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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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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사람에게 추천을 하는 글이니 부끄럽지만 자기고백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과학 도서를 거의 읽지 않는다. 화제가 되는 베스트셀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과학 도서를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이 쓴 과학 도서 독후감이다. 새 독자층을 과학 도서로 유입시키려는 편집자에게는 소소한 지침이, 이제야 과학 도서를 좀 읽어 보려는 동지들에게는 나만 답답한 게 아닌가봐, 라는 동병상련의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마는, 기왕에 과학 도서들을 섭렵해 왔던 독자들에게는 거의 쓸모 없는 글일 수 있다. 감안해 주시라.

 

 

2.

 

이 책은 진화생물학자인 저자가 '자기 기만'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탐구하고 현실 세계에 적용시켜 그 효용과 명암을 증명해 낸 결과물이다. 책날개의 소개에 의하면 저자의 최신작이라 하니, 오랜 시간의 공력이 활용된 유의미한 저작이라 하겠다.

 

그런데 읽고 난 뒤의 나는,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강하게 들었다.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라 하고, 유명 번역자가 그의 이름을 보고는 '내용을 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다 하며, 리처드 도킨스가 적극 추천한다고까지 하니, 내용에 가 닿지 못한 것은 오롯하게 내 집중력과 지성의 한계 탓일 것이라는 자책의 심정도 금할 수 없었다. 14장에 달하는 전체의 내용을 한 차례 브리핑하는 1장을 다시 읽어 봐도, 독서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읽은 내용이고 또한 방금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읽어 왔던 내용의 요약인데, 전혀 새로운 글처럼 보인다. 책장을 덮고 'The fooly of fools'라는 원제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의 추락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3.

 

그래서 나는, 일단 '왜 몰랐을까'부터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느 부분이 어떻게 어려웠는지, 어느 부분에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는지, 어느 부분이 불만이었는지 등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나면 재차 독서할 때나 앞으로의 과학 도서 독서에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다.

 

첫번째로 눈에 걸렸던 것은 이따금 등장하는 번역투의 문장이었다. 속속들이 등장하는 과학 개념어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그러니까 당연히 텍스트의 맥락도 다 잡지 못한 채 번역투의 낯선 문장을 만나게 되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즉각적인 추측이 무척 어렵고, 그렇게 멈칫하는 잠깐의 사이에도 흥미는 급격하게 식곤 했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왜 의식적으로 거짓을 만들어내기 위해 받아들인 정보를 수정할까?'라는 문장을 보자. 맥락을 한 손에 쥐지 못한 채로 이 문장을 접하면, '의식적으로'가 '만들어내다'에 걸리는지, '받아들다'에 걸리는지, '수정하다'에 걸리는지를 고민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어떤 동사를 수식하는지에 따라 문장의 함의는 꽤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각각의 뜻을 추론하고 원래의 맥락과 짜맞추어 보아 어떤 것이 맞는 것이었는지를 골라내는 과정은, 저자나 책, 혹은 설명하고 있는 개념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면 즐거운 게임이 되겠지만, 단순한 지적 호기심 정도로 접근하는 이에게는 하나의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로 눈에 걸렸던 것은 논거로 취하는 사례의 광대한 폭이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바와 같이, 기만은 은밀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관찰하고 탐구하기 매우 어려우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채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은 그 실재와 효용을 증명해 내는 데 있어 더욱 엄밀한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미 이름난 실험과 이론 등을 통해 논리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저 하나의 주장을 다른 주장의 근거로 삼고 그것을 또 다시 다른 주장의 근거로 삼는 진행도 눈에 띄며, 자세한 제반 설명이 동반되지 않은 본인의 특수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논증을 펴는 시도도 보인다. 저자 스스로 '과학적으로 확정적인 것'과 '도발적이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고 하였으며, 또한 내용 중 일부가 틀리더라도 곧 수정되어 '더 심오한 자기기만의 과학으로 발전할' 것이라 선언함으로써 비판적 독해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틀릴 각오가 되어 있다'와 '틀려도 관계 없다' 사이에는 분명 유의미한 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엄밀함에 빠져 큰 줄기를 잡지 못하는 것도 학자에게는 경계할 바이나 과감하며 논쟁적인 주장일수록 그 근거는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인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세번째로 눈에 걸렸던 것은 낯선 목차 구성이었다. 이것은 특히 서양의 과학 도서에서 흔히 보이는 구성인데, 소챕터, 그러니까 '1장'이나 '2장'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작은 챕터들 간의 상관관계가 일정하지 않다. 어떤 때에는 갑작스레 새로운 주장이 시작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의 예시를 따로 챕터로 분리하기도 하는데, 배치의 의도를 추측하여 다시 맥락을 잡는 데에도 꽤나 수고가 들어간다. 권두의 '차례'에 소챕터가 함께 기재되어 있었더라면 일단 일람하면서 흐름을 잡은 뒤 독서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차례'에는 총 14개의 큰 챕터의 제목과 해당하는 장의 본문 중 인상적인 부분이 서너 줄 가량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각각의 등위를 따져 다시 배치해 주면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겠다는 것은 고루한 독서법에서 나오는 불퉁거림인 것일까?

