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진보적이고 존경받는 종교 학자가, 하버드 석학이 썼다는 이 책은 성경을 역사와 관련이 있는 논쟁 많은 전설로 생각하는 사람이 쓴 책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하나님도 나오고, 예수도 나오고 사랑도 나온다. 성경 내용의 앞뒤를 연구한 노력도 보인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는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아들도, 구원도 없다. 맞는 말을 하는 듯하면서 잘못된 결론으로 이끈다는 것이 큰 함정이다.
별점: ☆☆☆☆☆
들어가며
성서를 중심으로 내 삶을 돌이켜본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각 단계에는 그 나름의 성서 읽기 방법이 있었다. 첫째 단계를 나는 ‘이야기‘ 단계라고 부른다. 나의 성서 이해의 발전 단계 중 두 번째는 ‘역사적‘ 읽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내가 성년이 된 후 천천히 발전했는데, ‘영적‘ 단계라 이름 짓고자 한다.
˝저 유색 인종 애들이 성경책을 하나 달라고 하대. 내일 주일학교를 하고 예배를 보겠다고 말이야.˝ 구치소장은 깨닫지 못했다. 출애굽기에서 복음서를 거쳐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 그리고 성서가 역사 속에서 혁명 운동의 불을 지핀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 아이들에게 성서는 즐거운 이야기들의 모음집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며, 또한 분해하고 분석하고 연대를 규정하고 분류해야 할 유사 역사 문서를 훨씬 뛰어넘는 어던 것이라는 점이었다.
오늘 우리는 성서를 왜 읽어야 하는가? ‘성경 공부‘와 ‘성서학‘이 같지 않다는 점에 주의하기 바란다. 성서학은 문법학, 문헌학, 의미론, 수사학, 비교 연구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고고학과 고생물학을 끌어다 쓰기도 하고 최근에는 문화 비교학을 이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연구자로 하여금 어떤 본문이 본래 무엇을 뜻했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하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 우리의 문화, 또 좋든 싫든 우리 각각의 혼을 가르치는 책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한 걸음 떨어진 외부 관찰자로서 성서를 만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정직한 질문들과 참된 희망을 가지고 성서에 다가갈 때에만 성서가 우리에게 말한다.
1장 뱀, 홍수, 악의 신비 - 창세기
창세기는 서로 다른 작가들이 쓴 이야기들의 수집물이다.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이미지는, 플루트와 비올라가 트럼펫이나 베이스 소리에 묻힐 때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주는 작곡가-지휘자-연주자에 가깝다. 게다가 이 작곡가-지휘자-연주자는 그 일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 섬세하게 해야만 한다.
‘원죄‘라는 단어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죄는, 좋은 삶을 살려고 애쓸 때 우리를 좌절시키는 딜레마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성서 전체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은혜‘라는 성서적 개념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원죄‘라는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응답이다.
2장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 - 출애굽기
성서를 진지하게 읽으려는 독자라면 고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다. 아마추어 수준의 성서 고고학 지식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번역을 비교해보는 즉시 우리를 꽉 잡고 있던 문자주의의 힘은 약해진다. 이로써 우리는 같은 히브리어 원문이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새미국표준 성서 NASB로 대표되는 문자적 ‘정확성‘과 다른 한편으로 메시지 The Message 같은 일상어에 더 가까운 번역들 사이의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전자의 경우 단어의 뜻이 변화하는 방식을 고려해볼 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을 만들어낼 때가 자주 있고 후자의 경우 현대적 번역에 열중하다가 원문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출애굽기가 어디서 왜 쓰였는지를 알아내는 일은 출애굽기의 종교적 힘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킨다. 이 책을 통전적인 영적 방식으로 읽는 것인데, 이것은 출애굽기가 아우르는 전설들과 민담들을 엮은 기원전 600년경의 유대인들의 입장에 우리들 자신이 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중심 메시지를 파악하게 되고, 이로써 어떤 한 민족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를 가지게 된다.
원조 출애굽의 저자들과 편집자들은 이집트 압제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옛이야기를 당대의 국가적, 종교적 목적을 위해 활용한 것이다. 그 책이 쓰인 기원전 7세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위협의 시대를 살아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느껴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 그 옛 시대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사용하고 재창조하였는지를-상상의 이중 도약을 통해-되돌아볼 수 있다.
