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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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를 읽는 동안, 우연히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김복준의 사건의뢰>에서 1920년대 일어난 '김정필 사건'을 다루었다. 김정필은 192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살해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는 김정필이 자기 남편 김호철의 얼굴이 곱지 못하고 무식하며 성질이 우둔한 것을 비관하여 번민을 느껴오던 중 남편을 없애고 이상적 남편과 살아보고자 주먹밥에 랏도링(쥐약)을 넣고 먹여 사망케 하였다고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의사 구도 다케키는 조선 특유의 범죄 형태를 총독부 통계 자료를 분석해 『조선특유의 범죄 : 남편 살해범에 대한 부인과학적 고찰』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당시 서대문형무소 살인범의 성비는 100명당 남성이 53명, 여성이 47명으로 여성 대부분은 남편 살해범이라고 한다. 당시 조혼이나 억지 결혼으로 남편, 시댁과 갈등을 빚는 여성들이 많았음을 감안해도 매우 놀라운 통계라고 느껴진다. 물론 역사 기록 그대로 당시 여성이 처한 여러 상황에 비추어 타국에 비해 남편 살해가 많았던 시기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강자에 의해 쓰인 기록이 아니던가.



​"윤박 교수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주장한 공창제 폐지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는 신문에 여러 차례 사설을 실어 여성 권익 향상에 앞장서고 있었다. 물론 그 사설의 말미에 항상 '사실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았기에 일어난 문제이니만큼 독립적 성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미군정 이후 커지는 여성의 목소리에 남성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_p.82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에서 살해된 윤박 교수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해방 후 귀국한 엘리트 남성으로, 동료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양준수 형사와 미군정 조사관인 이든 대위는 윤박이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다른 자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 그 희생양으로 떠오른 세 명의 여성 용의자는 『모던조선』의 편집장 선주혜, 현재는 가정 주부이지만과거 윤박의 집 식모이자 성 판매 여성이었던 윤선자, 그리고 윤박의 제자이자 자살한 신인 여성 소설가 현초의다. 

"나라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면 가장 위험해지는 것은 여성과 어린아이, 노인이나 변태 성욕자, 길거리 노동자처럼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_p.148

​"여성들이 저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하고 그러는 것이 별로여서요. 특히 일본 여성이나 조선 여성들은 과하게 순응적이죠." 이든은 미소를 지었지만 운서와 가성의 표정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순응하지 않으면 죽이잖아요. _p.85

역사적 기록은 누가 범인이고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가가 중요했을지 몰라도, 한정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사이의 누락된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정필은 어떨까? 김정필은 재판 당시 랏도링을 구매한 것은 맞지만 남편에게 먹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시댁에서는 시집 온 며느리가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했다고 고발했고, 경찰은 체포 당시 김정필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죄를 인정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당시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물론 그가 진짜 범인일 수도 있다.)


1920년대 본부(남편) 살해가 많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해 보자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남편을 죽였을 수 있다. 혹은 남성이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 이해하고 용납해 줄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여성은 작은 모함에도 상황을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생 아내를 폭행해 온 남편이 그날도 폭행을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아내가 사망해서 감형이 될 수 있지만, 평생 맞아온 아내가 저항하다 남편이 죽인 경우에는 계획범죄로 가중 처벌을 받는 지금과 비슷한 것이다.


​사실 내가 범죄에 치중해서 리뷰를 썼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윤박 교수의 살해도, 이 사건의 범인도 아니다. 한정현은 이러한 사회 구조적인 약자들이 착취당하고 위협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구해내려고 애쓰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이게 바로 낙관이야. 우리는 낙관할 수 있어. 우리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p.183) 지워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지금도 약자인 당신을 구해내기 위해 누군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낙관할 수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결국 사랑이, 선의가 우리를 구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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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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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인 내가 단숨에 이 책을 읽어낸 이유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의 절반을 읽어도, 삼분의 이 지점까지 읽어도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흥미로웠고,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54)


룰루 밀러는 아버지로부터 '넌 중요하지 않아.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가르침을 들으며 자랐다.(p.55)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반박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삶에 매혹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고귀하게 여겼고,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의 진짜 창조 이야기를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나자 그가 평생 수집한 표본은 모두 파괴되었고, 한순간에 모든 업적이 무너졌다. 이 정도 일을 겪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에 굴복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던은 어땠을까?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통해 역경의 시간을 헤치고 끝내 이겨내는 방법을, 자신의 무너진 삶의 질서를 회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룰루 밀러는 왜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논픽션이 지닌 특별한 지점은 이러한 독특한 서사 구조라고 볼 수 있는데, 이야기의 중반까지 룰루 밀러는 데이비스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언급하며 그를 칭송한다. 그러나 돌연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난다. 한국에서는 낯선 인물인 스탠퍼드 대학 총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신의 평생을 바친 연구결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결국 우생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쫓아가며 연구하던 룰루 밀러는 자신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스 스타 조던이라는, 그것도 생물학자이자 분류학자로서 권위 있는 과학자 한 사람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를 인정하고 칭송해왔던 과학이라는 세계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그가 한평생 연구하며 지위를 쌓았던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재 자연 세계가 인간이 설정한 대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250)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발혀질 것이다. (26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다양한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기준'이 사라진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정상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명확하게 내려진 답이 없는 혼돈의 시기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확신하고 있던 과학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아버지가 강조하던 '무의미'에 반박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확립해나가는 룰루 밀러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 해주는 존재, 웃음의 근원,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227)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264)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단언하지 말라, 예상치 못할 놀라운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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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브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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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해 빚더미에 오르고 가족과도 멀어진 남자가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이야기라니. 이렇게 한 줄로 설명하고 나니 더 뻔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튜브』는 순진하게 느껴질만한 성실하게 실패한 사람이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 신선한 결말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문득, 내가 김성곤 안드레아구나라는 생각에 아찔한 생각이 든다. 먼 미래를 무턱대고 낙관하며 아등바등 달려가다가 지쳐버린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쉽게 상처 주고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사람, 항상 너무나 많은 것들을 신경 쓰느라 진짜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람, 모든 것을 효용과 쓸모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느라 세상을 감탄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그것은 나였다.