 

네번째로 눈에 걸렸던 것은 주된 테마인 '자기기만'의 적용 범위였다. 이 책은 총 14장 중 7장까지는 이론을 설명하고 8장부터는 실제 사례에 적용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상 위의 글자들로 끝나지 않도록 현실 세계의 다종한 면에 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이 책의 뛰어난 미덕이다. 그러나 그 범위와 방법은 앞서 이론 파트에서 설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분야에 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7장까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변수를 갖지 않는 생물들과 인간이 자신과의 관계, 혹은 가족, 배우자와 같은 가까운 관계에서 어떻게 자기 기만을 저지르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 사례'를 취하기 위해 저자가 택한 필드에는 항공 우주 재난, 역사 기술, 전쟁, 종교, 사회과학 등과 같이 특정 개인의 정서 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안에는 유의미한 해석이 분명 존재하며, 한 명의 학자와 한 권의 책이 모든 시각에서의 성찰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이론의 틀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을 경계하지 말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4.

 

위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내가 지적한 내용의 대부분은 사실 과학 도서 독서계의 뱁새가 토하는 투정에 가깝다. 편린적 이해로도 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있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 동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뱁새 동지들에게는 위와 같은 지엽적 불만들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나도 또한 곁에 두고 익숙해질 때까지 때때로 꺼내어 걸음마의 동반자로 삼고자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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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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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른이 넘은 뒤로는 인천의 본가에 갔다가 하루 자고 오는 일이 더욱 줄었다. 계획에 없이 갑자기 자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자리를 펴게 되는 것은 명절날의 전날이라든지, 혹은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약속이나 행정적인 업무가 심야나 오전에 있을 경우 등으로 한정되었다.

 

 

볼 일이 있기 전까지는 꼼짝 않고 자리라 생각하지만, 잠귀가 밝은 나는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밖이 아직 어슴푸레할 무렵, 잊고 있던, 그러나 십수 년 간 들었던 터라 삽시간에 귀에 달라붙는,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잠을 깬다. 때는 아침 여섯 시. 아버지가 <조선일보> 가지러 나가는 소리이다.

 

 

그러니, 내가 세상에는 세 종류의 신문만이 있는데 <조선일보>를 보던 사람들이 조금씩 심심해지면 보는 것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인 줄로만 아는 유년기를 보냈다든지, <한겨레일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것이 스무 살 넘어서의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사회 일반의 기준으로 본다면야 무식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일이지마는, 나 스스로는 눈 딱 감고 면죄부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중동'이라는 단어를 거침 없이 말할 때마다 오래된 선배들의 얼굴 한 귀퉁이가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래도 동아는...'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이십대 중반의 일, 그 말의 뜻을 알게 된 것은 서른 근처의 일이었다. 바로 그 간극을 가르는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라는 이름, 약칭 '동아위'를 오랫동안 지켜온 초기 멤버이자 현재는 해당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철 씨의 신작, <폭력의 유>이다.

 

 

 

 

 

2.

 

이 책의 부제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이다. 제목의 맥락대로, 이 책은, 시기로는 일제강점기부터 MB정부까지를 다루고, 주제로는 주로 신문과 방송을 위주로 한 언론의 역사를 엮었으며, 독자의 대상으로는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요하는 전문가들보다는 통사적 차원에서 개괄과 일람을 원하는 '젊은이'들을 상정하고 있다. 내용과 기획의도가 잘 반영된, 좋은 부제라고 생각한다.

 

 

650여 쪽에 달하는 책은 '부록'을 포함해 총 10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다. 본문 격인 1 - 9부을 나누는 기준은 정에 따른 것이다. 집권 자체가 길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관한 3부나 가장 최근의 것이었던 이명박 대통령 시대에 관한 9부가 상대적으로 긴 10개의 소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나머지 부는 대체로 30쪽 정도에 걸쳐 3-5개 정도의 소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의 소챕터들 또한 그 안에서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첫 번째 소챕터를 통해 해당 정권과 언론과의 관계 양상, 혹은 해당 정권의 언론관 등에 대해 큰 그림을 그려준 뒤 다음 소챕터들에서 개별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모범적이다.

