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과자
이시이 무쓰미 지음, 구라하시 레이 그림, 고향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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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렴. 너는 또 누구를 행복하게 해 주려나."

--"내가요?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거예요?"

'왕의 과자'라는 이름이 붙은 파이는 프랑스의 전통 과자라고 한다. 처음 주현절을 축하하며 먹던 파이를 이제는 1월의 어느 날이어도 한자리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먹는다고 한다. 가족이 좋아하는 파이로 그 해의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축하하는 의미를 덧붙이며 지금까지도 파이를 먹는다고 한다. 파이 안에는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걸 페브라고 부르고 이 페브가 들어간 조각을 먹는 이가 종이 왕관을 쓰고 하루 동안 왕 혹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1년 동안의 행복을 약속받는 것이고 함께 하는 이들은 그의 행복을 빌어 주며 동시에 서로의 행복을 함께 빌어주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의식이 이 파이를 사이에 두고 이뤄지는 것이다.

제빵사는 페브를 파이에 넣으며 이 조그만 여자아이 페브가 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지 기분 좋은 희망을 품는다. 밀리라는 이름이 붙은 페브역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냐며 희망을 품는다.

한 가족의 새해에서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이 파이는 오르고, 아빠와 엄마와 잠시 떨어져 있게 된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도 함께 자리하게 된다. 밀리는 내심 이 여자아이가 자신을 뽑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누가 밀리를 뽑게 될까요?


읽는 내내 서정적인 글과 구라하시 레이의 섬세하지만 부드러운 그림에 감정이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시린 추위보다 서로 배려하고 다정한 마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이 가장 따뜻한 공간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자신의 집에서도 설날에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이 '왕의 과자'를 먹는다는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작가의 말을 전하고 있다.

'"당첨!"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즐거워지고요. 누군가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도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작가의 시선에서 내어주는 이야기는 파이를 사 가는 여성의 모습, 순진하게 페브를 자신이 찾아내고 싶다며 티격태격하는 두 형제의 모습, 자신의 새 날의 행복을 기다리고 있었을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까지 다정하게 감싸고 있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들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서 다가오는 새해에는 서로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내는 마음이 더 많이 보태질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풍요로움 속에서 사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빈곤함 속에서 '희망'하고 '소원'하는 것들이 간절함을 품고 소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아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에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히 품어 본다. 다른 나라의 문화이지만 그래도 역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이런 이야기는 어떤 나라, 시대,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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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자 와니니 창비아동문고 280
이현 지음, 오윤화 그림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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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니니는 사냥보다 세상 구경에 마음이 끌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이렇게 큰 강이 있는 초원까지 나와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폭이 넓고 물이 깊은 강이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 강이 네 개나 흐르고 있어서 '네 개의 강이 있는 초원'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황톳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을 따라 여러 가지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었고, 지평선까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건기에도 강물이 마르지 않아 언제나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초원이었다. 풀을 뜯는 동물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푸른 사자 와니니> 10p

암사자 와니니의 어린 시절, 마디바의 무리에서 지내던 순간부터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지내며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오해를 받고 쫓겨나고 사냥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 암사자 와니니는 온갖 동물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뎌내야 했다. 수사자 아산테와 잠보를 만나고 그들과 합류하게 되고 역시 그녀처럼 상처 입었기에 무리에서 쫓겨난 말라이카를 만나 네 마리의 사자들은 함께 길을 나선다. 건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들은 이제 '와니니들'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존재로 함께 한다. 그리고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암사자 마디바를 향한 존경심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는 것은 와니니에게는 또 다른 성장의 증거로 남는다.

그렇게 사냥보다 세상 구경을 더 좋아했고 다른 사자들보다 유난히 귀가 잘 들렸던 와니니는 그만큼 세심하게 여느 동족보다 더 강한 암사자로 자라고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자의 시간이 다가왔다. 잠보와 말라이카의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와니니의 사자들이 와니니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와니니는 큰 소리로 포효했다.

크하하항! 크하하하항! 크하하하하항!

그것은 왕의 목소리였다. 위대한 왕의 탄생을 알리는 커다란 포효 소리가 온 초원을 뒤흔들었다.

<푸른 사자 와니니> 211p

이 책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자들의 언어였다. 그저 울음소리이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더 '포효'라는 단어로 그들의 감정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성과 그들의 의지는 서로 상반되는 언어일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 큰 인상을 남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끝에는 '그들다운' 모습으로 향하게 한다.

어리고 약한 암사자였던 와니니가 '와니니답게' 살아낼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해가는 길이 크게 와닿는 것이 곧 이 이야기가 의미 있는 이유일 거다. '와니니들'을 이끌 수 있게 하는 것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 그 '여럿'안에 각자의 고유한 존재도 절대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을 통해 혼자를 넘어서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안에서 자신과 각자의 고유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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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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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숨을 느긋하게 한껏 들이마시며 아름답고 우아한 다리를 쭉 뻗었다. "옳고 그름." 그녀가 말했다. "난 옳고 그름을 믿어요." 그런 다음 만족과 여유가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던 얘기를 꺼냈다. "흥미진진할 거예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리고 인생의 일부가 될 거예요, 크로 영감님." 그것은 그녀로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노인은 이빨을 빨았으며, 워윅 디핑의 소설책에는 분홍색 불빛이 아른거렸다.

