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노란 가방의 작은 책꽂이 (노란가방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책을 읽는 게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편하죠....</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20 Sep 2026 20:44:17 +0900</lastBuildDate><image><title>노란가방</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49578114217064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노란가방</description></image><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전통교회 들어오면 숨막히고&amp;quot; 읽기</category><title>교회는 왜 충성된 사람부터 지치게 할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27544</link><pubDate>Sun, 20 Sep 2026 18: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2754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0613&TPaperId=175275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off/k76213061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감사와 기쁨으로 시작한 교회 봉사는 왜 어느 순간 그만둘 수 없는 의무가 될까요? 예배만 드리고 싶다고 말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새벽기도에 참여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전통교회, 들어오면 숨막히고 나가면 그립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봉사자의 소진, 늘 하던 사람에게 일이 집중되는 교회 구조, 새벽기도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문화,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필요한 쉼을 이야기합니다.&nbsp;​쉼은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자발적인 순종을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지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지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150/k7621306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82858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어떤 믿음은 우리를 망가뜨린다 -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22116</link><pubDate>Thu, 17 Sep 2026 16: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221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042719&TPaperId=175221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574/4/coveroff/89880427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042719&TPaperId=175221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a><br/>티머시 R. 제닝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08월<br/></td></tr></table><br/>두 달 전쯤 이 책의 시리즈 중 하나였던 다른 책을 읽었었다. 그 책의 핵심 키워드는 “마음”이었는데, 이번 책은 “뇌”다. 영어로 된 원제를 보면 “The God-Shaped Brain”이니 우리말 제목이 크게 다른 느낌은 아니다. <br>그리고 원서에는 “How Changing Your View of God Transforms Your Life”라는 부제가 함께 붙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꾸는가라는 말인데, 이 책의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한다. 책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우리의 뇌에, 생각에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 우리 삶을 망가뜨린다고 반복해서 지적한다.<br>전반적으로 보면 앞서 읽었던 책과 비슷한 논조를 갖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뇌’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 책은 여러 장에 걸쳐서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던 실제 환자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저자가 그들에게 어떤 신앙적 조언을 해주었는지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br><br><br><br>책 표지에 “이 책의 사례는 모두 실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읽었던 책에서 비판점은 기독교를 너무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정신과 의사가 실제 환자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고안되고 쓰였다는 정황을 놓친 것 같다.<br>확실히 기독교 문화가 더 일상적인 미국이니 만큼, 여전히 매우 보수적인 신앙관 속에서 종종 압제적인 상황에 처하는 이들도 많은 듯하다. (이즈음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여기 나온 사람들과 비슷한 고민을 할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든 것을 이분법 적으로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흔히 “죄”라고 말하는 것들에도 구체적 정황으로 들어가면 고려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br>이런 상황에서 경직되고 정통주의화 된 기독교 안에서 자란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엄격한 관점을 지니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빠져 심각하게 삶의 질서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충분히 나오게 된다. 저자의 책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한 가지 약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의 책을 너무 일반론적으로 읽으려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br><br><br><br>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단지 우리의 생각과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 건강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마음을 뇌의 특정한 부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건가 하는 구절이 몇 군데 보인다. 이른바 ‘육체와 마음의 연결점’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주제에 대해 저자는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br>어떤 부분에서 저자는 정신과 의사라기보다 목회상담을 진행 중인 목회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지는 모르겠다.