출애굽기는 실제 민족이 실제 상황(7세기) 속에서 먼 과거의 실과 천 조각 들을 모아 자신들을 위한-그리고 온 역사를 위한-인간 해방의 증언으로 짜낸 과정을 또한 말해준다.
3장 가나안 정복의 전투들과 단막극들 - 여호수아기
여호수아와 그의 전사들은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 및 다른 민족들-곧 다른 어떤 이의 신이 자기들의 땅을 이 방랑 민족에게 주었다고 믿지 않는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여호수아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책 속에서 윤리적 모델이나 도독적 규범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예리코 정복의 고고학적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만이 아니다. 고고학 연구는 당시 그런 성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증명한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아마 이스라엘 사람이 오기 훨씬 전에 버려진 산기슭 작은 마을의 폐허에 관한 민간 전설일 것이다. 여호수아기의 저자들이 그 전설을 가져다가 다른 지방 전설들과 함께 엮어서 아마도 야훼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성의 피비린내 나는 정보고가 파괴에 관해서는, 어느 고고학자도 그 성읍이 당시든 그 이후든 존재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 역시 여호수아기의 저자들이 이스라엘인들이 오기 훨씬 전의 전설을 사용하여, 야훼의 무시무시한 힘을 안에서든(불행한 아간) 밖에서든(박복한 아이 주민들) 절대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려 한 것이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때에 당신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성을 찍고 우상들을 불사르십시오(신 7:2-5). 그러나 고통스럽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다-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폭탄 단 하나로 히로시마의 남녀노소 6만 명을 불태우러 나가기 전 미군 조종사들은 군종 목사가 인도하는 기도에 머리를 숙였다. 혹 다른 교훈은 못 주더라도, 여호수아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책에 그려진 사건들보다 수 세기 뒤에 저작되었으며 특정한 종교 및 정치적 목적을 갖고 쓰인-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프로파간다‘라고 부를 법한-문서라는 저을 염두에 두고 여호수아기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여호수아기를 읽음으로 우리는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대량 살상 무기로 무장된 세상 속에 사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정복 전쟁을 계속 허락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인정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계속 허락할 수 있는가?
4장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하나님께 대꾸하기 - 욥기
욥기는 인간 고통의 신비, 특히 무고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항구적인 주제 속으로 가차 없이 뛰어든다. 욥기가 허구임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욥기는 히브리어식 ‘옛날 옛날에‘로 시작된다. 이 책은 역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전설, 영웅담, 이야기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욥기는 아랍어와 아람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노련한 언어학자들조차 곤란하게 만든다. 욥기의 번역 과정에는 추측과 유추가 많이 개입되어 왔다. 따라서 둘 이상의 번역을 앞에 두고 꼼꼼히 따져 가며 읽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최근의 번역들은 ‘인내‘라는 말 대신 ‘견딤‘이나 ‘변함없음‘을 쓴다. 그렇지만 이 단어들이 ‘인내‘보다 낫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나는 성마른, 때론 맹렬한 이 남자를 제대로 그려주지는 못한다. 이 남자 욥은 인내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쉽게 화내고 무례하고 도발적이다. 어쩌면 ‘인내심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우스는 성서의 다른 책들이 잠깐 언급되는데, 언제나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나온다. 오늘날로 치면 ‘오즈 땅‘이나 ‘먼 나라‘ 정도의 느낌을 주는 말이어서, 이것이 상상의 이야기임을 더욱 강조해준다. 그러나 허구하고 해서 욥기가 덜 진지해지거나 덜 믿을 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욥기로 하여금 시대를 초월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욥기는 오래전의 첫 독자들에게나 오늘날 욥기와 씨름하는 우리에게나 모두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욥의 끈질긴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때론 답이 그냥 전혀 없을 때도 있다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토해낸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
질병과 상실이라는 그의 개인적 경험은 그를 움직여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했다. 부의 특권에서 황폐한 무력에로의 전광석화 같은 추락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했다. 욥이 요람에서와 같은 안락한 삶을 계속 살았다면 절대 몰랐을 그런 세상을 말이다.
