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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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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미제라블>을 영화관에서 두 번 봤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쌓여 영화관 전체를 울리는 함성소리로 커져나가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 이라 보며 흘린 동정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 노래를 듣기 위해 다시 한 번 영화관을 찾았고 또 울었으며 요즘도 종종 그 노래를 찾아듣는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않은 세상에,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세상에, 목소리들이 한데 뭉쳐져 큰 울림을 준다는 것에 희망과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그들이 원하던 성과를 이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 혁명의 피가 물든 바닥을 청소하며 아낙네들은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마음 속에 담는다.

 

 제르미날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메타포는 '싹'이었다. 제르미날은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germinal' 에서 'germer' 싹이 튼다는 의미이며, 'mine' 탄광, 'al' 공화력을 나타난다. (해설 398p 참조)  제목에서부터 작가가 책에 담으려했던 메시지들이 드러난다. 탄광이라는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낸 혁명의 싹. 에밀 졸라는 제목을 짓기 위해 꽤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거대한 서사를 담아내는 데 그 어떤 것보다 탁월한 제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득한 지평선 그 어디에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고, 어둠의 바다가 일으킨 물보라가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방파제처럼 보이는 직선도로만 길게 뻗어있었다. (10p)

 

 책의 첫문단에 있는 문장이다. 나무 한 그루 없었던 피폐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에티엔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단을 보면 이 책의 시작과 끝이 대비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발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370p)

 

 80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흡수시켜 전달하는 듯 했다. 탄광의 혁명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에티엔이 사랑하던 카르텐마저 숨진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에티엔은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기대한다. 소용없어 보였던 일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 그리고 그 시간들을 또 다른 혁명의 잠재성, 씨앗으로 바라보는 일. 어찌보면 너무도 현실적인 결말에서 에밀 졸라는 희망을 그려낸다.

 

 책을 읽으며 굳이 맑스의 자본론과 사회주의 이론들을 떠올리지않으려 했다. 그저 서사를 따라가고 인물들의 대화와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굳이 '이론'을 따지지않더라도 이들의 삶이 지녀야마땅했을 권리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 안에서 확립된 생각으로 싹을 틔우기엔 아직 책이 소화되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 "빵을 달라! 빵을 달라!". 하지만 책을 덮고도 잊혀지지않는 단순한 대사를 담아두며 언젠가 이 책을 다시 한번 곱씹고 싶다. "제르미날! 제르미날!"에밀 졸라의 장례식날 울려퍼졌다던 함성을 떠올리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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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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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책을 읽던 중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신중하기 때문에'라는 전제로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기를 원했다.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 그가 내게 왜 신중하다는 표현을 하는지 고민을 해보며, 나는 신중하다는 표현 대신 '생각이 더럽게 많다'는 말이 더 내게 어울릴 것 같다고, 만약 신중하다는 말이 생각이 더럽게 많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면 그 말을 인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순간 조금 불쾌해졌다. 그리고 그 불쾌함의 이유를 찾아보자 책상 옆에 노랗게 놓인 이 책이 있었다.

 

 나는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이번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이 단편집의 첫번째 순서를 맡고 있는 <리모콘이 필요해>이 처음이었다. 제목에 드러나는 '필요'는 곧 대상을 향한 욕구이며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제목과 달리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주위의 욕구와 변명에 하릴없이 끌려다닐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짜 속내는 감추고 그 속을 가리고 있는 1차적인 (쓸데없는) 욕망, 리모콘에 집착을 하며 리모콘만 있으면 숨어있는 불분명한 욕구까지 해소될 수 있을거란 신중하지 못한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몸을 내던지듯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나는 불편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의 세상에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과감하고 거침없는 움직임을 거북해하는 것 같다. 그들이 곧 과감하고 거침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들이밀고 대들 것 같아 무섭다고 해야할까. 나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애쓰는 선배가 왜 거북한지, 왜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 알 것 같아졌다. (34p)