 

 

내용은 부제에서 적시한 그대로 한국의 현대언론사이다. 손꼽히는 언론사들의 기원과 성쇠,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보여주었던 명암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저자가 '해직기자'임을 굳이 밝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그 논조의 방점은 사주보다는 기자에, 보수보다는 진보에, '산업화'보다는 '민주화'에 놓여져 있다. 인과관계를 잘 얽어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사실들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따금 섞여들어가 있는 저자 본인의 경험도 훌륭한 양념 역할을 한다. 신익희의 사망 날 신문을 읽고 침통해 하는 아버지를 보고 의아해 했다든지, 백골단에게 맞아가며 쫓겨나고 동아투위를 건설했다든지, 감옥에서 동지들과 언젠가 만들 <한겨레일보>를 구상했다든지 하는 경험을 모두 직접 말해줄 수 있는 언론인이 이제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경외감을 가졌던 부은, 당시 인물들의 발언을 따옴표를 붙여 재구성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약간의 드라마타이즈는 있지만, 본인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 주었을 사건들을 언급하면서도 그 목소리가 대체로 담담하다는 것이었다. 회상과 슬픔에 사무쳐 왈칵, 하고 감정을 쏟아내었더라면, 그에게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마는, 그러나 이 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젊은이'들은 갑작스런 격차에 당황하거나 혹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본인이나 동지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젊은이를 위한 것이라는 집필 의도를 잘 살린, 프로페셔널한 접근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은 담백한 문체이다. 수십 년 간 기자로 단련해 온 저자이니 이것은 예상 외의 소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600쪽이 넘도록 이렇게 강건하고 담백한 문장을 읽고 나니 마치 정갈한 집밥을 담뿍 먹고 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꼭 적어두고 싶다.

 

 

 

 

 

3.

 

그 귀한 집밥을 먹고도 간사한 아쉬움이 조금은 남는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앙탈 부리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미리 달고 이야기해 보자면.

 

 

첫째는, 근현대 정치사를 잘 모르는 독자라면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두꺼운 분량 내에서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 또한 설명해 줄 수 있만큼 설명해 주었고, 아울러 이 책의 방점은 언론사에 찍혀 있는 만큼 주객이 전

 

도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언급되는 역사적 맥락과 사건들을 기왕에 알고 있지 못하다면, 인과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 책은, 근현대사는 쥐꼬리만큼 포함되어 있고 그나마도 선택 과목제와 집중 이수제로 국사 과목을 이수한 '젊은이'에게 건네는 책이 아닌가.

 

 

둘째. 아무래도 분량 상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진 선택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진과 그림 자료가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은 무척 아쉽다. 거론되는 사건들이 역사적인 중량감이 있었던 것들인만큼 남겨진 사진들도 무척 드라마틱한 것이었을텐데. 기자 출신이며 현재도 언론인이라는 저자의 특성 상 밝혀지지 못했던 사진이라든지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사진 등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제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호기심 없이 600쪽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일 것이다.

 

 

셋째. '언론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음에도 방송사와 신문사, 그 중에서도 특히 '5대 신문'이라고 하는 전국 단위 활자 일간지에 거의 대부분의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이명박 정부 시대를 다루는 9부에서 <리셋KBS>나 <뉴스타파> 등이 단편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YTN, MBC, KBS의 파업과 관련된 연장선 상에서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올드 미디어 내에서도 지방지, 주간지, 월간지 등 다른 카테고리의 언론에 대해 다루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인터넷 신문, 팟캐스트, 1인 블로그 등의 뉴 미디어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점은 무척 아쉽다.

 

 

위에 적은 세가지는 개인적인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이 책이 꼭 갖고자 하는 본질적 미덕만을 갖추는데도 600쪽 이상의 분량이 들어갔다. 그 이상의 시도는 분명히 상업적인 무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지금부터 적는 두 가지의 불만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비교적 사소한 불만인 첫번째는 '부록'의 성격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책은 9부의 본문과 '부록'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부록에서는 머독, 베를루스코니, 그리고 줄리언 어산지가 소개된다. 앞의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의 만행과 그 악영향을 다루고 있으며 어산지에 관해서는 그가 설립한 위키리크스의 성공 이력과 의의를 기록하고 있다. 언론의 역사를 정리하며 '나쁜 언론'과 '좋은 언론'의 실 사례를 제시했다고 하면이 시비를 걸 것까지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해직 기자의 입장에서 썼다고는 하나 되도록 공정한 통사를 구성하려고 했던 본문의 의도와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부연하자면. 물론 본문 중에서도 '나쁜 언론'과 '좋은 언론'의 구분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판단은 단 한 번도 명시적으로 선언되지 않으며,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 뒤 독자에게 선택하도록 하거나, 혹은 선택할지 말지조차도 독자에게 넘기고 있다. 독자는 그 안에서 '좋은 언론'의 부침과 명암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한편 부록에서 선택된 사례들은 선연한 의도를 띈다. '공공의 적 머독과 베를루스코니', '위키리크스가 일으킨 언론혁명'이라는 소챕터 제목만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질문들이 얼마든지 덧붙을 수 있다.

