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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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0.8권이라고 한다. 통계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도 있고 조사범주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긴 하지만 이보다 좀 더 많은 수치를 보이는 '직장인' 평균 독서량의 경우도 한 달에 2.6권 정도이다. 또한 분야별로 보면 문학, 자기계발, 실용서가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독서의 폭이나 깊이에 있어서도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문학의 경우 작품의 성격과 깊이 면에서 천차만별이며 문학을 읽는 것이 단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독서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안목과 지식의 기반이 되는 인문분야의 독서인구가 지극히 미미한 것을 고려해 볼 때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p.11)라는 장정일의 독서론에 비춰본다면 한 달에 한 두 권, 그것도 세간에 화제가 되거나 자신의 성취지향적 삶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독서인구에서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들에게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이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를 권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장정일이 말하는 '사회적 독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개인적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너머 현실의 수많은 쟁점들과 맞서는 치열한 세계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문학이든 인문학이든 독서를 통해 현 사회의 문제점들을 들춰내고 함께 고민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회적 독서'의 의의이다. 이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6권과 7권 사이에 출간 되었던 <장정일의 공부>와 맥을 같이하는데, 여기서 그는 나이 마흔에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며 각종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자신의 색깔(정치적 색깔)을 찾아나갔었다. 결국 그가 갖게 된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독자로서 주목할 것은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하고' 그 다음에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어줄 젊은 독자들이...'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봐야지'하고 발심(發心)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서문이다. 그의 공부를 이어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심(發心). 장정일은 9번째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에 발심(發心)의 소망을 담아 '사회적 독서'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행군을 부추킨다. 따라서 지난 1권에서 종종 눈에 띄었던 장정일의 독서관, 헌책방 이야기, 독서광 테스트 등 처럼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들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인권으로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역사 등을 아우르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비판, 근대화와 같은 우리 시대의 주요 논점들을 짚어가며 독자들이 다방면의 인문서적들을 접할 수 있도록 소개할 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도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글들로 가득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대화와 관련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것인데, 과연 요즘 세대의 젊은 독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깊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는 인권 문제를 상세히 다뤘고, 과학과 생명, 슬럼, 원전, 미디어 파악하기와 같이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르게 선별해 사회문제 전반을 다뤘다는 것은 '사회적 독서'를 표방하는 이 책으로서 매우 책임감있는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는 사회적 쟁점을 논하면서도 소설가 장정일 답게 문학에 관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 관점으로 풀어낸 문학도서의 서평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데, 예를 들면 세계문학전집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들려주는 서평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에 더해 글쓰기에 관한 <작가가 작가에게>의 서평까지 포함한다면 장정일은 사회적 독서 가운데 짬을 내어 은밀히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삽입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내게 와닿았던 것은 단연 서평에 관한 이야기였다(지금 나는 서평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양심적인 서평을 위해 조지 오웰이 제시했던 몇 가지 해결책 보다는 '서평가란 서평을 쓰는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는 사람'이라는 말이 그동안 써 왔던 나의 서평들을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정일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책 뒤에 들어가는 원고지 1~2매의 추천글은 날조고 사기이며 제대로 된 서평을 위해서는 원고지 15매 가량의 충분한 분량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만 독서와 서평을 병행하는 대다수의 독자(아마도 이 책은 서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으리라 예상한다)라면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 가장 날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황석영의 <심청>이다. '그 냄새가 그리 좋더냐'라는 선정적인 제목도 그렇지만 갖은 문학적 기교를 동원해 욕지거리에 가깝게 비아냥거리는 글의 내용은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에 대한 장정일의 글은 실상 황석영의 <심청>이라는 작품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는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낸 서평가에 대한 비난이었다. 비난의 중심은 '모더니티'의 남발이었는데, 모더니티와는 전혀 상관 없는 민족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발상에 찬사를 퍼붓는 서평가를 완전히 두드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장정일이 그의 서평에서 뽑아낸 '모더니티'라는 단어의 횟수를 살펴보면 정말 이처럼 모더니티를 남발했는가 싶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렇게 같은 단어들이 수없이 반복되었다면 일단 주책없는 주례사 비평의 수준을 너머 문장상으로도 서평가가 쓸만한 문장이었을까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비판하는 장정일의 글조차 '막장 서평'이 되어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대체 장정일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 날선 서평이라는 자신의 개성을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황석영 작가나 황씨 성을 가진 그 서평가와 좋지 않은 사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심청> 바로 다음에 있는 <박근형 희곡집1>에 대한 서평을 읽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본다(이것은 전적으로 '나름대로'이다). <박근형 희곡집1>은 일반적으로 서평집에서는 보기 드문 희곡인데, 이 작품의 대사와 등장인물의 작태를 보니 그동안 장정일이 접해왔던 소위 파격적이고 앞서간다는 작가들의 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그가 <심청>에 대해 썼던 농염하고 수위높은 욕지거리들이란 일종의 실험적 서평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역시 결론은 이런 서평이라면 좀 자제해 주시라는 것.

