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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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치열하게 내 안의 편견들과 싸워야 했음을 고백한다. 문화에 우월함과 저급한 것이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문화적 차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싶기도 했고, 그들 모두의 생각이 같지는 않아도 다수는 같기 때문에 똑같이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싶기도 했다.


『헤이트(Hate):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는 '혐오'를 주제로 심리학, 법학, 미디어학, 역사학, 철학, 인류학 등 다양한 학자들이 APoV 컨퍼런스에서 Bias, by us(우리에 의한 편견)에 대해 강연과 토론한 내용을 엮었다. 이 책을 읽고 컨퍼런스 영상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고, '혐오'에 관한 다른 강연들과 기사들도 살폈다. 평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혐오'라는 주제, 그리고 내 마음 안에 혐오심과 정직하게 마주하고 싶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에서 아시안 혐오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코로나19가 '차이나 바이러스'라며, 이 모든 책임이 중국에 있다고 수차례 발언했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우리의 많은 일상은 불편을 겪었고, 많은 것을 바꾸었으며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죽거나 직장이나 사업장을 잃어 고통을 겪었을지 모른다. 언제 나아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자신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있다는 억울함은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대상을 찾아 비난하고 싶게 한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 늘 반복되어 왔다. 14세기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우물에다 독을 타서 페스트가 번졌다고 믿었다. 이후 19세기 미국에서 천연두가 유행하자 그 원인을 중국인으로 지목하였고, 스페인 독감이 퍼져나갈 당시에도 외국인과 이주자들로 인하여 전염병이 퍼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는데, '혐오'는 대부분 국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혐오로부터 누가 이득을 취하고 누가 이런 혐오를 공급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가들이나 권력자들은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는 분노를 이용할 때,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스페인 독감 이후 퍼트려진 외국인에 대한 혐오는 나치 정권의 발판이 되었고, 현재 유럽 복지국가로서의 위기와 불안은 이주자나 난민, 무슬림 혐오로 둔갑되었으며, 트럼프는 백인 남성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성별, 인종, 이민자에 대한 혐오를 퍼트려 지지를 얻기도 했다. 대부분의 혐오는 만들어진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계속 넘지 못했던 혐오는 '무슬림'에 대한 혐오였다. 과거 IS 무장단체에 의해 한국인이 참수되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갔던 파키스탄은 여성 혼자서는 대문 밖을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곳이었고, 거리에는 남자들만이 거닐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에는 납치혼과 명예살인이라는 전통에 희생되는 인물들이 등장했고, 결혼을 거부한 소녀를 가족들이 죽이는 명예살인을 여전히 최근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화는 그저 다를 뿐이라지만, 이렇게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대부분의 혐오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의도적으로 퍼트려진 모습이 아니라 진짜 모습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속해있는 많은 집단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 내 뿌리인 안동 김씨, 내가 학업한 대학, 내가 근무하고 있는 출판사,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종로 등등. 그렇지만, 내가 속한 집단이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듯이 내가 혐오하는 대상 또한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나라, 그들의 종교, 그들의 직업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듯. 그래서 좁은 의미의 집단 정체성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시간되시면 유튜브 강연도 보셨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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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생애 소설Q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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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이키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그 순간만 내 인생에 없었더라면. 그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자꾸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나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과거에 머물게 했다.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완벽한 생애』는 각자 삶의 터전에서 도망치듯 떠난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방송작가 일을 하던 윤주는 직장 상사와 동료에게 모욕을 당한 뒤 일을 그만두고 미정이 지내는 제주로 향한다. 미정은 인권법재단 간사로 일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을 잃고 제주로 도망치듯 떠나온 상태였다. 윤주는 미정의 집에서 머물 한 달 동안 자신의 원룸을 홍콩 출신 시징에게 빌려주고, 시징은 홀연히 자신을 떠난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그리움을 안고 서울로 떠나온다.


각자 목적은 제각각이지만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도망친 건 같다. 낯선 곳에서 지내며 일상의 익숙함이 사라지자, 이들은 그동안 외면해온 자신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완벽한 삶이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신념은 애초에 갖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고민을 거듭하고 애쓰며 투신할수록 생애는 엉망이 되는 것인지, 미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_p.85


나의 이십 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투성이었다. 어른들이 삶에 대해 알려준 것들은 커다란 곡선들뿐이었다.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등등. 하지만 계획과 예상에 없던 일들은 폭력적으로 내 삶에 끼어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과거의 내 선택이 이해할 수 없었고, 내 선의와 최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여전히 젊은 혈기로 가득했고, 세상엔 궁금한 것이 많았으니까.


