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을 비롯한 도착 시리즈는 서술트릭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술트릭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계속 손을 댈까, 말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8:2 정도로 재미보다는 실망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번역하신 권일영 님(뚜벅이 님)도 후기를 통해 서술트릭은 (중략) 대성공과 대실패,

두 가지 결과만 얻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재미있게 읽힌 작품은 결과를 알고도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이 무슨 말장난?’이라는 불쾌감만 남게 됩니다.

서술트릭의 국대급인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해 못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제겐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호기심에, 또 실망할 때 실망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자는 마음에

시리즈의 첫 편인 도착의 론도를 집어 들게 됐습니다.

 

● ● ●

 

갖은 고생 끝에 완성한 작품을 월간추리 신인상에 응모하려던 야마모토 야스오는

친구인 기도 아키라의 어이없는 실수로 응모작을 도둑맞습니다.

억울하지만 다시 집필을 시작해 마감일 직전 원고를 완성하지만,

이번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그해 신인상은 시라토리 쇼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는데,

문제는 당선작이 자신이 썼던 것과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저기 억울함을 호소해보지만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야마모토는 자신의 작품을 도작(盜作)’한 시라토리 쇼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획득한 고급아파트와 여자까지 빼앗을 작정입니다.

뜻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갈 무렵 그는 두 번째 습격을 당하게 되지만,

자신의 작품을 도작한 것은 물론 두 번씩이나 자신을 습격했던 범인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건의 살인사건 역시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밝혀진 진실은 앞서 서술됐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뒤엎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이 도착(倒錯)의 론도였음이 드러납니다.

 

● ● ●

 

도착(倒錯)

1. 뒤바뀌어 거꾸로 됨.

2.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론도(rondo)

1. 원무곡을 가리키며, 원무 또는 그 노래를 이르는 말.

2. 주제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되풀이되면서 나타나는 음악의 한 형식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도착론도두 단어를 조합하여 해석하면,

뒤바뀌고 거꾸로 된, 그것도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들이 원을 그리듯 되풀이 됨입니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또 이만큼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대변하는 제목도 드뭅니다.

인물도, 사건도, 이야기도 모두 도착과 론도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어

독자로서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올바른 상태, 즉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목차만 봐도 뭔가 뒤바뀌거나 잘못된, 그리고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프롤로그   도작의 발견

1          도작의 진행

2          도착의 진행

3          도착의 도작

에필로그   도작과 도착

(참고로, 도작(盜作)과 도착(倒錯)은 도사쿠(とうさく)라는 같은 발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번역자의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작가와 한바탕 숨바꼭질을 하며 즐긴다면 번역자는 이를 작가가 작품의 바탕에 깔아놓은 유희정신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착 시리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리하라 이치가 열심히 뒤바꿔놓고, 거꾸로 놓고, 되풀이 시켜놓은 것을

숨바꼭질 하듯 열심히, , 즐기면서 찾아내거나 발견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문장은 참 쉽습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도 불필요하게 꼬아놓지 않아서

몇 시간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심플하면서도 계속 변곡점을 만들어내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도착의 론도의 진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감탄할 수도,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론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의 횟수와 속도가 빨라서

감탄사가 나오기도 전에 그동안 벌어졌던 도착을 하나씩 따져 물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제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얻어맞긴 맞았는데, 어디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파악하느라

얻어맞은 충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

 

우려했던(?) 만큼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이 실망감을 주진 않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만큼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착의 의미도 대략 이해가 됐고, 어느 정도 패턴을 읽었다 생각하니,

후속작인 도착의 사각이나 도착의 귀결에서는 왠지 작가의 함정과 트릭을

읽는 중에 미리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99%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이어서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였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읽을 생각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도 아직 읽어보지 못 했는데, ‘도착의 론도를 보고 나니 안 읽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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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가족에게 상처받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세 사람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틀에 박힌 여자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3살에 겪은 끔찍한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경찰이 되어 홀로 살아가는 아사야마 후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학교는 물론 가족과도 절연한 채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며 고독의 노랫소리에 파묻혀 사는 요시카와 준페이,

그리고 불행한 가족사와 억압되고 왜곡된 성장기를 거친 끝에

완벽한 사랑으로 이뤄진 완벽한 가족을 꿈꾸며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돼버린 마쓰다 다카시.

 

절도 수사팀의 후키는 편의점 연쇄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준페이를 만납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조차 없는 혼자라는 공통점,

그리고 고독한 삶을 원하지만, 고독한 삶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를 흐르게 만듭니다.

한편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고독한 삶을 부여받은 다카시는

완벽한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그에 걸맞는 여자를 찾아 나섭니다.

납치된 여자들에게 자신의 가족사가 담긴 비디오를 보여주며 고문과 세뇌를 가하지만

모두 그의 완벽한 가족의 마지막 퍼즐이 되기를 거부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점찍은 최상의 가족 후보는 바로 여경찰 아사야마 후키였습니다.