언제부턴가 인문경영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기업 CEO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나 인문 고전 읽기가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새로운 물망에 오른 것이 인문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인문학이 마치 자기계발의 수단인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이며, 더불어 취업이나 승진을 위한 스펙의 일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정일이 역설하는 '사회적 독서'의 취지를 바로 알고 독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의 변화로 눈을 돌릴 줄 아는 미덕이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가 성공인이 아니라 단지 시민이 되기 위함이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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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찌바 에필로그 -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지구를 살리는 창조적 도시혁명
박용남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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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년 전 혈거도시 판탈리카(Pantalica)를 바라보며 문득 뉴욕의 맨해튼을 떠올린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도열하듯 모여있는 개구부의 배치도 그렇지만 절벽 내부로 바위를 파내 수직동선까지 갖췄다는 사실에서 오늘날의 마천루와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 자연을 극복하려던 인간의 의지가 이기적이고 가학적인 욕망으로 변질된 증거를 목격한다. 도구의 인간이 만들어 낸 걸작, 인간지상주의의 인공낙원에는 더이상 자연이 가진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주요 도시들은 대도시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규모나 밀도 면에서 메가시티(Mega City, 거대도시)에 가까와지고 있으며 도시를 향한 담론은 첨단의 메가시티 안에 어떻게 자연을 삽입하는가에 몰두하고 있다. 즉, 거대 인공물인 메가시티를 고수하면서도 자연까지 회복시키려는 두 마리 토끼잡기에 고심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도시 내의 녹지 조성이나 쾌적하고 아름다운 조경계획만으로는 생태도시로의 여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물론 생태도시에는 자연적으로 녹지가 많이 조성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 없이 나무만 심어대는 도시계획은 단지 '녹색분칠'에 불과할 뿐이다.

황폐한 도시가 생태도시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습관과 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꾸리찌바 에필로그>의 주제도 바로 이러한 자생경제이다. 저자가 소개한 다양한 생태도시의 성공사례와 현황,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등은 현장 보고형 자료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경제성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기울여 온 노력이 멋진 옷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면 이제는 내구성을 위해 한 올 한 올 직조해 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꾸리찌바 역시 지루하고 힘든 직조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이제는 어엿이 주목받는 우수 생태도시로 떠올라 우리 삶에 다시 자연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생태도시 꾸리찌바의 비밀

꾸리찌바는 브라질 남부 빠라나 주(州)의 주도(州都)로 서울과 유사한 자연환경과 도시개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꾸리찌바를 주목하고 이 도시를 종종 시찰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유사성 때문이며, 현재 서울의 버스노선 계획 역시 꾸리찌바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꾸리찌바는 새로운 도시개념인 '창조도시'를 목표로 지속가능한 교통시스템, 하천의 친환경적 관리 및 녹지조성, 토건형 문화도시가 아닌 공동체형 문화도시라는 세가지 영역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는데, 이 세가지 영역을 추진해 간 동력을 유심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막대한 자본이나 첨단기술이 아니라 '유머'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가 발전이라 부르는 작업을 역행하는 발상의 전환 또한 재미와 웃음을 신조로 하는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민 전체에 전달되 공동체로서 환경에 기여하는 기본적 자세를 만들어 갔으며 자연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솟아나게 했다. 환경계획의 명칭만 봐도 '쓰레기 아닌 쓰레기' 프로젝트처럼 독특한 유머가 담긴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재활용을 연상케하는 페트병 모양의 버스 정류장 역시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생태도시란 결국 인간 본연의 가장 행복한 삶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유머'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사진설명(좌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 꾸리찌바시의 이과수강 풍경, 버스정류소, 거리의 악사, 곡물과 쓰레기를 교환하는 장면


