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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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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겨레>의 에디터인 고경태 씨가 기획하고, 성공회대 교수인 한홍구 씨와 시인 서해성 씨가 한 명의 인물을 초청해 대담을 나누는, 일종의 인터뷰 북이다. 본래는 한겨레(www.hani.co.kr)에서 외부 필자들의 칼럼을 고정적으로 연재하는 'hook'의 한 코너로, 지금도 사이트를 방문하면 주 별로 진행되었던 대담을 한 편씩 읽을 수 있다.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코너는 1년간 총 50회를 진행한 뒤 올 해 5월에 끝을 맺었고 그 결과가 한 권으로 묶여서 8월에 나온 것이다. 연재되던 당시 다음 주엔 누가 나오나 기대하며 한 편 한 편씩 읽어온 터라 책을 통해 처음의 대담부터 다시 읽고 있자니 해당 대담이 진행되던 시기 사회에나 나 개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다시 떠올라 무척 즐거웠다.


'직설자' 가운데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한홍구 교수부터 소개하자. 한홍구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이수하고, 워싱턴 대학에서 일제 시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대학원에 있을 당시 흉흉한 시국 탓에 그 말고는 현대사를 전공으로 하는 이가 적었기 때문에, 5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현대사 분야에서는 1세대, 혹은 원로로 대우받는다고 한다.


한홍구는 참여정부 때에 '국가정보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원회) 민간위원회'으로 위촉되어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조사하였다. 진실위원회에서도 2007년 그 결과를 책으로 발표하였지만, 더 접하기 편한 것은 그의 저서인 <대한민국史> 총 4권이다. 이 책에는 진실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 뿐 아니라 그가 계속해서 흥미를 갖고 연구해 온 정치, 병영, 사학, 종교 등의 다종한 문제가 많은 자료와 함께 실려 있어 한국현대사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데에 큰 힘이 된다. 인터넷 서점에서 세트로 묶여서 비교적 큰 할인폭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꼭 구입하도록 하자.


현 정부 들어서는 학생과 시민을 상대로 하여 위의 내용들이나 시국 분석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수 차례 진행하였고, 그 결과는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로 묶여서 나왔다. 특히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할 당시 진행되었던 강의의 강의록으로, 읽다 보면 당시의 좌절감, 분울함, 애도의 마음 등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두 권 다, 필독서다.



'직설자 2' 서해성 씨는 사실 '직설' 코너를 접하기 전까지는 시인이라는 것과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등을 기획한 문화계 인사라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사실은 지금도 몇 차례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짜투리 지식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한 달에 한 번씩 고정 토론 패널로 나오는 방송을 듣고 있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이 정도만 적는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imbc(www.imbc.com)의 '라디오' 코너에서 mp3 화일로 무료로 다운받아 들을 수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 들어보자. 상대 패널은 보수 논객으로 이름난 전원책 변호사.  

 

 
이제 책의 내용과 구성 이야기를 해 보자. 온라인 '한홍구 - 서해성의 직설' 코너는 총 50회였지만 그 가운데에는 새로 시작하는 코너의 소개나 한 주제에 관해 한홍구와 서해성 두 사람만 대담을 나눈 경우도 있어, 실제로 인터뷰를 한 인물은 총 36명이다. 



대담의 한 편 당 분량은 대체로 12쪽 가량으로 잘 편집되어 있다. 1쪽은 편집자의 입장에서 전하는 대담의 분위기, 혹은 인터뷰이의 소개이고, 12쪽은 한홍구와 서해성이 번갈아가며 그 날의 주제와 인물에 대해 평을 쓴다. 예습하고 복습하게 만드는, 좋은 구성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10쪽에는 분량에 따라 1쪽짜리 전면 사진이 한 장, 혹은 두 장이 들어가고, 전체의 내용은 약 네 개 정도의 소주제로 분류된다. 주제에는 '4대강'이나 '담뱃세', '6자회담' 등 개별 이슈인 경우도 있고 인터뷰이의 인생 전체를 회고하는 경우도 있다.  