나도 몇 년 전 미정과 윤주처럼 내가 일상을 모두 버리고 떠난 적이 있다. 맞다, 그건 도망이었다. 나의 최선과 열심을 장난처럼 저울질하며 정치질 하는 상사들에 지쳤고, 그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성숙하게 작아지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무엇이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일까 끝없이 과거를 복기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내 좋은 친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고,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라고요. 친구의 그 말을 상기할수록, 그가 나와 헤어진 뒤에야 다른 사람과의 정착을 결심한 걸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의 생애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것뿐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요. 그것이 우리 각자의 여행이겠죠. 물론 필연적인 과정들을 통해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 _p.151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때가 나를 바꾸었다고.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차있던 나를 유연하게 만들었고,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고, 당장은 아프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를 더 성숙하게 하는 과정일 수 있었다고. 확실한 것은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훨씬 나 자신이 편안해졌고, 진심으로 나를 알게 되었다.


지우고 싶고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여전히 미성숙하고 서툴러도 이런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있는. 다 잘할 수는 없고,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완벽할 필요도 없고. 미정과 윤주, 시징에게도 그럴 것이다. 신념을 따르고 사랑에 진심일수록 상처받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치고 부서지고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하지 못한 채 흔들리면서 '살아있음'을 깨달아가는 이 과정보다 더 완벽한 생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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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몽냥처럼 - 웹툰보다 더 내밀하고 사랑스러운 몽냥 에세이
몽냥 이수경 지음 / 꿈의지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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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 부부를 좋아한다. 이들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드라마 <싸인>과 <유령>을 좋아했지만, 최근 예능에 보이는 모습에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장항준 감독은 스스로 대한민국 3대 결혼 잘한 남자이며, 아내가 시가, 처가 등 모든 집안일들을 신경 안 쓰이게 내조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최근 출연한 '집사부일체'에서는 김은희 작가에 대해 “인간적으로 너무 좋은 사람이고, 위인이 된 내 가족”이라며 자부심을 표현했다. 특히 "노력 자체가 위인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존경할만한 노력”이라면서, 자신은 실패에 대한 내성이 있고, 크게 잘 돼 본 적이 없어서 괜찮지만, 아내가 언젠가 처음 겪게 될 좌절이 두렵다며 진심으로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랑한다면 몽냥처럼』을 읽으면서 이 글을 쓴 작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호감을 느꼈다. 헤어졌지만 지난 인연들 또한 좋은 사람이었다고 여길 줄 알고, 계산하지 않고 먼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내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 자신의 부족한 점을 드러내기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대로 인해 지금만큼 성숙해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보며 이 사람은 마음이 참 건강하다, 건강한 자존감과 자기애를 지녀서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혼 가정에서 자라 행복한 부부보다는 불행한 부부가 많다고 생각했고, 자존감도 낮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퇴근해서 열 평도 안 되는 깜깜한 자취방에 혼자 돌아오면 세상에서 자신만 동그랗게 버려진 것 같았다고. 하지만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몽이(남편) 덕분에 ‘내가 진짜 괜찮은 사람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아끼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나는 몽이 덕분에 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배웠고,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 반복해서 칭찬해주면 무의식 중 그 말이 쌓여 힘을 발휘한다." _p.245


지난 연애를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내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떤 때는 좋아하는 내 감정만 한없이 쏟아붓기도 했고, 또 어떤 순간에는 내 마음이 다칠까 봐 두려워 상대방의 마음을 수없이 의심하기도 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익숙한데, 오히려 받는 것은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내 고민을 들어주었던 선배는 남들에게 베푸는 것은 좋아하면서, 선물 하나 받은 것도 불편해서 꼭 되돌려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사랑을 고맙게 받을 줄 아는 것도 성숙한 태도'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지금 나는 그때보다 성장했으려나? 이 책을 읽으면서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보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남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면 '그냥 하는 말'이라고 곡해하지 않고 칭찬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 그 칭찬의 말은 다시 내 마음속에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선순환이 일어나면서 자존감이 한 뼘씩 자라났다. 남들의 평가나 시선이 나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나의 가치를 내가 만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많이 사랑해준다. 그것이 내가 몽이를 더 사랑하는 길이고, 우리가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길임을 이젠 안다." _p.247


