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몰자의 날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6 미치 랩 시리즈 5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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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 미치 랩과 CIA국장 아이린 케네디는 각각 미국에 대한 심상치 않은 테러 조짐을 감지합니다. 비밀리에 특수부대와 함께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날아간 랩은 알카에다 핵심들의 회의 장소에서 워싱턴을 통째로 날려 보낼 끔찍한 핵폭탄 공격 계획을 발견합니다. 랩의 정보는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놓지만 문제는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며 랩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입니다. 재선을 앞두고 9.11 이후 제정됐던 강력한 테러대책법을 완화하려는 대통령, 혼란을 야기할 안이한 대책만 내놓는 장관들, 백악관의 정치적 타격만 걱정하는 수석보좌관 등을 지켜보며 랩의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던 CIA 특수부대 암살자 미치 랩은 야비한 정치꾼들로 인해 그 신분이 노출된 이후 이른바 대테러 부문 수석보좌관이라는 사무직을 맡게 됐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일을 해치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선 현장요원이나 다름없는 맹활약을 펼치며 미국에 대한 핵폭탄 테러를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랩은 잔혹한 현실에 대해 1도 모르면서 그저 이해타산적인 정치술수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워싱턴 관료들의 작태에 격분합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그는 예전과는 급이 다른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는 장관이나 보좌관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 언제나 끝까지 자신을 믿어줬던 대통령마저 재선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자 랩은 넘어선 안 될 선마저 넘어서며 거친 공격을 퍼붓습니다. 핵폭탄이라는 미증유의 테러가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결국 랩은 모든 절차와 규약을 무시한 채 고문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마다하지 않기로 작심합니다.

 

나쁜 이슬람을 응징하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라는 프레임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의 안이한 행태를 지켜보고 있으면 랩의 참을 수 없는 격분과 극단적인 행태에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현장요원들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백악관은 재선 전략에만 몰두하거나 외국정상들까지 참석한 화려한 연회를 즐깁니다. 분초를 다투는 싸움을 두고 절차와 허가를 운운하며 권위만 앞세우거나 오히려 독이 되는 무모한 대안만 강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랩은 기어이 폭발하고 맙니다. 덕분에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암살자로서의 랩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산되는데, 그 매력은 핵폭탄 테러라는 엄청난 사태와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그야말로 절정에 이릅니다.

 

정치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랩이지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문과 살인을 자행하는 모습에선 다소 극단적인 신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핵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미국에 잠입한 테러리스트를 두 번째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신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 애쓰며 나름의 균형 잡힌 서사를 전개시킵니다. 물론 다소 맹목적이고 과격하며 적개심으로 가득 찬 위험천만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 랩은 단독 주인공으로서의 비중이 좀 부족한 편입니다. 초중반까지는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작전을 펼치느라 정작 워싱턴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에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또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FBI 특수수사관 스킵 맥마흔, 에너지국 핵 비상지원팀의 폴 라이머, CIA 최고의 심문관 바비 아크람 등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원톱으로서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들과의 협업을 이끌어가는 랩을 지켜보는 일 역시 색다른 흥미를 전해줍니다.