코너가 진행되던 때에는 그 주에 화제가 되었던 인물, 혹은 당시 섭외가 가능한 인물 위주로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책으로 묶이면서는 인물의 성격에 따라 크게 4부로 나뉘어 재편집되었다.



1부 '통찰 혹은 구라'에는 사상가, 혹은 광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여덟 명이 소개되었다. 직업 면으로만 보자면 '먹물/딴따라'로 구분될지 몰라도 면면이 살펴보면 모두 통찰과 구라를 겸장한 고수들이다. 돌아가신 뒤에 진행된 가상 인터뷰의 주인공 리영희 교수를 비롯해, 고은, 유홍준, 백기완, 김제동, 김영희, 류승완, 진중권이 이 챕터로 분류되었다.


특히 눈이 가는 것은 '리영희-백기완' 세대, '유홍준-한홍구-서해성' 세대, '김제동 - 류승완 - 진중권' 세대로 이어지는 '구라의 계보'다. 백기완 선생은 예외적인 존재이지만,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글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이미지로,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감성보다는 재미로 재정의 되어가는 '구라의 속성'을 목도할 수 있다. 경천동지할 입심의 '구라'들이 별안간 나타나 시대의 흐름을 바꾸었다기보다는, 바뀐 시대의 흐름이 그 품새에 어울리는 '구라'들을 토해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2부 '분노의 무늬'에서는 특히 현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주목해 해당 주제의 '권위자'를 호출한다. MB 정부에서 시위를 진압할 때나 인터넷, 방송을 검열할 때 뻔질나게 써먹은 '법치주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등판한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청계천 사업을 주도했으나 4대강 사업에는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된 최열 환경재단 대표,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로 '정의'를 꼽은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등이 그 예이다. 



3부 '시대의 생각들'의 목차를 보면, FTA나 구제역, 담뱃세 인하 등의 당기적 이슈들이 있어 소제목만으로는 2부와 큰 변별력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보면 개별 이슈에 집중하던 2부에 비해 3부는 환경, 복지, 언론 등 폭넓은 대주제에 헌신해 온 '인물'들의 이력, 신념, 주장 등을 소개하는 데에 더 힘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FTA의 관해 지금도 꾸준히 글을 올려 그 실체를 알리고자 노력하는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이해영 교수의 글은 특히 이 대통령이 방미한 뒤 급물살을 타고 있는 한미 FTA에 관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 '빨갱이 신부'라고까지 불리워 가며 삼성 비자금 폭로, 촛불집회, 용산참사 거리미사, 4대강 공사 반대 기도회의 최전선에 섰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총무 김인국 신부, <시사투나잇>, <추적 60분>의 프로듀서를 거쳐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위원장으로 취임해 종편과 싸우고 있는 이강택 PD의 일갈이 실려 있다. 어제인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오늘 첫 출근을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온갖문제연구소장 원순 씨'로 출연한다.



4부 '그들의 변명, 그들의 희망'은 정치인을 묶어 놓은 챕터이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친노 세력들이 참여 정부의 공과에 대한 성찰 없이 '노무현의 이름을 빌려' 부활하였던 세태에 대해 ''놈현' 관장사를 멈춰라'라고 하였다가 유시민 전 장관의 <한겨레>절독 선언과 <한겨레> 편집국장의 사과문 게시까지 불러일으켰던 천정배 민주당 최고의원과의 인터뷰도 여기에 실려있다. 한홍구와 서해성은 이후 수 차례의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자신들 또한 노무현의 서거에 대해 누구보다 슬퍼했었고,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노무현 정신'의 진정한 계승에 대한 고민 없이 정치적 입지의 확립을 위해 그의 이름을 빌리는 이들에게 분노했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왔다고 밝혔다. 한 평론가는 이 사태에 대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과 노무현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간의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직설> 책 전체는 대부분 시민 운동가나 사상가 등 '왼쪽'의 사람들을 주로 소개했는데, 이 챕터에서는 김성식 한나라당 정책위 부의장,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의원,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서민정책특위 위원장과의 대담이 실려 있다. 세 명 모두 '저쪽'에서는 '비주류'이거나 '주류였던', 그리고 '비교적 말이 통하는', 편이라고 평가되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오가는 말에 날은 분명히 서 있다. 특히 영원한 독고다이 홍준표나 현 정권의 핵심인사들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정두언에 비해 한나라당의 정책통으로 통하는 김성식 의원과의 대담에서는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나 '얼굴은 시뻘개'지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그 외의 면면은 강기갑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 김두관 경남지사, 박지원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 정동영 민주당 최고의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정치인들의 언술이니만큼 그 수사는 1부 - 3부의 인사들의 그것만큼 명쾌하고 담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타 언론들과의 인터뷰들보다는 훨씬 날것이다.