구티에레스는 이 ‘불평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한다. 그렇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불평이 기도의 정당한 요소일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분노한 절규는 기도의 정당한 형태이기도 하다.
5장 목소리 잃은 자들의 목소리 듣기 - 아모스와 예언자들
우리가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읽을 때, 읽는 것의 내용만 알아서는 안 된다. 그 자료가 어떤 종류인지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아야만 연대기와 전설을 혼동한다거나 비유를 역사로 착각한다거나 해서 성서를 잘못 읽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무분별한 문자주의에 빠지는 일을 막아준다. 성서는 여러 사람들이 오랜 세대에 걸쳐 만든 창조물인 것이다. 예언자들을 읽을 때 양식 분석이 어떻게 도움이 될까? 양식 분석을 적용해본 역사가들은 비슷한 양식들이 성서 저자들의 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자료들-기록된 형태와 구비된 형태 모두-에도 존재했음을 발견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읽으면 예언을 볼 때마다 그것이 예언임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6장 최후의 네 권으로 - 간직된 복음서, 버려진 복음서
왜 이 최후의 네 권은 가죽 표지 사이에 안전하게 놓여 있고, 도마복음서는 페이퍼백 단권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정경화‘라고 부른다. 어느 책을 넣고 어느 책을 뺄지 합의에 이르는 데는 긴 시간-몇몇 경우는 수백 년-이 걸렸다. 루터는 야고보서가 신약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을 가졌고 계시록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길고 혼잡한 정경화 과정을 오늘날 성서를 읽는 모든 이들이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일이 있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성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영감을 받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경우 정경화 과정의 복잡한 전투들에 관해 배우고 나면 힘들어할 때가 가끔 있다. 성령이 각 단어에 영감을 주었다고 믿는 이들에게, 같은 성경이 정경화와 번역이라는 쉽지 않은 길에서 그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셨다고 믿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포함된 것과 포함되지 못한 것 모두가 자기 자리에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방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우리 시대 우리 상황 속에서 ‘우리의‘ 해석 또한 다른 세기 다른 문화 속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고 화장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성서학자들은 이 모든 결정을 전적으로 남성들이 한 것임을 또한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거나 하나님을 여성형으로 부르는 문서들을 조직적으로 배제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복음서가 단 한 권이 아니라 네 권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각각을 비교하며 읽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로써 닮은 점과 찾아내게 되면 당연히 각 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은 그들이, 최소한 역사학적 의미에서는, 예수의 동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복음서들 속에는 저자들이 목격하지 못한 예수의 말과 사건이 보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리아 수태 고지, 탄생 이야기들, 헤롯과 현자들의 대화가 그런 예들이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기도할 때에 그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에 빠졌었다. 그밖에 다른 예들도 있다. 십자가 사건 40년 뒤에 복음서를 쓴 마가는 자신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머지 세 복음서들은 그보다 20년 이상 늦게 쓰였으니 그때 저자들의 나이는 최소한 90살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훨씬 넘어서는 나이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묘사하는 장면 속에 그들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처음에는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산상 설교를 들은 군중 속에 마태가 없었꼬 예수가 4000명을 먹인 후 부스러기를 거둘 때 마가가 돕지 않았다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나중에 좀 더 생각한 후 나는 이것이 실은 좋은 소식임을 믿게 되었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요르단 강이나 갈릴리 호수에서 ‘그분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해왔다. 우리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명상 기도할 때 이것은 좋은 훈련이 될 수 있고, 예수회 수사들은 이것을 하는 법을 가르치는 영적 훈련을 개발했다. 이것은 우리를 복음서 저자들에게 더욱 가까워지게 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예수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았다. 예수를 알아가고 또 사람들이 그의 생애에 부여한 의미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복음서 저자들과 동일시하고, 그들이 그랬듯이 ‘그에 관해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성서 이야기면 혹시 몰라도, 복음서들 간에 명백히 보이는 모순들을 짜서 내버리는 노력은 독자에게서 중요한 사실을 새로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오늘날 성서를 읽는 이들은 이 짜깁기 작업들을 피하고 대신 마가와 누가 또는 마태와 요한을 비교, 대조하는 가운데 배울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현명할 것이다.
