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자의 신앙고백 - 인간의 탄생, 성숙, 노화
김영웅 지음 / 선율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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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이라는 주제를 동시에 다루는 일은 일단 흥미를 자극한다. 흔히 이 두 영역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식의 편견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과학의 주요 공헌자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좋은 기독교인이면서 마찬가지로 훌륭한 과학자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장 폴킹혼이나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이 신앙과 과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고 있는 저자들이 쓴 책들은 우리에게 지적인 만족을 준다. 다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인물들은 없을까 하는 아쉬움도 살짝 든다. 사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은 모두 자연과학 학위와 함께 신학 학위도 보유하고 있어서 이런 종류의 글을 쓰기에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굳이 자신의 학위에 신학 학위를 추가하고자 하는 사람도, 그럴 만한 동기도 좀 부족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뭐 일단 신학이라는 학위가 교회 밖에선 별다른 가치가 없는 나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눈에 띄었을 때 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 저자가 쓴 과학과 신학의 통섭적 관점을 담은 책인가 싶어서다. 하지만 기대가 살짝 컸던 걸까? 이 책은 생물학, 정확히는 인간 발생과 성장, 노화를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신학이 아닌) 신앙적 통찰을 담은 내용이었다.




물론 신학과 신앙 사이에는 우월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두 영역은 각각 집중하고 있는 게 약간 다르다. 대체적으로 신앙 쪽이 좀 더 직관적이고 단순하며, 일상에 좀 더 밀착해 있는 느낌이다(물론 신학도 이런 요소들을 갖춰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흔히 교회 안에서 어른들을 통해 듣는 신앙의 지혜나 간증을 통해 듣는 이야기가 여기에 속한다.


신앙적 교훈을 더한 이 책 역시 조금은 직관적이며 일상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생물학적 설명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던 정도에 약간의 교양 수준의 과학을 덧붙인 정도이고, 각 사안에 관련된 저자의 신앙적 깨달음, 혹은 교훈이 덧붙여진 형태다. 애초에 책의 예상 독자를 좀 더 대중적으로 넓게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덕분에 책장은 쉽게 넘어간다. 다만 어느 정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좀 읽어본 독자들에게라면 살짝 아쉬운 면도 분명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단순하기만 한 건 아니다. 분명 관련 분야 전문가로서 저자의 지식과 정리 능력이 잘 드러나고 있고, 저자가 보여주는 신앙적 통찰과 교훈도 충분히 교회 안에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모든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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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용기가 생기는지,

그 덕에 소중한 친구를 찾아 다행이다.


- 윤지회, 『사기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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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 -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대한민국 이대남 보고서
이선옥 지음 / 담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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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눈길을 끌어서 집으로 데려온 책이다. 20대 남성을 뜻하는 이대남이라는 표현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듣기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언론기사에 종종 등장하더니 이제는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이대남에 관한 일반적인 인상은 젊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성향이 강하고, 자기들만의 공정 개념에 빠져서 여기저기를 치받는 어린 것들 정도?


책 제목에도 이런 일반적인 인상이 드러난다. “동네북”이라는 용어다. 여기에는 “모두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분명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들을 거슬려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동시에 “동네북”이라는 표현에는 이들이 억울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뉘앙스도 담겨 있다. 저자는 다분히 이런 의식을 갖고 이대남에 가해지는 “억울한” 비판을 방어하며, 그들이 왜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를 변호하려고 이 책을 썼다.




책 제목에도 들어가고 분명 여러 차례 이대남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만, 정작 책은 이대남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 단어가 그냥 일부 언론이나 호사가가 만들어 낸 단어이기 때문에 그 기준 같은 게 모호한 데가 있다. 대충 따져도 10년의 나이 격차가 있는 한 쪽 성별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무리다.


그래도 분명 이런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니, 저자는 일단 이 부분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듯하다. 책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대남”의 탄생은 일종의 반응이었으며, 그들을 향한 페미니즘 진영의 가시돋힌 독설과 편견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히 이 책은 이대남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그들을 매도하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 PC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정체성 정치나 PC주의의 기저에 깔린 교만과 혐오 코드의 위험성, 그리고 오늘날 주류가 되어버린 남성혐오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페미니즘에 대한 거친 공격적 표현들은 한편으로 저자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읽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이쪽이 좀 더 우세적인 포지션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저자의 주장에 타당한 점이 많이 있다. 선동과 혐오에 기초한 오늘날 주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문제를 조곤조곤 지적하는 부분은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많다. 관련 내용은 앞서 오세라비나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책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내용이긴 했다.


