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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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제목에 이끌렸던 건, “왜 친구가 없을까가 아니라 남자는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내가 남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도 아버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안에 무엇이 엉켜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간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에겐 아주 불쌍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좋았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랑 보낸 시간은 내 기억 속에 몇몇 단편적으로만 남아있고, 거의 모든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했다. 복잡한 가정사를 겪으며 내 안에 움튼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편을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거의 반쯤은 약 빨고 쓴 멘트들이 폭소를 터뜨리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이 책의 서평의 시작이 너무 무거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솔직함밖에 방도는 없다. 여하간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은 그러했다.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된 지금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많은 남자들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 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여자들을 모르겠다고 선언했지만 20세기 초부터 여성 운동과 함께 이어진 수많은 여성에 관한 글과 이론들로 인해 여자들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 선언은 꽤 구체적으로 행동화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남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고 느끼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그런 선언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축구 보는 거랑 한잔하는 거랑 뭐가 달라?"

"축구 보는 건 목적이 있잖아. 그게 중요해. 근데 나는 만남의 이유가 없어.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이런 식으로는 연락 못하겠다고"

"왜 못해?"

".. 그냥.."

"그냥, ?"

"남자들의 방식이 아니거든." (p.44)

 

위의 이야기처럼 남자들의 방식이 명확하게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던가? 혹은,

 

우리가 연락이 끊겼던 이유는 내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이 만나자고 연락할 때면 내겐 항상 핑곗거리가 있었는데, 대개는 지어낸 것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수한 생일 초대, 수백 번의 저녁이나 주말 외출 기회를 날려버렸다. 잔인한 진실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결정이었고, 우정관계를 죽인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점이다. 나는 친구들에 대해 신경을 꺼버렸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p.55)

 

남자들이 관계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주장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아래 대목이 서글프다.

 

언젠가부터 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손놓고 지냈다. '경력'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다른 거의 모든 것을 밀어내는 모습을 두고 봤다. 나는 항상 일했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생산성을 상실했을 때조차 일을 붙잡고 있었다. 일하지 않을 때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자유시간을 갖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 삶은 오직 일 그리고 나오미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야망은 '내 자아'의 건강한 일부분이 아니었다. 데수치가 그 대화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간 행위'였다. (p56-57)

 

아버지는 항상 일했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 시간에도 아버지는 자면서 밥을 먹었다. 오래전부터 육아 휴직에 대한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남자들의 육아 휴직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불쌍한 건, 아버지가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큰 문제는 물론 표현 방식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성애의 부재일까..?) 심지어 일을 마친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서 육아를 하는 게 벅찼고, 아이를 대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사실 저자와 비슷하게도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기나 강아지들과 놀아줄 때, 여자들이 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말들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구오구, 그랬쪄, 아이 이뻐라 등..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색하고 민망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말들까진 아니어도 아기들이나 강아지를 대할 때 조금씩 편해졌는데, 그건 아마도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 배워서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텔이 내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복합성과 깊이를, 나오미에게는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연기는, 다른 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또다른 연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남성성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내 머릿속엔 남자들은 서로를 더 부정적으로 만든다는 우울한 생각이 이어진다.(p.72)

 

그렇다, 남자들은 희한하게도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죽어도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여자와 있을 때는 한다. 정말 죽어도 하지 못할 그런 말과 행동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과 행동이 나를 편안하게 할 때가 있다. 위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성이 내 안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사이에 위치한 것이라는 통찰력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 가지 떠올렸던 것은 나의 학창 시절인데, 남중 남고를 나온 나로서는 친구들을 첫 대면할 때는 항상 경계심이었던 것 같다. 그 경계심은 남학교의 서열 문화에서 온 것이 분명한데, 이는 벌써 15년이 지나도록 내 안에 자리매김하는 거 같다. 15년이 넘는 지금에서야 남자들과의 첫 만남에 경계심을 품지 않게 된 것도 같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대를 제외하면 나는 남자인 친구와 여자인 친구들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던 거 같고,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줄었다. 이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난 친구가 인생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하간 남자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남자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내 안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점은 '유해한'남성성과 그 남성성의 '강하고 과묵한'전형성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 있다. 남자는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항상 스스로를 통제한다. 여기서 '자기통제''감정 없음'과 동의어다. 하지만 감정이 분노일 경우에는 예외다. 분노는 남자들이 표현하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된 유일한 감정이며, 다른 모든 감정이 모아지는 '깔때기'이자 방출 밸브와 같다.(p.104)

 

