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똑똑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미술은 똑똑하다 - 오스본의 만화 미술론 카툰 클래식 13
댄 스터지스.리차드 오스본 지음, 나탈리 터너 그림, 신성림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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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술, 특히 현대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이것도 미술이 될 수 있을까'라든지 '이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와 같은 생각이 앞서 흡족하고 여유롭게 감상하기란 수월치 않다. 그래서 흔히 전문가들은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거예요."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지만 실상 이것은 어느정도 미술에 대한 식견이 있을 때에나 해당될 법한 조언이지 순전히 개인적 감흥이나 연상작용에만 의존해 감상할 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작품 하나 감상하는 것에 식견의 유무차이로 '마음에 달려있는' 해석을 차별받는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 준다.

미술은 당신이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p.12)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미술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기호나 주관, 미적으로 아름다와야 한다는 선입견, 상업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에 대한 혼돈을 지양해야 할 대표적인 미술이론으로 꼽고 있는데, 이 중 가장 빈번한 미술이론에 대한 오해는 바로 '자신의 기호나 주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기호와 주관으로 미술을 감상하게 된 까닭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미술을 접하는 동기가 여가생활의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이고, 넓게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술에 대한 관념과 급격하게 보급된 현대 미술의 실상에서 빚어지는 격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은 역사상 인류와 함께 성장해 온 가장 큰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알타미라나 라코스 동굴벽화로부터 시작해 고대 그리스 시대, 르네상스를 거쳐 번성하고 이후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된 미술은 한 두권의 책이나 주말의 갤러리 관람으로 쉽게 이해될만한 만만한 학문은 아닌 것이다.

물론 미술이 처음부터 이렇게 대단한 지식을 요구하는 학문은 아니였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에 비춰볼 때 기술자나 장인정도였던 시절을 거쳐 점차 노하우에 따른 문서가 생겼고 아카데믹한 요소들을 인정받아 학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에 가세해 모더니즘 속에서 추상화가 탄생하고 점점 철학적 요소와 실험성이 강해지면서 점차 수반된 이론들이 다양해지고 견고해진 것이다. 그래서 미술에 '이론'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어쩐지 유화물감 뭍은 허름한 작업복 보다는 말쑥한 양복처럼 격식있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미술은 똑똑하다>는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는 미술이론이 양복을 벗어버리고 '만화'라는 요소를 통해 보다 친근한 청바지 차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미술이론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간다. 시대에 따른 미술과 미(美)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그러한 생각을 유발시킨 철학자나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꼼꼼히 챙긴 것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큰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여기에는 개념어 사전을 떠올리게 할만큼 상당히 많은 현대 학자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포함되는데, 아마도 입문서를 통해 이렇게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술이론이 진화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미술가들의 능력란 단지 자유로운 발상이나 순간적인 영감과 관계된 창의력만이 아닌듯 하다. 이론이란 자신의 이상와 신념을 반영하는 것인만큼 그것을 발전시키고 또다시 그 틀을 깨는 과정은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아우르는 부단한 지적 노력의 결과였다. 이제 미술은 눈에 들어온대로 보는 것이 아닌 생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날 아름답게 봐주세요'라는 수동적인 미술이 아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어?'라는 도발적인 미술과 함께 하려면 미술만큼 똑똑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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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도시 - 사진으로 읽는 도시의 인문학
이영준 지음 / 안그라픽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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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초조한가? 도시의 초조함을 따라 그 발상지로 거슬러 올라가보니 '에녹'이 있었다. '에녹'은 동생을 죽이고 추방당한 카인이 '떠돌아다님'을 뜻하는 '놋'이라는 땅에 정착해 만든 성이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을 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며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곳, 방랑의 운명이 각인된 땅에서 태어나 방랑자의 아들의 이름을 얻고 그 운명을 이기기 위해 문명으로 무장했던 곳, 바로 그곳이 도시의 시작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본향을 떠난 자의 한과 생존에 대한 초조함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것은 현대 도시에도 무의식적으로 계승되어 테크놀러지와 함께 더욱 급박한 박동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초조한 도시를 실감나게 묘사한 예로는 갓프레이 레지오 감독의 영화 를 들 수 있다. 'Koyaanisqatsi'란 호피족 인디언의 언어로 '균형잃은 삶(Life out of balance)'을 의미하는데, 87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음울한 저음으로 반복되는 이 단어(이 영화는 대사없이 음악과 영상으로만 제작되었다)는 탐욕으로 광폭하게 발달한 거대도시에 불길한 경고음으로 작용한다. 도로에 줄지은 자동차의 물결, 초고층 빌딩들의 경쟁적인 스카이라인, 자연에 황량함을 가하는 풍력발전기들의 도열, 공장 컨베이어에 실린 규격화된 제품들, 지하철 요금기를 통과하는 기계적인 사람들의 움직임... 생활인이 아닌 관람자로서의 도시인들은 'Koyaanisqatsi'라는 음울한 주문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도시가 재로 붕괴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된다. 어쩌면 도시를 그렇게 만들어왔던 공범자의 심리가 죄책감으로 작용했을지도...

