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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평점 :
어떤 이들에게는 꽤나 불쾌하고 아픈 명칭일 수도 있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멸칭이다. 분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역시나 소위 기자라는 이들이 벌이는 행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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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파적으로 한 쪽에 확고하게 줄을 선 기자들이 벌이는 낯간지러운 찬양쇼나 닥치고 까고 보는 걸 무슨 대단한 비판의식의 표출이라는 자아도취, 문제를 가리기 위한 물타기 기사나, 뻔히 돈을 받고 쓰는 게 보이는 광고성 기사들, 자신이 적대적으로 여기는 정치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몇 년 전 스스로가 썼던 기사의 논조를 180도 바꾸면서도 아무런 해명 따위도 하지 않는 뻔뻔함 뭐 이런 행태들이 모아진 결과일 것이다. 어디 재활용도 안 되는 악성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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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이 기자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마당에 위에서 시키는 걸 거부하는 건 여느 직장처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또, 일개 기자가 가질 수 있는 통찰의 한계도 분명하지 않은가. 때로 그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보이는 건, 몇몇 수준 이하의 개체들의 난동이 크게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최근 우후죽순 생겨난 온라인 신문과 무자격 기자들도 한 몫을 했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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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김인정 또한 기자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기자다. 기레기의 홍수 속에서,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이렇게 말하면 좀 박한 평가가 되려나) 애쓰는, 어쩌면 좋은 기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어떻게 하면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한 가득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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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려 있는 다양한 고민의 핵심에는 어떻게 고통을 기사로 써 내야 할까라는 질문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사로 접하는 사건들은 대개 누군가의 고통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맞고, 죽고, 학대당하는, 사기와 온갖 억울한 일들로 뉴스와 신문의 기사면이 채워져 있는 것. 그러니 저자의 고민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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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보여주면 그만이 아니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는데, 대개의 사건은 연속적이라 어디서부터 들을지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많은 경우 복잡한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보다는 그저 겉핥기식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데 그치곤 한다.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아니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인식을 갖추기도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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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아픔을 전시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구도에서 지방의 뉴스는 늘 무슨 문제가 있을 때나 등장하는 특별출연자역에 한정되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기사에서의 논조의 문제 등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기사란 단순히 어떤 사건의 내용을 요약 서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게 금세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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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발달로 이제 기사 역시(신문기사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뉴스까지도) AI가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과연 탐사보도를 할 수 있을까? 비대칭적인 정보의 양을 가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능력이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편견어린 시선을 스스로 필터링하고 뭔가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AI의 객관성을 우리는 늘 신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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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역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단지 기자라는 명함만 파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며 오랫동안 준비한, 그리고 밥벌이라는 중요하고도 치열한 영역 가운데서도 소위 기자정신을 지켜내려는 배짱이 있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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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언가 해답을 제시해 주는 책은 아니다. 저자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 왔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해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물론 저자의 모든 관점에 동의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다면, 또는 기자라는 직업에 흥미가 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언론이 어쩌구 하면서 한 마디 얹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