"많은 남자들이 제게 같은 얘기를 해요. 그들은 애들이나 아내가 어떤 사건이나 뉴스 등을 접하며 감정표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면 좋겠다'고 바라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남성들 자신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다른 이와의 관계에도 해가 돼요. 기쁨을 표현하고 좋은 소식을 공유하는 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요소거든요."(p.125)

 

우리는 어린 시절을 단편적으로 기억한다. 난 아직도 엄마의 몇몇 대사들을 명확하게 기억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대사다. “나는 남자가 쫑알 쫑알대는 거 싫더라. 남자가 좀 과묵해야지.” 어떤 드라마를 보고 했던 말인데, 드라마는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하는데, 엄마의 이 대사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좀 더 쫑알대는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좀 더 많은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농담은 아니다. 그 과묵한 남성상이 내 안에 똬리를 튼 것일까. 나는 아홉 살 때도 엄마와 뽀뽀하지 않았다. 그것이 창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이후로는 더욱더 심해졌다. 당시 버디버디 채팅하던 중 엄마가 내 채팅창을 본 뒤로 일주일 동안 엄마와 대화하지 않았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한 시간 동안 상담을 했다. 왜일까? 그게 너무 싫었다.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아직도 그때 내 채팅을 보고 싶어 하던 엄마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여자인 친구랑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치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약간의 부끄러움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화였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여자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건 어쩌면 남성 문화가 배척하는 무엇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내가 혼자서도 충분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우리는 이 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행동한다."(p.127)

 

그러면서 이어진 이미지는 고독함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남성의 고립이 여성에게 더 많은 감정노동을 야기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남친이나 남편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p.154)

 

위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반문한다. 남자는 함께 사는 여자 외에는 자신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이 없지만 여자는 무수히 많은 친구들의 감정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감정노동자가 되는 건 아닌가? 전반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지만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생각의 이면에는 무엇이 깔려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면 몇 명이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걸까? 사람의 성향마다 다를 텐데, 누군가는 한 명으로 충분할 것이고, 누군가는 열 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여자 말고 친구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삶의 방식 중 하나는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많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중 하나가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야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문제를 논하려면 친구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친구가 필수적이진 않다(고 생각 한다). 다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인맥이 필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직장에서 좋은 친구를 사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을 듯하다.(우정의 감정이 진심이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긴 유대감임을 의미-옮긴이) 이 말이 과장 같다면, 사람들이 퇴직한 뒤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 생각해보라. (p.274)

 

그렇기에 위 주장은 아주 적절하다. 다만 이 사회적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를 보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은 기억 속에 머물게 하는 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그들을 다시 만나는 건 그들과의 기억 속 사진을 콜라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저자가 했던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모든 친구들의 스케줄이 공통으로 비어 있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별들이 직선으로 정렬하는 기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중년의 우정은 대부분 관리의 문제다. (p.409)

 

친구들과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책은 남자의 내면 깊숙하게 파고든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의 솔직함으로 표면적 현상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문득 보관함에 넣어둔 벽돌 책 한 권을 읽어볼까 떠올려 본다. 90년대에 나온 남성들에 관해 아주 깊게 다룬 책이라던데..

 

이 재기 발랄한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커플들끼리 읽어보면 좋을 법하다. 아니다. 커플, 부부, 부녀 다 좋겠다. 물론 같이 읽을 때 남자들은 화끈거림을 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화끈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MBTI는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데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MBTI가 유행처럼 번지고 난 다음 긍정적인 효과는 나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당신과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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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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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우리는 나무늘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속도가 나의 속도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사고가 형성되고 습관이 심어진다. 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 잠도 덜 자야 한다.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게 무엇이든 더 많이 생산해 내야 한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생산물까지 더 많이.

 

또한 하층계급이 노동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유랑 혹은 게으른 방랑으로 비난받았고, 1531년의 최초의 방랑법통과로 이어졌다. 이 법률은 게으름만악의 어머니로 서술하고, 바랑죄를 지은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고 노동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 이후의 방랑법들은 더욱 보복적이었다. 가장 가혹한 것은 1547년에 통과된 것으로 첫 번째 위반을 하면 V자 낙인을 찍고 2년간 강제 노동에 처하며, 두 번째 위반을 하면 사형했다. 겨우 몇 년 사이에 10만명 이상이 교수형을 당했다. 인구의 대부분은 노동을 원하도록강요당했다. 노동을 원한다는 것은 분명 자연적인 인간의 충동은 아니었다. (p.63)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세뇌당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퇴사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특별한 일은커녕 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노예 상태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한편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입장에선 노동이 숭고한 걸까. 아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일(책의 주장대로라면 노동)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 평생 사용자의 지시를 받아 혹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노동을 하고 싶은 걸까.