총평하자.


장점 하나. 시민운동계, 노동운동계, 사상계 등에 대해 한 권의 분량에서 이 정도로 널찍하게 알아둘 수 있는 것은 사회공부 입문자에게 축복이다. 그 이상은 검색이나 추천서적을 통해 해결할 일이다.


장점 둘. 사학자답게 면전을 정곡으로 찌르는 한홍구는 담백하고 칼칼한 평양 백김치 같고, 시인답게 구비구비 에둘러 뒤통수를 후려치는 서해성은 젓갈이 듬뿍 들어간 남도 갓김치 같다. 어떤 인터뷰이가 들어와도, 터줏대감인 황금콤비는 나름의 가락을 만들어낸다. 듣다 보면, 한 편은 금방 끝난다.


장점 셋. 온라인으로 한 편 한 편 넘겨가며 클릭하다가 눈 버리는 비용이나, 이 코너만을 위해 한겨레를 매 번 사 보는 구독료가 얼마일지를 세어보면, 이백 장 남짓의 사회과학 서적도 만오천 원을 쉽게 뛰어넘는 요즘 500쪽이 넘는 이 책이 정가 만팔천 원인 것은 재능기부의 차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합쳐서, 필독서. 두 권 사서 나눠주고 세 권 사서 쌓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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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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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일은 아니라 일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나는 작년에 생계와 그 외의 목적을 위해 한 분기 정도를 들여 논술학원에 전임처럼 출강한 적이 있었다. 기형화된 사교육 시장 덕분에 보수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아, 일자리가 있을까 싶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여러 학원 가운데 선택을 해야 했다. 면접의 낭인 길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한 학원은 인천의 본가 근처에 있는 것으로, 지하철로 세 정거장 쯤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 면접을 마치고 나면 나는 그간의 면접사항을 쭉 늘어놓고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되는 일이었다.

서울에 세 정거장 가까운 본가에서도 통학하기가 싫여 출가한지 십 년이 되어 간다. 일단 예의라 면접은 보러 가면서도 어쩔까 고민 중이었는데, 초행길이 두시간 반이 걸렸다. 왕복이면 다섯 시간. 급여를 한 배 반쯤 더 주지 않는 이상 무조건 거절해야지. 마음을 먹고 걷는데 어디선가 봤던 길이었다. 학원을 찾아 헤매면서 생각을 해 보니, 십여년 전 고등학교 때 잠시 만났던 여자친구, 한 달 용돈 4만원에 주제넘게 택시를 타고 그 친구를 두어번 집까지 데려다 줬던 일이 있는데, 그 길이었다. 무슨 아파트였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아무튼 길을 걷다보니 어디서 뭘 했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등이 떠올라 나는 지갑속에 묵혀뒀던 복권이 1등에 당첨된 듯한 기분이 되었고, 통근 시간과 차비를 고려하면 다른 학원들에 비해 그닥 나을 것도 없는 그 학원과 계약을 했다.