 

'머독이나 베를루스코니는 언론이 권력에 영향을 미친 케이스인데, 권력이 언론을 억압하였던 대부분의 본문 내용과는 무슨 상관일까?', '사주 한 명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일까?', '폭스 뉴스가 나쁜 언론인 것처럼 종편 언론도 나쁘다는 것일까?', '위키리크스가 가진 절차적 부당함도 있는데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등등.

 

만약 '나가는 말' 정도로 해서 세 개의 사례를 간단히 언급한 뒤, 이 책의 집필 의도와 매끄럽게 이어주는 짧은 글을 썼더라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질문조차도 여운의 형태로 잘 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록은 약 55쪽으로, 본문 중의 웬만한 부보다도 길다. 무시할 수 없는 중량을 갖고 있는데 그 방향성이 본문과 달라, 불편한 채로 독서를 마무리하게 된다.

 

 

두번째는, 전체의 구성이 '권력 - 언론 간의 투쟁'의 틀로 짜여지다 보니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자본 - 언론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앙일보는 왜 의료민영화에 소리를 높였나, 와 같은 질문은 정치상황의 정보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자본과 언론 간의 혼맥, 유착 관계와 같은 전통적 이슈 뿐 아니라 근래에 불거지고 있는 통신사 설립 운동, 네이버로 상징되는 포털과의 불화 등도 자본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언론사'를 재구할 때에는 빠질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코드를 씨실로 삼는 후속작이 나온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는 개론서가 될 것이다.

 

 

 

 

 

4.

 

 

아쉬움과 불만에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많았지만 그만한 애정의 반증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바랄 만한 책이니까 바람이 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쓰는 것인데다 제공받은 책으로 정해진 기간까지 써야 하는 독후감라 부담을 갖고 시작한 독서였는데, 글이고 뭐고 나중 일은 난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500쪽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슬슬 끝나간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했다. 흥미로운 주제에 탄탄한 구성, 담백한 문체를 갖춘 삼박자 모범생. 지금 당장 부담스럽더라도 일단 사 놓고 현대사 공부와 병행해 가며 읽으면 언젠가는 책값의 몇 배를 되돌려 줄 우량주. 언론이나 사회, 역사를 읽고자 하는 이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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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인천 프로젝트 (정재승 외, 사이언스북스)

 

 

정재승의 글을 읽다보면, 직업으로 그 사람을 가늠하는 간편한 기준이 때로 얼마나 혹독한 오류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어떤 인문학자나 예술가에도 뒤지지 않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지닌 뇌 과학자 정재승의 신작.

 

저자는 이 작업에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원했고 또 그에 상당하는 홍보를 진행했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내용과 구성 방식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이미 많이 알려져 왔다. 손꼽을 수 있는 '국민 스포츠' 중 하나라고 부를 수 있는 야구, 그 중에서도 4할 타자, 그 중에서도 백인천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고,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선까지 성취를 이루고 또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질 것인가에 흥미를 갖는 사람도 있었다.

 

목차의 구성과 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책은 인문학적 호기심의 충족과 과학적 방법론의 성립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던 것 같다. 소재에 대한 회고, 작업의 경과, 그리고 논리적 분석의 결과까지. 한편으로 생각하면 화학적으로 엮기 어려운 요소들의 배치가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뭐 하나라도 어필하는 지점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혹여 다소간의 흠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작업을 실제로 실행하였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새 방법론의 한 사례로 삼을 수 있게 한 지점에서는, 개인적으로는 몇 장 쯤의 면죄부를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2. 일본 기담 (박지선/이노우에 히로미, 청아출판사)

 

 

기존에 있었던 일본의 기담을, 다섯 개의 카테고리를 설정해 새로이 분류하고 재창작한 내용이라 한다. 소설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고 인문학 카테고리에 들어와 있는 이유도 궁금하고, 일본의 기담을 다루는데 왜 한국의 엮은이가 들어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따르면 '일본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국 작가와 일본 작가가 공동으로 서술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현대의 입말에 맞추어 풀어쓴 것 만이 아니라 배경지식이나 모티브의 분석 등도 들어가 있는 것일까? 두 명의 엮은이의 저서들을 보니 각별히 이 쪽에 관심을 갖고 집필 활동을 해 온 것도 아닌 것 같아 불안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그것에 비해 좀 더 기괴하고 잔혹한 면이 있는 일본의 기담으로 남은 더위를 씻고자 한다.