7장 저자들의 어깨너머로 보기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첫 세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보는 관점이 공통되기 때문에 ‘공관 복음서‘라고 불린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마태는 독자들에게 이 새 왕이 단순히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응답을 요청한다. 공의의 나라처럼,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친 치유처럼, 그것은 ˝보는 것으로˝-아무리 예리하고 엄격하게 본다 하더라도-답할 수 없다. 그것은 훨씬 더 깊은 무언가를 요구한다.
8장 타르수스의 바울과 함께 여행하기 - 서신서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달리 명백히 ‘역사 속‘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를 가장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라도 그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서를 읽을 때 기억하면 좋은 것이 있다. 바울이 그것들을 쓸 때(기원후 53-62년) 복음서들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첫째,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생각이 아니었다(사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또한 이 나사렛 청년을 따르는 이방인들 그 누구에게도 그는 확실히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9:1-2 RNKSV
둘째, 확실히 그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conversion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바울(그는 이후로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다)은 바울 이전의 예언자들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부르심’에 해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 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행전 9:3-9 RNKSV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고전 14:34)
어느 성서 번역이든 자기가 사용하는 번역 성서의 모든 단어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으며 무오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울 저작을 반대하는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이 절이 후대에 끼워넣어졌다고 인정한다면 얼마나 많은 절들이 또 의심받겠는가?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1:26-27)
스크로그스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지금 게이 및 레즈비언 기독교인들이 풍성하게 해주는 인간관계는 바울 사도가 규탄하는 부패하고 비인간적인 성관계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스크로그스는 결론 내리길, 비록 성서가 정말로 권위 있긴 하지만, 당시와 지금의 배경의 차이점에 근거할 때, 성서가 동성애에 관해 말하는 바와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삶과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의 이 절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회중석과 강단에서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자리가 어디인가에 관한 논의에서 그야말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9장 난기류 속 여행에서 살아남기 - 요한계시록
몇몇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가 요한복음의 저자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대에 ‘요한‘은 흔한 이름이었다. 또 이 책을 쓴 요한은 자기가 사도였다거나 복음서의 저자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또한 두 책의 어휘와 문체가 뚜렷하게 달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요한이 서로 달랐다고 믿는다. 이게 중요한 문제인가? 이것이 고대 세계에 예수의 원 사도들이 썼다고 알려진 저술들이 그토록 많이 떠돌았던 이유이다. 그것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 그들이 쓰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성서의 첫 다섯 책을 사실은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을 때, 그것이 몇몇 사람들이 두려워한 만큼 책들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이 약화시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학자들은 바울이 썼다고 여겨지는 편지들을 바울이 다 쓰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그 편지들의 영적인 힘을 약하게 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 음산한 상징들이 오늘 우리의 미간도 찌푸리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암호 해독을 위한 온갖 가내 공업이 생겨나도록 했다는 점이다. 암호를 깨려고 수많은 책들이 헛된, 많은 경우는 이상한, 시도들에 할애되었다.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을 따라 실제 본문을 읽을 것을 권한다.
1막(1:9-3:22): 요한이 배경을 마련하고, 일곱 개의 초기 기독교 회중들에게 연극에 관해 언급한다(일곱 회중은 모두 소아시아에 있다). 그는 일곱 중 일부는 칭찬하고 일부는 나무라지만, 핵심은 그들 모두가 이 박해의 기간 동안 인내해야 하며 그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그들은 옳다고 인정받을 것이다.
2막(4:1-8:1): 요한은 하늘 궁정(욥기의 첫 부분과 비슷한)으로 우리를 데려감으로써 우주적 배경을 펼친다. 그 목적은 곧 일어날 모든 무시무시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지배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해주기 위함이다. 2막은 “반 시간 동안[의] 고요”(8:1)라는 기이한 말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청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이 잠시 다과를 즐기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도록 인터미션을 준 것일까?
3막(8:2-11:19): 이제 문제가 시작된다. 플롯이 복잡해진다, 아니 더 정확히는, 폭발한다. 교회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 나팔들 소리가 난다. 회개로의 부름이 있다. 하늘에서 목소리들이 들린다.