- 그레이엄 그린 <브라이턴 록> 90P


<사랑의 종말>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장편 소설이다. 화려한 휴양지인 브라이턴의 한 골목에서 신문 기자 헤일이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죽음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자연사'로 인정되고 그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한다.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당연한데 말이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여인 아이다는 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의 죽음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파헤치기로 한다. '옳고 그르다고' 믿는 행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이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식당의 종업원 로즈를 찾아가 진실을 말할 것을 설득하지만 너무나 어린 그녀는 이미 남자를 죽인 소년 핑키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겠다고 말한다. 그 죽음 하나를 두고 핑키에게 다가오는 현실은 냉혹하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과 죽음으로 인도한 죄를 저지른 자신을 향한 압박감이 핑키를 옥죄어 온다. 그가 건장한 젊은이나 중년의 남성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핑키에게 어리다고 이야기하고, 그의 미래를 위해 '남들처럼' 살아가자고 회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멀리 앞을 내다보기 힘든 핑키에게는 그 모든 모습은 그들의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용감하다고, 이 죽음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지 않게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핑키가 따르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소년은 자기는 그 동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꾸며 댔다. "난 종교에 관심이 없어. 지옥...... 그건 그냥 있는 거야. 지옥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어. 죽기 전에는." (186p)

핑키와 로즈는 끊임없이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 물러서지 못할 것임을 안다. 로즈는 물론 그를 사랑한 것뿐이지만 핑키가 부정하는 진실을 정확히 바라보고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핑키가 가장 두려워한 존재는 로즈였을 거다.

7시 30분 미사에서 돌아오는 사람들과 8시 30분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을 스파이처럼 훔쳐보았다. 그녀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을 멸시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이 있고, 자기에게는 핑키와 지옥의 벌이 있는 것이었다. (400p)

"나는 적어도 네가 모르는 것 하나를 알고 있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지. 그건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여자 말이 맞았다. 그 두 단어는 로즈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했다. 그 두 단어의 맛은 더 강렬한 음식인 '선과 악'에 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여자는 자기가 모르는 선과 악에 대해서는 로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로즈는 핑키가 악하다는 것을 산술적인 수학처럼 분명히 알고 있었다-따라서 이 경우에 핑키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411p)

처음에 유난히 책 이름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록인지 룩인지, 브라이턴은 또 무엇인지 싶은 생각으로 여러 번 앞표지의 제목을 다시 읽었다. 본문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브라이턴 록이 막대 사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먹어도 그 사탕 안의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이인다. 그리고 그런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핑키의 모습을 내세워 말하고 있는 것을 마지막 장까지 덮고 나서야 인정하였다. 한 번쯤은 그도 망설였다고 믿는다. 그가 순식간에 공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아픔을 느낄 때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당당하고 강해 보이려 애쓰던 핑키가 그때만큼은 두려워서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기를 품은 그는 그 독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독기가 자신을 대신해서 말해준다고 생각하면서.

사실 이 소설의 흐름만큼 조금씩 보이는 죄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가 흐르면서도 부지불식간에 떠오른다. 그들은 구원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죄를 꼬인 실을 풀듯이 조금씩 풀어낼 수는 없을까 생각하지만 핑키에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이 결국 회한에 빠져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길 바라는 나는 전형적인 행복 추구형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핑키가 바다에 빠지고 나서야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의 한숨을 쉬며 책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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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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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펜에서는 다시 신랄한 독설이 새어 나온다. 이 신랄함은 얼마나 아둔하고 생기 없는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 그러나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문득 반들거리는 타일을 입힌 탁자 표면 너머의 그에게서 뭔가를 느꼈다. 그것은 사랑 같은 심각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아마도 불행을 함께 나누는 동지애 정도일 듯싶은 감정이었다. 내가 헨리에게 말했다. "자넨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건가?"