 

 

 

 

 

 

 

 

 

 

 

 

 

 

 

 

 

 

 

 

 

3. 폰트의 비밀 (고바야시 아키라, 예경)

 

 

'폰트'라는 명칭은 계량화되고 객관화된 인상을 주지만, 기실 어떨 때는 메시지 자체보다도 더 상징성을 갖는 요소이다. 일상 생활에서조차 손글씨보다는 기계의 활자에 압도적으로 많이 노출되는 요즘에도, '서체'는 그 사람의 교양이나 성품 등을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캘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였으며 현재도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력과, 한 페이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여러 폰트의 사례를 컬러로 인용해 놓은 이 책의 구성은 폰트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독자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할듯 하다.

 

'브랜드의 로고는 왜 고급스러워 보일까?'라는 부제나, 목차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명품' 사례의 인용에서는 상업적인 분야로 소재가 다소 치우쳐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나 몇 장 가량 제시되어 있는 본문을 살펴보면 흥미를 끌만한 몇 가지의 소재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해당 폰트가 어떻게 기획 의도를 살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가 동한다.

 

 

 

 

 

 

 

 

 

 

 

 

 

 

 

 

 

 

 

 

 

4.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진중권, 개마고원)

 

 

특히 트위터를 활발히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중과의 접촉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난 탓에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만사에 참견하는 듯한'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나, 진중권은 여전히 메시지와 채널을 가장 전략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논객 중 한 명이다. 그러한 진중권의 '캐릭터'의 이력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초기의 기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합본되고 수정되어 재출간되었다.

 

진중권 개인에 대한 엄밀한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그 나이대의 학자, 논객이 십수년 전 펼쳐냈던 책들 중 지금에도 다시 시의성과 상업성을 겸장할 수 있는 저서가 몇이나 될지만을 따져 보아도, 이 책의 가치는 다시 말할 이유가 없겠다. 

 

지난 정권에서 등장하여 출판계에 큰 수혜를 내려 주었던 '국방부 지정 금서'가 이번에 다시 '국정원 지정 금서'나 '청와대 지정 금서'로 부활한다면, 아마도 제 1순위에 올라갈 것이 유력한 이 책이라, 일개 독서인이 이 자리를 빌어 굳이 다시 평가나 홍보를 하지 않아도 또 한 번의 성공은 보장되어 있을 것 같다. 진중권 선생의 또 한 번의 성공을 기꺼운 마음으로 축하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다.

 

 

 

 

 

 

 

 

 

 

 

 

 

 

 

 

 

 

 

 

5. 세상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김현철, 마호)

 

 

전작인 <울랄라 심리카페>도 그렇고, 김현철 선생은 독창적이기보다는 친숙한 제목 쪽을 선택하는 것 같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마는, 내용에 공감하고 제목에 아쉬워하는 입장으로서는 좀 더 욕심 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308가지의 이야기, 8개의 카테고리라는 소개를 보면, 이 책은 기획의도에 있어 '연애', '강박', '불안'과 같은 하나의 주제를 잡고 한 권 내내 비교적 학문적으로 접근하였던 세 권의 초기 저작보다는 임상이나 라디오에서 행했던 짧은 상담을 바탕으로 편안한 설명을 펼쳤던 전작 <울랄라 심리카페>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듯 하다.

 

전작의 55개의 각 편들은 대체로 '사연소개 - 증상진단 - 원인분석 - 대책제시'의 틀을 갖고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제공한 몇 장의 본문을 살펴보니, 각각의 항목들이 분리되어 한 쪽에서 두 쪽 가량의 운문형 산문, 혹은 에세이형 산문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좋게 보자면, 이런 기획성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만큼 김현철 선생의 경험이 풍부히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며, 해당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줄줄이 늘어진 논리적 설명문보다 훨씬 더 마음을 빼앗기는 형태의 구성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나쁘게 보자면, 아주 솔직하게 말해 '좋은 생각'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는 글을 다시 구입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고, 또 서간체, 대화체 등으로 표현된 문체에 낯이 좀 부끄러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정리된 만큼 300여 편 가운데 직관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글도 꽤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엄청난 명저라도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한 줄 아니겠는가.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줄쯤 얻어가는 것이 있는 독서가 되리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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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 박수밀 / 돌베개 )

 