 

● ● ●

 

그리 편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가족은 인간의 안식처이지만, 모든 욕망과 억압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하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굴절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폭압적이거나, 기성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는 불행의 순도가 너무 높아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피해자의 신체를 고깃덩어리처럼 훼손하는 다카시의 범행은

잔혹한 사이코패스 물을 좋아하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해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것은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였습니다.

그들의 고독이 드리운 그늘은 너무 짙었고, 때론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보기 불편했습니다.

더구나 그 묘사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방대하다 보니,

어떤 지점에 이르러서는 현실감은 떨어지고 작위적인 느낌만 남게 됩니다.

물론 이들의 고독이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트라우마라는 점,

, 고독한 삶으로 인해 서로 악연 또는 인연을 맺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것이 과한 나머지 이 사람들, 그저 철없는 어른들일 뿐이네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듭니다.

 

후키의 집요한 탐문과 준페이의 활약에 힘입은 사건의 해결 과정이라든가,

후반부에 밝혀지는 몇 가지 진실들 - 후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유년의 악몽이라든가

다카시가 희생자들에게 보여준 가족 비디오 속의 비밀,

그리고 다카시의 어머니가 그의 뇌리에 박아 넣은 괴물 같은 유산 등은

이 작품이 추리서스펜스 대상 수상작임을 보여주는 반증이자 미덕들입니다.

 

독자에게 강요하듯 동어반복적으로 묘사된 고독에 대한 지나친 강조만 아니었다면

수작으로 기억될 작품이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텐도 아라타의 작품으로는 애도하는 사람이후 두 번째 읽은 작품이었는데,

가족사냥이라든가 영원의 아이같은 그의 대표작이

초기작인 고독의 노랫소리의 아쉬움을 덜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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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7일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본편인 사신 치바6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반면,

사신의 7은 한 유명작가의 조사를 맡은 사신 치바의 7일의 여정을 담은 장편입니다.

신간에도 치바의 캐릭터와 그의 미션에 대해 친절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본편을 읽지 않고도 치바의 모든 것을 무난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다양한 매력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본편을 꼭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항상 비를 몰고 다니고,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대화로 상대를 당황케 만들며,

음악에 빠진 채 엉뚱한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치바의 유쾌한 캐릭터는 여전합니다.

또한 자신이 맡은 대상을 7일 동안 조사한 후 생사를 결정하는 사신으로서의 역할에 있어

치바는 거의 대부분 ’, 즉 죽음 쪽으로 결정하는 비정함을 보여줍니다.

이번에 치바가 조사를 맡은 인물은 야마노베 료라는 유명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아내 미키는 1년 전 딸 나쓰미를 혼조 다카시라는 괴한에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죄 선고를 받고 자유인이 된 혼조에게 사적인 복수를 준비 중입니다.

처음엔 아니겠지, 하다가 초반부에 치바의 조사대상이 야마노베라고 밝혀진 순간부터,

왜 하필...’이라는 안타까움과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나?’하는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습니다.

평소의 치바라면 아무리 딸을 잃은 슬픔을 겪은 야마노베라 하더라도

전혀 동요받지 않고 쿨하게 ’, 즉 죽음을 선고할 테니까요.

 

혼조 다카시는 쉽게 말하자면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사이코패스입니다.

10살 된 나쓰미를 살해하고, 완벽한 사전준비를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음으로써

야마노베 부부의 절망을 극한까지 몰아붙입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어 냅니다.

야마노베 부부는 복수를 위해 혼조에게 접근하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 아니라

그가 쳐놓은 덫에 걸려 큰 위기와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 항상 치바가 동행하고, 본의 아니게(?) 두 부부를 돕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치바는 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방관자처럼 행동할 뿐,

오히려 극한의 슬픔에 잠긴 부부 앞에서 엉뚱한 질문과 코멘트를 쉴 새 없이 날립니다.

 

하지만 7일 동안 치바와 함께 있으면서, 부부는 조금씩 웃음과 안식을 찾아갑니다.

심각한 위기와 좌절을 겪지만 치바 덕분에 기운을 얻고, 위안을 받고,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복수에 대해, 남은 삶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담기 위해 야마노베 료와 치바가 챕터마다 번갈아 화자를 맡습니다.

특히 평생 죽음을 두려워했던 야마노베 료의 아버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죽음에 대한 다양한 감정과 태도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치바가 죽음의 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한번쯤은 다뤘어야 할 주제였고,

아무래도 분량 상 단편에서는 다룰 수 없었던 내용이었기에,

솔직히 조금 지루한 감은 있었지만 나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사신 치바의 마지막 수록작에 치바가 처음 본 파란 하늘을 보며 감동받는 장면이 있는데,

야마노베를 조사하는 치바가 다시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과연 야마노베 부부의 복수는 성공할 것인지?