 

 이 소설 속 인물의 심리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단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문단에서 '같다'라는 말이 무한히 반복되어 나온다. '같다'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책임을 한발자국 뒤로 내빼는 말로, 적극적인 주장이 필요한 논술에서는 가차없이 빼버려야하는 서술어 중 하나이다. 선배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끊임없이 끔찍해하고 싫어하면서도 결국에는 술집에까지 끌려와 덩그러니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물을 시작으로 이 단편집은 유사한 형태의 '신중한 사람'을 소개한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신중한 사람>은 표제작인만큼, 작가가 말하는 '신중한 사람'의 정의를 꽤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그럴 때는 먹은 것이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서 가끔 쿵쿵 소리 나게 가슴을 때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중했으므로, 그는 완전하고 완벽한 자기 세계에 대한 꿈을 유보하는 편을 택했다.(46-47)

 

 <리모콘이 필요해>에 나오는 인물이 제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면, <신중한 사람>의 인물은 제가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족의 요구에 따라 뒤로 물리고 안으로 삭히고 또 삭힌다. 그렇기때문에 전편을 읽으며 품었던 '같다'반복의 답답함이 한층 더 심화되어 읽는 독자의 가슴마저 쿵쿵 때리게 만든다. (이 시점에서 나는 '신중한'이라는 수식을 '답답한'이라는 수식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누군가 나에게 '신중하다'라고 말을 했을 때, '나를 답답한 사람으로 보는구나'라는 억지 자괴감에 들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서술자의 단상보다 서사가 살아있는 <어디에도 없는>과 <딥 오리진> 역시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편들 보다는 말을 조금 줄여 사건 자체가 나타내는 의미에 대해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왜? 그래서 어떻게? 를 꼬리물게 되는 흥미로운 사건 덕에 상념만 반복된다면 지루해 덮어버릴 수 있었던 단편집의 호흡을 잘 조절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상념의 완결은 역시나 책의 마지막 편이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있는 <하지않은 일>에서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해명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 밖에 없다는 주장을 4페이지 넘게 설명하고 있으며, 지겨워질 때쯤 '당신'이 겪은 하지않은 일에 대한 억울한 사건들을 풀어내며 그 주장을 강화한다. 결국 소설이란 단순한 주장을 그럴듯한 이야기와 문장으로 길게 풀어 써낸 것이라 할 수 있을테다.

