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종교적 감정을 모욕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이다.
그 때문에 집에서는 신을 모독하는 사람도
교회에서는 되도록 그런 말을 삼간다.
슈피겔만도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캐리커처를 그리지 말았어야 했다.
보복의 위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 움베르토 에코,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중에서
앞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패커의 글을 읽었고, 이번에는 세례다. 초기 기독교 시기부터 세례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예식이었다. 최소한 2, 3년 동안의 교육과 다양한 훈련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데, 세례는 그 증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기독교가 사실상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갑자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2~3년 동안의 교육과 훈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세례 교육은 형해화되었고,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느낌이다. 다만 갈수록 교인수가 감소하는 오늘날에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세례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은 아닐까 싶은.(또 하나가 있다면 모든 종류의 의례나 예식에 대한 반발심)
사실 신학교에서도 이런 부분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당장 일선 교회에서 사역을 하려면 자주 접하는 일인데도. 알아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데, 최소한 이런 정도의 간략한 소개와 해설이라도 필요한 이유다.
세례와 관련해서 이 책에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그것이 왜 시행되어야 하는가이다. 책 제목에 세례와 함께 붙어있는 ‘회심’과의 관계성에 특히 주목한다.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세례는 또 왜 받아야 하는가? 세례가 우리의 구원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가 같은 질문들이다.
저자는 세례와 회심이 마치 성악에서 테너와 베이스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즉 서로 어울려서 더 풍성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세례라는 의식을 계속 해야 하는 가장 단순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만 외적 표징으로서의 세례가 가지는 상징적-신학적 의미를 넘어 어떤 실제적 효력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사실 설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긴 하다.
책 후반에는 유아세례나 입교식처럼 일선 교회에서 필요한 내용들도 담겨 있고, 말미에는 세례가 개인에게 주는 의미에 관한 몇 개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서 실전에서 사용하기에 괜찮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을 어떻게 해서 구입까지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중고도서를 구입하면서 배송비 무료 기준을 채우려고 이것저것 담다가 들어갔나 보다. 강렬한 핫핑크의 표지에 “답장이 없으면 슬프긴 하겠다”는 제목까지. 평소라면 손에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책이지만, 이렇게 우연한 기회로 만나는 책도 있는 법이다.
책은 이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에 관한 무슨 특별한 철학적 고찰을 담은 건 아니고, 저자 후기를 보니 처음엔 그냥 SNS에 올리던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 책으로까지 엮여 나왔다고 한다. 글의 분량이나 구성도 SNS에 맞게 길지 않다. 책을 열면 왼쪽에는 메신저창 형태의 말풍선 속 메시지가, 오른쪽엔 그에 관한 짧은 설명글이 덧붙여 있는 형태다.
모든 이별들엔 비슷한 면이 있나 보다. 그러니 이런 글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겠지만. 이 나이 먹도록 연애 경험 몇 번이 없을 리 없고, 그때의 감정과 기분을 떠올려 보면 책 속의 몇몇 문장들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이제는 그저 그 시절만 겪을 수 있는 불안과 설렘과 떨림 같은 것들이 그저 부럽기만 하지만.
그 시절,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듯한 책. 당시에는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더라. 이별로 아파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화이팅!
개인적으로 나에가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명의 저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한 명은 역시 C. S. 루이스이고, 다른 한 명은 마틴 루터 킹이다. 어린 시절 이 두 사람의 글을 읽고 많은 공부가 되었는데, 루이스가 내 머리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킹은 내 가슴을 형성하는 데 큰 지분이 있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킹의 설교문은 이런저런 책으로 이미 잔뜩 읽긴 했다. 그리고 언젠가 유튜브에서 킹의 육성 연설 영상을 (시대가 참 좋아졌다는 게 여기에서 느껴진다. 루이스의 강연이나 연설도 남아 있었더라면..) 직접 들었을 때, 그 조금은 떨리지만 강한 음성으로 “I have a dream”을 외치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성경 속 선지자를 직접 본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의 영감어린 설교의 내용은 물론, 조심스럽게 시작해서 점차 고조되며 강하게 비전을 선포하는 모습은, 흑인교회 특유의 분위기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한 때는 그런 스타일마저 닮아보려고 연습을 했던 것 같다. 물론 한참 모자라고, 특유의 반복어구 같은 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 책은 마틴 루터 킹의 다양한 연설/설교문을 모은 책이다.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라는 책에도 여덟 편의 설교가 실려 있었지만, 이 책에는 더 많은 연설문이 실려 있다. 사실 이 책이 훨씬 오래 전에 출판된 책이다. 1쇄가 1989년에 나왔으니까. 다만 번역은 아무래도 나중에 나왔던 책이 더 좋지 않았나 싶다. 같은 연설문이라도 좀 더 구어의 느낌과 분위기가 훨씬 더 살아 있어서 읽기에 좋았다. 물론 그래도 내용은 충실하게 번역되어 있으니, 킹의 사상과 그의 통찰을 접해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사실 그의 연설을 읽을 때는 흑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일상화되었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이를 철폐하기 위한 가두시위와 비폭력투쟁이라는 킹의 독특한 투쟁 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잔인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 시대, 비폭력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심과 실행은 간디 등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결국 그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누구도 고작 “들은 말”로 목숨까지 걸진 않는다) 오늘, 그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는 우리는 그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비록 그의 생이 암살로 갑작스레 끝나긴 했으나, 그가 죽기 얼마 전에 했던 연설 “I have a dream”을 비롯한 수많은 빛나는 연설들은 아마 그가 이 세상에 살았던 날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인종차별이라는 인류 공통의 범죄는 과연 언제쯤 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