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인간
염유창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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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유창 작가님의 마이너스인간을 읽었습니다.

작가님의 전작인 불특정 다수에 이어 두번째로 접하게 된 작품으로 전작보다 훨씬 깊이 있고 미스터리 소설 특유의 반전이 주는 재미 역시 한껏 끌어올린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은 범죄자들의 반성문을 대필해주며 그 의뢰비로 생계를 이어가는 실패한 작가 기시윤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그는 거액의 고료와 현실과의 타협 끝에 한숨심리상담센터의 센터장 조찬식의 대필의뢰를 받아 포레그린뷰재난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책으로 담아내기 위해 직접 생존자들을 발로 뛰며 인터뷰하게 됩니다.

포레그린뷰 재난 사건은 산사태로 인해 포레그린뷰의 입주민 중 아홉명이 지하 주차장에 고립되었던 사고인데요. 놀랍게도 모든 전문가들이 생존자가 나오기 힘든 사건이라고 분석하는 와중에 단 한명만의 사망자를 제외한 전원이 기적적으로 생환하게 됩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은 사망한 희생자를 영웅으로 만들지만 시윤은 이 사건을 인터뷰하며 생존자들의 증언들이 미묘하게 어긋나며 그들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며 실제로 그 날에 벌어졌던 일의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반성문 대필작가라는 신선한 소재를 바탕으로 실제 사회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사고와 유사한 소재를 인용해 몰입감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현재 사법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시작되어 밀폐된 공간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벌이는 본격미스터리 냄새 물씬 풍기는 심리스릴러로 이어 집니다.

어떻게보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과 재난 상황에서의 윤리학과 심리학을 다룬 구명보트 딜레마를 통한 개인의 도덕적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미스터리 소설을 통해서만 즐길 수 있는 반전이 주는 쾌감 역시 훌륭하게 이끌어냅니다.

엇갈리는 진술을 통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나가는 구성은 익숙하지만 그 익숙한 소재를 다양한 주제의식들과 함께 기깔나게 표현해 내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역량일텐데 그런면에서 염유창 작가님의 마이너스 인간은 훌륭하게 이야기에 독자를 몰입시키면서 연달아터지는 반전으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완성도 있는 재미를 보장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주제인 '그 날의 진실' 외에도 다양한 의문이 이 이야기의 미스터리 요소를 더합니다.

조찬식은 왜 포레그린뷰 재난사건을 책으로 내려고 하는가.

그리고 왜 하필 많고 많은 작가 중에 시윤인가.

시윤이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트라우마는 무엇이며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정말 오랜만에 새벽 2시가 넘어서까지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면서도 책장을 덮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은 추리소설로 염유창 작가님의 마이너스 인간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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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 오스틴 지음, 나연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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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오스틴 지음 클레이하우스 출간 서평



에밀리 오스틴의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는 삶과 죽음, 종교와 정체성, 불안과 유머가 한데 엉킨 이 시대 청춘의 비망록이다.

주인공 ‘길다’는 죽음에 대한 집착과 극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20대 여성으로, 무료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 들른 성당에서 얼떨결에 리셉션으로 채용된다. 무신론자이자 성소수자인 그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장하고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삶에 남겨진 사람들’의 무게를 다루는 유쾌한 미스터리로 전개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직접 읽기 전, 표지의 토끼와 왠지 모르게 따스한 그림체의 표지를 보고 이 소설을 힐링성장소설정도로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서점의 세부 분야가 미스터리/스릴러소설로 분류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해당 분야의 요소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으며 해당장르의 재미요소까지 충실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표지에 등장하는 토끼가 이미 살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스릴러소설의 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길다는 전임 접수원 ‘그레이스’의 죽음과 관련된 이메일에 거짓 답장을 보내고, 그 사건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면서 점차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한다.

이 소설은 ‘감자튀김이 먹고 싶어서 죽을 수 없다’는 익살스러운 문장에서처럼 무기력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사랑스럽게 그려낸다. 특히 길다의 정신이 나가버린 것 처럼 되는대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과 ‘지금 내가 미쳐서 이런 일을 겪는 건가’라는 자기 반문은, 자조적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춘다. 현실과 감정의 시차에 괴로워하고, 존재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타인의 아픔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야기는 가톨릭의 절기 ‘대림절’부터 ‘부활절’까지 총 다섯 장으로 나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길다의 변화와 감정의 깊이를 조금씩 보여준다.

엘레노어와의 관계, 남동생 일라이의 방황, 주세페의 왠지 모르게 이상한 구애 등 모든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며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다는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길다는 ‘세상의 밝은 면을 봐야 한다’고 스스로 되뇔 만큼, 위태로운 균형을 잡으며 삶을 버텨내는 인물이다.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는 고통을 무겁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오히려 더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이 소설은 우울과 불안이 단지 병리적인 증상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디폴트’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길다는 실패하고 비틀거리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실감나는 인물이며, 가장 현실적인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웃기고 슬프며, 무엇보다 솔직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묻는 가장 오래된 질문을, 가장 솔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묻는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곁에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고, 그래서 또 공감되고 위로로 다가온다.