도대체 혼조 다카시의 야마노베 부부를 향한 끝없는 악의의 정체는 무엇인지?

7일의 조사를 마친 치바가 야마노베 료에 대해 내린 결정은 일지, ‘보류일지?

이 많은 기대와 의문들 덕분에 페이지는 아쉬울 정도로 금세 넘어갑니다.

 

본편인 사신 치바6편의 단편을 읽은 독자에게는

치바의 장편이 좀 어색하거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캐릭터와 압축된 스토리로 무장한 치바의 단편들에 비해

한 사건, 한 인물에 대한 7일의 조사 기간은 지루하거나 장황하게 보일 수 있고,

앞서 언급했듯 야마노베가 화자인 챕터에서는 치바 특유의 매력이 감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속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당연히 단편집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저뿐 아니라 치바의 팬이라면 대부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 시리즈가 단편만의 매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듯이

치바의 다음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단편으로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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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후속작 사신의 76년 만에 출간된다는 소식에,

예전에 읽었던 사신 치바의 따뜻했던 기억이 생각나

서평도 써볼 겸 오랜만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 ● ●

 

치바는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사신이면서도 정작 인간이나 죽음 자체엔 별 흥미가 없으며

오로지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음반매장에서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는 것뿐입니다.

미션을 수행할 때면 예외 없이 비가 내려 치바는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잠도 안 자고, 피로도 못 느끼며, 감각이 없어 음식의 맛이나 통증도 못 느낄 뿐 아니라,

미션에 따라 그때그때 나이나 외모가 달라지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신입니다.

 

정보부에서 죽을 사람을 지정하면 조사부에 속한 치바 같은 사신들이 그들과 접촉합니다.

일주일 간 두세 번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상부에 가() 혹은 보류라고 보고하는데

()일 경우 예정대로 죽음이, 보류일 경우 좀더 연장된 삶이 그들 앞에 주어집니다.

 

스토커에 쫓기는 오피스레이디, 복수를 눈앞에 둔 야쿠자, 폭설로 고립된 산장 여행객,

로맨스를 꿈꾸는 미남 청년,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길에 나선 청년,

그리고 바닷가 미용실을 지키고 있는 70대의 노파 등이 치바가 만난 죽을 사람들입니다.

 

● ● ●

 

좀 장황하지만 사신 치바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이나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하드보일드 탐정 같지만,

그런 차갑고 뻔뻔한 얼굴로 배꼽 잡는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 읽었을 때나 다시 읽었을 때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치바의 대사와 독백 덕분에 몇 번 씩이나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역설적으로 또는 맘껏 비틀어 다루는 일본만의 독특한 문법은

소설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데,

사신 치바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뛸 만큼 개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목차와 첫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남은 에피소드들에 대한 몇 가지 기대감이 떠올랐습니다.

뻣뻣하고 고지식한 막대기 같은 치바도 한번쯤은 툭하고 부러지거나

자신이 혐오하던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기어이 독자의 마음과 눈물샘을 한번쯤은 후두둑 무너지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치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6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디쯤에선가 치바와 재회하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은 예상대로 맞아들었고, 만족감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신 치바는 블랙코미디와 따뜻한 인간극장이 잘 믹스된,

읽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질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조차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부분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기분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 사신의 7은 장편으로 출간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또한번 잘 짜인 연작 단편에서의 치바의 활약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장편에서도 치바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수록작 평점

사신의 스토커 리포트 ★★★★★

사신의 하드보일드 ★★★★★

사신의 탐정소설 ★★★

사신의 로맨스 ★★★★

사신의 로드무비 ★★★★

사신의 하트워밍 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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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다 리쿠가 쓴 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보만으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의 느낌은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꿈을 꿨다에 더 가까웠습니다.

악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꿈도 아닌, 그리고 밤새 꾼 듯 무척이나 길고,

어딘가 잔재가 남은 것 같아 한번쯤 뒤나 위를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 그런 느낌은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 ● ●

 

꿈을 영상으로 저장하는 몽찰(夢察)의 기술이 현실화된 시대,

예지몽을 꾸는 고토 유이코와 그녀를 사랑하는 꿈 해석사 노다 히로아키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죽음까지 꿈으로 예지했으나 결국 10년 전 예정대로화재참사로 죽은 고토 유이코,

형의 약혼자 유이코를 사랑했고, 그녀의 예지몽 능력 때문에 꿈 해석사가 된 노다 히로아키,

일본 전역에서 발생한 원인불명의 패닉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몽찰 팀에 합류한 후

고토 유이코의 생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경찰청의 이와시미즈 등이 등장합니다.