다음 작품에도 등장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야심찬 30대 법무부 부차관보 페기 스텔리가 눈길을 끌었는데, 핵폭탄 문제를 놓고 랩과 크게 충돌하면서도 그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랩이 유부남인 것 따윈 상관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다음 작품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기대감이 만발하는 캐릭터입니다. (상대적으로 랩의 발목만 잡던 아내 애너가 거의 등장하지 않은 점은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전몰자의 날미치 랩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한국에는 모두 일곱 편이 출간됐으니 이제 읽을 작품이 두 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작품들이 출간되지 않은 게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언제라도 좋으니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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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이스케이프 Escape 1
척 호건 지음, 최필원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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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진하고 묵직한 느와르의 진수를 만끽했습니다. ‘Prince of Thieves’, 도둑들의 왕자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악당입니다. “보스턴의 이웃이지만 행복한 가족사진에서 잘려나간 사생아처럼 이 도시의 모든 지도에서 자취를 감춰버린찰스타운의 토박이 4인조 은행강도, 그중에서도 10대 시절 유망한 하키 선수였지만 망가지고 망가진 끝에 위험천만한 무장강도로 전락한 더글러스 매크레이(이하 더그)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으며, 더그 일당의 습격을 받아 자신이 지점장으로 일하던 은행이 초토화된 것은 물론 납치까지 당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건 이후 더그와 사랑에 빠진 클레어 키시, 그리고 더그 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클레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FBI요원 애덤 프롤리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찰스타운 토박이 친구들인 일당과 함께 은행강도를 일삼던 더그는 피해자인 지점장 클레어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낍니다. 더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클레어는 사건 후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중 더그의 따뜻한 위로와 안식에 푹 빠집니다. 한편, 찰스타운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은행강도에 주목하던 FBI요원 프롤리는 더그 일당을 의심하지만 확실한 증거나 단서가 없어 그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입니다.

클레어를 만난 뒤로 더 이상 찰스타운에서의 피폐한 삶을 견딜 수 없었던 더그는 FBI의 움직임을 감지하자 마지막 한탕을 저지른 뒤 클레어와 함께 찰스타운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더그의 계획은 점점 엉망이 돼갑니다. 클레어와의 관계를 눈치 챈 일당들과의 갈등, 언제 클레어에게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끈질기게 뒤를 쫓는 FBI요원 프롤리와의 대결 등 시한폭탄 같은 암초들이 하나둘씩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는 좀 장황하지만 사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공격하고 납치한 피해자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FBI요원과 대결하는 은행강도 더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 동원된 것은 작가가 방점을 찍은 지점이 은행강도와 FBI요원의 대결, 즉 액션 스릴러나 느와르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 그리고 이야기의 주 무대인 찰스타운을 지배하는 우울하고 불온한 분위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타운 토박이인 더그와 그의 일당은 하나같이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것은 물론 아버지들의 뒤를 이어 범죄의 세계에 뛰어든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빈곤했지만 각별한 정서를 간직했던 찰스타운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품고 있습니다. 성격은 제각각이고 가끔 큰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결속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클레어에게 푹 빠진 더그가 흔들리자 무적의 은행강도의 위용도, 탄탄했던 우정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더그 일당의 뿌리인 찰스타운은 옛 모습을 잃은 채 말끔하고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 중입니다. 특히 1996년이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 선 찰스타운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면서 더그 일당에게 상실감과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더그는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악몽 같은 순간을 제공해온 고향 찰스타운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일당 중 일부는 찰스타운의 옛 모습을 지키겠다며 무모한 행각을 일삼습니다. 말하자면 더그와 그 일당의 삶은 찰스타운 그 자체의 흥망성쇠와 꼭 닮은 모습이란 뜻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고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느와르 영화 한밤의 암살자’(장 피에르 멜빌)와 많이 닮아 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못 본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읽는 내내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비극이 예견된 남녀 주인공의 사랑, 적절한 타이밍에 터지는 악당 주인공의 범죄액션, 평생을 쌓아온 탄탄했던 우정의 파열, 모든 것을 걸고 범죄자를 쫓는 수사관 등 홍콩 느와르의 치명적인 매력들이 작품 곳곳에 닮은꼴처럼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타운을 포함) 모두 네 편의 척 호건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아쉬운 건 타운만이 유일한 그의 단독 집필작이고 나머지 세 편은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와 공동집필한 뱀파이어 3부작이란 점입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척 호건은 화제의 데뷔작 스탠드오프’(1995)타운’(2004)을 비롯 2010년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낸 걸로 나오는데, ‘타운외의 작품들이 한국에 더 이상 소개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뒤늦게라도 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데뷔작 스탠드오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의 원제를 살펴보면 타운같은 느와르보다는 뱀파이어 장르로 의심(?)돼서 한국에 소개되더라도 읽을 가능성이 별로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척 호건의 출간목록

