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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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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쌤'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의 2013년 11월 신작. 전작 '국보순례'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보와 보

 

물을 소개하였고,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조선 시대의 서화 가운데 '명작'들을 골라 선보인다.

 

 

 

책은 총 5부로 나뉘어져 있고, 각 부에는 여남은 개 가량의 꼭지가 있다. 5부 중 앞의 3부는 조선 전

 

기, 조선 후기, 조선 말기의 시간 순으로 구획되었고, 나머지의 2부 중 하나는 서예, 하나는 왕실예술

 

에 관한 내용이다. 총 49개의 꼭지에는 편당 두 개에서 다섯 개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어, 합하여 백

 

육십 여 편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 격인 '책을 펴내며'의 첫 문단에서 이 책의 성격을 '명작 감상 입문'서로 명확히 규정하

 

고 있다. 예상되는 독자는 '국보순례' 때와 마찬가지로 옛 문화재들을 쉽게 접할 수 없고 또 접한다

 

하더라도 감상의 방법을 학습받거나 모색해 본 적이 적은 대중이다. 단 대중을 '입문'시키는 전략에

 

서는 차이가 생겼다. 전작인 '국보순례'에서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기르는 법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의하였던 저자는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감상에 필요한 충분한 자료만을 제공한 뒤 독자 스스로

 

길을 찾아보길 권하고 있다. 여러 시도를 통해 대중과의 새로운 접점을 집요하게 모색하고 있는 저자

 

의 애정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이러한 전략은 꼭지의 구성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소재인 문화재의 연원과 그에 얽힌 야사, 감상

 

포인트, 미술사적 가치 등의 여러 시점을 유려하게 섞어 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책에서 저자는 되

 

도록 본인의 감상과 평을 자제하고 작가와 작가의 시대에 관한 기록을 재구해 내는데 공을 쏟는다.

 

말하자면, '어떤 그림인지' 보다는 '어떻게 그려진 그림인지'를 설명해 주는 식이다. 물론 예술작품

 

에 관한 책이므로 해당 작품의 형식, 내용 상의 특징을 부분적으로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

 

러나 그 정도는 그간 저자가 유지해 온 톤에 비해 훨씬 건조하다.

 

 

 

 

따라서, 생각해 보면, 전작들에 비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낯설어서 어려웠던

 

우리 문화재들을 특유의 유려한 썰로 친근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유쌤'은, 이번에는 짐짓 옆으로 비

 

켜서서 록과 문집의 옛 기록들을 읽어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유쌤의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

 

에 조선의 정치 상황, 작가의 전기, 작품과 작가를 평하는 한시, 산문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것이다.

 

 

 

시대순으로 배치되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진 책이므로

 

그 안에서 설명되는 조선 정치사의 흐름은 비전공자가 가닥을 잡고 따라갈 만큼 유기적이지 못하다.

 

조선에서 예술을 담당하였던 계층의 특성 상, 작가와 교유를 나누었던 이들이나 작품 평을 남긴 대

 

부분의 이들도 국사 교과서에서 흔히 접해 본 이름은 분명히 아니다. 한글로 모두 번역되었지만 한

 

시와 한문 산문의 특유의 어투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분명히 낯선 것이다. '이조낭관 계회'를 '(요즘

 

으로 치면) 안정행정부 과장 모임'으로 풀어 주는 '구라' 정도는 곳곳에 있지만, 이 책은 저자의 대

 

중서 가운데에는 분명히 가장 이질적인 작품일 것이다.

 

 

 

말하자면, '유쌤'이 뒤에서 보행기를 밀어주는 식이었던 전작과 달리, 이번의 독서에서 독자들은 한

 

손이나 두 손 정도는 잡고 있을지언정 분명히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한다. 이십여년 간 지도해 온

 

자들에게 마침내 하산의 채비를 시키려는 진일보일까. 젖을 끊고 이유식을 먹이려는 어미의 마음

 

인 것일까. 알려 주고 사랑하게 해 주고 보여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고 사랑하고 보라는.

