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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ㅣ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평점 :

자음과 모음의 트리플 시리즈의 28번째 작품 파주를 읽었습니다.
트리플 시리즈는 세 편의 단편 소설을 통해 작가와 작품, 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며 시작된 기획으로 저는 27번째 정해연 작가의 말은 안 되지만으로 처음 접하게 되어 이번에 김남숙 작가님의 파주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2024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남숙 작가의 단편 소설 파주는 제목 그대로 파주에서 일어나는 1년간의 복수에 대한 글입니다.
어쩌면 죽고 싶었을 정도로 자신을 괴롭힌 군대 선임 정호에 대한 현철의 복수는 제가 상상했던 것 처럼 처절하거나 분노가 폭발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이게 정말 복수가 될 수 있을까 싶은, 혹은 복수가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던 것일까라는 생각도 처음에는 들 정도로 시시한 복수였으니까요.
이 모든 일을 복수의 당사자들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며 원래부터 별 볼일 없던 복수는 한층 더 시시하게 다가옵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던 현철이 과거를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으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살기 위해 선택한 용서와 잊음의 조건이 열 두달의 백만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현철이 제시했던 애매한 금액은 정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철이 정호에게 말한대로 처절한 복수를 실제로 행할 용기가 없었던 현철이 자신의 복수와 용서 그리고 망각 사이에서 선택한 절충안처럼 느껴졌거든요.
가끔씩은 보게 될 거야. 동네가 좁으니까. 이사 가지만 않으면.
현철은 그때도 시시하게 말하면서 시시한 인사를 했다. p52
그렇게 1년간의 복수가 끝난 뒤 정호는 다시 모든걸 잊은 듯이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르고 일상을 되찾아갑니다. 그간의 복수는 현철에게만 의미를 가지고 기억됩니다.
항상 주저앉아버리는 자신을 시시한 복수로 마무리하고 남은 앞으로의 삶은 잡아도, 잡지않아도 그만인 잉어킹처럼 마찬가지로 시시한 포켓몬고 만렙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살아갈 현철의 모습이 결국 정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묻지 못하는 윤정과도 닮아 보입니다.
명목상의 시시한 복수로 자신을 위로하고 어떻게든 잉어킹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현철의 모습은 생각보다 과거의 용서와 앞으로의 삶에대한 동기가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처럼 느껴져 삶의 무게에 대한 조그마한 위로처럼 다가옵니다.
특히 이 모든 파주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어찌보면 일산이나 용인, 여주, 이천으로 바뀌어도 소설의 전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소설의 배경이 제목으로 의미심장하게 박혀있는 것 조차 숨겨진 뜻이 있을 것 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시시할 수도 있다같은 의미처럼요.
점차 그도 곧 나에게서 연락을 거두었다. -중략- 그는 다른 소설에 열광하며 다른 이에게 꼬박꼬박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p113
그런 사람에서 먼 외국의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난 과거의 인연은 마치 스토커처럼 달라붙지만 결국은 우연히 다가왔던 것 처럼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른 작가를 찾아 떠납니다. 마지막 단편 보통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수는 회사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들에게 닥쳐온 문제는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 그저 탈모입니다.
김남숙 작가의 나머지 두편의 단편역시 파주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결국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보다 별 거 아닐 수 있다구요.
그러니 너무 깊고 무겁게 받아들이지말고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내버려둬도 될 일들이라고 말합니다.
트리플 시리즈의 단편 작품들은 꽤나 난해하게 다가오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고민할거리가 많고 그렇게 작품을 제 주관대로 해석한 뒤 전문 평론가의 해설을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인생은 마냥 즐겁지 않고 때로는 견디기 버거울 정도로 차갑고 무거울 수 있지만 사실 그 또한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시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처럼 느껴졌던 김남숙 작가의 트리플 시리즈, 파주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