 

노동이라는 마릐 기원은 노동이 피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노동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고통과 노고를 의미했으며, 가난이라는 뜻의 페니아와 유사한 어원적 뿌리를 가졌다. 노동은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을 의미했다. (p.24)

 

얼마 전에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그러면 노동을 할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 안에는 명백히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고 할 게 많은 건지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고 살 거라고 이야기했다.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주어지는 현재와 어떻게든 아득바득 프리랜서로 먹고살던 주 20시간 내외의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삶에서 중요한 건 일이었다. 나에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되는대로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 오죽하면 시간 확보를 위해 졸업 당시 취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겠는가. 아직도 마찬가지다.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회사를 퇴사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일자리를 갖는 것이 심지어 자유와 같은 것이 되었는데,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것은 존엄성의 부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바틀비는 말한다. “궂은일이라는 생각은 일자리를 갖는 게 존엄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흐린다.” 그러나 부유한 논평가들이 하는 주장, 즉 불쾌한 일일지라도 일자리가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역겹다. (p.208)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시간 불평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느끼던 중요한 논점이다. 물론 책의 원제는 시간 정치라고 하지만. 자본의 불평등보다 시간 불평등이 훨씬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물론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졸업 작품을 준비할 때 누구는 해외여행을 가고 졸업작품 비용도 부모가 지원해 준다. 그래놓고는 앞에서 졸작을 위해 힘들었다고 말한다. 가소로웠다. 가난을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일지언정 그 정도 말은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시기나 혹은 질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평등을 공고히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짓눌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분노. 이 분노는 어쩌면 내 삶의 방향성을 정해준 어떤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전환적 정치에는 공동의 적대자에 대한 계급 기반의 분노,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상실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 더 나은 미래의 전망에 관한 명확한 표현 등의 조합이 필요하다. 분노는 불의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지각에서 나온다. 그러한 의식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일부 불의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p.369)

 

자본주의 시대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시스템을 많이 이야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곳에 서있다. 아니, 어쩌면 윤석열로 인해 50년을 후퇴한 민주주의처럼 우리 경제는 고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여하간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던 그 시절로부터 아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52시간이 도입된 지 벌써 6년 남짓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착취의 시스템이다.

 

휴가는 에너지를 보충하고, 개인적 관계와 가족관계를 강화하고 노동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회복하고, 더 넓은 사회적 전망을 줄 가능성이 있다. 휴가의 축소는 건강을 악화한다. 미국 질명통제예방센터는 휴가가 거의 없는 여성은 관동맥성 심장병이 생길 가능성이나 심장마비가 올 가능성이 매년 최소한 두차례 휴가를 가는 사람보다 8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위험의 심장질환이 있는 12천명 이상의 남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언례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은 언례 휴가를 가는 사람에 비해 모든 종류의 원인에 따른 사망 위험이 21퍼센트 더 높고,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32퍼센트 더 높다. (p.214)

 

나도 휴가를 가지 않았었다. 간단했다. 프리랜서는 그런 휴가란 항상 불안요소였으니까. 혹시라도 일이 끊길 수도 있었고, 휴가를 가게 될 경우 일당은 끊겼다. 우리 사회는 휴가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사회일까. 아직 거기까지 못 가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는 영국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역시 선진국이라고 해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거쳐서 기본소득을 논하고 있는 장에 들어섰을 때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이재명 대표는 기본소득 철회를 논의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 만약 기본소득이 있는 사회라면 어쩌면 내 삶도 더 열정적이고 즐거움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물론 그 또한 알 수는 없다.

 

프레카리아트화된 정신은 또한 청원자가 된다는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대부분이 프레카리아트로 구성된 예술가 공동체에서 심한데,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 제공 기관에 지원하는 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원 및 전체 과정이 예술가들을 청원자로 바꾸고, 일시적인 꿈과 희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화 관련 관료들에게 청원을 한다. 이 꿈과 희망은 많은 경우 예술가 내부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관료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p.237)

 

이 책을 읽다 보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나름 진보적인 나조차도 반성하게 만드는 주장들. 위 문단이 그러하다.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류 작업을 하면서 매번 생각한다. 심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좋은 작품을 선보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을 의심할 때도 많다. 무엇보다 시간을 엄청나게 쏟아야 하는 서류들이다. 그 정도 지원을 받으려면 당연히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매번 불만이었다.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야지 적어 낼 게 너무나도 많다. 도대체 부가 서류들은 왜 내는 걸까.