큰 발자국 vs 작은 발자국

꾸리찌바가 생태도시를 이룰 수 있었던 원리는 단순하다. 그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기술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린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작은 생태발자국'을 가진 '지속 가능한'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해 '큰 생태발자국'을 가진 우리의 토건 계획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점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특히 정부의 다른 환경정책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견을 덧붙인데 반해 4대강 사업 만큼은 뚜렷하게 비판하고 있어 이 사업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뿐만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한강에 띄운 플로팅 아일랜드도 환경 차원에서 썩 내키지 않는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현재 서울은 도시의 관광수익과 관련된 이벤트성 프로젝트에 너무나 몰두하고 있는데, 청계천 복원도 사실상 야간 조명 아래서만 화려하지 자연스러웠던 옛 서울의 정취를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이렇게 모두 화려하고 거대한 사업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자원과 자연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서울을 곧 테마파크에 지나지 않는 우스꽝스런 도시로 변모할 것이다. 따라서 <꾸리찌바 에필로그>에서 경고하는 '작은 생태발자국'의 중요성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미래의 희망이다. 만일 이 교훈을 저버린다면 대표적인 녹색분칠의 메가시티요, 한국판 두바이라 불리는 송도 신도시의 실패를 또다시 맛볼 수 밖에 없다.

 * 사진설명(좌에서 우로) : 4대강 사업 현장, 서울 플로팅 아일랜드, 송도 신도시


생태도시와 사랑의 경제

아직 환경과 도시경제의 관계에 대해 대중적인 인식이 자리잡지 않은 상태이지만 저자의 역점은 지역공동체를 활성화 시키는 '사랑의 경제'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미' 그것을 실행하고 있어 공동체 회원간의 교역활동이 적힌 가계부까지 책 속에 제시할 정도이다. 저자가 대전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밭 레츠(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와 지역화폐 '두루'가 바로 그것인데, 옛날 우리나라의 품앗이나 두레를 연상시키는 공동체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생태도시가 녹색분칠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바로 이러한 경제 시스템의 변혁이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통화가 도대체 환경과 무슨 상관인가 궁금하다면 경제학자 헤이즐 헨더슨의 '사랑의 경제'에 대해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총생산이 '어머니 자연' 위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GNP나 GDP로 계산할 수 있는 공적영역의 층과 가정과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는 사적영역의 층으로 구분되는 시스템이다. 지역통화는 바로 사적인 영역 내에 속하는, 어머니 자연과 밀접한 층이며 소소한 농작물을 키워 교역하거나 차를 함께 나눠쓰는 상부상조의 생활공동체를 이룬다. 이미 사랑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도시들을 보면서 결국 생태도시의 희망은 사람과 사랑의 회복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인공과 자연 사이에 쿠션처럼 존재해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전에 첨단기술을 사용해 자연을 보호하려던 관리자의 역할에 비해 훨씬 더 위대해 보인다.


감응의 건축에 대한 희망

꾸리찌바는 생태도시로 각광받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정책주도면에서의 비판도 있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들도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솔직히 보여주었기에 우리가 생태도시로 출발하는 첫 걸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너무 이상적인 모델이 저 앞에 있다면 따라가기에 부담이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에게도 생태도시에 대한 좋은 개념이 있다.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감응의 건축'이 그것인데, 말 그대로 자연에 부합하고 응하는 건축을 뜻한다. 꾸리찌바의 폐광촌 오페라 극장을 보면서 이것이 정기용의 무주 공설운동장 프로젝트와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단순한 철골구조와 철이 가진 속성을 활용해 우아한 곡선으로 구조물을 만들었고, 흰색 페인트는 주변의 녹음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경관을 자아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은가! '감응의 건축'과 맥을 같이하는 여러 도시전문가들과 건축가들의 목소리도 이전부터 환경 문제에 대해 저자와 비슷한 지적을 해왔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생태도시를 위해 개발의 속도를 줄이고 '작은 발자국'을 추진하는 일을 실행해도 좋을 것 같다. 단, 정부의 의지가 이에 보탬이 되어준다면 말이다.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생태도시의 지도자와 행정체계에 대한 분석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사소한 환경프로젝트부터 거시적인 윤곽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결과물들을 보면 수십년간 생태도시에 목숨 걸었던 저자의 노고에 무척이나 감사해진다.

