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 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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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이지, 눈을 뚱그렇게 뜨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실험용 영상으로 찍은 농구경기가 '공식 경기장'에서 진행된 줄 알았기에 그정도 규모에서 고릴라가 지나간다면 패스의 갯수를 세는데 정신이 팔려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영상을 확인해 보니 이건 공식 경기장은 커녕 학교 체육관 규모도 아니고, 거의 실내의 한 구석 수준이다. 여기서 화면의 정 가운데를 거쳐 지나가는 고릴라를 못 봤다면 뭔가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저 착각이라는 인간 심리의 사각지대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넓을 뿐. 이렇게 눈앞에 바로 보면서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하는 것을 주의력 착각(illusion of atten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착각은 주의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 자신감, 지식, 원인, 잠재력, 직관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발생된다. 예를들어 내가 친구에게 가르쳐 준 것을 친구가 마치 자신의 지식인 양 내게 되가르쳐 줄 때, 어떤 일을 너무도 잘 안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갈 때, 혹은 모차르트 CD가 지적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현혹될 때, 빵껍질 무늬에서 성모 마리아 형태를 보고 신의 계시라 생각할 때, 이는 각각 기억력, 자신감, 잠재력, 원인 착각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일상에서 종종 발생될 수 있는, 그리고 때론 치명적일 수도 있는 착각의 사례들과 이에 관련된 심리실험, 연구 결과의 신뢰성 여부 검증 등을 통해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 우리 심리의 사각지대를 구석구석 탐색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우리의 착각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고릴라는 매우 섬세하면서도 끈질기고 힘이 센 녀석이다. 특히 이것이 상업적 목적으로 섭외될 때는 눈에 확 들어오는 광고 문구나 멋진 스타보다 막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천재'나 '두뇌향상'이라는 단어로 잠재력에 대한 기대감에 흠뻑 젖게하는 잠재력 착각은 각종 도서, 음반, 학습법, 식품들처럼 주변에서 흔히 찾기 쉬운 것들이며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니, 남들보다 더 뛰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게 충실한 먹잇감이 되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명확하게 보고 싶어하고 착각에 따르는 사소한 다툼, 크게는 분쟁이나 사고를 원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이거나 지식을 습득하지만 사각지대와 같은 착각의 서식지는 그리 쉽게 청산될 수 없어 보인다. 게다가 얄궂게도 책 속에 소개된 모든 착각들을 엮은 상당 분량의 실험용 일화(독자들 스스로 읽어보며 착각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만든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다시금 확인시켜줄 뿐,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 심리의 한계를 대면하고 발가벗은 본연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갖은 논리를 내세우며 완벽할 수 있을 것처럼 자부했던 인간의 우월감을 돌아보게 하는 솔직한 충고가 되어준다.

착각이라는 인간 심리의 사각지대는 그저 운전자의 자세가 되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물론,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여 강박적으로 모든 것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각지대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므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사각지대를 만나기 쉬운 상황에서 더욱 조심하며, 자신의 운전 솜씨를 과시하기 보다는 교통 흐름을 살피는 것이 운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라는 의미이다. 또한 저자가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의 아름다움은 비록 고릴라를 볼 수 없었다 할지라도 패스를 정확하게 셌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살면서 착각으로 놓치거나 실수하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주어진 상황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다는 것. 그것이 바로 착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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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문학에 취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그림, 문학에 취하다 - 문학작품으로 본 옛 그림 감상법
고연희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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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난생 처음으로 인터넷 연재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최신 트렌드인지 아니면 유명 소설가의 작품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는 연재 소설에는 뜻밖에도 상당한 수준의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림이 어찌나 인상적이면서도 해당 회의 분위기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는지 글 읽는 재미 이상으로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러스트 특유의 스타일(그림체)로 주인공의 외모에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림으로 표현된 분위기나 상황 해석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오히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교감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림이 글에 묘사된 이야기 이상의 것을 더할때는 올바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연히 읽게 된 인터넷 연재소설로 인해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림, 문학에 취하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시(詩) 한 수 곁들여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과 마주하려던 이 책에서 '옛 그림 속에 깃든 문학성, 이것이 '문제'다'라는 문구를 본 순간 어떤 '경지'에 오른 옛 선조들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갔을까에 온통 관심이 모아지면서 은근히 책을 통한 해답도 기대하게 되었다.