꽤 오래 전에, 고작 몇 달이지만 강남 애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농담이나 개인적인 관계 쌓기에 철저하게 경계심을 보이고 문제 해설에 사사건건 토를 달던 그 아이들은, 어느날 그 애들이 가져온 고난이도의 문제를 내가 앉은 자리에서 풀고 해설까지 해 주자 곧장 신도처럼 변했다. 애당초 서로의 관계라는 것이 돈 받고 기술 가르치러 간 거지만 목적의식에 100% 경도되어 있는 그 모습이 혐오스러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향의 애들은 꼭 도둑고양이처럼, 퉁명스럽게 인사하고 이따금 멋적은 듯 웃으면서 아주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앞으로 그 애들 인생에 꽤 긴 시간동안 상당한 영향을 미칠 대입 정보를 물어다 줄 사람이 전문가도 아닌 나 같은 사람 뿐인 그 처지에 내 옛 모습이 겹쳐져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강의실만큼이나 긴 시간을 그들과 옥상에서 보냈다. 대학 입시논술 기간의 특강이어서 짧으면 4강, 길어봐야 8강만에 헤어질 사이의 학원 선생한테, 앞으로 몇 년동안 기억될 지난 겨울의 추운 바람에 발끝이 얼어가면서도 그들은 평생 그런 말들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본 적이 없던 것처럼 자기 얘기들을 쏟아내었다.

정식으로 취업한 뒤의 첫 제자들은, 대부분 논술 입시에서 낙방을 하거나 지원한 대학보다 낮은 곳에 입학을 했다. 정보도 없고 이름난 학원도 없고 명문 고등학교도 없는 곳에서 태어난 팔자를, 막판에 수십 만원 들인다고 바뀔까 싶었던 건 그 애들의 부모들만의 꿈이었을 뿐 그 애들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둘씩 결과를 알리는 메일을 받으면서, 나는 옥상에서 애들의 얘기를 들었으면 충분했지 괜한 충고들을 했던 건 아닐까 하고 자책했다. 
  


전성기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둘리는 일용노동직, 도우너는 사기꾼, 희동이는 조직폭력배가 되어버린 단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광주항쟁이 보통 사람의 일생에 남긴 것에 대한 <100'c> 등 사회에 관해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온 만화가 최규석의 신작 <울기엔 좀 애매한>이다. 이번 작품은 작가가 미술학원에서 대학 입시를 위한 만화를 가르쳤던 경험에 근거해 그려졌다고 한다.   

작가는 관조적이며 염세적인 페르소나를 작중에 관찰자 역할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주인공은 작가가 일하는 학원의 미대 지망생들이다. 아이들마다 각자 개인적인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감성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기본적으로 작중의 아이들이 지닌 근원적 문제는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빈부 격차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의 구조에서 발원한 것이다. 제목인 '울기엔 좀 애매한'은 작중 인물의 대사 가운데 일부인데, 모여서 서로 힘든 사정을 자랑하며 낄낄거리는 학생들에게 한 여학생이 '찌질하다'며 비난을 하자 한 인물이 다음

과 같이 말한다.

"그게 말이지, 나도 그래서 한번 울어 볼라고 했는데... 이게 참 뭐랄까... 울기에는 뭔가 애매하더라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고아가 된 것도 아니고..."

재수생인 이 학생은 딱지가 붙은 집이 있고,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가 있고, 꿈을 포기한 동생이 있다. 재수생활은 맥주집 알바로 꾸려가고 있는데, 그 적은 돈마저도 집의 사정 때문에 받기도 전에 인출되어 버렸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이다. 이런 일들은, 이제 전쟁이나 고아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 비교해서만 울지 않을 수 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누가 고작 스무 살 먹은 아이에게 이런 일로는 울지 말라고 가르쳐줬단 말인가. 그 정도의 일을 겪는 사람이 주위에 수도 없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깨우친 것일 터이다.

최규석 씨는 권두에 다음과 같이 썼다.

"20대부터 30대 초반의 몇몇 시기에 미술학원에서 대학 입시를 위한 만화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보지 않으면 나았을 테지만 매일같이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는 상황을 겪고 나니 그들을 위해, 아니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내가 퍼부었던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

일기라도 썼어야지. 잘 한다, 하고 나는 자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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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공화국, 대한민국
김희수 외 지음 / 삼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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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4명이 법학자이거나 법에 관련한 글을 쓰시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구조가 확실해서 어려운 내용임에도 읽기가 쉬웠다. 그런만큼 차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이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1부 검찰의 역사

1장 검찰의 역사를 보는 눈    2장 이승만 정권과 검찰    3장 박정희 정권과 검찰    4장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검찰 5장 김영삼 정권과 검찰    6장 김대중 정권 이후의 검찰