- 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종말>

제2차 세계대전 무렵의 런던을 배경으로 소설가 모리스 벤드릭스와 세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헨리 마일스 세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철저한 모리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로 모리스와 세라의 사랑, 헨리의 사랑, 이별, 죽음, 회상을 마주하는 감정을 '모리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모리스는 헨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그의 아내 세라를 만난다. 세라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리스 역시 그 이유로 시작한 관계임을 알면서도 둘은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을 경험한다. 담담하게 그들의 관계가 탄로 날 위기를 넘기거나 사랑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이는 세라에게 모리스는 불안을 느끼고 자신이 사랑받는지 계속해서 의심한다. 그가 알게 된 그녀의 감정은 이미 그녀가 죽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죽은 이후가 되어서야 그가 발견한 그녀의 행적에서 그는 그녀가 끊임없이 '신'을 향해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려 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 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종말> 47~48p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더 가까울 것이다"라고. 사랑이 끝나고 절망, 후회, 슬픔이 아닌 증오와 종말을 이야기한다. 왜 그는 종말을 말하는 것일까. 세라가 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교회로 갔고, 그녀가 죽고 나서 신부님이 찾아와 세라는 세례를 받길 원했고, 화장이 아닌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끊임없이 남은 이들을 설득하려 했을까. 그녀의 사랑을 뒤늦게 확신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자는 상실 앞에 목놓아 울지 않는다. 이제는 중년이기에 그 상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세라의 남편이었던 헨리가 무너지지 않게 그 곁을 지킨다. 이상한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더군다나 모리스가 흔쾌히 한다는 느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상실을 함께 경험해 낸다. 그러니 이것은 애도의 기록이고 상실을 경험하는 모든 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증오이자 사랑의 감정인 이 기록(글)이 다시 여러 질문을 명쾌하게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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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열차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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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우리 삶이 또다시 무너질까 두려워서 가장 겁이 나는 부분들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사는 나라가 달라졌어도 술에 대한 사랑은 달라지지 않은 아빠, 화를 내고 우울해하는 엄마, 계속되는 아빠와 엄마의 싸움. 나는 모든 게 잘 되길 바랐다. 그래서 메이지를 품에 안고 귀에 대고 속삭이며 달랬다. 어떤 새도 나의 노래하는 새, 너만큼 달콤하게 노래를 부르지는 못해. 메이지가 울음을 그쳤을 때 나는 그저 안도했다. 메이지는 광산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카나리아와 같았는데,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고아 열차> 45p

나의 글은 늘 지극히 사적인 글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고, 모든 이야기들은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결국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게 하며 공공연하게 우리의 감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의 감정으로 그들을 들이기 전에 늘 나는 긴장감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끝내 그 노력이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아픔과 슬픔 앞에 거리를 두고 싶고 초연해지고 싶은 마음인 거다. 결국은 나의 몸과 온 신경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될 것을 안다.

표지 속 아이의 뒷모습이 고아 열차에 몸이 실린 채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대변할 수 있을까. 책을 덮고도 이 생각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에서 뉴욕으로 불확실하지만 어쩌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건너온 비비언 데일리의 삶과 열일곱 살 소녀 몰리 에이어의 아무도 믿지 않기로 하였던 삶이 교차되며 그려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854년부터 1929년까지 이른바 '고아 열차'라고 불리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태운 기차가 동부 도시에서 중서부의 농촌까지 운행되었다. 아이들은 어딘지 모를 역에 열차가 멈춰 서면 나란히 서서 어떤 어른들이 자신을 데려갈지 모를 운명에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온화하고 다정한 가족의 품으로 들어갈지, 그저 노동이 필요한 가정에 들어가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살아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큰 저택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노년의 비비언은 그 고아 열차에 몸을 실었던 한 소녀였고,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남겨주셨던 작은 목걸이에 의지하기며 차디찬 복도 위 매트리스에서 겨우 잠을 청하기도 하고, 차라리 추운 거리를 맨발로 뛰쳐나올 정도로 잔인한 삶을 마주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그녀의 삶을 지켜주려 한 사람들이 있었고, 칼날과도 같은 환희(71p)를 느꼈던 찰나의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으로 품어왔기에 지쳐 쓰러지거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 거다.

시간은 줄어들기도 하고 넓게 퍼지기도 해. 무게가 일정하지 않아. 어떤 순간은 머릿속에 머물고 다른 순간들은 사라져버리지. 태어나서 스물세 살 때까지의 세월이 나라는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뒤로 거의 칠십 년을 살고 있다니 참 말도 안 되지. 그 칠십 년은 네가 한 질문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시간인데 말이다.

-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고아 열차> 256p

외부로부터 자신을 굳게 걸어 잠그려던 소녀와 오래된 짐을 정리하던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테이프를 다 감을 정도로 오래 지속되어 올수록 몰리는 알지 못할 안도감을 느낀다.

더치가 피아노로 내게 말을 걸고 있고, 나는 꿈이라도 꾸는 듯 그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데, 나는 과거와 단절된 채 외로움이 사무치는 여행을 하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낯선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심정을 아는, 나와 똑같은 아웃사이더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고아 열차> 331p

비비언과 몰리의 주위에는 어른이 있었고, 그들의 존재 자체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다정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계속 들여다보려고, 그리고 그것에서 시작된 노력들은 의지로 변환되어 갔다. 이방인의 삶이었고, 아웃사이더라고 지칭하던 삶이었던 그들의 삶이 만나 서로를 다정하게 연결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정함이 따뜻하고 단단해서 고아 열차라는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것과 그 그늘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했던 수많은 삶을 만나는 것이 가슴 아플지라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의지'라는 단단함을 쥐어 잡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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