책 속에 소개된 작품들을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김정희의 <세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전기의 <귀거래도> 를 비롯 김이혁,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 윤제홍 등 19세기초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참여한 12폭 병풍 <고산구곡시화병>과 같은 대작, 그리고 그 밖에도 기행문을 표현한 <만폭동도>,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누백포호>, 유일한 민화에 해당하는 <구운몽도>까지 다양한 문학의 장르와 조우하는 그림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문학과 그림과의 만남이 일대일 대응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에서도 아름답고 심오한 구절들은 시대를 따라 다른 작품 속에서도 되풀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비록 그림이 한 편의 글을 택했다 할지라도 이와 관련된 다른 문학작품들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그림과 문학이 서로 경쟁하듯 하나의 경지를 향해 달음질쳐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하나의 문학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화가들이 묘사를 시도해 각각의 기교와 개성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비평가들에 따라 견해에 차이는 있겠지만 문학의 절정을 이미지의 절정으로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두 가지 예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짧은 식견으로 결론지어 보건대, 미술이 문학을 취해 그를 좇는다기 보다는 문학과 미술은 궁극의 이상을 향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북의 <공산무인도>와 소식의 <십팔대아라한송>의 구절 '공산무인 수류화개(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네)'은 문학과 그림이 추구한 특별한 정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식의 <십팔대아라한송>은 부처의 덕을 기리는 게송(찬양가)으로 여기서 시적인 극치라 칭송받는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깨달음 후에 다시 보는 산수와 자아와의 물아합일이 표현된 구절이다. 최북은 이 깨달음의 경지를 축자적인 이미지에 일치하도록 충실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가슴이 탁 풀리는 오묘한 기운 마저 담고 있어 그의 평생 득의작 중 하나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귀하고 아름답다. 한편 강세황의 <괴석>은 육우의 시(詩)를 원작 이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사실 육우의 시에서 비롯된 <수석유화>라는 그림은 여러 점이 있고 강세황 또한 <수석유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묘하게도 단순히 <괴석>이라 이름붙인(그러나 <수석유화와 동일한 소재인) 이 그림은 당시 꽃을 그리는 코드를 벗어나 색채 없는 국화를 탄생시키면서까지 은자의 미덕을 표현하고 있어 가히 화가의 품성과 발상이 문학을 넘어섰다 이를 수 있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중국의 문인 구양수의 <추성부(가을소리)>를 묘사한 그림이다. <추성부도>는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이 있어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작품이었는데, 아마도 이 그림에 대한 특별한 감동은 스러져갈듯 종이를 스치는 붓결과 붓결이 사라진 싸늘한 여백에서 진정 바람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소리를 글로 묘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소리를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더더욱 난이도가 높은 일이라 말하면서 <추성부도>의 경우도 글이 없었다면 쉽게 가을바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소리를 표현한 여타 그림 중에서 최고였다.

 

- <추성부도>의 좌측 반에 해당하는 일부(상)
- 뭉크의 <절규>와 <추성부도>의 우측 부분의 세부도(하)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그림들이 대부분 시(詩)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정선의 <만폭동도>와 윤제홍의 <한라산도>는 기행문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 중에서도 윤제홍의 <한라산도>는 그림의 주변에 병풍을 두른 것처럼 빼곡히 글씨를 채워놓은 점이 눈에 뜨이는데, 사실 정철의 <관동별곡>을 묘사한 <만폭동도>에 비해 명성이나 지명도에 뒤질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가보기 어려운 한라산을 최대한 상세히 묘사하려는 정성은 독특한 표현방식과 함께 어우러져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삼강행실도> 중 <누백포호(누백이 호랑이를 잡다)>의 판화도는 백성들의 도덕적 교화를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문학과 그림의 만남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가장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단계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문학이 그림과 만나는 다양한 범주에 속하므로 이 책에서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는 점이 무척 반가왔다. 우측 하단으로부터 지그재그로 올라가며 읽어야 하는 이 그림은 시간의 경과 묘사가 오늘날의 관점과 다른 것이 인상깊었으며 그 당시 패륜문화가 만연하고 있었다는 것도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문학에 취하다>는 문학을 표현한 그림을 통해 옛 그림을 감상하는 안목에 깊이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한 편 한 편 실제로 읽어나감을 통해 관련된 종교, 사상, 문화, 풍속 등 다양한 범위의 지식을 접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림의 감동을 더 진하게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사실 그동안 옛 그림 속의 문장들은 읽는다기 보다는 그림의 일부로서 서체와 기교에 관한 평이 더 부각되어 언급되곤 했는데, 이제 그 문장들을 유심히 읽어보고 그림을 바라보니 저자의 말대로 문학 작품을 읽고 그림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어 무척 즐거웠다. 더불어 문학을 취했던 선조들의 그림처럼 텍스트를 취하는 우리의 이미지에도 궁극을 향한 선의의 도전이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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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 - 형태로 이해하는 문화와 예술의 본질
한명식 지음 / 청아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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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