2부 검찰의 현주소

1장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닌 검찰    2장 대한민국 검사의 지위와 권한    3장 검찰의 궤도 이탈


3부 우리 시대가 바라는 검찰

1장 사법 개혁의 단골 메뉴, 검찰 개혁     2장 검찰 개혁을 위해 기울인 노력    3장 환부를 드러낸 검찰과 법무부 4장 검찰 바로 세우기    5장 법치주의의 수호를 기다리며


차례에서 드러나듯이 3부 구성은 검찰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검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폐해가 개개인의 인성 탓이 아니라 이미 고착화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2부, 그리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3부이다.

지난해 스폰서 검사 사건이 발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격발시켰던 것은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의 '네가 뭔데?'라는 발언이었다. 방송을 위한 취재 중인 PD에게조차 예외가 없었던 고압적 자세가 정서적 반발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같은 방송 내에 검찰 내부의 비리를 감독관리해야 할 감찰부에서조차 향응 관계가 있었다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와 이후 가장 큰 관심을 몰고다녔던 것은 역시 박기준 전 검사였다.

박 씨는 이후로도 복직 신청 항소를 제기하는 등 계속해서 논란거리를 만들어 냈는데,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만약 그가 자숙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이다. 검사야 옷벗어도 변호사 개업하면 그만이고, 퇴직한 지검장들이 이전의 자기 관할지역에서 버젓이 사무소를 내어 온갖 사건을 빨아들이듯 가져가며 100%에 가까운 승률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이 정도도 모르면 비웃음을 산다. 그런데 박기준 씨가 위와 같은 혜택을 깨끗이 포기하고, 과오를 모두 인정한 뒤 사회봉사라든지, 국익을 위한 일에 자신의 재력과 체력을 쏟아부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우리 국민들의 검찰 조직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PD수첩과 이 책이 지적하고 있듯 검사 개인에게 지나친 권력을 몰아주는 현 제도에 있다.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제 2의 박기준이 양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박기준 씨 개인이 그 뒤로 깨달은 삶을 살았든 여전히 향응이나 지름길 등에 익숙한 삶을 살았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그런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일인데, 우리 국민의 여론은 그처럼 치밀하고 근원적인 데까지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정도 고생했으면 됐지 뭘'이라든지 '능력이 아깝지 않은가'같은 반응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사건들 중 어떤 사건이 잘못되었는지, 그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사람은 현재 무슨 위치에 있는지, 또, 제도의 어떤 점이 문제이고, 그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을 명확하게 지시해 놓은 점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 책에는 삼성 비자금 사건이나 노무현 대통령 조사 사건 등의 책임 관련자 들이 실명으로 실려 있는데, 나도 처음에는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정감'에 기초한 정서적인 판단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러한 정서적 판단 때문에 그들이 잠시의 비난에만 버텨낸 뒤 또다시 특권을 누리거나 혹은 영전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런 방법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 책은 좀 더 많이 나와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성의 백혈병 노동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도록 의결한 사내 회의는 어떤 것인지, 구성원은 누구인지. 종합부동산세를 감면해 주도록 투표한 국회의원은 누구인지, 지역구는 어디인지. '국회의원은 다 나빠', '삼성이 다 그렇지'와 같이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구호는 시민으로부터 현실적인 행동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하지만 이름과 얼굴을 알면, 하다못해 친구라면 술자리에서라도 한 마디 충고할 수 있는 것이고, 오다가다 마주치면 쏘아봐 주기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인상적이었던 부분 하나만 적어두고 끝내려 한다. 청와대 민정수석에 검사들이 자주 임용되는 것은 정동기 씨 사건을 접하는 중에 알게 된 바 있었다. 그런데 법령에 따르면 검사는 다른 부처에 파견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검사들은 일단 휴직이나 퇴직을 한 뒤 민정수석을 지내고, 임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복직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고 한다. 뒷구멍으로 돈 받아먹는 거야 내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별 수 없다지만, 정부와 법무부의 최고위직에서 이러한 편법적 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면서 법치 사회를 운운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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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 공화국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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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신방과 교수인 강준만 씨의 새 책이다. 멀리서 여러 권이 쌓여 있는 모양새를 봤을 때엔 표지가 좀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한 권을 들고 오며 여러 번 쳐다보니 그 의도된 키치가 재미있기도 하다. 출판사는 인물과 사상사.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은 강준만 씨의 '한국 사회문화사 시리즈' 중 아홉 번째 책이다. 그
이전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커피, 다방, 축구, 강남, 입시, 전화 등의 키워드가 들어 있어, 다방면에 걸쳐 문화사 연구를 진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나는 시간 절약을 위해 특정 장르의 글은 덮어놓고 읽지 않는다는 고백을 한 일이
었는데, 문화사는 그 중 대표적으로 꼽는 것 중 하나이다. 물론 하나의 주제의식 하에 잘 기획된 문화사 서적도 적지 않지만, 대중의 화제에 오르거나 접하기 쉬운 책들의 독서 경험은 대개 크게 재미있지 않은 잡지를 읽은 기분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문화사는 다큐멘터리 채널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해서, 커피나 바나나 등에 관한 문화사적 지식은 영상물을 통해 훨씬 더 재미있게 접한 경험이 있는 터였다. 와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던 것은 일단 눈맛이 당기는 소재 탓이 첫 번째였고, '한국 현대사 산책'을 통해 쉽게 읽히는 글을 접했던 저자에 대한 신뢰가 두 번째였다.

