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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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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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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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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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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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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