 

 

 

총평. 심상한 리뷰 한 편에 저자의 책을 살지 안 살지 결정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믿

 

고 보'이라는 수식어를 오랜 기간 증명해 온 필자이다. 어차피 사시거나 어차피 보실 터이니, 한

 

마디 거드는 말만. 이번의 투자는 조금 고될 수 있다. 그러나 보상은 배일 가능성 크다. 

 

 

 

-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 하나만. 결국 이 모든 시도는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함께 실린 그림들 가운데 난화나 인물화 등은 그 세세한 표현까지를 살필 수 있지만,

 

화나 풍속화와 같이 원화가 큰 경우엔 그림 전체의 윤곽을 아는 정도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책

 

의 판형상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지만 소개되는 작품들 가운데 해당 그림들이 꽤 많은 분량

 

을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해 보면 역시 아쉽다. 하기사, 이 또한 책을 들고 박물관에 가 직접 그림

 

을 보면 해결될 일이긴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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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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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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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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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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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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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FTA가 체결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서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내 삶이 바다를 넘어 더 많은 연결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담당하는 축 중 하나인 수퍼 리치에 대해, 관련된 한 권의 책을 더 읽는 것은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그 한 권이 이 책이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깊이는 얕고, 전략은 지루하다. 기껏 시간을 들여 한 독서이니 흠을 잡기보다는 작더라도 장점을 발견하자는 것이 지향하는 독서의 자세이지만 이 책을 두고서는 좋은 평을 내리기 어렵다.

 

책의 내용은 크게 분석과 사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 파트를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회의 전체 부 중에 수퍼 리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만큼인지, 오늘날의 수퍼 리치는 주로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예전의 수퍼 리치들과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해 분석한다. 수많은 이론의 요약과 의미있는 사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실 유럽의 수퍼리치가 미국의 수퍼리치보다 0.2% 많다'든지, '0.01%의 수퍼리치가 0.1%의 수퍼리치보다 엄청나게 많이 번다'는 정도의 경미한 자극이 있을 뿐, 대강의 내용은 '1:99'라는 구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일통한다.

 

조금 더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사례 파트이다. 여기에는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이런 부류의 기사에서 언급되는 유명인들의 사례가 백화점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십 명의 인물이 다뤄지는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들을 다루는 이 책만의 독창적인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람이 이 정도 번대'나 '그 사람이 이 정도 쓴대', 그리고 가끔 '그 사람이 이런 좋은 일도 한대' 정도가 주된 내용으로,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고급스런 가십더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책날개에 실린 소개인 경제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상적인 서두로 쓸 법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건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다.   

 

사실 이것은 제멋대로의 실망일 수도 있다. 책날개의 소개글에서도 그렇고, 저자의 서문에서도 그렇고, 이 책은 결코 플루토크라트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분석하겠다든지, 아니면 나아가 그 대안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 여러가지 정보와 시각을 두루 소개하고 알리겠다는 것 정도가, 드러나 있는 기획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왜 멋대로 이런 기대를 하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역시 반 이상은 표지에 빚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표지는 명백히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패러디이다.

 

 

 

 

 

 

이 그림은, 당대에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외부 세계에 맞서 실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근대 문명인의 표상으로 이해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연 경시를 비롯한 물질 문명의 각종 폐해의 단초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도 사용된다. 구도, 자세, 배색 등의 요소들이 메시지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겹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 그림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기에, 나는 <플루토크라트>의 표지를 보며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점을 바꾼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를 설명하는 데 18-19세기의 영국이나 미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어째서일까. 정복하려는 대상이 대도시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가 발딛고 선 것이 다시 자연인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는, 소박하기까지 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써 줬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서의 표지는 본문의 깊이와 넓이를 비교적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표지를 넘겨 독서를 시작했다면 범박한 주장이긴 하나 공들인 분석과 풍부한 사례의 인용에 부분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도 독자도 원치 않았던 오해에, 그간 여러 권의 재미있는 독서를 빚진 출판사이지만, 나는 '열린책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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