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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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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한없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병에 걸리지않기 위해 매일 아침 알로에를 갈아대는 믹서기 소리. 초록불이 바뀌어도 성급히 발을 뻗지 않고 좌우를 살피는 치밀함. 내일을 위한 저축, 내일을 위한 공부,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모든 것. 그러니까 지금 바로 현재, 숨 쉬고 있는 순간 하나하나가 허무하다. 죽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온다.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경계선이 결코 멀리 있지도 그리 두껍지도 않다는 걸 인식한다.


 부당한 죽음 앞에 소멸하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하고 억울한가. 세상의 모든 일이 뜻대로 순리대로 이뤄지지않는다고 하지만, 죽음을 결과로 낳는 부조리는 결코 돌이킬 수도, 어떤 식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당사자가 아닌 그 당사자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붙잡고 '살려내라'며 불가능을 애원하고, 가끔은 그 분노의 방향을 알 수 없어 오히려 황망하게 무너져 땅만 치며 울어버린다. 이 눈물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눈물이 아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친구. 내 사람을 죽인 세상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다. 그들은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음껏 추억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미련한 끈을 붙잡고 놓지 못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죽은 이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대신 안고 사는 이들이 등장한다. 한 걸음 물러선 채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문체는 덤덤하고 그들의 말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상황은 너무도 슬프고 아픈데도, 그들은 그걸 툭- 던져놓고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을 할 힘조차 잃은 모습이다. 무표정하게 꾹 다물린 입매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영웅적이게 상황을 진두지위한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져 희생하는 그런 극적인 인물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으로 수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도 당시 그들이 떠나보낸 죽음을 잊지 못하고 감히 슬퍼하지도 못한다. 친구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죽음이 두려워 도망친 중학생 아이는 결국 하늘색 교련복을 입고 총대를 매고, 정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머니는 나머지 자식마저 잃을 것이 무서워 막둥이 찾기를 머뭇거리다 아들의 시체 앞에 시위에 나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 그 아픔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힘은 충분하다.


 외어야 하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중학교 시절 나는 '5.18'을 원인-전개-결과의 순서로 노트에 필기하며 달달 외웠다.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1980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광주에서 많은 희생자…. 암기과목에 자신있었던 나는 국사 과목의 점수가 좋았다. 그러다 가족이 다 함께 극장을 찾아 관람했던 <화려한 휴가>를 통해 나는 5.18의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과서에 적힌 '역사'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었다,는 사실보다 나는 그들의 삶이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5.18은 분명 정치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은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을 왈가왈부하는 일에 정치적인 의도를 섞게 되면,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이 될 수 있는 일이 거짓으로 매도될 위험이 생긴다. 나는 이 책을 5.18을 중점적으로 읽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너무도 아프게 느꼈다. 역사는 알아야하고 외워야하는 것이지만, 소설을 통해 읽는 역사에서 얻어낼 지점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적 문장이 아닌, 한강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5.18은 역사를 넘어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파해야 할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부당한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새기게 된다. 슬퍼하기도 전에 우리는 왜 분노에 먼저 지쳐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고 이상한 힘같은 것을 얻었다. 남들의 슬픔을 읽고 힘을 얻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어떻게보면 이기적인 일일테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은 죽음 앞에 초연해져 무기력해진 내게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로 사람들이 '가볍게' 죽어나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 역시 한층 더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너무도 쉽고 가볍게 죽어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토록 죽음은 남은 이들을 아프게 한다는 당연하지만 늘 잊고마는 사실. 


 봄이 오면 벚꽃이 피어난다.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언젠가 지구 온난화로 '봄'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3월과 4월의 경계 쯤, 봄이 이 어드매에 머물러 있었거니 추억하는 것 조차 무색하게 날은 여름과 겨울 둘로 나뉠 것이다. 하지만 5월 18일. 그날은 100년이 지나, 그 후에 또 다시 100년이 지나더라도 사라지지않는다. 그 시간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떠날지라도, 그날이 남긴 거룩한 핏빛의 역사는 매년 회자되어 남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다. 외어야 할 것은 외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하는. 그리고 죽음의 무게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그날.        


소년은 다시 올 수 없고, 그날만 계속해서 찾아온다.