하지만 <초조한 도시>는 똑같은 유형의 도시를 대면하면서도 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도시를 탐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리타니 고진에게서 힌트를 얻은 '괄호에 넣기'인데 이는 쉽게 말해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을 의식에서 제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적 태도는 대상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그로부터 받게 되는 다양한 반응을 괄호에 넣는 것 그 자체로부터 쾌를 얻고 있다.(p.17)


저자가 도시에서 괄호 안에 넣고 싶은 것은 바로 일상의 '초조한' 모습들이다. 이 책의 제목이 <초조한 도시>인 것도 말 그대로 '초조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조한'을 괄호에 넣었을 때 드러나는 새롭고도 비일상적인 도시의 미학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괄호에 넣기'의 목적은 단순히 도시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라보고 즐기기 위함은 아니다. 이것은 급변하는 도시에 안타까움을 가졌던 저자가 사라져가는 도시의 피사체를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선택한 방편이며 피사체가 남기고 간 시대의 메시지를 극명하게 기리고자 하는 온정 어린 시선이다. 따라서 '기호의 제국', '밀도와 고도', '콘크리트의 격'을 따라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여정은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적 산책이라기 보다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적 산책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 같다.

- 기호의 제국
도시에는 수많은 기호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처럼 간판의 위세가 막강한 도시에서는 글씨가 곧 기호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되기 쉽지만 사실 기호라는 것은 교통 표지판처럼 그대로 읽어야 할 것부터 풍경의 맥락에 의한 상징, 은유, 모순 등 숨겨진 것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가진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간판 밀집지역에서 크기나 글씨체로 드러나는 글씨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 교회와 증권사들의 간격을 압축해(망원렌즈로 바라봤다) '물신의 가호를 받은 종교'라는 과장어법을 적용하는 것 등은 도시의 기호를 해석하는 신선한 방식이다. 특히 급격하고도 잦은 변화를 겪는 우리의 도시에는 여러 층의 시간들이 혼재하기에 '기호의 제국'에 소개된 이미지들은 보다 풍부한 기호를 함축하며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고도와 밀도
밀도와 고도는 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가 날로 확산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밀도와 고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심한 밀도와 고도를 비집고 들어가는 인문학적 사유들은 상당히 유연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매끈한 공간과 주름진 공간', '되기(becoming)'의 의미를 의왕시 재개발 지구의 사진 한 장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부분은 가장 돋보이는 인문학적 해석이였다. 이밖에도 저자는 고딕의 욕망을 초월한 현대 건물의 고도, 교통량의 수평적 밀도에 의해 퇴색되가는 랜드마크로서의 자연의 고도, '삭막미'라는 경지로 승화된 철골의 밀도와 리듬 등 다양한 풍경을 통해 일반적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을 독특한 생각들과 함께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 콘크리트의 격
적어도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디자인하기 전까지 콘크리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싸고, 거칠며, 삭막한' 도시의 재료였다. 아름다움 보다는 기능과 공법에 충실한 고가도로나 질식할 만큼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눈에 띄게 많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콘크리트는 격을 가진다. 콘크리트를 도시의 옷이라 생각했을 때 기존에 자리잡은 이미지가 길거리표 옷이였다면 책 속에서 제시하는 이미지는 명품 브랜드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마치 신전을 떠받치듯 우아한 고가도로의 기둥들과 도로 곡선을 따라 살포시 하강하는 자동차 한대, 80년대 군사시설의 향수(?)가 어린 아파트 벽면, 콘크리트의 힘과 질감, 빛을 통한 아름다움...너무 흔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장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관찰력과 콘크리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빛을 포착한 솜씨가 대단하다.