* * 사진설명(좌에서 우로) : 꾸리찌바의 폐광촌 오페라하우스, 무주 공설운동장, 도시계획에 관한 건축가들의 제안(신문스크랩)


10년전 그의 책 제목을 보면 꾸리찌바는 '꿈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에필로그'가 '꿈의 도시'를 대신한다. 드디어 우리도 뭔가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리라는 의지이다. 언젠가 저자가 본문을 쓰는 날에는 찌를듯한 수직의 인공도시가 녹색 분칠을 벗고 생얼굴로 수평의 웃음을 씨익 펼치며 '한국 최초의 생태도시'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우리들의 행동하는 사랑 속에 있다.



** 삽입된 이미지 중 서울 플로팅 아일랜드, 무주 공설운동장, 도시계획에 관한 건축가들의 제안(신문스크랩)은 개인소장으로 본 도서에서 발췌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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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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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p.16)

 

 

 

 

<아치와 씨팍>은 적나라한 욕설과 폭력, 그리고 그로테스크함이 난무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지만광기 어린 자본주의의 속성을 솜씨있게 반영한 수작(秀作)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묘하게도 엑스트라급에 해당되는 보자기 갱단이 허겁지겁 하드를 먹는 장면이었는데, 이 모습은 마치 욕망과 물신주의에 마비된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야기의 하드는 권력에의 종속, 중독적 탐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신체와 지능이 퇴화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보자기 갱단은 하드에 중독돼 퇴화된 자들이다. 이들에게서는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하드에 중독된 자로,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자기 갱단들이 아침에 깨어날 때에는 그저 단 하나의 세상, ‘하드의 세상이 시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의 세계는 어떠할까? 이에 저자는 몇 백만 개의 세계가 아침마다 깨어난다는 프루스트의 문장과 대조해 잃어버린 자기만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관습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p.16)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그래서, 주체를 잃고 우매한 대중으로 한데 섞여버린 고귀한 개인의 가치를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권력이나 자본, 그리고 관습이라는 것에 저항해 자신이 느낀대로 올바른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책 속에 소개된 시인과 철학자들도 자기 고유의 목소리로 사회의 강요에 저항해 온 사람들이었다. 흐르는 물결에 쓸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은 힘겹고 괴로운 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시냇가의 물소리가 시원하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지켜 존재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니, 순리에 따른 아름다움이 이러하다면 우리도 돌멩이가 되어 봄직하다. 다만, 시인과 철학자들의 생각을 신봉하지 말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 기억해야 할 저자의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의 시를 만나면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편에서 나는 어떤 시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시는 너무도 내 가슴을 울렸고 갑자기 콧등을 시큰하게 했으며 시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 시가 꼭 김수영의 시 같다는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래 저자의 설명을 읽어 보니 내 느낌대로 김수영의 시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인지 알지 못해도, 그저 읽기만 해도 ''라는 사실을 독자가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울리는 발성법에 도통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김수영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할애해 준 것이 너무도 기뻤고, 더불어 그의 맥을 이어갔던 신동엽 시인까지 소개해주어 한국의 근대시가 가지고 있었던 힘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만일 시와 철학을 통해 침묵으로 가라앉은 목소리의 열정을 틔워보고 싶다면 김수영신동엽의 시부터 찬찬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 김수영, <폭포>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일어서야지,/양말 신은 발톱 흉물 떨고 와/논밭 위에 세워논, 억지있으면/ 비벼 꺼야지,/열 번 부러져도 그 사랑/발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있는 것......쓰러진 폐허/함박눈도 쏟아지는데/어디서 나왔을까, 너는 또/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 신동엽, <>

 

이 책에서 신선했던 점은 여성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에 해당하는 여성 시인들과 여성 철학자들을 예우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우리 안에 억압되어 있는 여성성의 가치를 확인하고 철학이 가진 여성성을 통해 사회에 유용하게 적용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성성, 박애, 포옹과 같은 주제는 남성철학자나 시인들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절박함과 짙은 감성이 담겨있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누구에게나 있지만/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오랜동안 진정나의 소유가 아니었다......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정희, <유방> (p.64-65)

 

문정희 시인이 가진 생각을 이리가레이의 철학으로 말한다면 '남성과 평등해져가고 있는 존재론적 차이의 회복'이다. 기존의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리가레이는 이것이 생명의 중성화에 불과할 뿐, 진정한 여성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여기서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란 여성우월주의나 있는 그대로의 여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이 가진 이물질을 포용하는 힘, 즉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공존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타자인(생물학적으로는 이물질인) 아기를 태내에 품고 10달을 인내하는 것처럼.

