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다 리쿠가 쓴 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보만으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의 느낌은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꿈을 꿨다’에 더 가까웠습니다.
악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꿈도 아닌, 그리고 밤새 꾼 듯 무척이나 길고,
어딘가 잔재가 남은 것 같아 한번쯤 뒤나 위를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또, 그런 느낌은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 ● ●
꿈을 영상으로 저장하는 몽찰(夢察)의 기술이 현실화된 시대,
예지몽을 꾸는 고토 유이코와 그녀를 사랑하는 꿈 해석사 노다 히로아키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죽음까지 꿈으로 예지했으나 결국 10년 전 ‘예정대로’ 화재참사로 죽은 고토 유이코,
형의 약혼자 유이코를 사랑했고, 그녀의 예지몽 능력 때문에 꿈 해석사가 된 노다 히로아키,
일본 전역에서 발생한 원인불명의 패닉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몽찰 팀에 합류한 후
고토 유이코의 생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경찰청의 이와시미즈 등이 등장합니다.
히로아키는 패닉 사건에 휘말린 아이들의 몽찰을 뽑아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몇몇 아이들의 꿈은 얼마 전부터 자신이 자주 꾸던 꿈과 거의 똑같았으며,
심지어 유이코로 보이는 기이한 영상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녀를 닮은 유령, 그녀가 좋아한 음악, 향기 등 유이코의 흔적을 감지해온 히로아키는
이 모든 일련의 현상들이 결코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머지않아 유이코와 관련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갖게 됩니다.
경찰청의 이와시미즈는 일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패닉 사건과 상식 밖의 초자연현상들이
명백히 유이코와 연관돼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녀의 생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와 각별했던 히로아키를 통해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유이코의 흔적을 찾아 나라(奈良)로 간 히로아키와 이와시미즈는
패닉 사건을 능가하는 대규모 실종 사건과 맞닥뜨림과 동시에
유이코 또는 그녀의 유령이 남긴 수많은 단서를 손에 쥐게 됩니다.
히로아키와 아이들의 꿈속에 등장했던 벚꽃이 만발한 봄날의 산에서
두 사람은 전혀 예상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줄거리 정리는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꿈’인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보니 평범한 줄거리 정리가 될 리가 없습니다.
히로아키를 비롯한 몽찰 팀과 이와시미즈가 겪는 초자연현상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패닉과 실종이 연이어 발생하고
유령과 환상은 히로아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며
안개, 먹구름, 그림자, 음악, 향기 등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현실 속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현상 자체는 말 그대로 현상일 뿐 ‘몽위’의 핵심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꿈을 꾸는 것은 내가 그를 그리워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일까?”라는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이야말로
온다 리쿠가 ‘몽위’를 통해 던진 화두입니다.
어젯밤 꿈에 A가 나타났는데, 후자처럼 A가 자신의 의지로 내 꿈에 개입한 것이라면,
그것도 A가 나를 끔찍이도 미워하던 사람이라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입니다.
A가 내 꿈을 악몽으로 만들고, 나를 패닉상태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뜻이니까요.
‘몽위’에서 주인공 히로아키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꿈은 내 의식의 반영’,
즉 내가 A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내 꿈에 나타났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반대로 히로아키의 상사 가마타와 이와시미즈는 ‘A가 내 꿈에 개입했다’고 믿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만 가마타가 온건하고 개인적인 수준의 ‘개입설’을 대변했다면,
이와시미즈는 끔찍한 재앙을 야기할 수도 있는 ‘빅브라더 식 개입설’을 대변합니다.
가마타 식 개입설이 히로아키와 유이코의 애틋하지만 신비한 멜로를 위해 설정된 반면,
이와시미즈 식 개입설은 판타지 공포물을 위한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읽는 내내 멜로와 공포 사이에서 꿈꾸듯 멍한 상태로 만든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렇지만 온다 리쿠가 방점을 찍은 곳은 조연인 이와시미즈의 ‘끔찍한 빅브라더’가 아니라
꿈을 통해 겨우겨우 연결된 두 주인공 히로아키와 유이코의 안타까운 인연 이야기입니다.
이와시미즈는 몽찰을 통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악몽 속에서 유이코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그녀가 아직 살아있고, 살아서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 사건을 일으키고 있으니
경찰 입장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이야기의 적잖은 부분이 이와시미즈의 가설을 반증하는 사건들로 채워졌지만
결국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고 온다 리쿠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때론 유령으로, 때론 음악이나 향기로, 때론 벚꽃 가득한 풍경으로 히로아키 앞에 나타났던
유이코의 염원이 어떻게 실현될까, 하는 점입니다.
그녀는 과연 살아있을까? 혹시 죽었다면 히로아키 앞에 나타난 유이코의 염원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등 이런저런 의문 속에 후반부를 맞이하게 됩니다.
작품 첫 머리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호류지(法隆寺)의 몽위관음상에 관한 설명을 보면,
“불길한 꿈을 꿨을 때, 관음보살님께 기원을 올리면 좋은 꿈으로 바꿔준다”라고 돼있습니다.
제목 ‘몽위’는 부제처럼 ‘꿈에서 달아나다’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본문 속 유이코의 독백처럼 “꿈을 바꿀 수 있다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예지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때론 사기꾼 취급을 받기도 했던 유이코는
정작 자신의 죽음을 예지한 꿈에서조차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바람대로, 또는 몽위관음의 힘을 얻어 꿈에서 달아났거나, 꿈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녀와 히로아키에게는 어떤 삶과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꽤 오랫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꿈에 개입한다’는 온다 리쿠가 던진 화두는
생각만 해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물샐 틈 없는 감시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이글 아이’,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등)는 현실감은 있지만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온다 리쿠 팬이라 하더라도 편하고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특히 그녀만의 특유의 ‘몽롱한 이야기’가 적응이 안 되는 독자들에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어깨에서 힘을 좀 빼고, 그 무엇도 가능하다는 넉넉한 아량(?)을 베풀고 읽는다면
어느 작가에게서도 얻지 못할 독특하고 기이한 책읽기의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