종교에 퀴어에 삶과 죽음의 의미까지 다루면서도 읽다 보면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에밀리 오스틴의 작품 '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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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 갱 올스타전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 지음, 석혜미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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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갱올스타전 나나크와메아제브레냐 디스토피아스릴러소설 서평 황금가지출간


'체인 갱 올스타전'은 미국 작가 나나 크와메 아제 브레냐가 쓴 장편소설로, 가까운 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작가로, 검색을 하게 되면 전미도서재단이 선정한 젊은 작가 5인에 선성되기도 했는데 나이가 91년생으로 33세의 나이에 이 정도의 재미와 사회적 메세지까지 담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왔다.


체인 갱 올스타전은 CAPE라는 이름의 국가 승인 민영 기업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이 프로그램은 장기 복역수나 사형수가 생존 게임에 참여하면 자유를 얻을 기회를 준다는 명목 아래, 그들의 생존 경쟁을 생중계하고 오락화한다. 말 그대로 죄수들이 투기장에 끌려나와 서로를 죽이며 살아남는 모습을 쇼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책의 뒷표지를 보면 1984와 시녀이야기와 이 책의 주제의식에 대해 비교하고 있었는데, 나는 다카미 코슌의 배틀로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사회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는 해결방식이 매우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


또 다른 시선으로는 죄 대신 가난으로 구경거리가 되어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오징어게임이나, 거의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시대적 배경이 과거와 미래로 극명하게 갈렸던 영화 글레디에이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계급과 독재를 배틀로얄 방식으로 풀어냈던 헝거게임 역시 연상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전하는 문제에 대한 메세지의 무게는 체인 갱 올스타전이 가장 밀도있게 느껴졌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두 주인공 서워와 스택스 역시 범죄자의 신분으로 배틀그라운드에 참여하고 있다. 흑인에 성소수자이며 사형수인 것. 둘은 같은 체인에 소속되어 사랑을 키워가며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이어가지만 결국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단순한 죄수나 투사라기보다는, 인간성과 윤리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존재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체인을 이루었지만 곧 생사를 가르는 싸움에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시스템에 순응하면 자유가 보장되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깨닫게 되는 모순.


작가는 그런 갈등과 딜레마를 통해 인물들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줄거리를 모두 드러낼 수는 없지만, 단순히 목숨을 건 경쟁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선택과 감정의 변주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에서 표현되는 그 어떤 등장인물들이 죽어도 전혀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죄질을 보면 살아있는게 더 사회에 해악이 될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

아이러니한 점은 소설 속 그들조차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해 나와같이 비슷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들의 죽음을 기꺼워하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모습을 통해 나 역시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와 별 다를바 없구나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는 명확하고도 날카롭다. 미국의 감옥 산업 복합체, 사법 시스템의 인종차별적 구조, 그리고 자본주의가 인간 생명을 어떻게 상품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특히 유색인종이 과도하게 형벌의 대상이 되는 현실, 수감자들의 노동이 기업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작품은 내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윤리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무거운 주제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흡인력도 상당하다.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피해자나 영웅이 아닌,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 소설이 500p가 넘는 장편임에도 펼친 그 자리에서 다 읽게 해주는 것은 이 소설이 언젠가 성공적인 미디어믹스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 혹은 애니로라도 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전투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였다.

각기 다른 매력적인 무기를 휘두르며 거칠고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배틀그라운드의 전투장면은 소설을 읽고 있지만 이미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그 장면이 재생되는 것 처럼 느껴졌다.


강렬한 사회적 메세지와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원하는 분들께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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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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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디트랜지션, 베이비'다. 디트랜지션은 성환원, 그러니까 트랜스젠더가 다시 원래의 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베이비는 음.. 그냥 아기다.

사실 제목부터 좀 낯설고(디트랜지션만, 베이비는 지금 몹시 익숙하다.), 내용은 더 낯설다.


트랜스젠더, 디트랜지션, 비전형적인 가족 관계 같은 말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살짝 당황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고. 사실 나는 이 쪽 분야의 용어에 전혀 무지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검색을 하며 읽어야 했는데 심지어, 시스젠더라는 단어도 처음 접했을 정도.

이 책을 읽으며 당황하게 되는 요소는 낮선 퀴어단어 뿐만이 아니다. 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고 성적인 요소들은 더 직설적으로 음란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이 책, 읽다 보면 그런 당황스러움이 아니라 ‘아, 이런 식으로도 인생을 꾸릴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뭔가 고정관념이 한두 개쯤은 깨지는 기분이다.


주인공은 리스라는 트랜스 여자인데, 이 친구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걸 꿈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의 전 연인이었던 에임스는 원래 트랜스 여성이었다가 다시 남성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그 에임스가 리스와 헤어진 후 다시 남자의 삶을 살면서 평범한 이혼녀인 회사 동료 카트리나를 임신시켜버린다. 문제는, 에임스 본인은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카트리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는 점. 그러다 보니 이 셋이 기묘한 제안을 하게 된다. 세 사람이 함께 아이를 키우자는 거다.


