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는 축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받자

슬픔은 슬픔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말하자


- 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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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인역 입문 - 칠십인역의 정의, 역사적 배경, 기원, 번역 과정, 가치, 권위
그레고리 R. 래니어.윌리엄 A. 로스 지음, 이민희 옮김 / 북오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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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며, 제목이며 깔끔하다.(다만 앞뒤로 내지 한 장씩은 넣어주지 그러셨어요)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약자로 LXX라고 표기하는 칠십인역에 관해 들어봤을 것이다. BC 2~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청으로 온 72명의 유대 장로들이 72일 만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완성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져 온 고대 그리스어 구약 번역본이 바로 칠십인역이다.


이 책은 이 칠십인역에 대한 좀 더 학술적인 연구를 다룬다. 칠십인역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1부와 그것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2부로 나누어져 있고, 다시 1부는 번역의 역사와 그 작업의 특징들을, 2부는 칠십인역을 통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갖는 권위에 관한 문제를 간략히 다룬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 관한 학문적 개요를 잘 정리해 놓았다.





간만에 사본학에 대한 다양한 지적 도전을 맛보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사본학이란 뭔가 만져질 듯하면서도, 가까이 가면 잘 보이지 않는 무지개 같은 느낌을 주는 분야다. 물론 대부분의 인문학 작업들이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이 분야는 수많은 가정들과 추측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본들만 남아있을 뿐인데, 그 중에서도 약자로 MT라고 하는 “맛소라 사본”이 가장 중요한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본은 특정한 가문에 의해 보존되어 정리된 구약 사본인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 AD 9세기 경 편집된 판본이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맛소라 사본보다 천 년은 더 이전에 번역된 버전이다. 어쩌면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마소라 사본의 필사자들이 보지 못했던, 보다 고대의 사본들을 보고 작업을 진행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칠십인역은 구약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라는 지적은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이 상당부분 바로 이 칠십인역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히 신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고대 그리스어 구약번역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칠십인역의 원래 사본이 한 권의 책으로 깔끔하게 장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히브리어 사본에도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듯, 이 그리스어 번역본 역시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사본학에서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기가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중에서 어떤 버전을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저자들 역시 이 명칭을 좀 더 폭 넓게 사용하려 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칠십인역에 얼마만큼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에 관해 논의하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규범적 권위, 파생적 권위, 해석적 권위로 구분한 뒤, 칠십인역을 구약에 대한 규범적 권위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정경적인 위치로까지 둘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본문이고, 번역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KJV만이 영감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화 있을 진저 ㅋ). 물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칠십인역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결과물이기에, 히브리어 사본의 좀 더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대신 저자들은 이 칠십인역에 파생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고, 신약에 인용된 칠십인역의 많은 구절들은 그 자체가 칠십인역의 영감을 증명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담긴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칠십인역은 해석적 권위도 갖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상당한 도움을 준다.


전반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방향을 잘 잡아주는 책이다. 물론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긴 하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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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안에 감춰진 장애에 대한 편견들




2. 모기처럼 물어뜯는 차별적인 말들




3.휠체어에 타신 하나님을 상상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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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법 - 듣는 형식과 표현하는 언어를 알면 감동이 더욱 커진다 음악의 즐거움 1
오카다 아케오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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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요새는 쉽게 구글링을 하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좀 더 진지하게 알고 싶을 땐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특히나 이번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문외의 영역인 경우 더더욱 괜찮은 책을 통해 기초를 닦아야겠단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가서 이 책을 골라 온 이유다. 제목부터가 (수영 할 줄도 모르면서 백과사전을 읽으며 수영에 관해 지식을 쌓은) 딱 나에게 맞아 보였다. “음악을 듣는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 나도 클래식 음악을 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져왔다.


물론 그런 심미안은 한 번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당장에 뭔가를 알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우선 책 자체가 시대별로 음악사를 훑어가면서 각각의 특징을 적어두는 식의 백과사전식 접근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일이란 무엇인지, 음악에 관해 말하는 건 또 무엇인지 하는 식으로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수많은 고전 시대 음악가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헤겔과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들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아, 책 제목은 왠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해 보였으나, 저자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물론 가끔은 역사적 접근과 시대상황 같은 요소들을 언급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최소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애호가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좀 더 잘 어울릴 듯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음악을 듣는 중 음악과 ‘공명’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소위 말해 감동이라든지, 뭔가 찌릿 하고 와 닿는 일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뭔가 분명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걸 적절한 표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그냥 음악은 느끼면 된다고 나무랄 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식의 태도 또한 음악에 대한 하나의 사조/경향일 뿐이다.


저자는 음악을 하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하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참여하는 걸 말하고, ‘듣는 것’은 말 그대로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감사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들은 음악에 관해 나름의 설명이나 해설, 감상을 하는 일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이 일들은 서서히 분리되어 왔다. 18세기까지의 많은 곡들은 사람들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꼭 잘 사는 집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었고, 가족끼리 함께 연주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브람스 이후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아마추어들이 간단하게 연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일과 듣는 일이 분리된 것이다.


그렇게 음악이 전문가들의 일이 되어버리면서 보통의 애호가들은 이제 직접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길이 적어져버렸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종의 틈새 산업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주는 중재자, 즉 비평가들이 등장했다. 다시 한 번 음악에서 말하는 것이 떨어져 나온 이유다. 흥미로운 설명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특히 세 번째 요소인 ‘말하는 일’을 보통의 애호가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몇 가지 접근 방식을 제안해 주고, 마지막 장에서는 직접 뭔가 악기를 연습해 보고 말해볼 것을 권유도 한다.




확실히 음악은 우리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내 어린 시절이 그랬듯,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나 어린 시절부터 악기 연주를 배우고 관련 문화를 향유하고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난점(일찌감치 아버지 사업이 망한 우리 집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어린 시절 그런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도 음악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도전해 볼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만 간만에 다시 좀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뭘 몰라도 저자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나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식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조금씩 빠져들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 일에는 이 책 말고 좀 다른 책의 도움이 또 필요할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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