-The Standoff (1995)

-The Blood Artists (1998)

-Prince of Thieves (‘타운’, 2004)

-The Killing Moon (2007)

-The Strain (뱀파이어 3부작, 2009)

-The Fall (뱀파이어 3부작, 2010)

-The Devils In Exile (2010)

-The Night Eternal (뱀파이어 3부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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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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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론, 아디, 그레이스는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10대 딸과의 갈등, 싱글맘이 된 후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 출산 직후 찾아온 힘겨운 산후우울증 등 내밀한 고민들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직장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필 새 CEO 후보로 거론되던 에임스 개릿이 사내 여성들에 대한 부적절한 언행과 성희롱 혐의로 슬론 일행에게 소송을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추락사 사건은 회사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론과 인터넷에선 젠더 갈등에 관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경찰은 에임스를 향한 슬론 일행의 소송이 추락사 사건과 연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미투 시대의 페미니즘 스릴러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압축해놓은 한 매체의 추천사인데,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즉각적인 갈등과 격론을 유발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런 추천사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을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위스퍼 네트워크(Whisper Network)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입니다. 슬론 일행은 댈러스 일대의 나쁜 놈들의 명단인 배드맨 리스트를 입수한 뒤 거기에 새 CEO 후보인 에임스를 추가한 것은 물론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피해자를 낳은 그가 새 CEO에 오른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슬론 일행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추락사가 배드맨 리스트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 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p21)

 

사람들은 은연중에 미투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고 약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기업 법무팀의 변호사들이 피해자로 등장한 점은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설정이었습니다. , 미투 사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직장 내 남녀 차별이 직업이나 직종은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부당한 현실이 제자리를 잡을 날이 오긴 올까요?

 

이 작품이 미스터리/스릴러로 분류되는 이유는 추락사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중반까지 추락사한 인물이 누구인지 감춥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밝혀진 뒤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또 슬론 일행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린 일과 그를 상대로 건 소송 때문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미스터리의 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누군지는 너무 빤히 보여서 그리 궁금증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타살 여부와 슬론 일행의 위기 탈출 과정에 쏠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그로부터 3주 전의 과거가 교차로 전개되면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된미스터리/스릴러로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맥 빠지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혼, 출산, 양육, 일과 가정, 성희롱 등 슬론 일행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이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런 탓에 팽팽한 미스터리/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슬론 일행이 겪는 힘들고 고된 삶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서 지루하고 느슨하게 읽힌 점이 아쉬웠는데, 사실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에 새삼 새로울 것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캐릭터나 상황 묘사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19년입니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작을 2018년이라고 볼 때 좀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됐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대목들이 단점이긴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좀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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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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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비롯 모두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스티븐 킹의 독특하고 오싹한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인데, 특히 그의 중단편 작품집은 장편 못잖은 쫄깃쫄깃하고 알찬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힌 경우가 많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 ‘자정 4분 뒤’, ‘별도 없는 한밤에가 대표적인데 그중에서도 별도 없는 한밤에는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독자조차 금세 그의 호러월드에 빠져들게 만드는 만점짜리 작품집이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을 읽을 때면 매번 비슷한 궁금증 -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 이 생기곤 합니다. 시신과 함께 매장된 아이폰이 몇 달이 지나도록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은 물론 소통마저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정(해리건 씨의 전화기), 60년이 넘도록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파먹는 존재(피가 흐르는 곳에), 오지의 통나무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감과 폭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시궁쥐와의 악마적 거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퍼올리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는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아웃사이더 1~2’를 읽은 독자에겐 또 다른 흥분을 선사하는데, 우선 주인공이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인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했던 중년여성 홀리 기브니는 이후 아웃사이더 1~2’를 통해 독립했다가, ‘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완전 1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웃사이더 1~2’를 읽지 못해서 이 작품 속의 홀리 기브니의 공포심을 100%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녀가 맹활약했던 빌 호지스 3부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를 흥분시킨 요소는 스티븐 킹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범인의 정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엔드 오브 왓치가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을 다뤘고, ‘아웃사이더 1~2’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앞세웠다면,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도 늙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끔찍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세 캐릭터는 결국 같은 범주의 악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초현실적이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긴 하지만, ‘샤이닝을 비롯하여 스티븐 킹의 호러물에 한번이라도 매료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얼마든지 흥겹게 만끽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그 오싹함이 훨씬 더 배가될 것 같습니다. ,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을 통해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낸 주인공 홀리 기브니가 등장한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머잖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후속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앞서 (그녀가 맹활약했던) ‘아웃사이더 1~2’를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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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미세스 - 정유정 작가 강력 추천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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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윌의 외도, 아들 오토의 퇴학, 응급의학과 의사였던 자신의 의료사고 등 한꺼번에 터진 인생 최악의 사건들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세이디는 남편 윌의 제안에 따라 자살한 시누이 앨리스가 남긴 메인 주의 외딴 섬의 낡은 저택으로 이사합니다. 섬 특유의 배타적 분위기에 낡은 저택이 내뿜는 불온한 기운까지 더해져 세이디의 절망감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여자가 참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는데, 문제는 현지 경찰이 세이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죽은 옛 연인의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남편, 전학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대놓고 악의를 발산하는 시누이의 딸 등 사방에서 날을 세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이디는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처지에 이르자 스스로 범인을 찾을 결심을 합니다.

