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드디어 읽었네. 그리고, 읽길 잘했다. 참 잘했다.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지혜의 조언들을 기꺼이 받아들임에 기뻤던 시간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표지에서도 보이듯이 이미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담은 것이니 어찌보면 나에겐 먼 생각들이고 감히 범접할 수 없을거란 생각까지 들게도 했다. 헌데 생각보다 술술 읽혀졌고 조금 더 생각의 시선이 확장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실제로 2015년 건명원에서 한 5회의 철학 강의를 묶어낸 책이었고, 전제의 내용은 우리 나라는 '철학 수입국'으로 살아왔기에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함이었고 사회적인 모든 이슈들이 그로 인한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개인이 사유의 깊이가 달라지면 따르는 이들이 생기고 그것이 확대되면 공동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철학하는, 깊이 사유하는 것이 비단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명원이 무엇을 하는 곳? 최진석 교수님은 어떤 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궁금해서 찾아보고, 책들을 찾아보니 나도 모르게 주문해 두었던 최진석 교수님의 책이 있었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230802/1


올해 2월자 기사인데, 건명원을 바탕으로 한 책이 이 책이기에 기사의 내용도 이 책의 내용과 아주 다르진 않아서, 조금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읽어가는 시기에 나온 기사.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158955

꿈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인재를 만들겠다는 생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헌데, 너무 좋다. 꿈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을 키워가겠다는 것.
어른들도 꿈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

어떤 시도도 실패로만 마무리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성공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동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된 동력은 실패의 암울한 풍경 속에서도 꿈꾸는 자들을 더 심층적이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꿈을 꾸지 않는 일입니다. 시도하지 않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감행해야만 합니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라는 편견을 너무 일찍부터 갖는 아이들이 그저 안타까울뿐이다. 나조차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쉬이 도전하지 못해왔었다. 이미 있는 것들을 따라하면 그 편안함과 쉬움을 포기하기가 싫은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것에서 또 느껴지는 권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헌데 그 과정을 동력이라고 표현한다. 무제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라고. 뒤늦게 꿈을 쫓는 나조차도 많은 이들의 시선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나도 여러 생각과 고민을 한참 하고나서야 불확실해 보이더라도 이루려 노력하는 것 뿐인데. 현재에 안주하지 마시길. (너무 막막한 조언같이 들리기도 하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고 큰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높이가 바로 철학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 : Philosophy
필로소피란 말은 원래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하며,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며, 필로소피아는 지()를 사랑하는 것, 즉 '애지()의 학문'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 [philosophy, 哲學] (두산백과)

왜 우리나라에선 유독, 철학원, 도. 이런 허무맹랑한 느낌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인지. 그 생각들이 그대로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고, 돈이 되지 않는다며 무시하는 것인지. (난 사실 철학학과를 가고 싶어했었다는 것. 나도 허망한 시선으로 감히 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자라 지금 어른이 되어 철학은 어렵다고 발을 담글 생각도 하지 않고 애써 고개를 저어버린다. 얼마나 흥미로운 분야인데. 물론 너무 방대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이어진 걸 보고 있노라면 흥미로운 순간이 꼭 생기는데 말이다. 편견을 거두어 주시길. 지혜를 구하고자하는 그런 의지로 봐주면 안될지.

지성의 높이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수학은 지성을 고도로 발휘해 수나 도형이나 대수를 가지고 세계와 관계하지만, 철학은 '수'나 '도형'대신 '관념'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합니다. 우리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 현실적인 지배력까지 보장해주는 이유는 세계를 그만큼 더 넓고 높은 데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높이를 철학의 단계까지 끌어오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을 더 넓고 더 높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되어서 좁은 식견으로 사회를 보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이제 그만 두고 싶어진다.

공을 이루었으면 그것을 차고 앉아 거기에 머물려 하지 마라.
(공성이불거)

역사를 끌고 밀고 나아가야 하는 영웅은 공을 이룬 다음에 바로 다음 공을 향해 나아가는 동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시대를 건너가려는 꿈을 꾸기보다는 각자의 틀로만 무장하여 싸우느라 앞을 보는 눈과 진정한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매우 걱정스런 형국입니다.

자기 삶을 영위할 때도 자기 삶 속에 온전히 침잠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삶 자체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익숙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익숙한 자기는 집단적인 관습이나 보편적인 이념을 공유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기입니다. 종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집단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은 단독자로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고립을 허용하지 않으면 그 안에 몰입되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고립을 자초한 후, 고독에 빠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짧은 글로는 모든 걸 정리하려니 오히려 길어지니. 아직도 부족한 나의 내공이 느껴진다. 플래그가 따닥따닥 붙어있고, 줄 그은 모든 곳이 또 새롭게 와 닿으니. 이 책은 다시 재독을 해야하는 책이 분명하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또 어떤 생각으로 마무리 지어질지.