소년은 다시 올 수 없지만, 그날은 계속해서 찾아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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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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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드.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전쟁 시절, 뉴어크의 우리 동네에서 스위드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위대한 스위드에서 살인자의 아버지로 


 스위드는 신이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를 연호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가진 마법 같은 우월함이 자신에게 전해지기라도 하듯이 그를 숭배했다. 유대인에게는 희망이었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그는 유대인이 아닌 미국인, 그것도 뉴저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스 뉴저지’와 결혼한다. 유대인이었지만 미국의 무리를 대표하는 운동선수이자 기업가였던 그의 인생은 불공평할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부 ‘기억 속의 낙원’일 뿐이다.

 

 딸이 미국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그는 추락했다. 삶의 모든 아이러니가 비켜가던 '신'은 이제 보잘 것 없는 보통의 인간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쩌면 신이어서 가지는 그 특별함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지독한 비극 속에 색을 달리 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위대한 스위드’가 아니다. 살인자의 아버지다.

 

 <미국의 목가>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 '스위드'의 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그의 삶은 미국적인 것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성공을 이뤘지만, 결국 미국적인 것에 가로막혀 무너진다.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진짜 미국 해병대, 미국 합중국 속에서 살고자했던 그는 딸 메리를 통해 미국이 가지고 있는 끔찍한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미국의 이면은 곧 자신이 품고 있는 이면과도 같았다. <미국의 목가>는 이처럼 스위드의 인생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그 부서진 환상 속의 폐허를 그리고 있다.

 

 

환상 속의 폐허와 마주하는 법 

 

 <미국의 목가>는 꽤 흥미로운 액자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자인 주커먼은 스위드를 '신'처럼 여기며 찬양하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그의 기억을 토대로 '스위드'라는 인물의 신비로움과 위대함이 1부 내내 이어지지만, 중간 중간 그의 환상은 '내가 잘못 생각했다' 라는 말로 가로 막힌다. 자신에게 개인적인 편지와 부탁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벅차오를만큼 그를 '팬'으로서 지극히 사랑하던 주커먼은 너무도 평범하고 약해진 스위드의 무기력 속에 실망하게 된다.   

 

 

유치하게도 그의 신같은 모습에 감탄하는 상황을 기대하고 있다가 철저하게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과 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 대접을 받을 때 치러야 할 한가지 대가는 모여드는 신자들의 줄어들 줄 모르는 환상과 마주해야한다는 것이다. (118)

 

 주커먼은 제리를 통해 스위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스위드를 철저하게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었던 끔찍한 비극의 전말을 알게 된다. 주커먼은 고등학생 때부터 품고있던 스위드의 진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현재의 스위드와 함께 교차시키며 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회상하기 시작한다. 주커먼만의 상상과 해석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스위드의 이야기는 새로이 시작된다. 그 안에는 어떠한 환상도 없다. 주커먼은 스위드를 '소설'을 통해 다시 만나는 것이다. 

 

 스위드의 우월함은 진실이었다. 스위드는 정말로 훌륭한 운동선수였고, 아름다운 아내를 지니고 깔끔한 경영을 해내는 존경받는 엘리트였다. 그의 아내 돈은 미스 뉴저지로 뉴저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둘에게 지나친 환상과 기대 혹은 잘못된 선입견을 주입시킨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제 3자들이었다. 스위드를 신으로 추대하고, 돈을 아름다움을 팔아 '돈'을 버는 골빈 여편네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들의 속내와 본질을 보다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것들이었다. 그런 환상이 가지는 위험 또한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메리'였다.

 

 

메리는 아버지를 증오해요

 

 대체 메리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 누구보다 가정적인 아버지와 아름답지만 진취적인 어머니를 두고도 메리는 파괴적인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메리의 부모는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에, 혹은 너무도 완벽하게 보였기 때문에 메리는 그 견고한 틀을 깨고싶은 반항이 들었을지 모른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외로움을 품고 있던 메리는 -의사의 말로는- 관심을 받고 자기 위주로 상황을 돌리기 위해 말을 더듬고, 아버지에게 키스를 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 '애정'에 강박적인 욕구와 본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 폭발적인 욕구는 한 대상에 대한 집착(천문학, 오드리 햅번, H4클럽)으로 표출되었다. 아름다움이 가지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축농에 매진하던 엄마, 합리적이고 균형있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늘 미국적인 틀에 얽매여있던 아버지는 메리가 키워내는 파괴성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메리는 폭발하고 말았다.