 

히로아키는 패닉 사건에 휘말린 아이들의 몽찰을 뽑아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몇몇 아이들의 꿈은 얼마 전부터 자신이 자주 꾸던 꿈과 거의 똑같았으며,

심지어 유이코로 보이는 기이한 영상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녀를 닮은 유령, 그녀가 좋아한 음악, 향기 등 유이코의 흔적을 감지해온 히로아키는

이 모든 일련의 현상들이 결코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머지않아 유이코와 관련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갖게 됩니다.

경찰청의 이와시미즈는 일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패닉 사건과 상식 밖의 초자연현상들이

명백히 유이코와 연관돼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녀의 생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와 각별했던 히로아키를 통해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이코의 흔적을 찾아 나라(奈良)로 간 히로아키와 이와시미즈는

패닉 사건을 능가하는 대규모 실종 사건과 맞닥뜨림과 동시에

유이코 또는 그녀의 유령이 남긴 수많은 단서를 손에 쥐게 됩니다.

히로아키와 아이들의 꿈속에 등장했던 벚꽃이 만발한 봄날의 산에서

두 사람은 전혀 예상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줄거리 정리는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인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보니 평범한 줄거리 정리가 될 리가 없습니다.

히로아키를 비롯한 몽찰 팀과 이와시미즈가 겪는 초자연현상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패닉과 실종이 연이어 발생하고

유령과 환상은 히로아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며

안개, 먹구름, 그림자, 음악, 향기 등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현실 속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현상 자체는 말 그대로 현상일 뿐 몽위의 핵심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꿈을 꾸는 것은 내가 그를 그리워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일까?”라는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이야말로

온다 리쿠가 몽위를 통해 던진 화두입니다.

어젯밤 꿈에 A가 나타났는데, 후자처럼 A가 자신의 의지로 내 꿈에 개입한 것이라면,

그것도 A가 나를 끔찍이도 미워하던 사람이라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입니다.

A가 내 꿈을 악몽으로 만들고, 나를 패닉상태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뜻이니까요.

 

몽위에서 주인공 히로아키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꿈은 내 의식의 반영’,

즉 내가 A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내 꿈에 나타났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반대로 히로아키의 상사 가마타와 이와시미즈는 ‘A가 내 꿈에 개입했다고 믿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만 가마타가 온건하고 개인적인 수준의 개입설을 대변했다면,

이와시미즈는 끔찍한 재앙을 야기할 수도 있는 빅브라더 식 개입설을 대변합니다.

가마타 식 개입설이 히로아키와 유이코의 애틋하지만 신비한 멜로를 위해 설정된 반면,

이와시미즈 식 개입설은 판타지 공포물을 위한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읽는 내내 멜로와 공포 사이에서 꿈꾸듯 멍한 상태로 만든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렇지만 온다 리쿠가 방점을 찍은 곳은 조연인 이와시미즈의 끔찍한 빅브라더가 아니라

꿈을 통해 겨우겨우 연결된 두 주인공 히로아키와 유이코의 안타까운 인연 이야기입니다.

이와시미즈는 몽찰을 통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악몽 속에서 유이코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그녀가 아직 살아있고, 살아서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 사건을 일으키고 있으니

경찰 입장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이야기의 적잖은 부분이 이와시미즈의 가설을 반증하는 사건들로 채워졌지만

결국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고 온다 리쿠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때론 유령으로, 때론 음악이나 향기로, 때론 벚꽃 가득한 풍경으로 히로아키 앞에 나타났던

유이코의 염원이 어떻게 실현될까, 하는 점입니다.

그녀는 과연 살아있을까? 혹시 죽었다면 히로아키 앞에 나타난 유이코의 염원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등 이런저런 의문 속에 후반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작품 첫 머리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호류지(法隆寺)의 몽위관음상에 관한 설명을 보면,

불길한 꿈을 꿨을 때, 관음보살님께 기원을 올리면 좋은 꿈으로 바꿔준다라고 돼있습니다.

제목 몽위는 부제처럼 꿈에서 달아나다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본문 속 유이코의 독백처럼 꿈을 바꿀 수 있다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예지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때론 사기꾼 취급을 받기도 했던 유이코는

정작 자신의 죽음을 예지한 꿈에서조차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바람대로, 또는 몽위관음의 힘을 얻어 꿈에서 달아났거나, 꿈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녀와 히로아키에게는 어떤 삶과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꽤 오랫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꿈에 개입한다는 온다 리쿠가 던진 화두는

생각만 해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물샐 틈 없는 감시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이글 아이’,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현실감은 있지만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온다 리쿠 팬이라 하더라도 편하고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특히 그녀만의 특유의 몽롱한 이야기가 적응이 안 되는 독자들에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어깨에서 힘을 좀 빼고, 그 무엇도 가능하다는 넉넉한 아량(?)을 베풀고 읽는다면

어느 작가에게서도 얻지 못할 독특하고 기이한 책읽기의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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