결국, 이 책은 내가 궁리하고 도전하고 몰입하는 모든 것의 이유를 설명하여준다. 내가 이리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해주고 싶다.

최진석 교수님의 책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찾아두었으니 바로 이어서 읽어나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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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 넘어진 듯 보여도 천천히 걸어가는 중
송은정 지음 / 효형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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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내 눈에 들어왔지만, 책방을 닫았다기에 겁을 먹게 될까봐 차마 집어들지 못했던 책인데, 꿈틀책방 사장님의 권유로 용기를 냈다. 책방을 한다는 것은 로망으로만 그칠 수는 없기에 (나도 그 점은 알고는 있었지만) 읽어봄직하다며.

책방을 내기로 결심을 하고, 내는 과정과 책방을 하면서 겪는 소소한 일상들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의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읽는 내내 공감이 되면서 흐뭇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의 이야기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꾸밈없이 써내려가는 글들이 참 좋아서 이 분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길 기대할 때,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이 아니라 오른쪽 혹은 왼쪽의 어딘가여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엔 전진도 후퇴도 없다. 높고 먼 방향을 점프하는 것만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 주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그냥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굳이 높이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히 말하는 작가가 그냥 나의 친한 인연과도 같이 가깝게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뜨악함과 마침내 공간을 마련했다는 개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두 개의 마음이 앞다투는 바람에 지금 이 감정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일 눈을 뜨고 난 뒤에야 상황이 파악될 것 같다.

어찌나 솔직한 부분인지. 뜨악함과 개운함. 나도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비로소 가르침에 뛰어들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큰일났다. 혹은 드디어 !! 라는 상반된 두 감정. 나도 또 책방을 낼 때 그럴까?

만약 나라면 어떤 책을 놓았을까.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책자의 운명이 흥미로웠다.

이전에 읽은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의 부분 부분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결국의 사람과 책이 만나는 곳이기에 어떤 곳에서도 똑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고, 어떤 곳도 같은 서점이 있을 수 없다. 나라면 어떤 책들로 사람들과 책을 이어줄까? 기분좋은 생각도 살짝 해본다.

그리고 소소하게 벌어지는 책장에서의 일들과 솔직한 주인의 생각들. 희미하게 웃으면서 넘기게 되었다. 책과 커피. 그것의 연결 고리에 대해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도 왜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지. 책방 문을 넘기까지의 용기를 내준 손님들에 대한 생각들. 자영업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고충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그러지 못한 이들보다 특별히 더 행복할 거라 주장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밥벌이에 관한 문제 앞에서만큼은 늘 공평했다. 회사원일 때도 책방 운영자일 때도 글을 쓸 때도 나는 고루 기쁘고 불행했다. 언제나 그랬다.
다만 일단멈춤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더 많은 책이 읽고 싶어졌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 좋아하는 마음을 낳았다. 훌륭한 책방 운영자는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책을 둘러싼 일을 사랑하게 됐다. 책방을 닫겠다는 결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닿아 있었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은 여러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냥 꿈으로 남겨두자. 역시 일은 일이야. 등등. 그리고 조금은 멈칫할지도. 헌데 이상하게 난 그러는게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고 싶다. 기한은 정해져있지만 그 기한내에 꼭 하겠다는 임무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강제성을 두고서라도 해내고싶다는 의미로 나의 지금 길의 방향을 정하였다. 이 책은 그 길에 두려움보다는 '그래도!'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지금 그녀는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태그를 검색하면서 찾은 그녀의 창에서. 길고 화려한 프로필이 아닌 간략한 1줄의 소개와, 피드의 사진들속에서 그녀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띈다. 용기를 낸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싶고, 끊임없는 응원을 보내며 팬을 자청하고싶다.

일단멈춤
음미하는 삶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일단 멈춤, 교토>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을 썼습니다.
말이 거창해졌다. 그저 기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였는데. 이 한마디를 자신 있게 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오늘도 오답 앞을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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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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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히 이 책에 대해서 다른이들의 생각과 기준에도 맞출만큼, 제대로 책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신있는 나의 이야기를 펼치는 공간이니 용기내보기로 한다.