리뷰를 쓰고 난 후, 두 명의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이다. 얼마 전 결혼을 한 친구, 그리고 이번 달에 결혼을 앞둔 친구. 몽냥툰의 사소하고 사랑스러운 일상처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오랫동안 지속되길. 처음 결혼할 때의 다짐과 마음을 잊지 않고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도 건강한 마음으로 내 삶을 꾸려 나가다 보면 내 인연을 만날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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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문학동네 청소년 53
전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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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게 먼 우주의 끝, 그곳에서부터 소행성 하나가 날아오고 있다. 지름은 800미터 남짓으로 충돌 시 문명의 대부분을 파괴할 규모다. 우주공학의 최정상에 선 연구단체인 '제네시스'는 달에 메시지를 새기는 기계를 만들어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광고판으로 삼았다. 그렇게 막대한 수익을 올린 제네시스는 부모도 후견인도 없는 열다섯 살 미만의 우수한 아이들을 선택해 연구원으로 육성하여 우주의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지구를 피해 가도록 하는 궤도 조정은 실패했고, 외부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소행성이 제네시스를 향하게 해 놓은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제네시스 항공기계정비반의 ‘유리아’는 단독 출장을 가 있던 달에서 지구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는 순간을 목도한다. 더 이상 푸르지 않은 지구를 지켜보며 달에서 버틴 지 어느덧 6개월. 반파된 지구에서 누군가가 리아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니까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지구 종말의 비망록인 셈이다.


 "나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는데 어른들은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말할 수 없이 넓은 이 우주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바꾸려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이 말을 누군가와 나눴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나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


지난주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소행성 다수가 몇 주 안에 지구 근처를 지나갈 것이라는 분석을 발표했다. 그중 소행성 2004UE는 직경 415m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크기이지만 영화와 달리 대규모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고 강조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처럼 어려운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처럼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이 6일 남은 시점,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해도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날이 며칠 안 남았다면, 나는 그 순간들을 어떻게 보낼까.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를 읽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냥 멍하니 있을 것 같아. 억울하거나 눈물 날 것 같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에 꼭 함께 있고 싶은 얼굴도 떠오르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목숨 걸고 간절하게 덤벼 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시간 동안 나 자신이 편안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사랑밖에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 무력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과 대조적으로 내 마음이 메마른 듯하여.


"우리의 궤도가 평행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평행선이 아니라면 하나쯤은 교차점이 있지. 우리는 그 보육원에서 교차점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멀어졌다 해도 교차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교차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하기를."


그래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내가 아니라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작가의 추천평으로 소개하고 싶다. "사회는 어떤 일에든 자격을 묻고 자격이라는 말로 선을 긋는다. 어리기 때문에, 신체가 불편하기 때문에,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내지 못할 거라는 확신.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에선 궤도 밖으로 밀려난 주체들이 사랑을 하고, 세상을 구하려 한다. 최종의 최종까지.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또 한 번 확신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단 하나의 자격이 필요하다면 바로 간절함이라고."


그렇지만 나도 사랑은 있어. “먹을 것을 주는 건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거든. 아직 내가 지닌 사랑의 크기는를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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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별밤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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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엄마가 불편했다. 서른이 넘으면서였나. 나는 내가 엄마의 세상에서 엄마의 습관대로 자라다 이제 나만의 생활 패턴과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작년 여름, 독립을 하게 되고 우리는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미워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가 살아온 삶에 대해 생각했다. 곤히 자다 일어나 백신을 맞고 열이 오른 내 이마를 무심히 짚어보고 가던 손길에 눈물이 나던 것도 이 탓이었을까.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_p.137


『밝은 밤』의 ‘지연’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떠난다.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 후 배신감과 충격에 도망치다시피 서울을 떠나 도착한 바닷가 마을 희령은 열 살 때 할머니 집에 놀러 가기 위해 방문했던 때를 빼면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아가씨, 내 손녀랑 닮았어. 그 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어. 내 딸의 딸인데.” 어떤 이유에선가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소원해진 탓에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를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어떤 말을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_p.18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잠이 달아난 새벽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책도, 드라마도 아끼고 아끼다 느즈막이 꺼내보는 편이었다. 왜 그 새벽에 이 책을 펼쳐들었을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나만의 기억과 순간들이 떠올라서, 뜨거운 차를 불어 마시며 오래 울었다. 나도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순간들이 있었음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어떤 말들이 여전히 우리 사이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다. 내 편이 되어주길 기다렸던 시간들과 고단했던 엄마가 나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멀어졌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p.314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 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_p.337


아직은 내 마음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일렁이지만, 이 이야기가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쉽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서로 다른 인물과 다른 장면에서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공감하고 눈물 흘리고 위로받았을 것 같다. 그래서 술 한잔하면서 이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마 그 순간에는 평소 내가 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꺼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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