4막(12:1-14:20): 상황이 바뀐다. 하늘의 의인들이 악의 수하를 물리친다. 그들의 승리는 이 작고 힘없는 회중들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신호탄이다.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다 하더라도 그들은 언젠가 “승리할 것이다”.
5막(15:1-16:21): 이 부분은 마음이 여린 사람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상황이 험악해진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진노의 대접들을 오만한 압제자들에게 쏟아붓고 그들을 섬멸할 재앙들을 보내기 시작한다(유대인이라면 출애굽 이야기의 개구리와 종기 때문에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시나리오이다).
6막(17:1-20:10): 이제 마침내 하나님의 군단들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바빌론’은 유대인 독자나 청자라면 즉시 알았을 ‘로마’를 뜻하는 암호명이다. 제국 포로로부터의 임박한 해방은 전에 있었던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반향한다. 이제 카이사르 곧 사납게 날뛰는 짐승이 아니라 그리스도 곧 온유한 어린 양이 승리한다.
7막(20:11-22:5): 대단원에서, 하나님과 악의 거대한 투쟁 곧 우주적 대결이 끝이 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늘로 끌어올려짐으로써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땅 위 이곳에 만들어짐을 통해서이다.
드라마가 끝난 뒤 20절을 주목하라. 여기서는 많은 극작가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극작가 자신이 잠깐 무대로 올라가서 예수께서 어서 다시 오시기를 간청한 후 축복의 기도로 마무리한다. 커튼이 내려온다.
692년 공식적 종교회의에서는 두 가지 결의-하나는 계시록을 포함하는 결의였고 다른 하나는 제외하는 결의였다-를 동시에 선언함으로써 논쟁을 악화시켰다 아주 천천히, 수 세기에 걸쳐서야 동방 정교회는 계시록을 정경으로 공인했다. ˝어쨌거나 이 책이 성서 속에 있잖은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그것이 어떻게 거기 오게 되었는가?˝이다. 어떤 책이 정경에 포함됐다고 해서 꼭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거나(이것은 후대에 와서야 중요해진 것이다), 출처가 분명하다거나, 심지어 영적으로 가치가 있음을 뜻하지는 않음을 기억하라. 그것의 의미는 단지 그 본문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대해 당시 발전하던 합의를 충분히 대표했고, 그래서 공적 예배에서 읽힐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공적 예배에서 거의 한 번도 읽히지 않는 성서의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일종의 ‘톱 20’에 들어서 우리가 늘 듣기도 한다. 페타우의 빅토리누스Victorinus of Pettau는 다른 것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인 주교였는데, 그의 이름이 남게 된 것은 기원후 300년경 (라틴어로) 쓴 계시록 전체에 관한 주석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계시록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책이 아니라 기독교회가 처해 있었고 그 후로도 계속 대면해야 할 신학적·도덕적 투쟁에 관한 책이라고 그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2장에 관해 논의하면서 그는 여자를 교회와 동일시하고 용을 악마와 동일시한다.
계시록 읽기 방식은 그다음 영향력 있는 해석자가 등장할 때까지 수 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아킴은 역사가 포괄적인 세 시대로 나뉜다고 보았다. 곧 아버지의 시대(주로 유대교 부분), 외아들의 시대(예수 그리스도의 도래 이후), (그의 시대에 밝아오고 있던) 성령의 시대가 그것이다. 요아킴의 성서 해석은 한동안 교회 신도들 중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이들 중 몇이 이 새로운 시대에는 성례와 사제직과 심지어 교황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지배 계급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또 다른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새 시대의 으뜸 전령이라고 가르쳤을 때 이것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저 상상력 풍부한 수도원장의 글들은 결국 이단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때에는 계시록을 교황에 반대하며 역사적·예고적으로 읽는 방식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고, 그리하여 이 읽기 방식은 종교 개혁의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또 반대로 종교 개혁은 이 읽기 방식을 더욱 널리 퍼뜨려 주었다).