 

 

"미스 아메리카를 원했어? 그래, 형은 미스 아메리카를 얻었네, 말 그대로 말이야- 형 딸이 미스 아메리카잖아!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진짜 미국 해병대가 되고 싶었고, 아름다운 이방인 아가씨를 품에 안은 진짜 미국 거물이 되고 싶었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미합중국에 속하기를 갈망했어? 그래, 이제 그렇게 됐네, 형, 딸 덕분에 말이야. 이곳의 현실이 바로 형 입안에 있어. 딸 덕분에 형은 그 똥더미, 진짜 미국의 미친 똥더미 속으로 내려갈 수 있는 한 깊이 내려가있단 말이야. 미친듯이 날뛰는 미국에! 길길이 날뛰는 미국에!" (73)

 

 

 메리가 가진 정치적인 신념이 정말 '메리의 신념'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신념을 아주 무대포로 배워나가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한다. '미국'에 대한 증오는 여태껏 저를 외롭게 만든 부모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류층에 속한 아버지, 공장을 운영하며 노동자를 부리는 아버지.너희들이 말하는 '위대한 부부'는 그저 위선적인 똥덩어리일뿐이다. 그렇게 메리는 미국을 향해, 그리고 스위드와 돈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스위드는 제 인생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왜 요모양 요꼴이 된 거지?" 라는 질문을 자신이 메리에게 했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답을 구하려 한다. 그럴수록 그는 자괴감과 분노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메리가 바랐던 바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그러나 스위드 부부는 메리가 말한 것 처럼 그렇게 증오적인 인물인가.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는 딸을 낳을만큼 도가 지나쳤었나. 그렇지 않다. 스위드 부부는 조금 더 잘나고 아름다웠을뿐,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보내는 그 환상의 기대치가 너무 커 그들의 '평범함'을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코 살인자를 키워낼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좋아하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맞서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모든 목소리가 그들의 삶을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288)

 

 그렇다고해서 스위드 부부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스위드 부부는 개인이 아니라, 위선적인 미국의 사회 구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그가 아무생각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로 혹독한 죗값을 치룬다. 오대수가 받은 잔혹한 복수는 결코 오대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다. 오대수의 말이 품은 사회적 정언명령에 대한 복수였다. 작가는 이처럼 겉으로 봐서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스위드 부부'를 내세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미국의 비판적인 지점을 말하고자 했을거라 생각한다.

 

 <미국의 목가>는 함부로 스위드를 신으로 만들었던 환상도, 스위드가 지닌 합리적이라는 명목 하의 위선도, 메리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신념도,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비꼬는 이웃들 모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목가. 농촌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또는 그런 것은 모두 똥덩어리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책을 덮으며 <한국의 목가>라는 제목으로 된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국의 목가>는 읽기 꽤 어려웠던 소설이다. 미국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나 역사를 알지 못한 상태로 읽어낸 <미국의 목가>는 그야말로 겉핥기 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점이 가장 아쉽지만, 그렇게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미국을 맛보게 되었다는 건 꽤 유익한 경험이었다. 필립 로스의 소설은 <에브리맨>을 먼저 읽었다. 그의 작품이 가진 매력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인물'과 '문장'들로 나와 같은 모든 '에브리맨'의 뇌리와 가슴을 탁- 탁- 때린다는 점이다. 사실 초반은 늘 지루하기 짝이 없어, 몇번이고 앞과 뒤를 들추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돌직구를 날려주는 그 탁월한 묘사와 센스가 부럽다. 그는 이제 은퇴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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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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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에 소설 두세 편을 읽을까 말까 하다가 최근 3개월간 외국 소설을 10편가량 읽었다. 공교롭게 다 장편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한 번도 읽은 적 없던 대가들(알베르 카뮈, 필립 로스, 무라카미 하루키, 줄리안 반스 등)의 작품이었다.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공통점은 처음부터 흥미를 쉽게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페이지가 넘어가기 전까지 섣불리 작품을 가늠하거나, 인물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읽히지 않아 앞 페이지를 두세 번 더 펼쳐보기 일 수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긴 터널 끝에 눈부신 빛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그 묘한 어지러움에 흥분했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느끼게 될 감동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터널이 너무 어둡고 길었다.

