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유럽인 고향에 대한 연구에는 깊은 역사가 있다. 성서가 모든 것의 기준이었을 때는, 성서기술에 맞춰 인도유럽인의 기원을 탐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비교언어학이 유행을 할때면 어휘의 유사함을 추적하는 가설이 주류를 이뤘다. 그리고 고고학으로 접근한 유적을 통한 인도유럽인 이동을 탐구하려는 시도 중 하나가 쿠르간 유목민의 이동에 주목한 방식이다.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유목민'은 인도유럽인 고향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책은 아니다. 훨씬 더 폭넓게 인도유럽인 기원부터 오늘날 인도유럽인 분포에 이르는 통시적 과정을 모두 주목한 책이다. 그러니까 인도유럽인 기원문제는 첫부분을 장식하고 이내 다음 시대로 넘어가고 만다. 책에 실린 분량만큼, 자세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쿠르간 유목민에 초점을 맞춘 인도유럽인 고향문제기술은 가능한 여러 가설 중 하나로, 고고학연구를 통한 연구결과 중 일부분일 따름이다. 신석기, 청동기 시대 유럽과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아대륙 등 여러 지역의 인도유럽인 유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제시하지 못하는 거 같다. 아무래도 저자가 책을 쓴 의도가 유럽대륙에서 인도유럽인의 유입과 변화를 설명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거 같다.

인도유럽인 기원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들이 잘 정리된 책으로 J P Mallory의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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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핑커의 책들은 전달하려는 내용과 전달하려는 방식을, 충분히 숙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다루는 영역인 언어와 마음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반독자들에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핑커가 책 전체 구성을 잡는 방법이나, 자신이 잡은 차례 속에서 글을 풀어내는 방식이 몇몇 지점에서는 썩 명쾌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충실한 언어학자로서 자신의 커리어에서 나오는 영민하고 재치있는 글솜씨는 인정한다.

마음에 관한 <마음의 과학>은 이런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예인 거 같다.

 

 

 

 

 

 

 

 

 

 

 

 

 

마음을 가지고 쓰는 글은 어떤 모습을 띨 수 있을까? 방향은 조금 다른지만, 심신문제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들의 차례들은 이렇다. 처칠랜드의 책은 누구나 익숙한 구성을 띤다. <물질과 의식>에서, 2. 존재론적 문제 3. 의미론적 문제 4. 인식론적 문제 5. 방법론적 문제 6. 인공지능 7. 신경과학 으로 차례를 잡아 심신문제를 다루는 철학적인 지형도를 초보자에게 도움이 될정도로 잘 그려준다.

김재권의 책은 이 철학 지형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그의 책 <심리철학>에서, 001. 영혼으로서의 마음 002. 행동으로서의 마음 003. 두뇌로서의 마음 004. 컴퓨터로서의 마음 005. 인간적 구조로서의 마음 006. 심적 인과성 007. 의식 008. 심성내용 009. 환원적 물리주의와 비환원적 물리주의 으로 차례를 잡아 심신문제를 다룬다. 특히 이 책은 단순히 시간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관심, 성과, 그 한계를 담아 정리하고, 그 다음 시대가 그 한계를 어떤 방식으로 뛰어넘으려 했는지를 반복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심신문제를 지적으로 아름답다고 할만큼 문제-해결 방식으로 뛰어나게 기술하고 있다. 끝 부분에서는 저자의 관심영역인 심신수반문제로 집중하여 마무리한다.

 

 

 

 

 

 

 

 

 

 

 

 

 

하지만 스티브 핑커의 책은 이런 방식은 아니다. 그의 방식은 로버트 라일 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처칠랜드가 철학적 행태주의 범주안에 위치시킨, 영민하고 세밀한 지적질이 주된 방식인 라일의 방법이 계속 생각난다. 스티브 핑커는 계산  과 진화심리학이라는, 자신이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의 연구틀을 가지고, 여러 수준과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심신에 관한 여러 편견과 오해를 풀어 주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각 영역과 일반 사람들의 잘못된 지식에 대한 세련된 지적질이 주를 이루는 인상이다. 자신이 주장하려는 뚜렷한 방향없이, 계속해서 낯설고 새로운 지적인 도구를 끌어 들여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자신의 주장과 해결책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현안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깊은 이해가 따르지는 않은 인상이다. 또 다른 책 <빈 서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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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엘로이즈>,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같은 루소의 글을 읽다보면 당황스러워진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측면으로 내면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신 엘로이즈>경우 그 중에서 제일이다.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편지글로 이루어진 형태의 소설은 진작 유행하고 있었지만, 편지도 편지나름이다.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새뮤얼 리차드슨 <파멜라>를 보면, 같은 편지글이지만 사건 전개에 필요한 모든 요소(인물, 사건, 배경)가 편지 속에 다 들어가 있다. 루소의 편지는 그렇지 않다. 젊은 연인들 사이 주고받은, 이성이 마비된 연애편지같은 글이다. 둘 사이의 모든 행동과 말이 사랑의 해석이 필요한 암호고, 그로인하여 서운하고 오해하여 가라앉고, 희열에 가득차 둥둥떠다니고, 이런 감정의 교류가 계속된다. 애정으로 해석되지 않는 사건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고, 별일 아니라도 애정이 관련되면 확대해석된다. 소설이라기보다 내면, 특히 감정의 고백이다. 그리고 루소도 강조하듯이, 감정의 허구라기보다 진실된 감정의 재현이라고 할만하다.