계시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가?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이 점성술을 위한 천궁도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계시록은 노스트라다무스나 수정구의 성서 버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인간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면적 철학 또는 신학을 빚고자 하는 대단한 야심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요한이라는 이름의 유대 배경을 지닌 초기 기독교 저자의 관점으로, 그와 그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1세기 말에 직면하고 있던 배경 속에서, 쓰인 것이다.
10장 오늘날 성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예수 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관해 무엇을 발견하든 그들의 작업이 끝나고 나면, 예수는 여전히―아무리 멋지고 매력적이고 신비한 인물이라 하더라도―과거의 역사적 인물, 개인으로만 남는다. 현재의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성서가 자체가 그 답을 준다. 전체 66권을 관통하는 중심 줄기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약간의 위험이 따를 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예수가 요구하는 태도를 ‘영적’spiritual이라는 말로 부르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는 바는 결코 전적으로 내향적인 읽기 방식이 아니다. ‘영적’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서 전체를 통하여 그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성령이다.
우리가 성서가 말하는 바를 향해 순수하게 열린 마음을 갖고서―그 속에서 발견하는 것 때문에 어쩌면 당황하고 흔들리기까지 하면서―성서를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동일한 드라마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내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가? 본회퍼에게서 힌트를 얻자면, 그것은 성서를 읽는 ‘다른 이들’ 세 무리를 의미한다. 첫째, 그가 말하듯 삶을 ‘아래로부터’ 보는 이들이 있고, 둘째, 다른 신앙을 견지한 채 성서를 읽는 이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때론 거슬리게 때론 나란히 놓는 방식―전통적인 읽기에 의문을 던질 때도 많은―으로 바꾸어 이야기해주는 시인들, 소설가들, 시각 예술가들, 영화 제작자들이 있다.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답할 때에, 우리는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참 원천으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서는 신앙의 몇몇 참 원천 중 하나로 이해돼야 한다.
성서를 ‘아래로부터’ 읽으려는 시도의 기본 요점은 사회에서 보다 편안한 위치에 있는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인상을 보다 덜 안전한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이들에게 비추어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가며
내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평소 자주 그렇듯 몇몇 친구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냐고 내게 물어 왔다. 내가 ‘성서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답하자, 어떤 친구들은 좀 놀란 표정이었고 또 어떤 친구들은 관심을―적어도 겉으로나마―표현했지만, 두어 명은 내가 그런 미심쩍은 프로젝트에 시간을 쓴다는 사실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의 반대 의견은 몇 가지 형태를 띠었다. 어떤 이들은 왜 내가 그렇게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러운 픽션으로 가득 찬 옛날 책에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써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어떤 이는 성서를 ‘유대교 동화 모음집’이라고 불렀다. 다른 이들은 그 ‘좋은 책’이 한때는 정말로 가치가 있었을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했다. 성서는 낡고 구식이고, 교육 못 받은 편협한 사람들이나 몇몇 골동품 애호가에게나 흥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나는 보다 당면한 문제에 내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서너 명은 나를 꾸짖었다―보통은 부드럽게. 성서가 얼마나 위험한지, 오랜 세월 증오와 갈등을 얼마나 많이 낳았는지 알지 않느냐? 왜 지금 성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 하는가? 성서가 스스로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 그보다 더 낫게는, 먼 미래에 있을 그러나 필연적인 성서의 종말을 앞당기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성서는 우스꽝스럽고 황당무계한가? 그 답은,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영웅담과 전설, 거인들과 말하는 나귀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성서에는, 허클베리 핀이 톰 소여의 일화에 대해서 쓴 말마따나, “약간의 과장”이 담겨 있다.
성서가 구식이라는 비난, 한때는 지혜와 영감의 원천이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비난 역시도 맞는 면이 좀 있을 수 있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들 중 몇은 후기 신석기 시대를 살던 이들 앞에 있던 문제와는 다르다.
동시에 성서는, 우리를 둘러싼, 그리고 불러낸 적 없는데도 우리 속에서부터 분출해 나오는, 신비를 직면하려는 인류의 시도들을 기록해놓은 문서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나는 이 이상한 옛 모음집에 관한 또 하나의 책을 쓰느라고 시간을 써야 하는가? 한 가지 답은 성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에 있다. 성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권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돕고, 모든 종교 전통의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나뉠 수 없는 관계임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