 너무도 신중하여 뱉어내는 말은 적지만, 그만큼 안에서 맴도는 문장들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세상이 기우뚱해지는 사람들. 타이트한 삶을 살아가는 시대 속에 이처럼 느린 화면으로 늘어지는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는 심도 깊다. 책을 읽고 나자 이승우의 문체(혹은 이 책에서 고집하고자하는 문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한문장이라도 쉽게 내버려두지않고, 그 문장의 까닭을 쉼없이 꼬집으며 상념을 줄줄이 풀어내지만, 그 상념을 따라 읽어내다보면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중이 되어서는 '뭐 이렇게 말이 많아'라는 불평이 일게 되는,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문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기 때문에 할 말이 많은 이 소설집의 인물은 닮고 싶지 않았으나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존경할만 하다. 그 누가 쓸데없음을 이토록 가치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다시 한번 '신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면 꽤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책에 나오는 인물보다는 좀 더 확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며,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야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결정 역시 부담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라며 머무르는 생각을 입에 내뱉을 때는 '같다'라는 말을 뺄 수 있도록 답답하지 않은 '신중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럴듯한 교훈이 남겨진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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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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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처음 도착했을 때, 얇고 가벼운 책의 무게를 느끼며, 짧은 페이지로 묶여있는 장들을 대충 훑으며, '금방 읽겠거니'하며 읽는 날을 미뤘다.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잡고 지하철에서나 강의실에서 이 책을 펼쳤지만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가볍기만 했던 책은 책장 하나를 넘기기기에도 버거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장 한장 읽어내기를 포기하고 일단은 책장을 끝까지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남은 것이 있을까 생각했다. 의미를 얻지 못한 문장들만 머릿 속에 둥둥 떠다녔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닌, 책 읽기를 실패한 자의 변명이나 한숨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 이 네 사람의 이름에 익숙해지는 것 조차도 힘겨웠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해보려하는 순간 문단은 끝나 금방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나는 당황해하며 자꾸만 뒤를 돌려봤지만 성질만 부리며 덮어버렸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이 책에 대하여 '쿤데라가 독자들을 위해 열어 준 지혜의 축제. 보다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가벼움'이라고 말했다. 축제는 기존의 엄숙하고 권위적인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에 따라 모든 질서가 전복되고 일탈이 허용되는 순간이다. 축제를 진정으로 줄기기 위해선 '권위적인 주류 문화'의 존재를 의식하며 주류 문화가 가지는 부조리에 대한 의식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쿤데라가 열어준 '무의미의 축제'에 몸을 던지기 위해 알아내야 할 거대한 '무의미' 혹은 '의미'의 대상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소설을 한번도 읽지 못했다는 이유가 제일 클 것이다. <무의미의 축제>를 말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전작 <농담>을 언급한다. 두 소설 모두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않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미 없는 말을 의미 있는 말로 해석하여 농담을 던진 사람의 삶 전체를 그 '유의미의 말'로 점철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이 가지는 '의미'를 흐릿하게나마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농담>을 읽지 못했기에 남들이 쓴 의미만을 좇는 것일 뿐이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의미있게 남은 장면은 알랭의 엄마가 자살을 하려다 누군가를 살해한 대목이다. 내가 죽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버린 아이러니, 그리고 죽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 순간 삶에 대한 갈망이 숨차게 밀려온 그 아이러니. 뒷통수를 강타하는 강렬한 모순에서 이어지는 알랭의 '사과쟁이'에 대한 부정적인 단상들이 묘하게 얽혀 어떤 '의미'를 일렁이게 만든다.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57,58 p)

 알랭은 '사과'는 미안함을 전달하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며 곧 지금 벌어진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라며 의미를 덧붙인다. 결국 알랭 역시 길거리에 어깨가 부딪힌 여자에게 사과를 던지고 자책하고 마는 '사과쟁이'인 셈이다. 그가 사과쟁이가 되어버린 이유는 물에 빠진 남자의 생명을 죽이고 자신의 삶이 태어났다는 자신의 존재성부터가 '죄'의 시작이었다고 의미지어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생은 그저 생일 뿐이다. 잉태했기 때문에 태어났으며,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다. 자식을 낳느냐 마느냐 선택하는 부모에게는 어떠한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마냥 태어나는 아이는 그저 태어나는 일만 하는 것이다. 의미를 붙여 사과쟁이가 될 필요가 없다.


 이런식으로 슬그머니 내가 읽어낸 장면에 의미를 덧대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완벽히 읽어내며, 작가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드는 모든 생각과 문장들은 결국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붙여 내게 의미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역시 그처럼 마음대로 의미를 만들어 기억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재미가 아닌 억지처럼 느껴질 때는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의미를 둘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 하지 말고, 무의미 그 자체를 사랑하라. 어쩌면 이 책에 대한 의미 찾기를 포기하는 일이 작가가 바라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담 없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무의미의 축제' 그리고 그 속의 철학이 무엇인지 사랑할 수 있도록. 무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를 되짚는다. 무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를 죽인다. 그 순간 의미가 살아난다. 모순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책을 사랑하는 법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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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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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분주히 재잘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홀로'라는 '1'의 상태에서 금방이라도 '無'로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침대에 혼자 드러누워서는 느낄 수 없는 '0'의 존재성은 군중 속에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관계망 속에 혼자 부유하고 있는 듯한 투명함을 즐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나만의 투명인간 놀이인 셈이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기를 자처하여,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게 된 이유는 오히려 투명해지지않기 위해서였다. 사람들과 섞이어 떠들다보면 때론 내 주장과 다른 이들의 말에 동조해야하거나, 뜻하지않은 기대나 오해가 입힌 가면에 진짜 '나'는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낸 페르소나만 남게된다. 군중 속의 고독은 나의 진짜 영혼을 느끼게 해주곤 한다.