 

철학적 시 읽기의 소주제는 사랑을 비롯, , 여성, 타자,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 등과 같은 삶과 현실의 키워드들이다. 이 중에서도 사랑과 타자는 다양한 키워드 가운데 꾸준히 등장하면서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이성복의 시와 라캉의 무의식을 통한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극복, 한용운의 시와 바르트의 사랑(일반적인 사랑)을 통한 타자에 대한 감각 생성, 고정희의 시와 베이유의 해방신학를 통한 박애적 사랑과 타자와의 연대, 그리고 김행숙과 바흐친의 덮어주기를 통한 억압에서 일치로 변하는 타자 등이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긍정적인 관계로 접근해가는 사유의 단초들이 되어주고 있다. 한편, ,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와 같은 소주제에서는 세상이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을 간파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리하게 해주며 시와 철학에 나타난 저항정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현명한 자세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한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포용과 저항, 보다 포괄적인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과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광란의 21세기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명제이기도 하다. 저자도 꾸준히 언급해 왔지만 철학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배워가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또한 분노를 추구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그들의 부당함에 대해 정당한 분노의 목소리를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시인과 철학자들이 사랑과 분노에 대한 발성법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갔듯, 우리도 이 책을 악보 삼아 자신만의 발성법을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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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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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어본 바, 현대미술의 코드를 안내하는 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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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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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윌렘 드 쿠닝씨께