 

이야기는 세 여자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외딴 섬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절망을 겪던 세이디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뒤 직접 범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어 세이디의 남편 윌에게 집착하며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밀의 이야기가 간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6살 소녀 마우스가 새 엄마에게 학대당하는 끔찍한 상황이 막간극처럼 소개됩니다.

 

음습한 늦가을의 외딴 섬, 남편의 외도, 스토커에 가까운 불륜녀, 잔혹하게 난자당한 피살자, 살의를 내뿜는 시누이의 딸 등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의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작품이지만 디 아더 미세스는 극단적인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끈적끈적한 심리스릴러입니다. 가족이나 일터의 동료는 물론 외딴 섬의 불온한 기운과 시누이가 자살한 낡은 저택의 공포까지 감당해야 하는 세이디의 심리가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또 언제라도 세이디를 공격할 것만 같은 불륜녀 카밀의 들끓는 욕망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긴장감을 맛보게 만듭니다.

이웃의 여자가 칼로 난자당한 채 살해된 사건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이자 불안정한 상황의 세이디를 막다른 벽에 몰아넣는 카운터펀치인데, 세이디의 주변 인물 중 누가 범인으로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게 전개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두 가지 정도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대형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지만) 우선 이 작품은 막판에 두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 첫 반전이 저의 취향과 맞지 않았는데, 실은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중반쯤부터 슬슬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꽤 많은 힌트를 줘서 그 반전이 폭로됐을 때 딱히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했던 건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독자가 눈치 채길 바라고 일부러 그 많은 힌트들을 준 건지, 아니면 독자들이 그 힌트들을 몰라보곤 막판 반전에 놀라기를 바란 건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앞서 제공된 힌트들을 전복시키는 신선한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역시 그렇군...”이란 아쉬움만 남고 말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두 번째 반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사한 설정으로 실망감만 남긴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이 두 번째 반전디 아더 미세스만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또 동어반복처럼 그려진 세이디의 공포와 절망에 대한 묘사는 심리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병행되긴 했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심리스릴러는 아무래도 좀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메리 쿠비카는 디 아더 미세스로 처음 만난 작가인데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필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국에 먼저 소개된 그녀의 작품 굿 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심리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는 장르지만 페이지터너의 힘을 갖춘 작가라면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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