"엄마, 그런 말 들어도 나는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그만 좀 하세요. 그래서 어쩌라고. 꽃이 폈어. 그래서 어쩌라고, 응? 따달라는 거야? 아니잖아. 엄마 말이 맞는다고 해야 되는거야? 매번 꽃 폈다고 중얼거릴 때마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건데요?" 김성곤 안드레아는 차츰 감탄하는 법, 놀라는 법, 사물과 세상을 목적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법을 잊어갔다. 그런 걸 잊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미소나 여유 같은 게 우러나올 리가 없었다. (152)


어떤 인생이 실패일까? 세상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낡은 자전거로 배달 음식을 나르는 그를 실패자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승승장구해서 돈을 많이 버는 가장이었다면 성공한 삶이었을까? 그가 불행하다고 느낀 이유는 단지 사업의 실패에만 있지 않다. 그는 삶의 감각과 감정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목표를 좇아 살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다 학원 운전기사로 일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얼굴에 쏟아지는 비 때문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는 날, 아이들이 비에 맞지 않게 분주히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작은 비닐 통로를 만들던 남자는 아이들을 인솔하며 미소 짓고 기둥에 맺힌 빗방울을 순수한 눈으로 바라봤다.

뭐든지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땐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그러니까 생각의 스위치부터 꺼야 하죠. 낙엽은 낙엽으로 보고 전봇대는 전봇대로 보는 겁니까. 빨간 건 빨강게 노란 건 노랗게 받아들이면 되죠.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죠. 온 세상이 신기한 것 투성이고 예쁜 것 투성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146)

작가의 전작 『아몬드』에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라면, 『튜브』는 감정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하게 살아온 중년이 그것을 회복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김성곤이 바라는 변화는 자신의 더 나은 상황과 결과의 변화가 아니라 잊어버린 감각을 되살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신처럼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선정해 도전을 지켜보고 응원해 주는 '지푸라기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게 된다. 그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닿는 순간이었다.

삷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그것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삶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흐른다. 인과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종종 헛된 이유는 그래서이다. 찾았다고 생각한 정답은 단기간의 해답이 될지언정 지속되는 삶 전체를 꽤뚫기 어렵다. 삶을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는, 그것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 (238)

김성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실패한 사람이 실패를 딛고 다시 성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공이 뭐지? 혼돈과 불안정은 살아있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파도에 맞서야 할 땐 맞서고 그러지 않을 때는 아이의 눈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잠잠히 김성곤을 응원하게 된다. 나도 달라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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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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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러시아는 국가 간 전면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YouTube에서는 실시간으로 대규모 폭발 장면과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 행렬을 송출했다. 누군가의 불행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마르티나 보스셉스카/폴란드 자원봉사자 : 우리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료 교통수단을 제공하려고요. 뉴스를 보고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생각해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차역 곳곳엔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놓은 종이가 붙어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연락을 주세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폴란드 도시의 시민들은 당장 거주할 곳 없이 우크라이나를 떠나온 난민들을 돕고자 했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있어 국경의 개념이 다른 우리나라였다면, 나라면 어땠을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 집을 내어주고 돌봐줄 수 있을까?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캠프에서 구호물품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로세르, 전쟁이 임박해 있어. 이념과 원칙의 전쟁이 될 거야.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두 방식 사이의 전쟁이고, 나치와 파시스트와 맞선 민주주의의 전쟁이고, 자유와 권위주의가 맞선 전쟁이지." _p.185


『바다의 긴 꽃잎』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겪은 빅토르와 로세르가 파시즘을 피해 칠레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정착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 정부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시작되어, 안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이었고 밖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은 파시스트 군부의 승리로 끝나고 프랑코의 보복을 피해 스페인을 탈출한 난민들이 냉혹한 현실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지자, 칠레는 '파블로 네루다'를 프랑스 주재 특별 영사로 파견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난민들을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인 ‘바다의 긴 꽃잎’은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언젠가 칠레」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시인과 이사벨 아옌데의 조국 칠레를 상징한다.