 

 

 

 

 

 

 

 

 

 

 

 

굵직굵직한 역사인 거시사, 그런 거시적 배경속에서 개별인 수준에서 일어난 사건궤적을 쫓은 역사를 미시사라고 한다면, 루소의 글은 감정의 미시사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당시 감정의 수준에서 일어난 궤적의 기록이다. 또한 기록된 감정의 역동성을 생각하면,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같은 이야기 서사시가 떠올라, 감정의 서사시라고도 부를 수 있을거 같다.

이런 감정의 교류에 목마르지않고 익숙지 않은, 오늘날 독자들은 난감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익숙한 이들은 더욱더 그렇다. <에밀>과 <신 엘로이즈>에 가해진 동시대인들의 비판에, 루소가 자신의 입장을 고백한 <고백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장을,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을 해야하는데, 또다시 자신이 평생 크게 느꼈던 감정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한다. <고백록>역시 감정의 서사시다. 루소가 성장하면서 겪은 일들이 다 포함되었지만, 역시 기준은 감정의 질이다. 감정으로 충만했을 때를 중심으로 일대기가 배열된다.

그렇다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이 책은 산책할 때 떠오른 몽상들을 기록한 것이다. <고백록>처럼 자신을 고백하고 변명한다기보다, 산책하다가 평소 관심을 기울였던 여러 대상들에 대한 생각과 상상, 몽상을 적어놓았다. 다른 책들에 비하여 관능에 관련된 감정이 드물게 나온다. 루소는 이 책을 다 완결짓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런 루소의 글들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공감할 컨디션이 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런 감정의 교류가 부담스러울 때는 읽다가는 덮고를 반복하게 되는 거 같다. 책은 보고 싶고, 읽기에는 부담스럽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동시대인들은 어떻게 작품을 대했을까? 루소의 시대만해도 인쇄술의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뒤였기 때문에 예전의 독서법인 낭독은 물론, 가만히 들여다보는 묵독도 자리 잡았다. 루소의 독자들의 독서법은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끝부분에 적혀있다.

 

 

 

 

 

 

 

 

 

 

 

 

당시 소장가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 유통되는 책의 상태, 그리고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책을 대하는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타인의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속으로 음미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며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묵독보다는 낭독으로 장면장면의 감정을 연기하듯이 읽으면 루소가 전하려고 하던 '자연'의 정체성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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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영역이 진리일 수 있다??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스스로를 지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곤란한 상황이다. 과도한 감정과 감성이 어떻게, 개인의 내면에서라도, 진리일 수 있을까? 루소의 작품 <신 엘로이즈>나 <고백록>을 보면, 주인공이나 저자가 어느 순간에서만큼은 자신의 상황을 충실하게 감성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작품 내내 그런 태도로 진행하는 모습에는, 지나친 감정의 충만함으로 읽는데 감정의 피곤함마저 든다. 물론 충분히 동시대인이 절대적이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쟝르일 수 있음은 알게 되었다.

공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인 루소의 변명과 의도는 칸트에 와서 이해될 수 있었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그런 감성을 이해하려는 작업을 한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판단력 비판>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추천하는 김상현의 책이다(그 중 한명은 <중용한글역주>에서 신나게 중용의 철학적 가치를 열창하는 김용옥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태도는 지적이라고 여기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루소의 독자나 칸트의 독자가 감성적인 영역에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하다고 하겠지만, 오늘날 독자에게는 그런 동기부여는 유효하지 않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감성의 영역이 진리일 수 있을까? 진리라면 어떤 종류일까? 이런 얘기들이 김상현의 책에 녹아 있다.

루소가 펼친 감성의 영역은 당시 이성중심의 계몽사상가들과 충분한 교류와 함께 구축된 것으로, 다음 시대 감성인 낭만주의로까지 영향을 준다.

 

 

 

 

 

 

 

 

 

 

 

 

 

김진수의 책에는 이러한 감성의 영역이 오늘날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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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를 다룬 수작은 피터 게이의 책이다. 번역본은 절판이지만, 원서는 번역본 절반 값이다. 게다가 번역되지 않은 시리즈 2편도 비슷한 가격에 있다. 아마존서평에도 좋은 평들이 많다.

 

 

 

 

 

 

 

 

 

 

 

 

 

계몽주의를 말하면 아무래도 이성, 교육 같은 감정의 여지가 덜 느껴지는 개념들이 주를 이룰 듯 보인다. 정치와 경제 관심이 많았던 몽테스키외나 볼테르는 그런 요소들이 많다. 그리고 계몽주의에 흥미를 가진 전제군주들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감성의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이도 있다. 대표가 루소다. 그의 소설 <에밀>과 <신엘로이즈>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덕분에 여자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도 감정을 대화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전 금서로 묶이고, 혁명에 이르는데 영향을 끼친 책으로까지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큰 영향력때문에 루소는 본국에서는 더이상 활동하기 어렵게되고, 외국 여기저기를 떠돌게 된다. 그런 생활 뒤 씌여진 작품이 <고백록>과 미완성작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다.

이렇게 감수성 깊은 작가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는 흥미로운 주제다. <개인의 사생활 3>편이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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