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평점 :

책 제목이 '디트랜지션, 베이비'다. 디트랜지션은 성환원, 그러니까 트랜스젠더가 다시 원래의 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베이비는 음.. 그냥 아기다.
사실 제목부터 좀 낯설고(디트랜지션만, 베이비는 지금 몹시 익숙하다.), 내용은 더 낯설다.
트랜스젠더, 디트랜지션, 비전형적인 가족 관계 같은 말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살짝 당황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고. 사실 나는 이 쪽 분야의 용어에 전혀 무지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검색을 하며 읽어야 했는데 심지어, 시스젠더라는 단어도 처음 접했을 정도.
이 책을 읽으며 당황하게 되는 요소는 낮선 퀴어단어 뿐만이 아니다. 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고 성적인 요소들은 더 직설적으로 음란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이 책, 읽다 보면 그런 당황스러움이 아니라 ‘아, 이런 식으로도 인생을 꾸릴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뭔가 고정관념이 한두 개쯤은 깨지는 기분이다.
주인공은 리스라는 트랜스 여자인데, 이 친구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걸 꿈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의 전 연인이었던 에임스는 원래 트랜스 여성이었다가 다시 남성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 에임스가 리스와 헤어진 후 다시 남자의 삶을 살면서 평범한 이혼녀인 회사 동료 카트리나를 임신시켜버린다. 문제는, 에임스 본인은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카트리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는 점. 그러다 보니 이 셋이 기묘한 제안을 하게 된다. 세 사람이 함께 아이를 키우자는 거다.
이쯤 되면 이야기 전개가 상상 그 이상이다. 그런데 웃긴 건, 작가는 이런 황당한 설정을 진지하게 끌고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상처, 욕망, 책임 같은 걸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그려낸다. 리스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때론 이기적이기도 하고, 에임스는 과거의 선택과 현재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카트리나는 비혼모가 될 각오도 되어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외로움도 있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트랜스젠더가 나오고, 디트랜지션이란 낯선 개념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은 인간 이야기다.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우리와 어느 한구석은 다르지만 누구나 안고 사는 외로움,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가족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망이 이 사람들 안에도 똑같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그걸 무척 사실적이고 날카롭게 묘사해준다.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이 책이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완전히 다시 써내려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엄마 아빠 아이’라는 가족 모델에 익숙하지만, 여기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키우고, 책임지려 한다. 그 방식이 꼭 이상적이지도 않고, 말끔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게 더 현실 같아서 와닿는다. 사실 전통적인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게는 어느 정도 그런 가족의 형태에 대해 날선 표현도 느껴지긴 했지만 결국은 세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도, 동시에 아이에게는 뭔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그 진심이 가슴을 울린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책 같은 작품이 나왔다는 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시대의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이야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읽고 나면 나랑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그들을 차갑게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곰곰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얘 쳐다보지 않고 외면하며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읽을 가치가 있다. 익숙한 세계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 보면, 또 다른 사람이 보인다.
'디트랜지션, 베이비'는 그런 걸 아주 똑똑하게, 때로는 웃기게,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게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