<초조한 도시>는 모든 도시에 여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 밀집도시라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일종의 숨구멍을 찾으려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고, 거대 공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숨구멍의 밀도도 높아진다는 긍정적 논리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획일적이고 빽빽한 아파트촌에서도 다양성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혼란스럽고 아찔한 변전소에서도 복잡계의 체계를 발견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온기가 따른다. 비록 수천년 전부터 물려받은 생존에의 두려움이 언제나 요동친다 할지라도 도시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면 용감하게 초조함을 괄호속에 넣어버리는 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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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한솔 마음씨앗 그림책 2
백희나 글.사진 / 한솔수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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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빗길에 젖을 신발과 옷자락 걱정부터 지하철에서 맞부딪칠 다른 사람들의 젖은 우산, 그리고 혹시나 우산을 잊고 귀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이런 저런 불쾌한 생각들을 앞세우다 보면 괜스레 빗소리도 거슬리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고만 싶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 다른가보다. 아이들도 빗물에 젖어가며 학교에 가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알록달록 예쁜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는 일과 물 웅덩이를 첨벙첨벙 걷는 일, 이웃집 홈통을 타고 내려온 빗물 폭포를 괜스레 손으로 건드리는 일처럼 평소에 할 수 없는 신기한 놀이감에 이내 불편한 마음을 툭툭 털어낸다.

<구름빵>은 이렇게 비오는 날에도 뽀송뽀송하게 남아있는 아이들 마음 한 조각을 구름에 담아 마법으로 풀어놓는다. 꼬마 형제들이 비오는 날 아침 발견한 구름 한 조각은 아직 젖지 않은 아이들의 꿈이다. 아이들의 꿈을 현명하게 다루는 것은 엄마의 몫일까?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늘의 요리'보다 명쾌하게 구름 조각으로 빵을 만든다. 이 장면은 실제 요리책처럼 표현한 아이디어가 매우 돗보이는데, 아마도 아이들이 구름빵을 진짜 만들수 있을거라 믿는 까닭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진짜 구름빵은 못 만들어도 비오는 날 아이들과 함께 구수한 빵을 굽는 것도 좋으리라!). 


꼬마 형제들의 동심에 엄마의 사랑과 지혜가 더해져 막강 파워 날아오르기 묘약으로 탄생한 구름빵! 구름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붕~ 날아오른 꼬마 형제와 ’그것봐, 엄마표 구름빵 대단하지?’라고 말하는 듯 천연덕스러운 엄마의 표정 때문에 정말 이 장면에 홀딱 반해버렸다. 날기에 대한 환상을 접어버린지 오래된 어른도 날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구치는데, 어린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이야기 속의 꼬마 형제들은 참으로 착하고 영리한 아이들이다. 구름빵을 맛있게 먹고 나더니 이번엔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에게 아침 식사를!’이라는 특명을 받은 것처럼 용맹하게 하늘을 날아올라 전기줄을 가로질러 두 눈의 레이더를 한껏 드높이고는 콩나물 시루 버스속의 아빠를 찾는다. 늘 일하느라 바쁘고 가족들과 함께하기 힘든 아빠들이 뭉클해 할 장면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엄마’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구름빵 만들기’ 부분과 ’아빠’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구름빵 배달하기’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의 무사안전을 확인하듯 아빠의 무사출근을 확인하는 아이들.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과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이 기특하다.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개어오는 하늘 아래 다정히 앉아 또 다시 구름빵을 나눠먹는 꼬마 형제들...서서히 밝아오는 하늘과 꼬마 형제의 초롱한 눈망울이 너무나 깜찍하고 귀여워 꼭 껴안아 주고 싶다.


