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논리학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고, 어찌보면 이상하다. 


불교명상이나 수행


인도불교가 중국불교와 차이나는 지점도 내가 보기에는 논리학의 위치


일반적인 (서양전통)논리학 


인도불교 속 이슈였던 문제들을 정리



이처럼 불교논리학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면모만큼, 불교논리학을 기술하는 여러 접근이 있을 수 있다. 중관학에 초점을 맞추거나; 디그나가나 다르마키르티 처럼 논사에 초점에 맞추거나; 인도논리학 전통과 함께 불교 논리학을 논하거나; 불교논리학 속 이슈들을 정리하면서 얘기하거나; 적당한 논리예제를 들며 논하거나; 서양전통 논리학과 대비하면서 불교논리학을 얘기하거나 


일반적인 개론서, 즉 논리학이 등장하는 인도불교, 대승불교 에서 계보를 훑는 듯한 소개는 인물과 저서 등만 기억에 남고 인상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특히 밀교로 넘어가는 분위기에서 슬그머니 불교(논리학)가 사그러지는 것만 기술하고 끝나기도 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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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특히 선진시기, 에 관한 얘기들과 논의들 속에 수많은 '잃어버린 고리들'이 있다. 세분하면 다양하겠지만, 그 중 하나는, 문헌에 나오지 않는 혹은 문헌과 배치되는 발굴과 고고학상의 발견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알려진 문헌이지만, 그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웠지만 발굴로 진위가 밝혀진 책들이 있다. 

발굴된 죽간과 백서에 관한 얘기들이 바로, 현재 전하는 문헌에 없는 '잃어버린 고리'가 잔뜩 들어가있는 매혹적인 부분이다. 이학근의 <잃어버린 고리>에는 발굴된 문헌 에 관한 상세한 얘기들이 들어있다. 다양한 이유로 우리가 놓친 문헌들 얘기가 손에 잡힐 듯 자세하다.








진위를 의심받은 현존 문헌 중 <문자>, <공자가어>에 관한 언급이 특히 재밌었다.


문헌의 한계는 다른 관점에서 언어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자로 표현되기 시작한 즈음과 그이전은 우리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고고학은 그런 언어의 한계를 포함하여 문헌의 진실성 혹은 협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시선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부족을 넘어 초기국가로 들어서는 무렵과, 초기국가에서 국가의 확장을 보여줄 수 있는 소스들은, 글자기록이 갑골문이나 청동예기에 기록되어 가까스로 남겨진 것 외에는 고고학의 간접적이지만 넓은 시선들이다. <중국고고학>에서는 구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전기까지 다루는데, 이는 서주직전인 상나라 말기까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원지역 초기국가인 얼리터우와 얼리강의 형성과 그 강역, 주변지역 문화의 특징과 교륙, 그리고 상나라 문화의 시작부터 끝 이다. 읽다보면 고대중국 초기국가들의 공간적 형성, 지배방식들, 주변 문화와 교류 양상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농경중심인 중원지역과 북쪽 서쪽 지역과 차이와 교류 같은 점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고대중국의 고고학적 발견 중 특히 청동기에 집중해서 논의를 펼친 책도 재밌었다. 고대중국에서 청동기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인데, 그 독보적인 면이 줄 수 있는 색다른 얘기들이 세밀한 논증을 통해서 잘 전달하고 있는 심재훈의 <청동기와 중국 고대사>다.
















저자의 관심에 따라 좀 지엽적이다 싶은 주제도 있고, 예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하던 논의도 있지만, 항상 충실한 근거와 자신의 논의의 부족한 점을 짚어주는 정성과 성실함은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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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본격적으로 불교들어오기 전인 선진시대에 관한 책과, 인도 초기 불교에 대한 책을 보니까, 중국불교에 담긴 중국 지역성이 보이고, 다시 중국불교의 시작으로서 인도 지역성도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다. 