이쯤 되면 이야기 전개가 상상 그 이상이다. 그런데 웃긴 건, 작가는 이런 황당한 설정을 진지하게 끌고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상처, 욕망, 책임 같은 걸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그려낸다. 리스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때론 이기적이기도 하고, 에임스는 과거의 선택과 현재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카트리나는 비혼모가 될 각오도 되어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외로움도 있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트랜스젠더가 나오고, 디트랜지션이란 낯선 개념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은 인간 이야기다.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우리와 어느 한구석은 다르지만 누구나 안고 사는 외로움,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가족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망이 이 사람들 안에도 똑같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그걸 무척 사실적이고 날카롭게 묘사해준다.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이 책이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완전히 다시 써내려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엄마 아빠 아이’라는 가족 모델에 익숙하지만, 여기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키우고, 책임지려 한다. 그 방식이 꼭 이상적이지도 않고, 말끔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게 더 현실 같아서 와닿는다. 사실 전통적인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게는 어느 정도 그런 가족의 형태에 대해 날선 표현도 느껴지긴 했지만 결국은 세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도, 동시에 아이에게는 뭔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그 진심이 가슴을 울린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책 같은 작품이 나왔다는 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시대의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이야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읽고 나면 나랑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그들을 차갑게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곰곰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얘 쳐다보지 않고 외면하며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읽을 가치가 있다. 익숙한 세계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 보면, 또 다른 사람이 보인다.

'디트랜지션, 베이비'는 그런 걸 아주 똑똑하게, 때로는 웃기게,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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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 사이드미러
여실지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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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티 출판사의 신작 난기류는 현대 사회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직장내 괴롭힘을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대한항공이 떠오르는 가상의 국내 1위 항공사 알파에어를 배경으로, 위계가 강하고 폐쇄된 조직 속에서 점점 파멸해가는 인간 군상을 냉철하고도 서늘하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여실지 작가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화두를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로 그리지 않고, 시스템에 의해 조장되고 강화되는 피지배층 간의 갈등으로 묘사함으로써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 무엇보다 피해자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일수 있다는 점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소설은 두 명의 여성 승무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1부는 은하의 이야기다. 온화하고 사회성이 좋은 은하는 노조 활동을 하며 이상을 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로 인사팀 업무를 맡으면서 동료들로부터 고립된다. 회사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떠맡은 은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료의 징계에 일조하게 되고, 결국 노조 선배의 비극적 죽음 앞에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짓눌린다. 가혹한 업무, 동료들의 냉대, 점점 깊어지는 죄책감 속에서 은하는 A380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 삶을 끝낸다.

2부는 은하의 죽음 이후, 그 자리로 들어온 신입 승무원 수연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은하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연은 터부시되고, 가혹한 괴롭힘을 견뎌야 한다. 수연은 처음에는 꿋꿋하게 버텨보려 하지만, 점점 외로움과 두려움에 짓눌린다. 노조에 가입해보지만, 노조마저 부패로 붕괴되고 만다. 기대할 곳도, 기댈 사람도 없는 현실 속에서 수연은 LA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기체는 난기류를 만나게 되고, 기묘한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

이 소설에 정말 감탄했던 부분은 수연 역시 직장내 괴롭힘을 직접 겪기 전에는, 은하가 겪고 있는 고통을 '출근 할 수 있는 자들의 배부른 투정'이라고 치부했다는 점이다. 결국 돌고 돌아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이는 직접 경험해봐야 얼마나 괴로운지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한다.

난기류는 서사의 구조 또한 탁월하다. 1부는 다중 시점으로 은하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행동한다. 이들의 다양한 시선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주제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2부는 수연의 단독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수연이라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독자 역시 점점 조여 오는 공포와 압박감을 체감하게 된다. 작가가 선택한 이 대비는 이야기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특히 난기류는 '괴물성'에 대한 통찰을 품고 있다. 괴물은 단지 가해자만이 아니다. 소설은 괴물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태어나며, 때로는 피해자 또한 다른 누군가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혹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스스로 악해진다. 그것이 일터의 비극이다. 여실지는 이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다. 덕분에 인물들은 단순한 선악의 도식에 갇히지 않고 입체적인 케릭터로 다가온다.

작품은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현실을 교묘히 엮어낸다. 승무원 대량 해고, 무급 휴직, 줄어든 인력과 늘어난 업무 강도. 항공업계의 붕괴 속에서 승무원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지고, 그 안에서 괴롭힘과 고립은 심화된다. 이 배경은 난기류에 더욱 설득력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항공업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이라는 공간, 일터라는 시스템 안에 갇힌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특히나, 알파연대가 해고 때문이 아닌 감축시대에 적응한 인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 때문이라는 점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와 감탄하게 된다. 항공사는 아니지만 내가 경험해본 직장생활도 대부분 그랬으니까.

난기류는 단순히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도 훌륭히 살린다. 특히 기내에서 벌어지는 난기류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작가는 한편으로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난기류를 읽는 내내 독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제공한다. 후반부에는 오컬트적인 요소도 적극 활용하여 장르문학의 재미를 선물한다.

난기류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어두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그 안에 놓인 인간 군상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난기류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우리 사회가 마주해야 할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일터라는 이름의 지옥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 난기류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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