시각예술의 세계에서 이 한마디 만큼 형태의 변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경우가 또 있을까?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남긴 이 명제는 근대 산업혁명의 시대를 주도했던 합리주의, 기능주의 사고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형태의 당위성에 대한 진리로 신봉받으면서 지치지 않는 기계들을 통해 장식이 배제되고 규격화된 형태들을 무수히 쏟아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대부분을 획일적이고 각진 형태들과 함께 해왔는데, 이후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형태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면서 이젠 바야흐로 "형태는 감성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라는 명제가 더 신뢰있게 들리는 듯 하다.

이처럼 동시대와 가장 가까운 근대의 일부만 살펴본다 해도 우리가 인식하는 형태에는 역사, 과학, 철학을 포함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시대에 따라 영향력을 미치는 주 요소의 특성으로 인해 형태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도 동일 선상에서 '문명 이래'라는 보다 폭넓은 시간 간격을 두고 형태에 영향을 미쳐온 주 요소들을 살펴보며, 동서양의 차이, 원근법, 죽음, 진화, 모나드, 기하학, 미술, 디자인, 조형이라는 9가지 요소들을 통해 결국 예술이란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예술 역시 생존이라는 현실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지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실험에 따르면 서양인은 형태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동양인은 재료를 통해 인식한다는 결론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타 민족들과의 경쟁 속에서 보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던 서양과 통일된 문화를 가지고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삶을 유지해야 했던 동양이 각자의 환경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사물의 인식에도 차이를 가져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서양에서는 자연을 존재(being)로 보았기에 인간 문명의 부산물인 건축도 자연과 대등한 존재로서 땅 위에 구축된 형태로 표출되며, 동양에서는 자연을 무(無),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채워짐을 기다리는 비워놓은 자리로 보았기에 건축은 그 빈자리를 찾아 안착된 형태로 표출되며 자연과의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비움의 공간이 눈에 뜨인다.


예술을 바라보는 9가지의 시선 중 가장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실상 '죽음'을 소재로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는 것도, 죽음이라는 모티브가 중세 예술에서 가장 활발하게 표현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죽음은 부활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현대의 예술, 특히 상업적 성격을 띤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와 빈번히 만난다. <가위손>, <배트맨>, <렛미인>과 같이 중세 고딕풍을 재현한 고스(goth) 영화, 이러한 스타일을 패션에 반영한 고스(goth) 족, 록음악이나 할로윈 축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인체의 신비 전>까지,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죽음이 끊임없이 예술 속에 드러나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의 반영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중세말 팔라초 아바텔리스가 그린 <죽음의 승리>와 현대 <인체 신비 전>의 메인인 군터 폰 하겐스의 작품이 너무도 흡사한 모습으로 읽히는 것은 불안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얼마나 현실로부터의 탈피를 염원하는지 표현해주는 암묵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기하학은 형태를 설명하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명확한 시선이 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활에서 접하는 기하학이란 대부분 유클리드 기하학뿐이니 기하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의 진보는 물론 그에 수반된 사고와 형태의 변화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마치 은빛 구름이 몰려가는 듯한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며 위상 기하학을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축조된 파르테논 신전과 나란히 비교해 보면 형태의 상이함은 물론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과학관이나 세계관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형태는 그 변화된 모습으로 우리가 무심코 속해있는 동시대의 사고방식에 대해 각성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형태를 통해 바라본 예술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미술이다. 미술사에 나타난 형태의 변화만 해도 이집트 미술의 완전한 형태, 로마 미술의 서사적 형태, 르네상스 미술의 논리적 형태 등 8가지에 달하니 원시시대부터 똑같은 생물학적 두 눈을 가지고도 이토록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바라보게끔 만든 사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다. 이 중 바로크는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할만큼 혁명과도 같은 양식이었는데, 원근법이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이전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가 선적이고 평면적이었던 반면 바로크의 회화는 색채와 면, 공간감을 중요시 했기에 훨씬 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대조는 우리의 시각을 좌우했던 이성과 감성의 대조라고 간략히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어지는 여덟번째 시선인 근대의 디자인과 추상을 읽으면서 오늘날 포스트 모던에 의해 표출되는 형태와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 또한 이성과 감성의 대조를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에서의 형태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에 영향을 미쳤던 요소 역시 광범위하여 중요도를 가늠하기 힘들겠지만, 결어에 해당하는 마지막 시선으로 조형을 선택한 것에는 미래의 디자이너들을 향한 저자의 애정이 담겨있다. 형태에서도 가장 고도의 사고와 기술을 요하는 조형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자연물의 창조와도 비견될 수 있는 형태 표출의 방식이기에 자연을 더 이해하고 자연이 이뤄낸 세상에 더 가깝게 접근하라는 조언은 디자이너는 물론 테크놀러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미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교훈으로 작용한다. 