같은 내용이라도,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라면 어쩐지 좀 더 재미없는 내용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의 경우 그렇게 해서 놓쳤다가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나중에 다시 찾아내고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던 것 중 하나가 연암의 글이다. 연암의 글은, '고전'이라는 사슬으로 묶어 암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에는 지나치게 재미있다. 발랄한 표현도 그렇거니와 그 안의 상상력에 이르면 현대의 작가들이라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경지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의 매체였던 한문학이 무엇보다도 '전범', 그러니까 옛 글의 형식과 내용을 충실히 익혀 표현하는 것을 지상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을 고려해 보면 감탄의 한숨은 더욱 깊다. '문학사적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글이 가져다주는 '상업적 / 대중적' 쾌락을 놓치는 독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연암의 글 중 더욱 재미있고 의미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충실히 번역한 책은 기왕에도 수 종이 나와있다. 와중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연암이 그런 글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어떤 방법과 구성으로 그런 효과를 간취해 냈는지에 대해 보다 구조적으로 살폈을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박사 논문을 비롯한 수 편의 논문을 통해 연암에 깊이 침잠해 온 바 있다. 재미는 예측할 수 없으나, 내실에 있어서는 적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강신주의 다상담 ( 강신주 / 동녘 )

 

'거리의 철학자' 철학박사 강신주의 신작. MBC 라디오에서 6개월간 진행되었던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에서 저자가 진행하였던 동명의 코너에서 이름을 따왔다. 저자는 이때의 인연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종영된 뒤에도 대학로의 '벙커'에서 역시 동명의 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팟캐스트에도 올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MBC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에 패널들에게 들려주는 강연의 형식으로 출연한 바도 있으니 그의 외모나 강의 스타일이 궁금하신 분은 다시보기로 접해 보셔도 좋겠다.

 

'전공'인 장자에 관한 책이나 제자백가가 활약하던 시기의 책을 쓰기도 하지만, 그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가져다 준 것은 역시 '다상담'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대표되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상담'이다. 그의 상담을 듣다 보면, 그래, 철학이란 것이 이렇게 쓰이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라는 것은, 철학과의 대학원생이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나 혹은 철학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장삼이사들이 살면서 겪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대해 좀 더 효율적으로 답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읽기조차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이나 보자마자 겁나는 '-주의', '-주의'같은 이념을 들어, 그 새끼와 헤어져야 할지 말지, 그 상사를 무시하는 게 나을지 불러다 한 번 패는 것이 좋을지를 설명해 주는 강신주야말로, 본질적인 의미에서 가장 철학자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일면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이 책, 기대된다. 방송이나 강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과외의 재미일 것이다.

 

 

 

 

 

 

3. 정치의 즐거움 ( 박원순/오연호 , 오마이북스 )

 

순수하게 봐줄 수도 있는 것이다. 수도 서울의 시장을 찾아가 지난 1년 반 간의 행정경험을 물은 결과물은 작게는 서울 시민부터 크게는 한국의 시민에게까지 유용한 정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이 이미 연임에의 의지를 천명하였다는 점과 그간의 오연호의 행적을 보자면, 삐딱하게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연호의 킹 메이킹 프로젝트, 다음 타자는 박원순이었던 것인가,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책의 제목도 한편으로는 몹시 해맑은 소녀의 눈망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게 불타는 야심가의 안광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 되었든, 안철수 씨가 삼백 분의 일로서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된 뒤로부터 '탈정치성'에 있어서는 차세대 리더군 가운데에서 부동의 1위에 머물고 있는 박원순 시장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지지자에게든, 반대자에게든. 

 

 

 

 

 

 

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 유홍준 / 창비 )

 

이것은 마치 인문학계의 설국열차. 한 번 타면 내릴 수 없다. '국내편' 1권이 93년에 출간되었으니 철마는 20년째 달리는 중이다. 책의 판형이나 표지의 디자인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에이, 모으는 맛이 없어졌어, 하고 신 포도를 등지는 여우처럼 합리화라도 해 보련마는, '유쌤'의 책들, 특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모으면 모을수록 빛나는 시리즈물의 마성을 숨기지 않는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것들 중 문득 아무 권이나 빼내어 넘겨보아도 재미 또한 20년 동안 변함이 없으니, 아아, 답사지로 향하는 티켓은 진실로 오로지 편도 뿐이다. 이왕 그렇게 되었다면 부디 오래오래 달려 주소서.  

 

 

 

 

 

5.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신정근 외 / 21세기북스 )

 

위에서는 제목 소개를 한 줄로 끝내기 위해 저자의 이름을 신정근 교수 한 명만 소개하였는데, 이제는 본문으로 들어왔으니 마음 편하게 모든 저자의 이름을 호명해 보도록 한다.