<구름빵>은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의미들을 녹여내고 있는 정말 대단한 책이다. 물론 아이들 책이 대부분 짧지만 짧은 내용 속에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담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스한 가족 사랑과 상상력, 그리고 긴박감과 예측불허의 스토리까지 모두 갖춘 이 책은 비오는 우울한 날 아이와 함께 읽으며 다시금 유쾌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특별한 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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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 고형욱의 영화음악 오디세이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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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없는 영화는 뭐랄까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 같아요.
당신의 음악은 우리 모두를 고양시키고, 우리를 날아오르게
만들어요. 우리(배우)들이 모든 걸 단어로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할 때도, 당신은 이미 우리를 잘 표현해주었어요."
(p.122)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음악을 맡았던 헨리 메시니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저자는 '영화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핵심이 여기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소개하였는데, 잠시 음악이 없는 영화를 상상해 본다면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예를들어 <조스>에서 상어가 나타날 때 그 음산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면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영혼>의 마지막 장면에서 데미 무어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스르르 눈물을 떨어뜨리는 순간 애틋하고 순결한 'Unchained Melody'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의 이별이라는 환상은 사라지고 그저 흔히 접하는 남녀간의 이별 정도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 있어 음악이란 우리를 현실로부터 날아 오르게 하고 무한한 영화적 상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연료가 된다.

그런데 영화 음악에 대해 햅번이 깜빡 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을 굳이 복잡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의 회고본능을 자극해 감동을 재생시키는 영화음악의 힘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영화의 감동이 유달리 큰 날은 엔드 크레딧(End Credits)에 깔리는 음악이라도 부여잡고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고, 극장을 나와서는 곧장 음반가게로 달려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억 속에 가라앉았던 영화의 감동을 다시 날게 하고픈 욕구를 자극한다.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아름다웠던 장면을 다시 음미하고 싶은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는 메시지인가!

책 속에는 빽빽한 CD 전집처럼 50개의 추억의 영화들이 연도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세어보니 50편 중 내가 본 영화는 31편, 보지는 못했어도 대략 내용이나 제목만 알고 있는 영화는 7편이었다. 처음엔 추억의 명화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영화들이기에 영화 매니아가 아닌 나로서는 이 책을 공감하기 쉽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영화들이 친숙해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더불어 CD에 담긴 음악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익숙한 곡인지라 CD만 듣고 있어도 내 맘대로 영화의 추억과 상상속에 잠기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50가지의 영화를 표현하는 글은 기본적인 영화의 내용에서부터 배우, 수상경력, 작곡가, 관련된 에피스드와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상이나 관객들의 시선과 같은 분석적인 이야기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가장 주된 것은 (물론) 영화의 장면을 고조시키는 음악에 대한 해석, 그것으로 표현되는 감흥,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 그리고 원곡, 편곡 등에 얽힌 내용들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영화들을 소개하다보니 하나의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묘미는 상대적으로 덜한 느낌이었다. 고전에 속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통해 현대인의 욕망과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가하고, 같은 O.S.T지만 LP로 들을 때와 CD로 들을 때의 목차 구성에서 오는 미묘한 감상의 흐름을 짚어내는 저자라면 충분히 신선하고 심도있는 견해들을 더, 더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닥터 지바고'편이나 '라스베거스를 떠나며'편에서 발휘됐던 보다 음악적인 감성과 주관적 해석이 뭍어나는 글들이 참 좋았는데 늘 짤막하여 아쉬웠다.

'라라의 테마'는 라라의 캐릭터를 대변한다. 그러나 라라를 위해서 작곡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 분위기를 아우르는
보편성이 있다. 멜로디는 낭만적이면서도 떨림이 있다. '라라의 테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러시아 민속악기 발랄라이카를 뜯으면서 내는 울림은 러시아다운 정조와 함께 간절한 사랑의 느낌을 고조시킨다.(p.149/닥터 지바고)

주제곡인  'Ben And Sara'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피아노곡이다. 다른 음악들이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만을 자아내는데 비해 이 곡의 피아노 소리는 밝다.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 약간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욱 절망적이다. 현실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p.326/라스베커스를 떠나며)