 

 원래 서문이나 작품 해설을 먼저 읽지 않는 터라 작품을 먼저 펼쳤다. 책에서 처음 만난 러바인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며 읽었다. 하지만 자꾸만 흩어지기 시작하는 이미지들을 주워 모으기에 힘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 말’을 어떤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조차 쫓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번역의 잘못인지, 원서가 그런 것인지, 인물이 많아서 혹은 인물의 개성이 말에 배여 있지 않아서, 그저 나의 이해력이나 집중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 읽기 불편했다. 힘들게 <이슬비>를 다 읽어 냈을 때는, 몹시 어려운 시를 읽은 듯한 머리아픔. 그리고 단서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나름의 해석이 나조차도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해설을 읽지 않고는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작품해설을 읽고 서문까지 읽어버렸다. 그리고 작품보다 오히려 서문에서 더 매력을 느꼈다.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여전히 읽기는 고역이었다. 단편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장편이 주는 상대적인 친절함이 없어 힘들었다. 다섯 작품 모두 아주 짙은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을 너무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밀한 통합>의 그로버나 <이슬비>의 러바인 등 인물들은 너무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었고, 가끔은 그 잘난 체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기꺼이 공감 가능한 일상의 일이지만, 과하게 낯설게 다가오는 문체와 인물들이 끝없이 펼치는 공상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나마 가장 힘을 풀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로우 랜드>라 할 수 있다. 플랜지와 아내 씬디의 재치있는 대화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작품 안으로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내의 바가지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온 친구들과 쓰레기 폐기장에서 과거에 대한 허세와 현재의 회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 밖에도 중간 중간 양념을 치는 핀천 특유의 유머가 그나마 책을 끝까지 버티고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 책은 단편이 주가 되는 단순한 단편집이 아니라, 그의 서문과 함께 읽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그가 말하는 작품 배경과 작품을 쓸 때 느낀 고뇌와 반성을 엿보며 읽는다면 핀천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의 작품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 될 것이다. 비록 나는 핀천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했지만, 핀천이 앞서 내놓은『브이』나『중력의 무지개』를 읽은 독자라면 그의 작품을 상호적으로 읽어 또 다른 의미를 도출해낼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책 표지는 짙은 핏빛이다. 마치 토머스 핀천이 소설을 쓰기 위해 흘린 핏자국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묵혀져 바랜듯한 분위기다.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은 이렇다.『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토머스 핀천 자신을 가리키거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직 이루지 못한 성장을 빗대어 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아직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느린 독자이다. 얼마나 더 느리게 읽어야 이 책을 독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언젠가 터널 끝에 빛줄기를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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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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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유를 택하여 불안 속에 살거나, 안정을 택하여 그 풍요를 잃지 않기 위해 구속당하거나. 두 가지 삶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 사회는 일찍이 그 선택권을 박탈하거나 감히 선택할 수 없도록 개인을 두려움에 장악시켜 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가장 가중시키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부모 혹은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자식이다.

 

 난과 핑핑은 타오타오를 위해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대학에서 위대한 학자를 꿈꾸던 난은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노동일을 하며 ‘돈’을 위해 살아간다. 그나마 사전을 놓지 않고, 편집 일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하지만 결국 돈이 많이 들어오는 요리사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놓게 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그 박탈감과 억울함은 타오타오를 향한 분노로 표출하게 되고, 오히려 이는 타오타오를 개인이 아닌 자신의 꿈을 갉아먹는 족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성공해야 하는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며 아들의 자유를 억압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타오타오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난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재능이 탁월하다. 하지만 난의 현실은 그저 자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요리사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난 스스로 자신을 늘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함부로 문단에 뛰어들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을 패배자라고 만든 성공과 그 아늑한 그늘을 함께 만들고 이제야 한숨을 돌려 쉬고 있는 제 아내 때문이다. 그는 얻은 것이 많은 만큼 잃을 것이 많아졌다. 현실이 덮어버린 이상 속에 정신 착란 증상까지 보이며 힘들어 한다.

 

 난이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게 된 계기는 오히려 풍요를 흔들리게 만든 ‘현실이 주는 불안’이었다. 자신이 문학을 택하지 않아도 결국 현실은 이토록 갑작스레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염두 하지 않고 몰두하게 만든다. 핑핑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다시 모두가 하찮게 여기는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제 서야 삶은 안정 속에서도 늘 불안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이분이란 없다. 그렇기에 그가 자유로운 시작(詩作)을 택한다하더라도 곧바로 불안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은 이미 주위에 타락해버린 예술인들을 보았다. 결국 어떤 삶을 택하느냐가아니라, 달려오는 삶 속에 자신이 어떻게 중심을 잡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난의 동생 닝은 미국으로 가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지만, 정작 미국에서 오랜 삶을 보낸 난은 동생의 행보를 반대한다. 세상의 기준은 늘 이방인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중국에서 정부를 반대하는 중국인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도, 시를 짓는다고 하지만 완벽히 문단에 속하지 못하는 난도 모두 이방인이다. 기준의 세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모두가 이방인이 될 수 있고 그에따라 자유를 박탈당한다. 자유로운 삶이란, 나를 가두는 기준을 박차고 자신만의 국가관과 인생관을 지니며 살아가는 것이다. 난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노래를 하고 싶으면

분명히 노래를 하라.