 

강신주, 고미숙, 김언종, 김영수, 박석무, 박웅현, 성백효, 신정근, 심경호, 이광호, 이기동, 정병설, 정재서, 주경철, 한형조

 

이 정도면, '드림콘서트' 급을 넘어서, 퀸시 존스의 '힐더월드' 프로젝트 급에 필적한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여기, 에서 동양고전을 가장 잘 알고 있거나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대가들로 꽉 채워졌다. 기왕에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고 있어 해당 저자들의 저서를 따로이 갖고 있는 분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동양 고전을 접하는 청소년에게나 아니면 그간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것을 한차례 일람하고자 하는 성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권위 있고 검증된 라인업은 없을 것이다. 본래 시민 강좌였던 것을 엮어 책으로 낸 것이라 하니 읽기에도 수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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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사용법 - 텃밭부터 우쿨렐레까지 좌충우돌 DIY 도전기
마크 프라우언펠더 지음, 강수정 옮김, 소복이 그림 / 반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 11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오랜만에 우쿨렐레 악보라도 보며 마음을 좀 다스릴까 하고 도서를 검색해 보니, 지난 겨울 동안 내내 진행되었던 도서관 증축 공사가 끝나면서 음악 악보책들은 대부분 학교 저쪽 너머 언덕 위의 음대도서관으로 옮겨져 있었고, 엉뚱한 제목의 이 책이 함께 찾아졌다. '텃밭부터 우쿨렐레까지 좌충우돌 DIY 도전기'라는 부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의 DIY는 어둠의 역사다. 약 20여년 전에, '교내 과학경진대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무척 거창한 이름이지만, 수업이 다 끝나고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간 토요일 오후에, 칙칙한 과학실에서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지 못 해 칙칙한 인상의 '자연' 선생님의 감독 하에, 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지정된 문구점에서 '라디오 키트 세트'를 사다가 빨리 조립하는, 심심한 행사였다. 선생님은 빨리 조립하는 순서대로 이름을 적었고, 1등부터 그 밑의 일정 등수까지는 다음 주 월요일의 조회 시간에 단상으로 불려나가 시상을 하게 될 터였다. 지금처럼 내신이 있고 입학사정관이 있는 세상이라면야 학생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써넣을 수 있다지만 당시에 왜 그런 행사를 했고, 또 왜 굳이 시간을 체크하여 상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과학입국을 부르짖었던 군인 출신 대통령의 말씀이 교무원들의 가슴에 깊숙이 남아있었는지 어쨌는지. 결과로 보자면, 나는 꼴등을 했고, 덕지덕지 납땜이 붙은 나의 첫 라디오는 죽어가는 괴수의 단말마 같은 소리 외에는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성과물을 낸 학생은 이름이 적히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과학실에는 꼴등인 나와 한시라도 빨리 퇴근하고 싶어하는 선생님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납땜의 여분을 다 쓰고 아이들이 남기고 간 여분까지 모아다가 회로판의 뒷면을 납 범벅으로 만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반쯤은 측은하고 반쯤은 지루해 죽겠는 얼굴로, '노력상'을 만들어 수상할 터이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여기까지는 일기에도 한 차례 적은 바가 있고 비슷한 화제가 나왔을 때에 사석에서도 입에 올린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다음에 적는 것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말이다. 나는 사실, 고개를 들어 집으로 가라고 하는 선생님의 입을 보기 전까지의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지인들 사이에서 나는 기계치로 유명하다. 단지 기계를 잘 못 다룰 뿐 아니라, 기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고 때로 두려워한다. 상담이나 최면을 통해 증명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분명한 트라우마이며, 특히 정확히 그 날에 생겨난 것이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유난히 '쪼닥쪼닥'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장난감이고 생활용품이고 가져다 꺾고 부수고 붙이는 걸 좋아하던 나는, 그 과학경진대회 이후로, 완벽한 설명서가 존재하고 어떤 기계치가 조립해도 항상 균일한 완성품이 나오는 레고 정도에 만족하는 '소비자'가 되고 말았다. 있지도 않은 '노력상'을 다시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쪼닥쪼닥의 습관, 잔재주이긴 하나 끈덕지게 키워냈다면 어떤 쓸모가 있었을지 모르는 기술은 기껏해야 학알을 접거나 이따금 뜨개질을 하는 등의 소소한 취미 정도로 생활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감추었다.

 

 

다시 손 끝으로 무언가를 만지게 된 것은, 외로워졌기 때문이었다. 동기도 후임도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군 생활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끝날지 않은 것 같은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전화 몇 통이면 밤새 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대학 시절과 달리 열흘 여 전에 잡은 약속도 저쪽의 야근이나 이쪽의 공부에 밀려 취소되기 일쑤였던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초반에, 우쿨렐레나 기타를 구경하며 낙원상가를 기웃거렸던 것은 그 과정을 일기에 세세히 쓸 정도로 신이 나는 일이었다. 어차피 혼자 노는 것이라 잘 못해도 재미있으면 장땡이었고, 낙을 찾고 나니 애당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는 부끄러움은 차츰 사라졌다. 모두, 납땜만큼 즐거웠다.