 

 만수는 역시 제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나의 존재성을 지키기 위함인지, 나의 존재성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함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흑과 백,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도망쳐 투명을 택한 이와 달리 만수는 흑과 백 사이를 오로지 '가족의 생존'을 향해 넘나들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만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큰 것 말고 뚜렷한 개성이 없던 자식이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어수룩하고 누이를 따라 나물 캐기를 좋아하던 만수에게 다들 커다란 기대나 몫을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고엽제'에 집을 책임지던 맏형 '백수'가 죽고 만수는 얼떨결에 집의 장남이 되어버린다. 그나마 보살핌을 주던 큰누나마저 시집을 가버리고, 만수는 완벽히 자기 아래 두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 된다. 존재감이 없던 만수에게 점점 짙고 무거운 책임의 그림자가 앉게 된다. 만수는 묵묵하고 미련할만큼 그 책임을 완수해내고자 노력한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만수는 그저 '노력'만 할 뿐이다. 특별한 자신의 색깔도 주장도 없는 만수는 오히려 그 '투명성'을 특기로 물처럼 모든 사람들 사이를 넘나들고 아우르며 사회생활을 한다. 만수는 열심히 돈을 번다. 가족을 위해,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간다.

 

 만수는 그렇게 투명인간이 되었다. 좌파나 우파. 어떤 정치적 분파에도 가담하지않고 오로지 가족들만 생각하는 무식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모두를 아우르고 챙겨가며 가족과 동료에게 '염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는 떠안지않아도 될 책임까지 모두 떠안고 희생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않는다. 그가 꾸는 꿈에는 가족의 안녕만 있을 뿐, 만수의 세상 속에 자신의 정체성은 이미 오래전에 '투명'해졌다. 그리고 권력 아래 그는 투명인간과 같이 없는 사람처럼 무시당하는 노동자 계급에 속해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꽤 고위 관직을 맡고 있는 그는, 권력에 아부하면서도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깔보지 않았던, 흑과 백 모두에 속하지 않으며, 결국 모두에 속하고 말았던 '투명인간'이다. 그리고 만수는 정말로, 투명인간이 되었다. 

 