이 책은 해방 이후부터 스폰서 검사 사건이 터졌던 2010년까지를 총 8장으로 나누어 해당 시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총 8장 가운데 4장부터 8장까지의 다섯 개 장은 2000년대 이후를 다루고 있어 근현대사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도 기억 속의 사건을 떠올리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내용은 룸살롱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하여, 룸살롱에서 일어난 사건, 룸살롱 문화의 본질 등에까지 방대하게 뻗어나간다. 개별 사안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드물게 보이는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룸살롱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한 권 안에 접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문화사의 미덕이다.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없었던 근현대사의 정치적 비화 뿐 아니라 '텐프로'와 같이 실제 룸살롱에서 쓰이는 비속어 등까지 두루 기재되어 있는 방대한 정보 등이 그 예이다. 강준만 씨 개인의 수집 편력에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는데 다른 이들이 활용을 못 하는 것 뿐일까?

흥미로운 여러 꼭지들을 지나 '맺는말'의 형태로 저자가 요약하는 바는, '룸살롱 문화'는 한국의 '칸막이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며, '칸막이 문화'는 '조직의 공동체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끼리끼리 문화'가 낳은 음지의 자식이 '룸살롱'이라는 원적 불명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성을 거부하거나 배제'하고,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할 내부 비판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이 '칸막이 문화'를 어찌 하면 좋을 것인가? 좋지 않으니 없애자, 라는 원론적 결론을 낸다면 선정적 화제를 꺼내어 코묻은 돈이나 떼어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정체성 부여와 그에 따른 사기 진작'이라는 '나름대로의 순기능'을 인정하되 '부처 간 교환 근무 인사'나 '평가 시스템의 개혁'등의 대책을 통해 개선해 나가자는 끝말을 내놓았다. 그 이상은 이 책에서 다룰 바가 아니다, 라면 할 말 없지만 기대하던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하긴 하다. 흥미로운 정보의 편집을 통해 끌어들인 독자들에게 건전한 가치관, 상식을 심어주는 데에까지 나아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총평하여, '룸살롱'이라는 소재에 대한 훌륭한 자료집이므로, 사회 제반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된 글을 쓰는 이는 반드시 한 권 사 두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훨씬 즐겁게 읽은 다른 책들도 근래 형편 때문에 살까말까 고민 중인 나로서도 당장 구매 최우선순위에 이 책을 올려두었다. 끝에 소심하게 슬쩍 덧붙이는데, 책 제목은 좀 심하게 식상하지 않은가 싶다. 제목 바꾼 탓에 흥행에 시뻘건 불 들어갔다고 평해지는 영화 '나는 아빠다'에 한 치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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