 

 

근래, 공으로 얻은 문화상품권을 어디에 쓸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 직접 깎은 목각인형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조각도 세트를 샀다. 나무는 무엇이 좋은지, 색은 무엇으로 칠해야 좋을지 등에 대해 일상의 틈을 빌려 조금씩 알아보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찾으려던 우쿨렐레 내용은 별로 없어보였지만 DIY라는 말에 눈이 꽂혀 꺼내보았다.

 

 

저자인 마크 프라우언펠더는 잡지에 글을 써서 먹고사는 프리랜서 기고가였는데, 2000년대 초반 IT 산업의 붕괴로 여러 개의 기고처를 잃고 만다. 고민하던 그는 어차피 돈을 못 벌고 살게 된 판에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고 덜 돈이 드는 주거지를 찾다가 남태평양의 '라로통가'라는 외딴 섬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를 하게 된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감행한 이 시도는 결국 몇 달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 시기 아내, 두 딸과 하루종일 코코넛을 따러 돌아다니거나 해변에서 해삼을 잡아대던 생활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전부터 알던 미디어 단체의 설립자와 상의하여 2005년 <메이크>라는 DIY 잡지를 창간하고 편집장이 된다. 이 책은 그가 편집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저널리스트로서 스스로 행하고 잡지에 기고한 DIY의 기록이다.

 

 

300쪽 가량의 책은 11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론과 결론, 그리고 서론의 연장선 격에 있는 1장을 제한 여덟 개의 장이 실질적인 DIY 내역이다. 혹 흥미를 가질 분이 있을까 하여 자세한 내역을 순서대로 적는다.

 

잔디 죽이기. 텃밭 가꾸기. 에스프레소 뽑기. 닭 기르기. 기타 만들기. 콤부차 우리기. 벌치기. 딸에게 수학 가르치기. 이는 단순히 챕터의 소제목들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이 있다. 이를테면, '기타 만들기' 장에서 시가 상자로 기타를 만들어 본 데에 우쭐해진 저자는 이어 숟가락을 조각하고 닭장을 짓기도 한다.

 

제목만 놓고 보면 심상하지만, 실제 독서에서 얻는 감흥은 예상 이상이다. 저자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있는 일을 기술하는데 집중하는 편인데, 그런 구질로 '잔디 죽이기'에 대해 40쪽을 메꾼다고?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잔디를 죽이는데 얼마나 많은 세부 단계가 있으며, 또 어떤 문제들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적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몹시 사실적이고, 또 재미있다.

 

저자의 기록 중 많은 수는 실패의 역사다. 기르던 여섯 마리의 닭 중 네 마리의 닭은 튼튼한 닭집을 짓는다고 요란법석을 떨었는데도 코요테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봉을 시작했지만 따로 지은 벌집의 벌들은 도망갔고 나머지 벌들은 집의 천장 아래에 둥지를 틀어 '전등 안에 죽은 벌이 가득해 전등 빛이 희미해질 정도'가 되었다. 원래 수학을 잘하던 딸이 갑자기 점수가 떨어진 차에 시작된 '딸에게 수학 가르치기'에서, 딸은 결국 중요한 최종 시험에서 본래의 떨어진 점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점수를 맞았다. 그래도 그 실패에 '사서 쓰지', 아니면 '사람 부르지'와 같은 조롱의 웃음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과정의 세세한 기술을 통해 저자가 작게는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맛보았고, 크게는 다음 DIY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경험'을 쌓았음이 이미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결과도, 크게 보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전달하려 한 메시지와 실제 책 내용이 잘 어우러진, 즐거운 독서였다. DIY의 숨겨진 팬에게나, 삶의 목적,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독후감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 중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여러 부분 가운데 하나를 골라 뒤에 덧붙인다. 저자가 양봉을 시작하며 참고하였던, '거꾸로 양봉법'의 창시자 찰스 마틴 사이먼의 '거꾸로 양봉법 원칙' 중의 일부이다.

 

 

 

- 양봉의 선구자들, 현대적인 양봉의 원칙을 구축한 분들, 랭스트로스, 다단츠, 루트.... 그들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뭘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 그냥 부딪히면서 순리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창의적인 원칙이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일단 표준이 정해져서 바위에 새겨지고 사진과 도표와 절차가 활자로 찍혀 나오면 추종해야 할 모델이 생기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본질적인 것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전부 부차적이거나 열등한 취급을 받는다.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본질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양봉을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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