 

- 난의 시작노트 <봄> 中 45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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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베로니카가 일기장을 주지 않는다. 대신 수수께끼 같은 일부분의 기록만 보낸다. 에이드리언답게 복잡한 사유가 논리적인 형태로 기술된 메모다. 일기는 책임의 연쇄 고리를 배분하려는 타이밍에서 끊긴다. 토니는 뒤의 말을 추측하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만 금세 그만둔다. 자신이 그 가정 속에 들어가 책임을 배분 받아야 하는 이유와 그 가정으로 바뀌게 될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말한다.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군. 그녀는 만취된 구역질로 갈겨놓은 편지를 던져준다. 토니는 낯 뜨겁고 치기어린 저주의 향연에 사과의 메일을 보내지만, 답장은 같다. 좀처럼 이해를 하지 못하네. 그녀는 토니에게 정신이 불편한 사람 하나를 보여준다. 그제 서야 토니는 그 저주가 단순한 모욕에 그치지 않았음을 감 잡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진심어린 죄책감과 함께 사과를 하지만 베로니카는 말한다. 여전히 감을 못 잡는 군. 토니는 뒤늦게 펍에서 진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의 가정으로 바뀌어야 할 비극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책임이 있고 혼란이 있었다.

 

  그들의 역사를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들 주위에 어떤 수많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개인(베로니카와 토니)이 상정하는 한 개인(에이드리언)의 역사는 한정되고 치우친 시야로 수집된 자료에 의해 조립된다. 협소한 자료를 통한 해석은 중요치 않은 원인의 몫을 왜곡하거나 부풀어내기 쉽다. 100개의 원인이 있으나 눈에 띄는 것이 5개라면, 그리고 그 중에 그토록 증오하는 ‘토니의 저주’가 포함되었다면 과녁은 그쪽을 향해 쏠리는 것이다. 또한, 토니 역시 책임분배의 첫 번째 가정으로 자신이 지명된 글귀를 받음으로써, 책임의 사슬 속에 박힌 커다란 이니셜을 읽어낸다. 토니의 죄의식은 베로니카의 의도와 불충분한 자료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사라가 남긴 편지는 오히려 토니를 위로하고 있으며, 사라가 전하고자 했던 일기장 역시 의도가 같을 거란 ‘예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이드리언과 사라는 논리적이지 못한 운명 아래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될 토니를 우려해 네 책임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삭제된 일기에서 그는 이런 식의 가정을 펼치지 않았을까.

 

  만약 토니가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S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S를 만난 것이 토니 때문인가. 그 행위에 토니의 조언만이 크게 작용한 것인가. 아니다. 나를 시험하듯 사라와 같은 자리에 나를 내버려 둔 V가 있었고, 윤리적인 선을 넘은 내가 있었다. 책임의 정확한 배분이란 없다. 롭슨을 떠올려보자. 여자는 임신을 했고, 그는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증언이 없기에 그 역사에 원인과 결과는 확증할 수 없다. 진실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 일의 당사자이며, 이것만큼은 확증할 수 있다. b가 태어난 것은 토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나의 이 말과 V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 각자의 사고방식의 반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나의 역사에 토니를 악인으로 집어넣어 그의 역사를 망가트려놓는다면 거부할 것이다.

 

  베로니카는 이 의견을 거부했을 것이다. 이 일기장으로 인해 토니가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 끔찍해 일기장을 불태웠다. 토니는 분명 책임이 있어. 개똥같은 철학으로 네가 멋대로 면죄부를 줄 일이 아니야.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을 만나지 않았다면’의 가정이 토니의 가정보다 먼저다. 그녀는 토니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모든 비극으로부터 회피하려 한 것이 아닐까. 추측 컨데, 애초부터 토니의 편지는 에이드리언과 사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지 모른다. 토니가 서술한 에이드리언은 친구가 분에 못 이겨 휘갈긴 편지에 적힌 ‘어머니를 만나보도록 해’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따를 만큼 순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도 확실치 않다. 불충분한 자료와 부정확한 기억만이 가득한 이 책에서 모든 예감은 틀릴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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