청소년기 분명 읽었으나 기억에 남지 않는 그 조각을 가지고 이 책을 성인이 되어서 다시 펼쳤을 때 그 조각마저도 흩어졌음을 느꼈다. 아니, 조각이 있었는지조차 모를만큼 아예 다른 책으로 다가오고 의미가 깊어졌다. 동시에 필독서로 내걸면서 말하는 이들조차 진정으로 이 책이 그 당시 청소년에게 올바른 의미로 다가왔을지를 확신하고 내린 결정이었을지. 무책임한 어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고. 고전을 읽히고 싶은 이들이 오히려 고전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이후로 다시 펼친 헤르만헤세의 책은 <데미안>이다. 처음 아이의 10대 시절의 회상으로 시작할 때, 두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부분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어둡다고 여겨지는 세계를 즐기는 것을 오히려 좋아할 때도 있었다는 부분이 나에겐 꽤나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돌아갈 안전한 세계가 있으니 그도 잠시 잠깐의 일탈을 생각했겠지. 나 역시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온실속의 화초만큼은 아니어도 보호받으며 살아왔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그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독립을 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지낼 때도 일탈을 행해보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 남편과의 여행조차 허락을 받고 갈 정도로 바른생활 아이였으니. 헌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학창시절 나의 이해를 벗어난 일탈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해가 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하고. 가끔 '나도 한번쯤?' 이라고. 금방 고개를 저어 말도 안된다고 거부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이 싱클레어의 입장이 연민의 감정도 들었고, 싱클레어의 모든 상황이 나도 함께 포함된 듯이 느껴져 마치 뿌연 공간을 헤매는 것처럼 느껴졌다. (독서모임에서 그리 말해주셨다. 안개속을 헤매고 있다가 나온 느낌이었다고) 덮고 나서 뭐라고 정의 내리고 깔끔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이해가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은 <싯다르타>에서도 내면의 이야기에 대해서 글을 쓴 그가 아니던가. 역시 <데미안>에서도 내면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 자신의 길을 가라며 이야기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이들의 마음에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다는 <데미안>. 우리네 젊은이들의 마음에도 파동을 일으킬 순 없을까?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너무 유명해져서 이미 익숙해진 문장인데, 여기서는 이렇게 계속 기억에 남게 될지 몰랐다. 알을 깬다는 것의 의미. 한마리의 새. 가녀리지만 용기있고 투쟁할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동시에 '지금의 나는?'이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이런 멋진 이 책의 함축적인 의미를 두고선, 예전 기억을 더듬어 본 이의 말로는 그 당시 청소년시절엔 왕따나 이지매가 사회화 되었고, 이 책의 일부인 데미안이 또래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그 시절만을 이야기하며 그것만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이해하게 했다는 것이다. (본인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라면 그랬을지도) 참, 무책임한 어른들.

그녀는 공기처럼 가볍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죠. 당신도 알죠. 새는 알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애쓴다는 걸. 돌이켜 물어보세요. 길이 그토록 어려웠던가? 오직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 수 있었을까요?"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부인과 싱클레어가 만나게 되고, 그녀가 한 말들과 위로가 잔잔하게 남는 장면이었다. 3포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청년들. 좌절에 쉽게 포기하고 쉽게 상처받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남기기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서 더 쉽지 않다. 무엇이 잘못된걸까? 사회? 국가? 경제? 모든 걸 다 떠나서,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조금은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래서 그 후에는 여러 이유를 나열하고 나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며 다시 앞으로 내딛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결국 자신의 삶인것을. 앞이 막막해보인다해도 끝만이 해답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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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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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읽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을 책이었다. 내내 관심이 가던 책이었지만 나의 편견때문에 쉽사리 시작하질 못했었다. 하지만 1챕터를 지나고나서는, 그 생각을 가졌던 내가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판사유감>의 저자로 나에겐 더 익숙한 문유석 판사의 책이며, 법률적인 용어가 나오긴 하지만 마치 법률회사에 다니는 동네 오빠, 삼촌이 이야기해주듯이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개인주의자라는 개념도 '합리적' 개인주의자로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으니, 나의 편견을 철저하게 깨부순 책이었다는 결론을 조심스레 내본다.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개인이 먼저 서야한다는 것이다. 휘둘리지 않게 견고하게.
이 부분 뒤에 오는 아래 글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합리적 개인은 자신의 비합리성까지도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전락하여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마저 저해할 뿐이다. 자기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와 동전의 양면처럼,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는 개인의 이익이 지속가능하지 못하도록 '반대 인센티브(불이익)'를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합리성이기도 하다.

합리적 개인이라니. 합리적이지 못하다면 그저 이기적인 개인주의자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지키기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개인과 다수의 극단적인 결정만을 놓고 생각해오던 것에서, 이런 합리성에 아이러니하단 생각이 먼저 드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덮고 나서야 이 말이 판사 문유석이 말하는,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합리적인 개인주의겠다 싶었다.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이 말은 좀 더 와닿았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과도 같은 말.