드 쿠닝씨,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그림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얼마 전 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 보니까 당신의 드로잉이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보다 더 안전한 자신이라는 놀라운 구절이 있더군요. 저는 미술작품을 살 만큼 큰 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 10년전 구입한 당신의 작품집을 가지고 있어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책의 속지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필 사인본이라면 당신의 드로잉만은 못해도 미래에 상당히 가치있는 고서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이런 이메일은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드 쿠닝 또한 읽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스펨메일함으로 클릭!).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불안이 계속되고 물가가 헬륨 풍선처럼 두둥실 솟아 내려앉을 줄 모르는 상황이라면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해봄직 하다. 게다가 가혹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고 심지어 화기애애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곳은 과연 경제를 떠난 무릉도원인가 싶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티 옥션은 경제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만불이 넘는 작품을 793점이나 팔았다고 한다. 반대로 경기가 호조되어 투자할 곳이 많아지면 미술계는 오히려 한산해진다. 이러한 동향은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계를 일반화하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미술 작품도 자산가치에 일조하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젠 미술계의 신은 비너스가 아니라 마이더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비너스는 마이더스에게 고용되 월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이야기만 빼놓고 그 나머지를 쫓아가는 이 여행은 5개국 6도시를 횡단하며 7가지의 이야기들을 채집한다. 모두 각계의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무척 생생하고 현장감이 있다. 정작 7일이라는 짧은 일정동안 장거리 여행을 소화한 저자는 의외로 여유있었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가뜩이나 생소한 미술계의 뒷 이야기를 듣는데다 미술을 대하는 다양한 시선들이 등장하고 있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알게 된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이것은 비록 예술로서의 미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은 깨어놓긴 하지만 미술계를 움직이는 역동성의 모습이기에 관람객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5개국 6도시 7가지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한다..........옥션 :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옥션이다. 가장 상업성이 짙은 미술계의 단면이며 미적인 안목 이외의 실력을 가진 대단한 프로들이 활약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회화, 조각, 사진 작품들은 재산, 자산, 품목으로 묘사된다. 좋은 바스키아 작품은 제작년도가 1982년인지 1983년인지 혹은 그림에 머리, 왕관, 빨간색이 들어가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좀 희안한 곳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작품을 보호하고 전문성에 의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찾아주는 일에는 매우 공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저 비싸게 팔고 톱뉴스를 만들어 내는데 혈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스튜디오 : 현대미술의 상업적인 측면들만 다룰 줄 알았는데 갑자기 LA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의 비평수업이 이어져 잠시 놀랐다. 옥션에서처럼 명품에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휘감은 프로들은 간데 없고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수업 도중 샌드위치나 쥬스를 마시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들,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업풍경을 엿볼 수 있다. 비평수업을 소개하는 의도는 미술 비즈니스의 기본 언어를 배우는 곳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크릿(Crits,비평)이 실제적으로 미술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가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학생들 중 미술계의 좁은 문을 통과해 주목받는 스타 아티스트가 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며 나머지는 비싼 학비를 갚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다는 현실에는 공감하지만..........아트페어 : 다시 옥션과 유사한 긴박감이 흐르는 장소이다. 그러나 장소는 저 멀리 스위스로 이동해 왔다. 억만장자, 백만장자들이 인파를 이루고 문일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구입경쟁의 장면. 바젤 공항보다 더 엄격한 통제. UN처럼 비상업적인 국제회의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엄청난 규모의 돈과 상품(작품)이 오가는 미술상업의 현장이다. 여기서는 신진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꽤나 각광을 받는다. "40개 정도, 좋은 작품을 건진 것 같아요." 세상에, 한꺼번에 미술작품들을 40점이나 사다니. 이곳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딜러들의 빠른 안목과 솜씨가 정말 놀라웠다. 아트페어에서의 교훈은? 막판 세일을 기다리지 마라..........미술 상 : 비행기를 타고 날아 런던 테이트 미술관으로 이동한다. 큐레이터들의 지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최신 미술계 기사를 장식하는 친숙한 이름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권위있는 터너상 답게 일정과 선정과정은 엄격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정된 작품은 경악을 자아낼 만큼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는 딱 2명이라는 점에서는 여타 남성위주의 미술 상과 다를 바 없는 결과이다. 또한 이 상의 후보작의 경우 작품값의 1/3이상, 수상작은 2배 이상 상승한다니, 미술 상의 권위가 미술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필요한데, 이에 관한 고민은 책 속에 자세히 나와 있다..........미술 잡지 : 쾌활하고 입심좋은 직원들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현장은 다시 미국 뉴욕에 위치한 잡지사 아트포럼이다. 전화소리도 간간히 들릴 듯 분주하다. 아트포럼은 우리나라의 월간미술 정도에 해당하는 잡지인데, 세계적으로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적은 고료에도 불구하고 글을 기고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수상 한 방으로 큰 돈을 버는 아티스트와 무척 대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물론 이것은 무명 학자와 유명 아티스트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술잡지의 기획기사 같은 것이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대표 소유주 토니 코너의 의지와 '한점의 오류도 없는' 기사에 집착하는 편집국장 제프 깁슨 같은 인물 덕에 오늘도 아트포럼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작가 스튜디오 : 이번에는 정말 멀리 갔다.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있는 도쿄까지 갔으니까 말이다. 무라카미는 <오벌 붓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여기에 쏟아 부은 주물은 물론이고 제작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잡동사니(주로 재료들)나 물감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조용하고 소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무라카미의 작업실은 고용된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같다. 기본적으로는 예술작품을 생산하지만 그 외에 디자인이나 패션 브랜드에 관련된 일도 한다. 알고 보니 작업실이 일본에 세 군데나 있다. 좀 기묘한 분위기의 작업실이었다. 이런 작업실이 미래 우리 미술가들에게도 트렌드(?)가 될까? 순수 예술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산업 전반에 관여하는 기업같은 작업실 말이다..........비엔날레 : 비엔날레는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하긴 하지만 진정한 비엔날레는 도시가 주체가 되어 국제적 차원에서 열리는 행사를 의미한다. 미술계의 비엔날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비엔날레는 바로 베니스 국제 비엔날레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며 국가별 부스로 운영된다. 사실 비엔날레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성대한 파티와 개성있는 각국의 전시관으로 붐벼 가장 화려했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명한 큐레이터가 던진 한 말씀은 기억에 남는다. "비에날레는 원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이는 이미 합의된 것, 검증된 것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불안정한 것을 제도권 내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긴 여행이 끝났다. 아니, 짧은 여행인데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걸작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 상업주의에 물든 미술계를 속속들이 파헤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미술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념이나 직업적 윤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미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모두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견해와 안목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더이상 구매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치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발굴하고 이슈화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미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작품의 구매를 최상류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귀족적 취향의 전유물로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들의 보급과 작품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관람객인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질 때 마이더스도 비너스를 착취하는 부당 권력이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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