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같은 이름을 한 모 방송국의 연예 프로그램이 있다.

두 명의 연예인들이 나와서

일주일 동안 단 돈 만원을 가지고 생활을 한 뒤

누가 더 많은 돈을 남겼는가를 겨루는 프로그램이다.

(요즘도 계속 방송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방송을 보면서,

이 프로그램의 의도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다.

(물론 TV라는 매체의 속성상 언제나 혼자 질문하고 답하긴 했지만)

만원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일주일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비용은 100% 식사비로만 사용되니 말이다.

옷도 사지 않고, 책도 사지 않는다.

전기세도, 가스비도 내지 않는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매우 절제되고 연출된 일주일을

카메라와 함께 보낼 뿐이다.

사실 시청자들은 그들이 카메라 불이 꺼진 뒤

무슨 행동을 하고 있을지 전혀 알 방법도 없지 않은가.)

아니면 자신의 사생활을 알려주고 싶어서(혹은 캐내고 싶어서)

안달하는 노출증(혹은 관음증) 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방송에 나와서 (일주일쯤은 굶더라도) 홍보를 하려는

연예인들(혹은 기획사 관계자들)을 위해 제작된 것인지.

결론은 모든 이유가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만원의 행복'이란

이 프로그램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데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단돈 만원으로 일주일을 힘들게 살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상하고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터 과연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기대하시라. 

 

 

지금은 그렇게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대학 졸업때까지,

나는 지하철로 학교를 다녔다.

학생들의 등교시간과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이란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라서

출근 시간 지하철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김밥과 같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철을 탔다면

발을 한 두 번 밟히거나, 이리 저리 밀리는 것 쯤은 예삿일로 넘겨야 한다.

모두들 그런 경우를 당할 때면 약간 인상은 찌뿌리겠지만

크게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제일 속편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발을 밟은 사람도, 나를 민 사람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 추구을 할 사람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원 지하철을 탈 때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어지간히 밀리거나 흔들려도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맨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겠지만,

중간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원래 가운데는 변변히 잡을 고리도 없어서

객차가 심하게 흔들릴 경우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 자리다.

하지만 만원 지하철에서는 좀 다르다.

사방에 꽉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몸에 힘 하나 넣지 않고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상황.

내가 말하려는 '만원의 행복'은 이런 상황을 두고 생각해 낸 말이다.

한문으로 쓰면,

'萬원'의 행복이 아니라

'滿員'의 행복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인 '원'은 한문으로 못 쓴단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좀 재미가 없을 터.

지하철에서 내리더라도 만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주위를 꽉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위를 꽉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책임들, 업무들도

만원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품들이다.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 더, 두 개 더' 하는 식으로 조금 씩 더 맡았더니,

어느 순간, 일주일이 온통 스케쥴들로 가득 차서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 말이다.

 

 

그런 상황에 조금식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스케쥴들이 내 생활을 이끌어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쓰러지지 않는

'만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의지력이 강하지 않다면

이런 경우 대번에 몸과 영혼의 힘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소진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지력만 뒷받침 된다면,

도리어 삶을 지탱시켜주는 지지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저히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은 순간이 닥쳤을 때,

내가 맡고 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많은 일들은

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처리하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개인적인 아픔이나 슬픔에 오랫동안 빠져 있을 수 없게 되는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

만원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당신이 만원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축하한다.

당신은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만원의 행복에 지나치게 빠지만 안 된다는 점이다.

원래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도무지 그것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곧 익숙해지고, 따분해하며, 지겨워한다.

('익숙해짐'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내가 예전에 쓴 글을 참고하시라)

 

 

만약 만원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이런 '익숙해짐'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당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그 수많은 책임들과 일들이

이제는 적으로 돌변해 당신을 짓누를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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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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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때는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 몇 대에 걸쳐 자살전문용품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유구한 전통의 가업(家業)에 충실하려고 하는 아버지 튀바슈, 그런 남편을 도와 독극물를 제조하는 뤼크레스, 첫째 아들인 뱅상은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기발한 자살 장치(심지어 자살 테마파크까지..;)들을 고안해 내는 가문의 기대주이고, 딸인 마릴린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라고 생각하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단조로운(?)’ 가족 구성원에 특이함을 더해주는 것은 막내아들인 알랑이다. 가풍과는 어울리지 않게 늘 발고 활기찬 그는 부모님의 큰 ‘걱정거리’다. 게다가 가업인 자살가게를 어떻게든 망가뜨리려고 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주니 말이다.(자살용 밧줄을 칼로 긁어 놓거나, 독약이 든 사탕을 골라내 버리기도 하고, 면도칼은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이 가족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2. 감상평 。。。。。。。   