<대승불교> 같은 개론서를 통해 개략을 파악하고, 조금씩 모아둔 불교연구서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연구나 논문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보니까, 그때그때 흥미와 사정상 책들이 인도 중국 불교사 중 랜덤하게 모였다. 개론서에서 강조하고 소개하는 책들 중에 고른 것도 있고 해서 지금 보면 왜 샀는지 생각도 안나는 책도 좀 있다.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로 확장 분화하는 과정도 널리 알려진 진보적인 대중부, 보수적인 상좌부 분화처럼 비교적 그 이유가 명확한 경우도 있지만, 남은 자료가 많지 않고 그 계승이 불명료한 경우는 이름만 남고 세부내용은 모르는 경우도 꽤 있는거 같다. 그 중 하나인 '경량부'에 관한 책이 서재에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경량부 연구>다. '구사론'에 관한 얘기가 정말 자세하고 흥미롭게 잘 정리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상식이 뭉터기 이미지에서 조금씩 분별이 되기 시작하니까,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서 흥하고 흘러흘러 전도되기 시작한 각 불교의 조각들이 다르게 보이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대승 불교 흐름에서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불교의 중심철학>, <유식철학>, <불교논리학1> 도 쉽게 접했던 큰 그림 속 다양한 논의와 얘기들이 반갑고 즐겁다. 하지만, 이들 책도 쓰여진지 벌써 수십년 전이고, 저자들이 원하는 취지와 시대배경은 제각각이다. 과장하면, 중국불교에서 번역승들이 선택해 번역한 경전처럼, 이들도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맞게 번역하고 해석한 것이다. 


무르띠의 <불교의 중심철학>은 중관사상에 관한 것이다.
















체르바스키의 <불교논리학1>은, 막 제대로 된 불교를 서구세계에 알리려는 이의 고군분투를 잘 보여준다. 역자의 어휘선택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독교 배경지식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어휘들이, 과장하면 중국 번역승들의 격의불교 느낌이 조금 들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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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정신을 되찾자 2022-03-1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식사상과 공사상~˝유식˝과 ˝공˝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유식은 중생심(유위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고, ˝공˝사상은 여래심(무위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유위법과 무위법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삼라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식˝이 있다 또는 ˝식˝이 없다라는 양극단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식˝은 ˝있는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이며, 비상,비비상이라는 뜻의 ˝식˝의 성질은 ˝공˝이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개념의 색즉시공(물질세계인 이승과 영의 세계인 저승)~이승은 물질의 세계이고, 저승은 영의 세계입니다.영의 세계인 저승에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왔다는 겁니다. 자신의 물질적 세계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적인 마음만 남게 됩니다. 영적인 저승세계에 있는 모든것, 즉 지옥이나 극락은 자신의 마음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오게 되면, 물질인 육신을 통하여 그 물질을 만지고 촉감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저승세계의 모든것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 존재하므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살이 아무리 설법을 하고 노력을 해도, 스스로 업의 본질을 깨닫고(견성) 변하지 않으면,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 세계에 길들여진 영혼이, 저승에 가더라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식이 항상 그렇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필름으로 비유하자면, 번뇌가 없는 여래심은 깨끗한 원본 필름인데, 중생심은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필름이므로, 자신의 눈에 항상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모습의 저승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즉, 저승이든, 이승이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그것이 자신의 업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의해 좌우되어, 그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지옥이나, 극락은 오직 마음의 업식에 따라 그 존재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마음의 업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가 바로, 성불이요, 우주의 본심이요, 우주의 법진리인 ˝비로자나˝라는 것입니다. → 사찰의 ˝대적광전(비로전)˝ 참조

즉, 중생심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만(유위법), 부처님의 마음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무위법). 그러므로 진리를 다른곳에서 찾지 말고(원리전도몽상), 허상이든, 실상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인연연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가 바로, (자신의 ˝업˝으로 보이는)참진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생심(유위법)에는 극락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래심(무위법)에는 극락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핵심입니다.

*물리적 개념의 색즉시공~물질적인 측면에서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현대물리학의 거장인 하이델베르그에 의하면, 물질이라 함은 질량과 그 질량이 존재하는 위치가 특정되야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원자상태 이하로 쪼개어 분석한다면, 질량이 측정되면 위치를 측정할수 없고, 위치를 측정하면 질량을 측정할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물질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물질도, 사실은 물질도 아니요, 공도 아님을 말합니다. 즉, 물질도 그 본질적인 면에서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영혼은 물질인가? 아닌가? 물질도 아닌것이 존재하므로, 공도 아니다.. 석가의 업과 번뇌를 가지는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석가말씀)

물질=질량+위치= 측정가능.
물질의 원자이하는= 질량+위치모름, 또는 위치+질량모름,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이텔베르크말씀)
석가와 하이텔베르크의 말씀이 동일함. 이것으로 노벨물리학상~]

*미시적 우주론~물질은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 중간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새로운 입자를 쿼크라 불렀는데,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론상 존재하지만 측정하기 어려워 top쿼크는 1995년도에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는 6가지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및중성자를 전자와 연결하는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되고, 전자는 6가지의 렙톤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반야신경원문 뜻해석” 블로그 참조
 

중국선진 혹은 양한 시기까지 고대중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 새삼스럽다. 찾아보다가 서복관 과 마르셀 그라네 책이 눈에 꽂혔다. <중국인성론사-도가, 법가 인성론>, <중국사유> 다.
