 상징적인 투명인간이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향토적이고 현실적인 묘사로 유려하게 흘러가던 전개가 갑자기 끼익, 마찰음을 내며 뜬금없어지는 대목이다. 만수가 살아온 삶을 가슴 속으로 애잔하게 바라보던 독자들은 갑자기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의아해진다. 거기다 투명인간이 된 사람은 만수만이 아니다. 태석도 석수도 명희도 만수의 아내도 투명인간이 되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진짜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태석은 부모의 버림, 같은 반 아이들의 끔찍한 괴롭힘, 선생님의 무관심과 폭력. 썩어빠진 학교. 어떤 울타리 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하지 못했고, 결국 제 몸을 불태워버리듯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석수는 고문 속에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강제적으로 개조당하면서 만수의 세상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만수의 아내는 태석의 빗나간 반항심과 벽에 똥칠하며 저를 비웃어대는 시누이, 끝없는 노동과 가난 속에서 제 삶을 잃어버렸으며, 명희는 가스 중독으로 바보가 되어 넋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투명인간과 '진짜 투명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투명인간' 만수는 죽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뻑- 몸통을 날릴만큼 금속성의 자동차가 강한 속력으로 걷어차도, 꽥- 소리 한 번, 핏물 한 번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투명인간이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너무도 사소한 소시민(小市民)이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살기 위해 투명인간이 되었던, 만수. 이세상의 모든 만수. 이세상의 모든 투명인간은 그렇게, 아무렇지않게 세상의 폭력에 사라지고 있다. 투명인간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 눈을 뜰 생각조차하지않고 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이 아닐까. 투명인간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들은 일부러 간과하고 있을지 모른다. 가끔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이제 나는 그 천진난만한 바람앞에 무거운 상징을 얻게 되었다. 투명인간은 이제 SF공상과학 소설에나 등장하는 환상이 아니다. 지금 내 주위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슬픔이 공허함만큼이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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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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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모든 단편이 10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그 시대가 가지는 모순과 결핍을 깊이있게 고찰하고 있다. 단 한 편도 그 역할을 소홀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기 드 모파상이 포착한 장면과 그려낸 이야기가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 독자에게도 공간성과 시간성을 뛰어넘는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위 아더 월드. 마치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비정상회담'의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제 나라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만국공통의 주제 아래 토론을 펼치듯, 기드모파상의 단편은 하나같이 인간 세상이 가지는 보편적인 갈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그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범하지않은 인생을 살아온 한 인간 자체의 삶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비범함'은 비극과 닿아있어 한 편마다 그들의 기구한 삶에 마음이 쓰리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저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할 수 없다. 기드 모파상은 이야기 안에 인물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 배치한다. 그리고 힌트를 조합하여 만든 답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며,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시킨 사회의 부조리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 '목걸이'는 그 대표성만큼 대단한 작품이다. 고전이라는 이유로 이미 반전의 지점을 다 알아버려 뒤통수를 때리는 충격은 받지 못했지만 덤덤하게 그의 문장을 읽어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골이 얼얼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허영심과 그 허영심을 수요로 삼아 탄생한 '짝퉁'. 진실된 제 모습보다는 겉을 치장하여 위상을 뽐내는 것에 급급했던 여자는 결국 진짜가 아닌 짝퉁 목걸이를 위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간단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시사하고 비판한다. 대표작 <목걸이>가 가지는 시사성은 62편의 단편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래서인지 62편을 읽어내는 동안 뻗어난 가지들이 서로 얽혀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가지들은 결코 긍정적이거나 희망을 향해 뻗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은 단편의 편수만큼이나 다양했던 시점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등등 국어시간에 배웠던 모든 시점의 예들이 줄줄이 이어져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만찬>처럼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들려주는 단편도 좋았지만,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독자와 동등한 위치의 화자가 등장할 수록 새롭게 느껴졌다. 간접적인 화자는 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다 화자가 단순히 이야기를 토스해주는 역할만 하여 짧은 페이지 안에서 시점에 변화를 준 <미망인>도 좋았고, 조카의 시점에서 가족들에게 외면받는 삼촌을 바라보던 <쥘 삼촌>도 좋았다.  

 

 은유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간혹 단편들은 그 은유성을 무기로, 고집스런 주관성을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어려운 시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어려운 시도,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시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씩 난해할 수록 더욱더 은유적이고 예술적이라고 칭송받는 모습은 의아하긴 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기드 모파상의 단편은 읽기 매우 편하다. 문장도 어렵지않고, 인물들의 관계성 역시 복잡하지 않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도 분명하다. 그렇기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한 편씩 읽어내기 쉬웠고, 좋았다. 책읽기를 꺼려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기 쉬운 가독성 또한 그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 중 하나다.

 

 기 드 모파상은 '선택과 집중'의 기능을 아주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수많은 장면들 속에,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뽑아 간단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 낳는 편협함은 63편이라는 방대한 개수로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또 이야기 자체에 빠지며, 그 이야기의 상징성을 머릿 속에서 풀어내다보면 무궁무진한 늪 속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펼친 수많은 플롯과 메시지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감상할 때나, 창작을 할 때에도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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