총 3부로 나눈 이 책속에서, 나의 고집스런 편견을 잠재운 부분이 위에 나온 1부였고,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라는 제목으로 여러 이야기를 풀어냈다. 문유석 판사님의 담담하게 말하는 자신의 주변 이야기, 자신의 생각들, 가끔 너무 솔직해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내듯이 마무리하는 각 챕터들의 이야기가 그를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들기도 했다.

2부는 '타인의 발견' 이라는 이름으로 법관으로써 많은 이들을 만나왔기에 더 절절히 가슴 매이게 하는 상황들도 만났는데, 그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동시에 우리 이웃들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이 어떻게 해서 법정에 서는지, 또 어떻게 해서 조정을 거쳐가는지를 말한다. 결국, 여기서 연결되는 것은 법도 아니고 약속도 아니고 '사람'이고 '인정', '정'이다.

3부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라는 타이틀로, 여러 나라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또 다른 속 모습들을 그려냈다. 진실은 불편한 법이다. 우리가 로망으로 생각하는 북유럽, 미국등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 우리가 결국 따라가고자 하는 모델 사회에 대한 생각들. 읽으면서 정말, 불편하긴 하더라. 내가 너무 무지했다고.

유토피아는 믿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다보면, 상상보다 훨씬 나빠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스스로 공동 구매하지 않으면 강제 배급받게 될 테니 말이다.

어쩌면 사회, 미래에 대해서 너무 방관적인 태도로 일관되게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겁이 많았나싶다.

팔짱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일이 있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Dare to be an opti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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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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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도 가방에 챙겨가서, 침대에서 뒹굴 거리면서도 보게 만든 채사장의 2번째 책이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지식들을 쏟아내기에 그리 대단하게들 여기는지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읽으면서 그 의문이 사라져갔다. 그가 지내온 모든 삶을 그냥 열거하기 보다, 그에게 가장 의문에 휩싸이게 된 시기들과 그 시기에서 몰입하며 연구하고 고민했던 주제들. 그리고 그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끝맺으면서 완벽한 결론을 내리지 않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게도 했다. 그가 가졌던 생각들, 그 생각을 하게 만든 이야기들, 그 중심의 인물과의 가상의 대화들. 멀게만 느껴지던 종교이야기와 철학들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삶과 죽음 사이의 '나'를 마지막으로 두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딱딱하고, 쉽게 접근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술술 읽혀져서 나도 놀래기도 했던 그의 문체가 많은 이들에게 통했나보다.

그는 이 11계단을, 불편함의 계단이라며 이 책의 서두에서부터 불편함을 겪어내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문학 - 기독교 - 불교 - 철학 - 과학 - 이상 - 현실 - 삶 - 죽음 - 나 - 초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식들,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문학 책만 읽어도 마음이 동하게 되고, 또 다른 세계들의 모습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책은 의미가 있으리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헛헛한 느낌을 피할 순 없을거라 생각한다.

책 읽기의 근본을 내세우는 '잉여의 책읽기'를 그저 마음껏 하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헌데, 어디 그럴수만 있으랴. 책을 읽고, 내가 알던 것과 다른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게되면, 다 덧없이 느껴지기도 할테지. 세계에 무모하게 잘못되었음을 외칠 수가 없다해도 책으로 세운 곧은 정신만은 이 세상 살아가는데 조금은 한 자락 희망으로, 위로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불편함조차도 모두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나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우리를 먹고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하며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 삶은 너무나도 아쉽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한계가 느껴져서, 참 보잘것없이 부끄럽게 여겨지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참 좁았구나.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면서 말이다.
내가 30중반에 들어서서, 이제서야 시작하는 불편한 독서라해도 다행이다 싶기도했다. 더 늦었다면? 평생 알지 못했다면?

이 책에서 보이는 종교 이야기역시, 그리스도의 구약성서를 시작으로 싯다르타의 불교 이야기까지. 내가 지금껏 가져온 종교적인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저 같은 이념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니체의 이야기와 체 게바라의 이야기. 내가 알던 지식이 또 덧대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가장, 내 기억속에 강하게 박히게 된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야기.

운 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예요.

그 이후의 이야기는 죽음, 그 이후의 나. 초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파니샤드> 를 주문하였고, 앞 부분을 읽으면서 <공산당 선언>을 주문하였다. 전혀 내가 생각도못한 주제들의 책을 처음으로 주문하였다. 생소하고 낯설고, 알고싶지도 않았던 무지에 가까운 내 의식이 이미 그 책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 또 깨트려질지 모르겠지만, 무참히 깨트려보라지 하는 오기가 섞인 생각까지 드는 건 아직도 무지한 내 의식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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