 

이건 저자가 주장하는 다른 국가 지원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업급여를 받거나 취업지원을 받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돈을 받으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데 내가 안일한 것이었다. 이 또한 불평등하다는 걸 저자가 일깨워 줬다.

 

일자리 보장 정책은 가부장주의적일 것이다. (중략) 그리고 일자리 보장 지지자들은 훈련도 받지 않고 십중팔구 보장된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급여를 상실하게 되어 분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이 든 친척이 사회적 돌봄을 받는 것을 진짜로 원하는가? (p.344)

 

그들은 수백만명이 가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일자리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일하기를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은 급료와 좋은 노동조건의 괜찮은 일자리를 갖길 바란다고 그들이 응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일자리가 생래적으로 시시하고 따분하며 따분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수행하도록 밀어 넣어지거나 유도된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런 다음 물질적 궁핍의 공포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p.358)

 

결국 우리 사회의 윤리다.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는 걸 인식하기. 차별하지 않는 것. 자본주의 논리는 차별과 혐오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노년을 보내는 거라는 역겨운 말들. 그들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는지, 공부를 잘했는지, 혹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알고 그런 말을 내뱉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를 지적한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한민국 TOP10에 들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가.

 

200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이루어진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가 기본소득을 지지했으며, 모든 나라에서 다수였다. 응답자가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공통된 대부분의 대답은 분노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소득 혹은 보장소득이 분노와 정신적 불건강을 줄인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 실험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p.404)

 

희망. 누구나 부자가 되진 않아도 누구나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이 책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서 시작되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반성을 부여했고, 공감과 연대를 지나쳐서 희망을 건넸다.

 

나는 해방이라는 위대한 고전적 담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한다. - 자크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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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문예 인문클래식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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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은 필독서로 손꼽히는 도서 중 하나다. 이런 도서들은 무수히 많지만 살면서 이런 도서를 접하는 건 쉽지 않다.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좋은 책을 읽어볼 기회를 가졌다.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지만 사실 어려운 건 없다. 어렵다고 한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오는 막막함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만 이 클래식이 지금까지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비상계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살게 되었다. 우리는 공화국이지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이런 국면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군사 독재 시절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애초에 보수당이 3분의 2 이상 의석을 가지게 되었다면 무슨 일이 펼쳐졌을까.

 

<군주론>에 따라서 만약을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말 정치를 잘 해서 민중을 위했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적절한 두려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힘을 적절하게 억압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을까. 그땐 군주제가 됐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비상계엄 또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군주론>은 단순히 500년 전의 이탈리아 사회에서만 적용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회사에서도 적용될 법한 문제다. 용병의 문제. 식민지의 문제. 원군의 문제. 민중의 문제 등. 집단에서는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심리적인 문제가 포함된 아주 고차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500년이 지난 세월의 우리들에게는 당시와 다른 인류애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부분은 숙고해 볼 만하다. 특히 다음 대목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해칠 때 덜 주저합니다. 사랑은 감사의 끈으로 유지되지만 사람은 저열해서 이익을 챙길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관계를 깨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의 공포로 유지되며 당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17)

 

오늘 뉴스에서 비상계엄 당일 탱크를 막은 시민의 영상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두려움에 맞선 시대에 살고 있다. <군주론>은 인간 본성과 심리를 꿰뚫는 명서지만 우리 사회는 <군주론>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번 문예출판사의 <군주론>은 당시 군주들의 초상화 등 그림이 실려있어서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훌륭한 군주라고 평가하지만 그토록 잔인하고 냉철한 인물들의 얼굴을 보니 오싹함까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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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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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1년생인 나는 어렸을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수도 없이 들었다. 어렴풋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도 몇 번이나 봤고, 주변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친구들도 꽤나 많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고, 연좌제나 빨갱이라는 단어는 영화나 소설에서 접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2017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까지 갈라놓는 정치적 갈등이 분단 직후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음을 실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가장 깊숙하게 발을 디뎠던 것은 13년 전 군 복무 시절이다. 후방에 근무하던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 그대로 전역만 기다리던 병사였다. 그날도 무슨 유해를 찾겠다고 땡볕에 산에 올라 땅에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우리 부대에서 아무도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한조였던 나와 맞선임은 유해를 두 구나 찾았다. 한 구는 완전 유해였다. 탄피에 만년필, 수첩까지 나왔다. 추후 영결식까지 거행됐다. 어쩌면 60여 년을 차가운 땅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분도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유령의 시간>을 읽고 그날을 떠올려본다.

