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한중지식인이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상황과 배경하에서 하는 얘길까? 지식자체나 그 본질보다는 지식을 다루는 사람과 상황을 재밌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18세기 지식과 지식인을 궁금해하는 20세기 일본인들과 한국인들도 함께 나온다.

18세기에 통용되는 지식들의 거래와 가치부여, 그리고 후대에 재구성되는 양상, 중국, 조선, 일본에 어떻게 지식들이 생성되고 모이고 흩어지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그리고 이들과 교류를 가진 중국 지식인들 면면이 하바드 엔칭도서관을 중심으로 계속 밝혀진다. 그래서 단면적, 단편적으로 알았던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을 풍부하게 알 수 있다. 국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사 관점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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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전집 6권에서 성격유형을 설명할 때, 같은 분야에서 외향성과 내향성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함께 다루어, 성격유형에서 에너지의 방향이 다를 때, 그 분야의 내용물이 얼마만큼이나 달라지는 지를 감탄스럽게 보여준다. 한 예가 그리스철학에서 이데아를 주장한 플라톤이 내향성의 대표고, 그 이데아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외향성의 대표다. 
















이 성격유형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데, 융과 프로이트의 결별도 그런 측면이 있다. 융은 프로이트가 외향성, 아들러가 내향성이라고 분석해 놓았다. 

카렌 호나이의 글은 일단, 외향성임이 분명한데, <내가 나를 치유한다>에서는 흥미롭게도, 외향인 사람이 내향성 자체를 분석한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분석하니, 반짝반짝 흥미로운 주장들과 새로운 이해들이 적지 않지만, 외향성이 보기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흥미로운 사건들을 모아놓아, 그 선별 자체로 자연스러워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서 신선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술방식이 한번씩 거슬리고 호나이가 짚어준 측면이 호나이가 기술하는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다양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놓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엉성하지는 않은데, 엉성하달까. 책이 공감을 주거나 감동스럽지는 않은데 눈과 손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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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 글쓰기는, 특히 현대이전 시간대에서는, 정말 문헌중심의 글쓰기다. 모든 문헌을 섭렵해 쓰는 글쓰기는 특유의 힘이 있기는 하지만, 또 특유의 답답함이 있다. 유식하지만, 답답하달까. 인류학자의 열려있는 글쓰기 같은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자신들의 선조들의 얘기고, 남겨놓은 문헌들이 많이 있으니까, 웬만큼 알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거 같다. 100년 전만 가도 벌써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라고 보는게 맞는거 같다. 















웨난의 글인데, 처음 들어보는 인상적인 정보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루한 글도 많았다. 그러니까, 왜 손자병법이 그 시기에 통했을까, 오늘날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이런 의문에는 별로 관심을 안 준다. 손자병법 내용 자체는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삼국지처럼, 어떤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권력찬탈의 어떤 측면에 집중한다.

내용을 음미할 때는 줄리앙의 글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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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 흥했던 논증방식에 결의론(casuistry)이 있었다고 한다. 이 논증방식이 흥미로운것이, 초기 기독교나 중세 기독교에서 원칙이나 원리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과 상황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 때 쓰던 방식이라는 점이다.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길을 갔을 때, 흔히 알고 있는 신약성서 속 여러 말씀들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런 것들은 원칙이나 원리에 가깝고, 적용할 원칙들이 두 세개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성서에 기술되지 않은 상황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때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 결의론이었다고 한다.

중세 기독교도 같은데, 우리 상식과 달리, 딱딱하고 굳은 것만 그들의 교리가 아니고, 유연하고 현실반응영역도 상당했다는 점이 놀라왔다. 게다가 꽤 흥했고, 근대과학이 흥했던 시기와 맞물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하는 논증글쓰기와도 좀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논증글쓰기가 과학이나 수학의 기하학적 방식을 많이 닮은 반면에, 결의론은 그렇지 않고, 한 원리를 연역하기 보다는, 여러 대안들을 비교하는 식으로 하는 거 같다.

















그리고 오늘은 장국영의 사망 17주기다. 멋진 중국사람이 주는 울림은, 다른 나라 멋진 사람들과 좀 다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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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열심히 읽었던 김재권을 포함한 여러 심리철학 책들; 초기불교,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불교논리; 현상학 책들 일부; 신경분야의 코흐의 책들과 이 분야 끝판왕 이나스의 <꿈꾸는 기계의 진화> ; 그리고 고대 중국 사상(노자, 장자, 논어, 회남자, 손자병법)이, 자아 혹은 의식을 바라보는 서양전통, 인도전통, 중국전통인 거 같다. 

이들 모두 자아나 의식을  다루는 정말 다른 방향과 방식들의 책이었만, 웬지 동전의 앞뒤 같은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계속 각 방면 책들을 모아 읽어 보게 되었다. 너무 다루는 소재나 가고자 하는 길이 달라, 이들 모두를 건사해 그 '다름'의 가치를 제대로 챙기고 전달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그 '색다름'을 전면에 내세워 이들이어떻게 다르고 무엇을 다뤘는지를 소통시키는 책을 발견했다. <몸의 인지과학>이다. '인지과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입장을 분별하고 구분해준다.















그리고 특히 불교를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서양인들의 불교에 대한 기술은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취해 가볍고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는데, 이 책은 흡족했다. 


이들 저자들이 고대중국사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적당한 정리와 신선한 시선을 줄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걸게 했다. 


자아 혹은 의식을 보는 시선 중에 이들을 얕게 여기고 '신경'을 중심으로 보는 시선이 있는데, 이들은 자아를 부산물 정도로 다루고, 의식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현상들을 깊이 다루지 않고 소홀히 넘기는 듯 보인다(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신경 중심 논리도 약해지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도 멋진 책이 있는데, 로돌포 이나스의 <꿈꾸는 기계의 진화>는 신경중심시선의 끝판왕이다. 자아에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기는 하지만 이 책도 역시 신경중심으로 기술을 이끌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논리전개와 증거제시가 너무 대단해서 자아와 관련된 부분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다.
















인지과학이나 심리철학 말고도, 의식 자체를 신선한 실험과 해석으로 숨겨진 속성들을 드러내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던 <the ego tunnel>이 있다. 의식의 속성을 어떤 조건이면 의식을구현하거나 재현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깊이있는 접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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