은 사람들 중 무작위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아마 이 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쇼룸』이라는 소설집에는 8개의 단편 소설이 담겨있고, 그들은 모두 '이케아'라는 공간, 그 중에서도 60개의 쇼룸이라는 공간을 통해 서로 교차해 스쳐지나간다. 그것은 이케아나 다이소라는 비교적 '저렴한' 물건을 소비하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20-30대가 직면한 현실은 스스로는 '집'을 구할 수 없고(빈집),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소위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 있는 혜택받은 자들의 권리(세븐 어 클락)이며,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로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쇼케이스) 세대이다. 한 때 유행처럼 번지던 삼포 세대, 육포 세대라는 자조적인 말은 이제 너무 익숙한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소비는 무척 현실적이다. 연애, 결혼, 출산, 생활비, 월세 등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하여 미래나 노후는 준비할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그래서 아들에게 물려줄 집은 커녕 자신이 살 곳조차 없어(빈집) 서글플 뿐이다. 그런 우리가 어떠한 '소비'를 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이케아의 조립식 물건으로 조명이나 가장 저렴한 90,000원짜리 '크로바로프 소파'를 구매(이케아 소파 바꾸기)하거나, 다이소에서 화초키우기나 애완동물의 옷을 사며 소소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의 소비도 수월하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정도의 소비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지만, 사실 그 행위 자체가 점점 더 스스로를 고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배웠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사실 '돈'이 대부분인 삶을 살고 있다. 안그러고 싶지만 눈 앞에 닥친 학자금 대출에, 생활비에, 월세에 메여서 여유있게 자신의 미래를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사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고를 수 있는 보기 중에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이다. 열정으로 청춘으로 도전하고 모험해보는 것은 이제 사치일 뿐이다. 당장 '노동'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현실이 놓여있다.(심지어 이것도 여의치 않다)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에서 소위 하위층이라 불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용감하게 뛰어든 사업이 부도를 맞은 부부, 대기업 계약직으로 일하지만 그나마 재계약을 하지 못하거나 취업하지 못한 청년들, 가진 것이 없어 연인과 헤어지는 사람들. 이제 '소비'는 바로 능력과 지위로 직결된다. 당장 백화점에서 가방을 사는 사람과 다이소에서 물건을 사는 계급으로 나뉘며, 이 계급은 세습되었고 세습되어질 것이다. 그런 인물들이 원하는 것은 '집' 또는 '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케아에 예쁘게 꾸며진 쇼룸을 보면서 가지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그 욕망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좌절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쇼룸』에서 '방'이라는 공간, 이케아의 쇼룸이라는 공간은 그들의 욕망이자 좌절의 공간이 된다. 

 

『쇼룸』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아이'문제가 등장한다. 수 년을 동거한 연인에게도, 7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 행위가 아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고,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는 '나'하나를 먹이는 것도 쉽지 않아 누군가를 책임질 여력이 없는 것이다. 나도 친구들과 '이 고통은 우리 대에서 끝내자'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이 고단한 삶을 물려주기에 지금은 너무 고단하고 희망없지 않은가.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이라는 말처럼 그나마 주인공들은 현실 가능한 범위에서 자신의 삶에 윤활제가 될 수 있는 소비를 택하여 작은 만족을 얻는다. 다이소를 통해, 이케아를 통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방을 보며 위안하고, 조금 더 늘어난 물건들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이 이야기가 낯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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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황승택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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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의료진들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어제 있었던 회식 이야기, 오후 스케줄 등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환자 입장에서는 이게 편치 않더군요. 그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수많은 제보자들이 간절히 저에게 이야기를 할 때 바란 것이 이런 집중이 아니었을까. 기사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드러난 제 행동과 표정에서 제보자들도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_p.150

죽음을 일방적 공포가 아닌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제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앞으로 주어진 삶에서는 다시 하지 말아야 할 실수가 무엇인지 복기할 수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어 삶이 느슨해질 때 지금 이 순간과 하루가 정말 소중하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 자극제도 제 몸에 장착됐습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지난 3년이 상실의 기간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_p.213

 


 

 

최근에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Q.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불안했던 때를 이겨냈던 방법은?
A. 그 때의 내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보고 꽤나 감동이 되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아 받아 들이기 어려웠지만, 사실 세상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도 많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질병은, 개인 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 말은 관리를 잘 하면 '병'에 걸리지 않을거란 믿음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방송기자로 생활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술도 적게 마시고 틈틈히 운동도 하며 관리했지만 '백혈병'은 느닷없이 찾아왔고 아직 병의 정확한 원인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가 '병에 걸렸다'라고 말한다면, '왜?'라는 질문은 맞지 않다. '왜'라니, 큰 죄라도 지어 벌을 받는 것처럼 되묻는 물음에 '당사자'는 더욱 우울감과 고립감에 고통받을 뿐이다.

 

사람마다 '힘든 순간'을 견디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더 나누고 싶어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현재의 감정을 글로 남기며 정리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황기자는 투병 중에 느끼게 되는 우울감과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투병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 혼란스러웠던 마음,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을 글로 쓰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가 '고통스러웠다' 라고 쓰는 여섯 글자에는 얼마나 많은 순간이 담겨있을까, 혼란스럽다고 적는 한 단어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하지만 어리둥절해도 그 순간 긍정적인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려는 의지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알고보면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인데, 나 혼자만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누군가가 지나간 길이다.

병원에서도 '기자 정신'을 놓지 못하고 취재하고 인터뷰하며 투병기를 써내려가는 그 단어들 위에 '삶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나답게' 산다는 것의 가치가 담겨있다.

 

그래서 '지금의 황승택'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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