다만 페미니즘 사이의 차이를 전혀 무시하는 측면이라든지 하는 몇몇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좀 지나치다 싶다. 뭐 애초에 이 책이 논문이나 사회학 연구서보다는 대중적인 성격을 좀 더 강하게 띠고 있긴 하지만.


또, 책 제목에도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책에서 이대남을 분석하는 내용은 정교하지 못하다. 그저 모든 건 페미니스트들의 만행 때문이라는 단순한 내용만 보인다. 이 점 역시 아쉬운 부분.




비단 페미니즘 뿐 아니라 어떤 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릴 때 사람들은 쉽게 이성적인 판단 대신 맹목적인 신종을 택하곤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한 때는 평등을 주장했던 많은 사상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하곤 한다.


다양한 가치와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차이를 조율, 타협해 나가며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민주사회의 최상의 모습이라면, 그저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상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은 그 안에서 자리를 배정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생각들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람에 따라 이 책에 실린 내용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담긴 비판을 그저 무시하며 자기 주장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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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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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와 1930년대 “하이랜더” 성인교육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던 마일스 호튼의 대화집이다. 두 사람 모두 교육과 관련된 일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성장기라든지 하는 개인적인 일화도 등장한다.


프레이리에 대해서는 그가 쓴 책을 앞서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는지라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호튼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내용이 많았다(여전히 내 지식은 얕다). 그가 시작했던 “하이랜더”는 흑인들의 문해교육을 하기 위해 시작한 학교 밖 교실이었다.


당시 미국 테네시주는 투표권자 등록을 위해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수의 흑인들과 노동자들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튼과 그의 동료들은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실을 열었는데, 이 때 그 교육의 이념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전문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대신, 배우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도록 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함께 학습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프레이리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프레이리 역시 체제를 강화하기만 하는 공교육의 방식과 내용에 반대하며 조금은 다른 방식의 교육을 꿈꾸던 사람이었으니까. 예컨대 프레이리는 “공부란 사랑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정해진 수업 시간표에 따라서 학습을 요구받는 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랑에는 시간표가 있을 수 없”으니까(58).




가르치는 사람이 전문가의 권위를 덧입은 채,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주입하려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교와 학원,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대단이 있느냐며, 현재의 방식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여기엔 현재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교수가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저런 전문가가 되었는데 하는 식의. 문제는 이런 식의 테크노크라시가 지나치게 확산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소수의 몇몇 기술관료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각종 세금이 줄줄 새는 건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큰 이권이 걸린 일들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공론화라는 작업이 좀 더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여론 조사와 달리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일을 결정하겠다는 건데, 여기에도 반발이 적지 않다. 재판 과정에 일반인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일을 우리나라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극렬하게 반대한다. 지난 정부 때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일반 시민들을 모아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어 의사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자칭 원자력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사람들이 복잡한 원자력 발전의 개념에 대해 뭘 안다고 결정을 하느냐는 식으로 꼰대짓을 했었다. 정작 그 일로 영향을 받는 건 그 “아는 게 없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인데도.




호튼과 프레이리가 제안하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분명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표준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어 평균적인 수준의 지식 주입으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겠다는 산업화 시대의 교육모델과는 크게 다르다. 노조운동이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반발은 산업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독재적 정권에게도 눈엣가시였을 게 분명하고.


하지만 이미 정보화사회로 넘어가고,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던 수많은 일들을 대신하게 될 미래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지금, 여전히 그런 과거의 교육 패러다임에만 매몰되어 있는 건 분명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이 시대에는 스스로 배울거리를 찾아나서고, 탐구하는,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 두 사람의 주장이 더욱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공교육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는 뉴스들이 들려온 지 오래다. 이제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상황이란 말인데, 우리는 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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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은,

자기 내어줌이 긍정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있다.

당신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당신을 파괴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만, 가해자의 권력을 안정시켜 줄 뿐이다.

자기 내어줌이 서로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지만,

실패의 고통과 폭력도 예상해야 한다.

폭력이 몰아칠 때, 자기를 내어주는 행동은

곧 어둠에 가려진 하나님 앞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될 뿐이다.

자기를 내어 주는 행동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 어두운 면이

바로 십자가의 스캔들이다.


-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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