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운 ㅣ 이스케이프 Escape 1
척 호건 지음, 최필원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아주 진하고 묵직한 느와르의 진수를 만끽했습니다. ‘Prince of Thieves’, 즉 ‘도둑들의 왕자’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악당입니다. “보스턴의 이웃이지만 행복한 가족사진에서 잘려나간 사생아처럼 이 도시의 모든 지도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찰스타운의 토박이 4인조 은행강도, 그중에서도 10대 시절 유망한 하키 선수였지만 망가지고 망가진 끝에 위험천만한 무장강도로 전락한 더글러스 매크레이(이하 더그)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으며, 더그 일당의 습격을 받아 자신이 지점장으로 일하던 은행이 초토화된 것은 물론 납치까지 당해 큰 충격에 빠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건 이후 더그와 사랑에 빠진 클레어 키시, 그리고 더그 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클레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FBI요원 애덤 프롤리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찰스타운 토박이 친구들인 일당과 함께 은행강도를 일삼던 더그는 피해자인 지점장 클레어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낍니다. 더그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클레어는 사건 후유증 때문에 괴로워하던 중 더그의 따뜻한 위로와 안식에 푹 빠집니다. 한편, 찰스타운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은행강도에 주목하던 FBI요원 프롤리는 더그 일당을 의심하지만 확실한 증거나 단서가 없어 그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벌입니다.
클레어를 만난 뒤로 더 이상 찰스타운에서의 피폐한 삶을 견딜 수 없었던 더그는 FBI의 움직임을 감지하자 마지막 한탕을 저지른 뒤 클레어와 함께 찰스타운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더그의 계획은 점점 엉망이 돼갑니다. 클레어와의 관계를 눈치 챈 일당들과의 갈등, 언제 클레어에게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끈질기게 뒤를 쫓는 FBI요원 프롤리와의 대결 등 시한폭탄 같은 암초들이 하나둘씩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는 좀 장황하지만 사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공격하고 납치한 피해자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FBI요원과 대결하는 은행강도 더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 동원된 것은 작가가 방점을 찍은 지점이 은행강도와 FBI요원의 대결, 즉 액션 스릴러나 느와르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 그리고 이야기의 주 무대인 찰스타운을 지배하는 우울하고 불온한 분위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타운 토박이인 더그와 그의 일당은 하나같이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것은 물론 아버지들의 뒤를 이어 범죄의 세계에 뛰어든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 빈곤했지만 각별한 정서를 간직했던 찰스타운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품고 있습니다. 성격은 제각각이고 가끔 큰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결속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클레어에게 푹 빠진 더그가 흔들리자 ‘무적의 은행강도’의 위용도, 탄탄했던 우정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더그 일당의 뿌리인 찰스타운은 옛 모습을 잃은 채 말끔하고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 중입니다. 특히 1996년이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 선 찰스타운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면서 더그 일당에게 상실감과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더그는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악몽 같은 순간을 제공해온 고향 찰스타운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일당 중 일부는 찰스타운의 옛 모습을 지키겠다며 무모한 행각을 일삼습니다. 말하자면 더그와 그 일당의 삶은 찰스타운 그 자체의 흥망성쇠와 꼭 닮은 모습이란 뜻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고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느와르 영화 ‘한밤의 암살자’(장 피에르 멜빌)와 많이 닮아 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못 본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읽는 내내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비극이 예견된 남녀 주인공의 사랑, 적절한 타이밍에 터지는 악당 주인공의 범죄액션, 평생을 쌓아온 탄탄했던 우정의 파열, 모든 것을 걸고 범죄자를 쫓는 수사관 등 홍콩 느와르의 치명적인 매력들이 작품 곳곳에 닮은꼴처럼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타운’을 포함) 모두 네 편의 척 호건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아쉬운 건 ‘타운’만이 유일한 그의 단독 집필작이고 나머지 세 편은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와 공동집필한 ‘뱀파이어 3부작’이란 점입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척 호건은 화제의 데뷔작 ‘스탠드오프’(1995)와 ‘타운’(2004)을 비롯 2010년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낸 걸로 나오는데, ‘타운’ 외의 작품들이 한국에 더 이상 소개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뒤늦게라도 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다면 반가운 마음으로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데뷔작 ‘스탠드오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의 원제를 살펴보면 ‘타운’ 같은 느와르보다는 뱀파이어 장르로 의심(?)돼서 한국에 소개되더라도 읽을 가능성이 별로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 척 호건의 출간목록
-The Standoff (1995)
-The Blood Artists (1998)
-Prince of Thieves (‘타운’, 2004)
-The Killing Moon (2007)
-The Strain (뱀파이어 3부작, 2009)
-The Fall (뱀파이어 3부작, 2010)
-The Devils In Exile (2010)
-The Night Eternal (뱀파이어 3부작,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