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훈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보이저1호에게 『라디오미르 산문집 『사물들-The Things『장소들 The Places』가 있다. - P-1
나는 봄이라 부를 만한 걸 찾지 못하고너는 코드를 빼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아직도 추억하고, 아이처럼 약속하고 - P-1
곡우
계절이라는 말이 인연의 뒷모습을 닮아갑니다 당신과 차나무 밭을 처음 보았던 날 가지 뒤에 숨어 피는 꽃들도, 피고지는 풀빛 무수한 시간들이 동그랗고 단단하게 묻히는 모습도 보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들려줄 줄도 몰랐습니다 추억하기 위해서도, 뜨거운 마음들 돌아 돌아 더 짙어지기 위해서도, 시든 이파리 위를 더 힘줘 걸어야 할 봄도 있었기에나는 오래 미뤄야 할 안부에 대해 궁리했습니다 아무리 부처도 읽히지 않을 편지처럼 그냥 계속 말하고픈 때가 내게도오게 마련이었나봅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계절을 먼저 떠올리듯 풍향을 바꾸는 한낮, 살아 한번 더 보고 싶단 말조차 전할 수 없어 다행이던 뒷모습이 흰 봉오리처럼 아른거립니다 - P-1
1월
터진 둑과 무겁던 물이 서로 시치미를 떼던 겨울 앞에서 저수지는 늘 잠든 척하고 흙길은 단단한 척해온 것처럼, 언젠가서로 쳐다만 보아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듯 소복이 쌓인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지문 같은 질감을 갖게 되기까지, 잡힌 적 없는 세상 발 닳지 않을 걸음으로 마중을 주고받기까지, 모든 게 소용없어도 좋을 만큼 따뜻한 계절이 오거든 꿈은 현실일 수 없어도 현실은 꿈을 닮아가기를녹은 적 없는 물속에서 빙어들이 언제까지고 죽은 숨 찾아 쉬듯이, 언젠가 언 발들 녹이며 꼼지락꼼지락 찻물을 데워 올려놓듯이, 서로의 손 모양을 칭찬하듯이, 흉내내듯이. 감싸안듯이 - P-1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들과 가장 깊숙이 잘 넣어둘 것들은 왜 비슷한 모습이었을까 - P-1
나만 아닌 줄 아는 놀이와 나뿐인 줄 아는 놀이들은 언제 끝날까 - P-1
퍼주는 사람이 바보지, 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 중에 쥐사람 못 봤다고 말하면 대부분 끄덕이면서 잠시 말을 잃는다 그런 너에게도 끝까지 안녕히 가시란 말은 못하고 날 출다고 손에 핫팩을 쥐어주면서, 다시 그 핫팩 때문에 여러신박한 방식으로 모함당하면서도 또한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게 싫어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다 그만둔다 그 - P-1
차 시간 늦겠네 그만 가자, 의 그만과 가자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 P-1
안녕, 은 잘 웃지 않아서 안녕, 갑자기 팔이 안 올라가 심장이 마치 거기 있었던 듯 - P-1
뒷모습
아무래도 흘러간 날들 중엔 흘려보낸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혹은 내버려두어도 당신의 뒷모습이표정보다 더 오래 남는다 다 그리기도 전에 자리를 터는 피사체를 보면서, 시간과 질감을 한 획에 그리는 놀이만 손에 익히면서, 벌건 숯이 어느 날 더 하얗게 잠들기까지 품고만 있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모르면서, 우리는 결국 꺼져야 다시만날 이른 봄의 밤바람이 될 거면서, - P-1
길이 없어 갈 수 없는 경우와 의지가 없어 갈 수 없는 경우가 모두 같은 외골격으로 추억을 나누는 건 우리가 자라온 척해왔기 때문일까 - P-1
어떡하면 좋을까, 너를 어떻게 해줄까먼지 속에서 더욱 먼지가 되고프던네가 있었는데, 쭉 현재형으로 있었는데 - P-1
평생 들꽃 보는 힘으로 걸었는데아직도 아는 이름이 거의 없다주기율표보다 외우기 힘든 이름과이름의 의미를 덮는 여름이여름보다 먼저 널린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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