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속성이지만, 
의외로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성경 속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양한 유형을 살펴보고, 
각 유형이 어떤 경우에 사용될 수 있을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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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해주는 말들을

왜 자기 자신에는 해주지 않나요?

따뜻한 말은커녕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실패할 거잖아’라고 심한 말을 퍼붓는다는 자체가

자학의 안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무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입장을 다른 사람과 바꿔서 그 사람에게 해줄 말을 적어보세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탓하는 안경을 썼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넓은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 미즈시마 히로코, 『유리멘탈을 위한 심리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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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참된 신학을 터득하려면

금식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낡은 태도 중 

적어도 몇 가지를 단념해야 한다.

음식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용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금식을 한다.

기독교 교리에 민감한 것은 좋지만 

그 민감함을 잠시 보류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딱히 기독교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의 문화, 하위문화, 기질, 지적 오만과 더 관련된 싸움들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신학적 주장들을 사용하며

그 민감함을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톰 라이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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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과 은혜
폴 투르니에 지음, 추교석 옮김 / IVP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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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조화 내지는 융합을 시도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폴 투르니에가 쓴 책이다. 이번 책의 주제는 “죄책감”이다.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서는 죄책감이란 무엇인지, 2부에서는 죄책감이 일으키는 다양한 문제들, 3부에서는 죄책감을 대하는 일반 의학적 접근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로서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회개와 용서를 말한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가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하던 이상행동들의 근원에 죄책감이 있었다는 설명 등은 흥미롭다. 심리학이라는 분야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에 관한 분석과 설명이다 보니 확실히 신기한 면이 있다. 예컨대 자기 주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퍼붓는 인간들(대체로 정치인들이 그런 면이 있다)은 실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재미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죄책감을 이용한다. 우선은 모든 부분을 법과 같은 규정을 통해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근거가 불확실한 것들을 강제하려고 할 때도 죄책감은 톡톡히 이용된다. 물론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이 어떤 사람의 내면에 심각한 억눌림을 초래할 때다. 과도한 죄책감, 정확히는 잘못 이해되는 죄책감은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를 막아 지속적인 괴로움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죄책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죄책감을 초래하는 근원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근본적인 치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대 의학은 죄책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특정한 성적 본능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상황에 대해 현대 의학은 그가 그런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 그 남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을 억압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관한 부끄러움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투르니에의 독특한 관점이 빛을 발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인 용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는 그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여기에 저자는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의식을 모두 포용한다).


그리고 하나 더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의학적이고 영적인 치유를 통합하는 의사에게 일종의 성레적 치유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명명법인데, 의사가 성직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일반은총에 기초한 직업적 소명에 대한 강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동안 인간을 단지 기계적으로만 이해하는 관점만이 적절한 의학적 이해라는 착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물론 여전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런 차원에서 영과 육을 아울러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폴 투르니에의 주장은 사뭇 특별하게 여겨진다. 사실 인간을 기계로 이해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기계 취급을 받으면 불쾌함을 표하지 않겠는가.


특히 죄책감이라는 문제는 죄와 용서라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와도 연결해서 확실히 신학적인 면에서도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 부분이다. 당장 죄가 무엇인지, 그것이 인간의 전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도식적이고 이론적인 결론만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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