디자인을 위한 조형, 조형을 위한 추상, 이것들은 결국 형태에 의미를 부여함이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이루어 낸 세상의 형태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의지다. 브랑쿠시가 말하는 추상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자연이며 그러한 형태에 익숙해진 인간의 본능도 자연이기에.(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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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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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마치 이미지와 감각이 지배하는 거대한 테마파크와도 같다.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화려한 광고 포스터를 휘감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부지런히 mp3와 게임에 감각을 몰입한 채 목적지까지의 시간을 향유한다. 북적거리는 도시의 한복판을 무심히 걷고 있어도 '맛보세요'와 '써보세요'라는 상냥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뜻하지 않은 다양한 체험이벤트를 제공하며, 도시 역시 시시때때로 행사를 벌여 때론 대형 스크린으로, 때론 불꽃놀이로 꿈과 환상의 감각제국을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손안에 쥔 작은 모바일폰은 자신의 뜻대로 조작할 수 있는 이미지와 감각의 결정체이다. 욕구를 느끼자마자 버튼 하나만 누르면 동영상이든 트위터든 즉각 접속되고, 화면 속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포착 즉시 신경중추를 타고 전달된다.

이처럼 현란한 이미지와 감각의 일상 속에서 반대로 텍스트와 이성을 들춰낸다는 것은 매우 건조하고 지루한 작업처럼 느껴진다. 즉,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흥미롭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 내용이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시(詩)'와 '철학'에 관한 것이라면 감탄보다는 한숨이 절로 나올 듯하다. 그런데 이 책은 막막하기 그지없는 시와 철학을 함께 엮고 여기에 '즐거움'이라 덧붙이고 있으니 먼저 그 '즐거움'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p.17)