역시 처음 책들을 봤을 때와는 무척 다른 느낌이다. 선진시기 여러 고전을 번역이라도 곧바로 읽어 내려고 도움을 청한 때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내용이 맞다 틀리다 의 문제가 아니고, 저자들이 원하고 가려는 방향이 눈에 찐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여전히 각 고전을 파서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방식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풍부한 이해를 돕는 색다른 시선은 항상 반갑다.


서복관의 책에서 <노자>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으로 어조사유무와 '성'자 유무를 근거로 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결과는 <노자>가 전국초기나 춘추후기로 <장자><맹자> 앞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얼마전에 봤던 장우진의 <양생>에서는 <노자>의 전체적인 내용이, 춘추시대서적의 시대정신인 '공동체정신'보다는 '개인양생'에 초점이 맞춰져있다고 보고, 그 시기를 늦게 잡았던 것과는 방향이 달랐다.


그리고 서복관의 책에는 선진시기와 진한시기를 분간하는 한 가지 기준을 제시하는데, 인상적이고 어느정도 타당해보이는 견해였다. 대표적으로 <회남자>가 양한시기의 시대정신인 '종합'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즉 현장철학이기보다는 책상철학에 가깝다. 이에 비하여 선진시기는 실제의 체험이 주양분인 현장철학이다.


현장철학으로 볼 때, <노자>의 몇몇 내용들은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노자>가 철학대상으로 삼은 것들은 현장의 복잡성을 전제로 한다. 고기를 가르는 백정도, 천지를 낳는 도도, 백성을 다스리는 무위도, 그 대상들이 단순하거나 백지상태가 아니라, 현실의 복잡함을 놓고 하는 얘기다. 


그라네의 <중국사유>는 다양한 카테고리를 놓고 중국사유가 어떠한가를 얘기하지만, 개별 범주별로 열심히 분석해놓은 내용들이, 종합하여 내놓는 깊이와 체계는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맨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내가 배경지식이 없어서 책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지금 보면 저자의 글쓰기 태도가 장님 코끼리 만지듯 개별부분에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모두 풀어놓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중국사유가 어떻게 다른지는 알겠는데, 왜 다른지는 많은 얘기가 없다. 그래서 독서가 자주 끊기고 읽고나서도 남는 것이 뚜렷하지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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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의 흐름을 잡아줄, 적절한 불교이미지를 선택해서, 내가 보아왔고 친숙한 이미지와 책에서 본 것중 괜찮은 장면을 잡아, 그 내용을 풀어내 설명할 수 있으면 바란다. 그 와중에 새롭게 알게된 고대중국이해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기면 좋겠다.


이전에 중국불교에 관한 책을 봤을 때와 달라진 점은, 고대 중국에 새롭게 들어온 대상이 무엇일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지금은 새롭게 들어온 대상을 맞이한 고대중국인들의 모습과 수용과정이 좀 더 관심이 간다.


이미지중 하나는, 선사상의 창시자 달마대사가 면벽수행했다던 소림사-얘는 후대에 작성되어 사실여부 판단불가.

다른 하나는 다양한 출신의 번역승; 다른 하나는 <대승기신론>; 다른 하나는 중국에 전해진 불교의 출발지와 상황; 북중국 불교와 강남 불교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초기불교의 암송되어 왔던 내용이 '기록'된 시기가 대승불교경전 성립시기와 멀지 않다는 점


...



암송되어온 초기불교의 형태가, 이미 인도 내부 혹은 오늘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확장될 때부터, 본격적으로는 암송이 기록화될 때부터 적지않은 현지화와 현지인들의 요구에 대한 대응, 새로운 깊이 추구 등이 반영된다. 인도아대륙부터 수많은 언어가 상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는 불교성립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다. 계속 이어지는 바라문교의 문화에 대한 불교대응도 잘 알려진 여러방면으로 나타났다.


중국도 그렇게 멀지 않은 방식으로 불교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엄청난 언어상 차이가 번역자와 번역에 인도본토와는 다른 영향을 끼치고, 불경에 담긴 내용에 관심과 의문을 갖는 영역이 달라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


이렇게 선택된 경전의 번역과 해석이 낳은 차이를 음미해볼 수 있었다. 또다른 관점으로, 시대별 시대정신이 좇은 시대적인 요구와 각 문화권에서 활발했던 논의를 중심으로 놓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논리학을 둘러싼 중국불교와 인도불교의 차이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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