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에 푹 빠져 있는,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 시리즈를 작정하고 내고 있는 다함출판사에서 또 한 권의 카이퍼 책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카이퍼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그의 유명한 “칼빈주의 강연”에 관한 책이다. 아홉 명의 현대 학자들이 “칼빈주의 강연”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일단 표지가 예쁘다. 파스텔톤의 연보라색을 메인으로 해서, 이 시리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카이퍼의 이미지가 중앙을 장식한다. 앞서 나온 두 권의 책과 비슷한 콘셉트인데 컬러만 바뀐 모양이다. 계속 이런 느낌으로 가도 조을 듯. 예전에 홍성사에서 루이스 책을 냈을 때처럼.
총 9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반의 여섯 개 장은 칼빈주의 강연의 순서와 똑같다. 각 장을 맡은 저자들은 그에 해당하는 “칼빈주의 강연”의 장을 맡아 분석하고, 비평한다. 7장은 조금 독특한데, “칼빈주의 강연” 속 인종차별적 문장들을 끄집어 내 이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은 장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시대적 한계였다고 보면 되지 않아 싶은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서면 이 부분도 설명이 길어지는가 보다.
8장에서는 원래 네덜란드어로 작성된 “강연”의 원고가 어떻게 영어로 번역되었는지 과정을 재구성해 보고 있고, 마지막 9장은 이 책의 번역자이기도 한 신국원 교수가 칼뱅주의가 한국교회에 끼친 다양한 영향을 돌아보고 있다.
책을 읽어 나가며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건 (각 장의 저자들이 신학자인 때문도 있겠지만) 좋은(바른)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부분이다. 바른 신학이란 지적인 영역에서의 정밀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적 사고를 하도록 만들고, 결국 세상에서의 바른 실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장인 9장에는 흥미로운 예가 하나 등장한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장로교는 칼뱅주의에서 기인한 교회정치제도다. 초기 선교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들어왔는데, 신학 대신 실천을 강조했던 감리교보다 장로교가 우세하게 된 것에는 확실히 신학적 강조와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신학이 현실을 떠나 탁상공론으로 넘어가 스콜라주의로 치닫는 것 또한 문제겠지만, 이즈음 보이는 신학적 혼돈이 결코 교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리는 없을 것 같으니까.
책 자체가 카이퍼의 “칼빈주의 걍연”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강연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이해하는 데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독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앞서 나온 “강연”의 보충설명을 담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장에서 다루는 주제를 카이퍼가 어떻게 다루었는지와 함께, 그의 주장에 담긴 신학적 함의를 풀어주는 내용도 담고 있어서, “강연”을 좀 더 깊이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다.
신이 하나라고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이 하나라는 것은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려는 경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도 작용하지 않는가?
하나의 신을 향한 믿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람이 ‘안’에 있게 되고 모든 사람이
정확하게 같은 관계성 ‘안’에 있게 된다.
-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중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벌써 거의 한 세기 전에 강렬하게 등장했다가 이제는 사장된 언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새로운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부적인 면에서 과거의 파시즘과 달라진 부분이 있지만, 그 핵심부에는 여전히 “외국인을 배제함으로써 상상의 유기체적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이 있다는 것.
과거의 파시즘의 중심에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새로운 파시즘의 중심인물은 미국의 트럼프나 프랑스의 르펜,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덴마크 피아 키에르스고르 같은 (그 중에서도 역시 트럼프) 인물들이다. 확실히 이즈음 극우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이지만, 일부(예컨대 트럼프 같은 인물은)는 극우라는 이념 지향 보다는 오히려 탈이념적인 인물도 있다.
책 제목에도 나와 있듯, 저자는 이 새로운 파시즘에 ‘후기 자본주의’를 덧붙이고자 한다. 문제의 원인을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서만 찾으려 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문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다.
정리하자면, 대규모 경제위기는 복지의 축소로 대표되는 긴축정책을 펴도록 만들었고, 이는 사람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다시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불신,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고, 이 공간을 파시스트들이 차지했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파시즘은 어떤 종류의 음모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해체의 표현”이다.
오랜 경제 위기로 인해 누적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불만을 해소할 “복수의 대상”을 찾는다. 파시스트들은 그런 사람들 앞에 이민자, 무슬림, 공산주의자, 유대인 같은 타자를 희생양으로 던져주어 물어뜯도록 만든다. 또, 새로운 파시즘은 이전과는 달리 우리의 일상, 특히 온라인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소위 일베나 펨코 같은 파시스트들의 친목질 커뮤니티에서는 이민자나 특히 중국인이나 무슬림에 대한 강력한 혐오와 공격적 언사들이 일상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건, 이른바 진보적 의제를 제시한다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점.
심지어 현재 우리나라엔 책에는 나오지 않는 현상도 있는데, 바로 종교적 배경을 지닌 집단이 부패한 정치세력과 굉장히 밀착해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일각은 물론 통일교나 신천지 같은 이단 집단들이 책에서 말하는 새로운 파시즘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도, 그런 것들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돈과 인력이라는 지원을 하는 상황은 종교와 정치의 오랜 (그리고 부적절한) 밀착의 반복이기도 하지만,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책의 분석이 아주 정교하지는 못하다. 사실 책 자체의 볼륨이 그리 크지 않은데도, 앞서 말한 주제가 별다른 발전 없이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느낌이다. 어떤 인상비평, 사건에 대한 스케치 정도에 가까워 보인다. 당연히 상황에 관한 설명 이외에, 대안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볼륨에 비해 책값이 꽤나 비싸다.
책을 많이 쓴 유명한 저자도 아니고, 무슨 초대형교회의 담임목사도 아니지만, 어찌어찌 내 손까지 들어온 이 작고 얇은 책에서 마음에 담아가는 문장들이 제법 여러 개다. 30년이 넘는 시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해 왔고, 얼마 전 뇌종양 진단을 받아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웠음을 인식하고 있는 저자가 자신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남기는 소박하고, 진심이 담긴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문장이 화려하거나, 신학적으로 탁월하거나 한 글은 아니지만 제법 울림이 있다. 뽐내거나 재지 않고, 소박하면서 끈기 있게 목회를 해 온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 아니 위로와 격려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후반부는 성도들을 향해 쓴 글들이다. 그 중에서 역시 전반부의 내용이 더 눈에 들어오는 건, 나 역시도 후배 중 한 명에 해당되기 때문일 게다. 목회자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고민들, 예를 들면 사명에 대한 회의감, 교인들과의 갈등, 성공에 대한 압박과 패배감 같은 주제들을 과감하게 언급하면서도, 책망하거나 가르치려는 태도 대신 조심스럽게 공감하고 격려를 더해 준다.
사실 지금 내가 틀린 것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허탈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땐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법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상황에 있지 않나 싶다. 교회와 목사가 온통 욕받이로 내몰린 것은 벌써 오래되었고, 단지 자신이 오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자, 그 중 작은 한 부분을 맡은 책임자라는 이유로 그런 시비를 묵묵히 받아내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어차피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튀는 몇몇 별종들, 연예인급의 대형교회 목사 같은 사람들만 보지만, 이제는 아는 사람들까지도 거기에 한 마디, 두 마디 보태니 사실 쉽지 않다. 이 책의 인정과 위로가 더 와 닿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