저자가 설명하기를, 시란 시인이 경험한 물속이기에 가장 주관적인 것 같지만 누구나 그 물에 들어간다면 같은 경험을 하게되므로 가장 보편적일 수 있고, 철학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물이기에 가장 보편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상 철학자가 만든 특정한 그물(특정한 물고기를 위한)이므로 오히려 가장 주관적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시와 철학, 보편과 주관이 결합한 시너지를 통해 낯선 세계에 빠져도 보고 실체들을 끌어내 확인할 수 있으니 한 세계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즐거움이 따르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가 가슴속에 품은 이성복의 글귀,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은 21쌍의 현대 시인과 철학자를 통해 우리의 무뎌진 감성(감각이 아닌)에 날을 세우고 허약해진 이성에 근육을 보탠다.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 아닌 다중의 논리를,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사유는 곧 의무라는 판단을,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 소비의 원리를,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을...이렇게 21개의 주제를 따라 차근차근 시와 철학의 교집합 세계에 빠져들다보면 인간의 본성과 욕망, 생과 사, 사회의 현상들과 타인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눈은 더이상 감각에 이끌려가는 무의지적 시선이 아닌, 나와 타자를 포함한 세상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의지적 시선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21쌍의 시인과 철학자 중 가장 특별한 한 쌍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바로 시인 김준태와 철학자 박동환인데, 다른 쌍들이 모두 우리 시인과 서양 철학자들로 구성된데 반해 이 쌍만은 우리 시인과 우리 철학자로 짝지워져 있다. 두 사람을 통해 풀어나가는 '도시 너머에서 발견한 희망', 그리고 '한국적 사유'라는 마지막 주제를 보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 단순한 철학 입문서나 에세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불어 '철학적 시 읽기'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할지를 일깨우는 목적 의식이 발견된다. 이 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으로서의 광주'에 반해 '구조로서의 광주'가 아직 살아 있음과 도시 변두리에 씨를 심는 행동으로 희망을 말하는 시인의 의지가, 중국과 미국의 철학을 관망하고 모방만했던 제삼자에서 벗어나 우리 사유속에 흐르는 생명체의 근원적 논리를 되새기자는 철학자의 방향성이 매우 인상깊었던 장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논리가 문명의 붕괴로 사라질지라도 우리의 집요한 생명력만은 살아남을 것이라 주장하는 박동환, 이와 연결되는 "흙과 서로의 몸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으로 생명체 사이의 연결을 역설하는 김태준, 이 두 사람은 다시금 '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21번째의 시인과 철학자에 따르면,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전수해 준 문명으로 북적대고 있다. 그리고 맨 처음 언급한 이미지와 감각으로 가득한 세상도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를 떠올리며 이 감각의 제국에 틈새를 만들고 씨앗을 심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력이 도시의 틈새에 심겨질 때 그 뿌리와 잎이 자라고 종국에는 은근한 힘으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그날은 우리가 틈새 속에 침잠하고 충분한 양분과 수분을 끌어모으는 시간 속에서 탄생할 것이며, 시와 철학은 양분과 수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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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정신
로버트 헨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미국 미술계의 정신적 지주라 일컫는 로버트 헨리와 예술의 정신이라는 엄숙한 주제 앞에서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쩐지 황진이를 떠올렸다. 그것도, 조선시대 명기로 이름을 날린 역사적 인물 황진이가 아닌 TV 드라마 <황진이>이다. 사실 <황진이>는 화려한 캐스팅과 의상, 가무와 같은 볼거리며 기녀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에 눈길을 끌었지만 사실 예술의 경지와 예술혼에 대한 해석이 매우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조청단지를 쏟아 붓고, 줄타기를 배워가며 완전함을 추구했던 열정이나 기술과 전통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감정을 이입하는 창조적인 발상, 여학의 행수(기녀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의 대표자 자리) 자리에 연연해 경쟁하지 않고 오직 완벽한 춤을 구하는 순수한 이상, 자연에게 묻고, 사람살이에 묻는 겸허하고 소박한 자세, 그리고 종국에는 장단에 맞추는 춤사위가 아니라 음악으로 하여금 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살아있는 예술혼의 획득까지... 만일 <예술의 정신>에서 로버트 헨리가 진심을 담아 후학에게 전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황진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황진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까닭은 이 책이 가진 내용과 분위기를 좀 더 쉽게 공감했으면 하는 의도에서이다. 막연히 '예술의 정신'이라고 하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심오한 철학이나 이를 수 없는 경지처럼 들리기도 하며, 예술에 의한 사회 운동(movement)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는 '예술'과 '정신'이라는 단어의 심도로 인해 갖을 수 있는 선입견일 뿐 저자의 진정한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예술의 정신>은 로버트 헨리의 강의나 그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기고문 등을 정리해서 모은 글들로 다정하고 세심하며 실질적이고도 본이 되는 생각과 격려가 가득하다. 저자가 화가이기에 미술학도들에게 해당되는 스트로크, 드로잉, 초상화에 관한 구체적인 조언들도 종종 눈에 띄이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예술인들, 더 나아가 꿈을 가진 청년들이 참고해도 좋을 투명한 사색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예술의 정신>을 보다 잘 이해하고 읽기 위해서는 로버트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로버트 헨리는 20세기 초 미국 사실주의를 주도한 화가로 펜실베이니아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했고, 마네(Manet)와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영향을 받아 도시의 정경이나 인물을 주로 그렸다. 또한 1907년 뉴욕의 화가들이 보수적인 전시정책에 항의하여 만든 에이트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업적과 활동을 놓고 보면 그의 글에서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의 전통과 기품 어린 생각들이 흐르고,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소탈한 자세, 생활에서 체득되는 예술적 감흥들이 한껏 뭍어나는 것이 더욱 드러난다.

                                                   - 로버트 헨리의 사진(좌)과 그의 작품들 -


'예술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되는 글들은 따뜻한 온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물론 그가 자신의 학생들을 위해 쓴 글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90년전 어떤 스승으로부터의 조언이 마치 나의 선생님이나 선배로부터 듣는 것처럼 친근감 마저 느껴지는 까닭은 이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삶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무엇을 위한 예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가르침에 목말라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화가는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술가로서의 덕목, 세상을 보는 방법, 비평, 예술가로서의 성공 여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도(正道)와 순수, 인간으로서의 예술가가 무엇인지 돌이켜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예술의 정신>은 이후에도 스승이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고 힘을 얻을 정신적 후원자로 삼아야 겠다 생각해 본다.

개성없는 기법은 아무리 정교해도 사소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연구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사소하다.
예술의 크기는 곧 인간성의 크기이다. 예술의 위대함은 예술가의 개성의 위대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p.255)


* 사진출처 : http://artria.net/150043356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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