 

고작 15년을 아버지와 함께 했을 지형은 아버지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45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섭은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건 실례다. 어떤 언어로도 이섭이 살아온 세월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형은, 혹은 작가 김이정은 이섭의 삶을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것이 오빠 지석과 한 약속 때문인지, 딸로서의 도리인지, 혹은 작가로서의 사명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껴졌던 많은 감정들 중 부끄러움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한테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이섭은 말한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이섭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치열했다. 어쩌면 얼굴에 침을 뱉은 운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삶은 달라졌을까. 숙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인생이 헛된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부질없다. 다만 그는 숙부의 영향을 받았고, 운식을 만났다. 그 삶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념을 가지고 꿈을 꿨으며 꿈이 박살 났을 때도 인간을 믿고 살아갔다. 진과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미자를 호적에 올렸다. 모든 걸 잊기로 다짐했지만 남북의 상황이 좋아지니 실낱같은 희망을 다시금 품었다. 그는 끝내 떠났지만 진과 지용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형이 듣는다.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결말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울까. 하지만 나는 지형이 지용에게 편지를 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결말은 단순한 판타지라고 치부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매일 같이 양조장에서 하염없이 진과 아이들을 기다리던 이섭의 시간이 담겨있고,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채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들의 현재가 담겨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비극적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을 모른다. 심지어 대학생인 친구들을 만나봐도 북한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부표처럼 쓸려왔을까라고 생각한 이섭처럼 어쩌다가 이 나라는 이지경까지 왔을까 생각해본다.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한반도를 떠다니고 있다. 이제 어떡할 것인가. 도착하지 못한 편지는 반송될 것이다. 이제 곧 우리는 반송료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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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3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시전설의 모든 것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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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오래된 습관 중 하나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 서핑이다. 이 책이 신간 목록에 떳을 때 자연스럽게 보관함에 옮겨두었다.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를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들은 아이템 서치에 유용하기 때문. 하지만 가격이 가격인지라 쉽게 결제를 하지 못할 때 서평 이벤트가 열렸고, 응모해서 당첨됐다.


두께에 비해 책은 술술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짤막한 이야기가 묶여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도시전설이라니. 언제 어디에서나 돌고 도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라니. 이런 이야기들엔 보통 욕망이 서려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오는 날 멈춰선 차량에 커플이 타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남자는 잠시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보러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자친구를 걱정하고 있는 여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차에서 내린다. 그런 뒤 발견한 남자의 시체는 차량 위에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인디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책에서 발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읽었었고, 어딘가에서 들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일부러 책을 펼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적었다. 변형되는 이야기엔 변화하는 욕망 또한 깃들테니. 여하간 인디언에 대한 혐오와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게다가 미국에서는 차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역과 문화까지 아주 짤막한 이야기에 스며들어있다. 결국 핵심은 우리 사회의 욕망이다. 불과 몇년전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국내에서는 난민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뉴스가 퍼졌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우리나라의 의료 보험 혜택을 외국인이 전부 가져가고 있다는 뉴스도 많이 퍼져있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활과 아주 비슷한 사례들도 많다. 첫 이야기는 에어컨이 고장난 교실에서 시험을 치루던 학생이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선생님이 달려들어 막았다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어려운 시험에 학생이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또 강아지에 관련된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집에 돌아온 새댁이 죽어있는 갓난 아이를 보고 경악한다. 키우던 강아지 입 주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결국 강아지를 죽인다. 하지만 집을 둘러본 결과 도둑이 들었던 것이었다. 도둑과 싸우던 강아지를 죽인 주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강아지 관련 이야기는 대부분 강아지는 의로운 동물이고,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이 또한 우리가 강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각각의 이야기에 주석을 달아 놓는다.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각 사례들이 어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서 변형해서 쓰고 있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각 이야기들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열심히 적어뒀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들은 참조해볼 필요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흥미롭게 봤던 이야기들을 따로 적어뒀다. 책의 저자는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고 서술했지만 오히려 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미국에서 많이 퍼져있는 자동차 테마는 문화가 살짝 빗겨간 느낌이 있고, 동물과 관련된 일화들은 개인적 취향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니 오히려 더 재미를 느꼈다. 


꼭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아니어도 평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재밌게 볼만한 책이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짤막한 분량으로 정리해준 저자가 고맙기도 하다. 최근의 경향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파만파 퍼진 이야기들이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많다. 마치 동화를 보며 교훈을 느끼는 것처럼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들여다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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