 

     이 특이한 소재와 시종일관 그로테스크 한 전개는 처음 몇 장을 넘기는 동안 독자의 마음을 살짝 설레게 한다. 과역 작가는 어떤 식으로 즐거움을 줄 것인가. 이 상황에 담겨 있는 반전의 요소나 강한 임팩트는 어디쯤 등장할까.... 하는.

     역자 후기를 보니 이 책을 영화로 만들면 누가 감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던데, 생각해 보면 영화화는 제법 괜찮을 것 같다. 이런 내용과 유사한 분위기의 영화를 자주 만드는 팀 버튼 감독이라면 봐 줄만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영화 이야기고, 영화랑 책은 좀 다르지 않은가. 영화는 내용의 빈약함을 영상으로 메울 수 있지만, 책은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요컨대 문제는 이 책에는 주제를 재미있게 할 만한 부수적인 소재들은 많은데, 마땅한 주제가 없다. 툭툭 잽만 날리다가 경기가 끝난 복싱경기를 본 허전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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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휴대폰을 바꿨다.

단 돈 만원~ 이라고 했는데...

실은 30,000을 추가로 더 냈다.(통신사 가입비란다..ㅡㅜ)

뭐....

그냥 질러보는 거야~

 

 

참, 엊그제는 CMA 계좌도 하나 만들었다.

오늘 거기에 100만원 쯤 넣어뒀고..

이자야, 이자야.. 쑥쑥 붙거라... ㅡㅡ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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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인간 -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손봉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므로 ‘最大 多數의 最大 快樂’보다는

‘最小 數의 最少 苦痛’이 윤리적 당위성의 근거가 되어야 하고,

이런 목적론적 윤리는 의무주의 이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데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기피일 것이기 때문이다.

 


 

1. 줄거리 。。。。。。。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철학책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주제들 - 소위 거대담론들(세계의 기원이나 구조 등) -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집중을 하며 내용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독특한 점이 발견된다.

     저자는 고통이라는 경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언급하고, 고통이 지니는 원초성과 긴박성에 근거해 하나의 윤리관이 나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라는 목적론적 윤리를 제시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통이 갖는 의미를 찾아나가고자 하는데, 제 종교들 - 불교와 기독교, 과학주의 -의 견해를 살피면서 여전히 고통의 본질은 인간에게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고통은 인간 사회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주장한다. 예컨대 아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라면 누구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안하거나 발전시키고자(고통을 줄이고 편하고 즐거운 삶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작업으로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론부에서 논의는 반 발자국 쯤 더 나가는데, 아마도 저자는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기에, 고통을 당할 때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선한 무엇’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을 주체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로 내용을 맺는다. 하지만 이 주장이 니체의 ‘초인(超人)’의 개념과 정확히 어떻게 같은 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2. 감상평 。。。。。。。 

 

     저자에 따르면 고통은 단순히 쾌락의 반대가 아니다. 쾌락은 시간이 지나면 그 것을 느끼는 정도가 떨어지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으며, 약간의 쾌락이 증가할 때보다는 약간의 고통이 증가할 때 더 긴박한 상황이 되는 것이 그 예이다.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 윤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생각해 볼만 했다. 형벌이 단지 ‘행복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을 늘리는’ 방식이 된다면 그것이 갖는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예전처럼 ‘채찍질’이 부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엔 자연스레 공감을 하게 된다. 갈수록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강력범죄들을 보면서, 좀 더 강한 범죄방지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저자의 의견에 공감을 하지만,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인위적 방법들에 대한 ‘약간의 경계’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마취제나 진통제 등의 약품까지도 경계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꽤 흥미로운 깊은 내용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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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평전』과 『단테신곡강의』.

아이템 두 개 획득.

알지 사무실에 갔다가 받아옴. ㅋㅋ

 

 



 
이 두 권은 훈련소에 들어간 후에나 읽게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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