마지막에 단 한편 소개된 한국영화 역시 불만이 되는 요소였다. 다음 저작의 주제가 한국 영화음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리의 추억'이라 덧붙이고 <별들의 고향>만을 소개한 것은 의외의 마침표이며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전반적으로 추억의 명화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음악을 통해 감동을 되살려본 시간은 즐거웠으나 좀 더 영화속에 깊이 침투되는 맛을 선사했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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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 - 당신을 속여왔던 대중문화 속 주인공들의 엉큼한 비밀, 개정판
마크 슈미트 지음, 김지양 옮김 / 인간희극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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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중문화 안에서 그것을 향유하고 누릴 때 무엇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문화의 소비자로서 영화나 뮤지컬을 관람하고 가요를 따라 부르는 동안 의식이 즐거움에 몰입되고, 어느덧 즐기는 행위로부터 기인한 주체라는 느낌에 사로잡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80년대의 3S(Screen, Sport, Sex)정책을 돌이켜 본다면 대중문화란 우리 손 안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무언의 압력과 왜곡을 가할 수 있는 큰 힘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가 범람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는 이를 즐기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때로 대중문화 밖에 서서 내가 속해있던 풍경의 전체 그림을 파악하는 현명함도 필요하게 되었다.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라는 작은 책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나 해석에 관한 다양한 책들 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책이었다. 그 이유를 꼽아보자면, 먼저 유년시절의 향수가 배어있는 스머프가 도마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파스머프가 표지에 나서있다니,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두번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서가 장정일이 자신의 독서일기에서 이 책을 호평했으며, 그의 독서일기에 소개된 책들 중 드물게 절판되지 않은 책이라는 점이다. 세번째는 호주인인 저자가 우리나라에 장기간 머물며 영어학원 강사를 했던 이력과 우리나라의 영화를 보고 남북관계에 대해 논한 글이 한 꼭지 들어있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꽤 익숙한 외국인에게 남북관계가 어떻게 비칠지 사뭇 궁금했다.

저자는 <개구장이 스머프>에서 드러나는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동성애에 대한 글로 네티즌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그것을 계기로 이 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머프 마을은 사회주의에서 이상적으로 꿈꾸는 공동체 코뮌(commune)의 전형이며, 자급자족, 토지의 공동 소유, 폐쇄적 경제 및 직업의 평등성을 모두 반영하고 있었다. 그저 사이좋게 산딸기를 따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생각했던 스머프 마을에 이런 원리가 숨겨져 있다니! 이에 더해 스머프 개개인에 담긴 의미를 풀어나간 시각도 매우 흥미롭다. 특히 가슴이 밋밋한 체형의 스머페트는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사회적 표준으로 여성을 통제하려는 사고방식을 나타낸다는 점과 늘 거울만 보는 허영이뿐만 아니라 덩치, 편리 또한 동성애를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가가멜은 고집스럽게 욕구에만 몰두하는 자본가를, 구박을 받으면서도 가가멜에게 충성을 다하는 어리숙한 아즈라엘은 자유 시장 체제의 노동자를 나타낸다는 점도 상당히 신선한 관점이었다.

스머프 마을을 이색적으로 바라보던 방식은 슈퍼맨과 개인주의, 사우스파크와 동성애 혐오, 해리포터와 운명 대 유전자의 축, 섹스앤더시티와 요리 등에서도 여지없이 이어져 간다. 물론, 동성애나 페미니즘과 같이 평이한 해석도 종종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심사와 기저에 존재하는 의식들을 과감하게 짚어내는 솜씨는 비록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감탄할만한 수준이다.

저자의 세밀하고 날카로운 분석은 '한국 영화와 햇볕정책'편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 영화가 조폭을 의리있고 친숙한 인물로 묘사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지적하며 한국영화에서의 조폭은 북한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어내고 있다. 따라서 햇볕정책의 흥망과 조폭 영화의 쇠락이 함께 움직였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봤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쉬리>, <친구>,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중심으로 외국인(비록 저자가 한국 장기체류자임에도)에게 비춰진 남북관계를 엿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높은 벽, 더 깊은 골을 느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중문화에는 우리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비롯 다양한 가치관과 사회의 일면들이 담겨있는 보고와도 같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로부터 나오며, 어떤 것은 증폭되고 어떤 것은 왜곡되기는 가운데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중문화의 힘이 점점 더 커져가는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끌려가지 않고 진정한 대중문화의 주체가 되려면 어느정도 출입이 자유로운 외부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외부인으로서 과감한 시도를 선보인 이 책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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