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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2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이 있었네요. 말씀하셨던대로 100만이라면 모르긴 해도
이렇게 저렇게 얽힌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자살자가 없는 가정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어렸을 때 이모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암튼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품어주면 좋을텐데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저자가 임상심리락자네요.저도 기회되는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읽으면 좀 마음이 좀 착잡할 것 같네요.

노란가방 2024-03-25 21:20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양가감정이 좀 드는...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읽으면 슬플 것 같아서 못 보겠는 그런..ㅎ
 



단순히 “양측이 똑같이 나쁘다”고 말함으로써

주장 자체와 분리되어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객관적이다”라는 복잡한 개념을

“명백하게 당파적이지 않다”는 어떤 모호한 감각으로 축소해 버린다.


-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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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디자인
사와다 도모히로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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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만 보면 어떤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책이었다. 물론 제목에 사용된 단어야 익숙하지만, ‘이게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고?’ 하는 느낌. 저자는 일본의 한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카피라이터였다. 청춘의 나이에 입사해 몇 년 간 일에 몰두하며 살았던 그는, 입사 10년 만에 얻은 아이가 시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충격에 빠진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삶의 궤적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그는 우선 실제 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을 소개받는 식으로 2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한 후, 그는 비로소 약점은 다양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을 표준삼아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여기에 맞춰 구축되고 제작되고 유통된다. 만약 장애인들이 여기에 맞춰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꾼다면, 그래서 장애인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본다면 그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구부러지는 빨대라든지 한 손으로 불을 켜는 라이터는 모두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제작되었다가 이제는 널리 퍼진 발명품들의 예다.





광고전문가로서 저자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과 같은 장애인들의 ‘약점’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보기로 한다. 이 때부터 소수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하나로 저자 자신의 약점이기도 한 스포츠(나와 비슷하게 몸으로 하는 운동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저자) 영역에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른바 ‘유루스포츠’가 그것.


유루스포츠란 일본어로 느슨하게(유루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가리킨다. 손에 비누칠을 하고 하는 핸드볼경기인 핸드소프볼, 애벌레 모양의 침낭 비슷한 경기복에 들어가 구르고 기어가며 하는 애벌레 럭비, 강한 충격을 가하면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센서가 장착된 공을 사용해 아기울음소리가 나면 상대에게 공을 넘겨야 하는 아기 농구 같은 것들이 책에 소개 된 유루스포츠의 예다. 단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해 핸디캡을 마련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승리하는 방식을 자체를 바꿔 기존의 강자들과 약자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를 만들어보자는 개념이다.


물론 이 주장이 더 빨리 달리고,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들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엘리트 스포츠에 매몰되어 대중이 직접 참여해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좀 더 본질적인 체육활동에 집중해 만들어 본 또 하나의 스포츠 영역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이제까지 광고회사에서 더 많은(Scale) 사람들에게 더 빨리(Speed) 알리고, 짧은 기간(Short)에 그 역할을 마쳐왔다. 하지만 이제 눈을 돌려 좀 더 천천히(Slow), 작은 것부터(Small), 키워가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는(Sustainable)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라는 자기파괴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소진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래야 또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존재일까?


저자는 이 질문을 단지 자신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적용해 볼 것을 권한다. 책 후반에는 어떻게 하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며 살 수 있는지에 관해 간략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요새 유행하는 퍼스널 브랜딩과도 약간 맥이 닿아있는 느낌인지라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게다. 누군가는 틀에 박혀있지만 필요한 일을 해야만 사회라는 곳이 굴러갈 테니까. 하지만 그 안정된 틀이 누군가의 희생을 깔고 가야만 하는 거라면, 틀을 흔들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으면서도 좋은 메시지를 던져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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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우리 가족뿐입니다
김민철 지음 / 죠이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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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책이다. 이천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교회, 그리고 부임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자녀들만 함께 예배하고 있는 상황(물론 중간에 함께 예배했던 분들이 계시긴 했다)이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자로서 참 낙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저자가 느끼고, 감당하고, 극복하고 있는지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상가 지하의 교회가 그렇듯,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추운 상황, 가끔은 배관에 문제가 생겨 예배실 한 가운데로 물이 흥건하고, 아마도 냄새도 심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는 예전을 따라 예배를 꿋꿋이 진행해 나간다. 일견 그게 무슨 고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애초의 교회의 사이즈라는 것이 어디 정해져 있는 게 아닌 이상, 매주 가족과 함께 예배한다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저자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해 본 것 같다. 교역자가 바뀌었으니 현수막도 걸어보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광고하기도 하고, 쓰레기봉투를 나누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나름 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해 봤지만, (책에 따르면) 저자가 오기 전 교회의 이미지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 (교회성장학과 관련해 반면사례로서도 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계속 현재 자리에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보통 이런 경우라는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들어가거나(나이 때문에 제한될 수도 있긴 하다), 현재 있는 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책 가운데에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적 소명은 내가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리키고, 외적 소명이란 그 일에 실제로 뛰어들었을 때에 어느 정도 열매가 보일 때를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저자의 (적어도 이천에서의) 목회사역은 외적 소명 부분을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를 좀 다르게 읽어낸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사역을 하면서 생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좀 더 해도 된다는 사인이 아닐까 하는. 뭐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와는 다르게 저자는 가족도 있으니...


사실 어떤 감동이나 그런 것 보다는 염려가 더 많이 드는 독서였다. 왠지 모를 동질감, 그리고 이왕이면 이런 분이 좀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격려와 안쓰러움이 복합적인 그런 감정이랄까. N잡까지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의 표준 사이즈라는 게 어디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교회도 하나 존재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현재 교인은 없지만, 저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를 불러서 강사로 세워주시는 선배 목회자들, 그에게 기꺼이 일을 맡겨주신 출판사 사장님, 특히 교회에 물이 샌다는 말을 듣고 함께 와서 수리에 동참해 준 지역의 동료 목회자와 성공회 신부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저자를 만나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깊은 대화를 했던 여러 사람들도 아마 저자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에 가까운 책이지만, 그 가운데 날카로운 교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처음 고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감리교 교단의 지방 조직 내 알력다툼을 원만히 끝낸답시고 양쪽 파벌에서 지지하는 개척인가를 모두 허락하지 않기로 했던 사건이라든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교회들에서 은퇴를 해야 할 목사의 전별금을 후임 목회자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목사를 청빙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한국 교회 내 고질적인 악습이다.


그리고 저자와도 밀접하게 관계있는 소위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다. 저자가 속한 감리교단에서는 2016년 이중직을 금지하되 미자립교회에 한해서는 허락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애초에 미자립교회의 목사자들을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일까지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결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지적을 한다.


이런 결의는 교단에서 목회자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는 것. 차라리 이중직을 금지하고, 목회자들에게 최저생계비(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를 지급한다던가, 또는 생계에 곤란을 겪는 목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행정을 하는 대신, 그저 이중직을 풀어 줄 테니 알아서 먹고 살라는 식으로만 느껴졌나 보다(물론 꼭 그런 취지로 개정된 건 아니겠지만).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직영 신학교에서는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지만(물론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교육을 안 한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역의 진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두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식이다. 가톨릭처럼 그들의 거취를 중앙의 행정에서 조절하는 식이 아니라도, 근본적으로 목회자 수요와 교계 현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인데, 관련 논의가 등장한 지 2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어어 하다가 0.7 이하로 내려가 버린 출생률처럼, 아마 이 문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진 않을까.



저자의 선택에 완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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