"네루다는 열정적으로 스페인을 사랑하고, 파시즘을 증오했다. 그는 패전한 공화주의자들의 운명을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우파 정당들과 가톨릭교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새로 취임한 대통령을 설득해 공화주의자들을 칠레에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p.145


조지 오웰은 종군기자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에 갔으나 혁명에 매료되어 전쟁에 뛰어들었고, 민병대원으로서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운 역사를 『카탈로니아 찬가』를 통해 기록했다. 이 경험을 통해 조지 오웰은 '인간을 압제하는 모든 형태'를 타파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희생양을 구하고자 하는 실천적 저항으로 소설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이사벨 아옌데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칠레를 관통한 정치적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작가 또한 칠레에서 최초로 투표에 의해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이자 자신 역시 주인공처럼 피노체트 군부독재를 피해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경험이 있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방인의 아픔과 비극적인 역사의 상처를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었다.


"네 세대는 이상주의가 결핍되어 있어." _p.408


 우리 세대가 문학 작품을 통해 조지 오웰과 이사벨 아옌데가 말하는 정치적 역사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 평등한 사회를 꿈꾸고, 인간을 압제하는 모든 형태에 저항하고, 정의롭지 못한 희생양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상주의'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러한 전쟁을 이데올로기 싸움이라고 명명하겠지만, 전쟁 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존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웠고 더 나은 평등을 위해 투표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이 같은 전쟁을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파시즘을 피해 칠레로 망명해야 했던 2천여 명을 오로지 형제애로 환대한 칠레 국민들의 모습처럼, 지금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난 사람들을 조건없이 돕는 이들의 모습처럼 우리에게도 약자를 향한 인류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다의 긴 꽃잎』을 읽으면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다른 책들도 살펴보게 되었고, 시인으로만 알았던 파블로 네루다가 외교관으로서 스페인 사람들을 포용하고 시를 통해 위로했음을 알게 되면서 왜 칠레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지도 깊이 알게 되었다. 꼭꼭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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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김도영 지음 / 봄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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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유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했던 박정호 교도관은 자신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으로, 2004년 대전교도소에서 근무 중 재소자에게 둔기로 수차례 맞아 순직한 故김동민 교도관을 기렸다. 그는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꼭 지켜드리고 싶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터뷰했다.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A 씨가 더는 만나 주지 않자 A 씨와 여동생, 어머니를 차례로 살해한 김태현, 금품을 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와 언니를 살해한 당진 자매 살인범, 장인 앞에서 아내를 일본도로 찔러 살해한 남편 장 모 씨. 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잔인한 범죄자들에게는 무기징역 형이 확정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무기징역'이라고 하면, 죽을 때까지 사회에 나올 수 없는 격리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잊는다. 존재하지만 모두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사회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세상의 끝을 떠받치고 있는 교도관의 삶은 어떨까? 사람은 달라질 수 있을까?


"가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 폭력성이 더해져 아내를 수년간 폭행한 이 사람은 아내가 자신을 신고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자살을 기도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우리가 살려낸 그 남자는 출소 후 두 달 만에 다시 구속됐고, 죄명은 살인이었다." _p.39



야간 근무를 서던 어느 새벽, 팔다리 앙상한 60대 노인이 새빨개진 눈으로 교도관을 불렀다. “제가 늙어서 냄새난다며 화장실 앞에서 자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어제는 제가 깜빡하고 창문 앞에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그놈이….” 같은 방을 쓰는 20대 조직폭력범에게 얼굴을 밟혔다고 호소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치료를 해주고 가해자를 징벌방으로 옮긴 후, 근무 보고서를 쓰기 위해 노인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사건 개요 : 피고인 ○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당시 유치원생 ○양을 칼로 위협해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원룸으로 데리고 가…] 저자는 자신의 직업인 교도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매 순간마다 자신이 지녀온 가치관이 뒤틀리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저 오늘 어땠어요? 판사한테 좀 어필이 된 거 같아요? 오늘 조연까지 특별출연 시켰는데, 시킨 대로 교복 입고 왔네. 다음 재판에선 또 누굴 부르지. 병원 환자복을 입고 오라고 해야하나."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자의 반성 없는 모습은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다. p.96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빌딩이 높아진 만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라는 대사가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가족이 해체되면서 범죄는 날로 잔혹해져가면서 국민들의 법 감정 또한 높아졌다. 더 강력한 처벌,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도록 격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교도소의 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고 수감된 이들이지만, 교도소 내에서 자신의 인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집요하게 요구하는 현실을 보며 저자는 끊임없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진짜 정의로운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반성 없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며 '사람은 변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무너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수감자들도 있기에 교도관들은 사명감과 보람을 느낀다. 한 명의 교도관이 계호하는 수용자는 100명 이상, 잦은 24시간 근무와 수용자의 고소·고발 및 언어폭력에 현장의 교도관들은 지쳐갈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는 사람들이 교도관들이 처한 상황이 많이 알려져서 수감자가 아닌 교도관들의 처우에도 대안이 생겼으면 좋겠고, 사회의 한곳을 떠받치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사명감과 보람을 느끼며 근무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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