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전제를 갖고 임하는 것과, 목회자가 할 만한 일을 하는 것 중. 물론 이 또한 일부 목회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신자들을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눌러둔 결과겠지만.<br>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견해, 그 중에서도 그분을 무서운 심판자이자 처벌자로만 인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해줄 만한 책이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574/4/cover150/89880427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574040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역사/인문</category><title>역사를 삶의 무기로 삼아도 될까 - [역사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지나간 세월에 담긴 다가올 날들을 위한 통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8570</link><pubDate>Tue, 15 Sep 2026 21: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85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636692&TPaperId=175185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1639/67/coveroff/k4826366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636692&TPaperId=175185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역사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지나간 세월에 담긴 다가올 날들을 위한 통찰</a><br/>문예춘추 편집부 지음, 이미경 옮김 / 베가북스 / 2019년 11월<br/></td></tr></table><br/>전에 이 책의 제목과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문득 리뷰를 쓰려다 같은 출판사에서 낸 시리즈물인가 싶었지만, 웬걸 출판사 이름이 전혀 다르다. 물론 두 책 모두 일본인이 쓰거나 기획한 책이지만 별 상관은 없어 보인다.<br>그리고 검색하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하나. “~는/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무척이나 많다. 이 문장의 주어 자리에 들어가는 것들로 독서, 심리학, 시간, 집중력, 독학, 고집, 불안, 법, 심지어 복음까지 있다. 어지간히 무기가 고픈 시대인가 보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경쟁, 싸움을 위한 도구인데, 이렇게 여기저기서 무기를 찾으려고 하는 시대는 평온한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br><br><br><br>여하튼 이 책은 그 무기를 역사에서 찾는다. 역사가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역사의 교훈” 같은 것을 이르는 듯하다. 다만 역사라는 건 그것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달라지곤 해서, 누가 그것을 읽느냐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br>모두 스물 세 명의 기고자들의 글을 엮은 이 책의 경우, 각각의 기고자들의 성향을 분석할 수는 없고, 이를 모아 낸 문예춘추라는 출판사(이자 월간지 이름)에 집중해야 할 것 같은데, 조금 찾아보니 일본의 유명한 우익 출판사라고 한다. 다만 모든 글에서 우익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건 아니고, 사안을 ‘다르게 보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부각하기’의 과정에서 다분히 일본 중심적으로 역사를 읽고 있다는 느낌은 종종 받게 된다.<br>예컨대 근현대를 다루는 파트에서 미국의 민주당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주제로 쓴 글을 보면, 과거 민주당이 노예제를 옹호하던 정당이었으나 교묘하게 과거를 숨기고 있다(!)면서 민주당 정권을 인종차별 정권이라는 식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두 개의 원자폭탄을 배치한다. 문제는 여기 어디에도 일제가 당시에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점. 물론 글의 논지가 미국 민주당에 대한 비판이긴 하지만, 일본은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원폭의 피해까지 입은 피해자로서만 서술된다. 전형적인 우익적 논설이다.<br>고대 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루는 글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이민족의 수용에서 찾고, 이를 현대의 난민 문제와 연결시키는 시도도 보인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형식적, 내용적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중원을 지배한 수많은 이민족들이 결국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점과 비교하면서 중국은 문화적 가치가 민중 전체에게 공유되었지만 로마는 그렇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조금은 성급한 면이 있지 않나 싶다.<br>또 종교와 관련된 내용도 기본적으로 유물론에 기초해 접근을 하니 피상적인 고찰만 나올 뿐이다. 애초에 애정이 없는 대상에 관해 쓴 글은 재미있기도 어렵다. 로마가 예수의 처형 이후 그 제자들이 시작한 신앙운동(기독교)의 의미를 깨닫고,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해 은근 사도들의 활동을 지지한 것 같다는 주장은, 당시 아직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화가 유대인들 내부에서도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때 그다지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니다.<br><br><br> <br>그래도 꽤 흥미로운 통찰도 보인다. 한 필자는 로마 교회와 과학 연구 사이의 긴장만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자연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집중해왔음을 근거로 실제로는 과학 연구에 상당한 진전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19세기 중후반 영국과 중국(청)의 관계에 대한 고찰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를 단순히 자유 민주 vs 권위 독재, 혹은 제국 vs 저항 같은 이항 대립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br>특히 페르시아와 로마, 당, 이슬람 제 왕조들, 몽골 등의 번영을 이룬 대제국에서 공통점을 ‘소수파’의 지배로 보는 점이 흥미롭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지배층이 통치를 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관용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피지배 계층에서도 신분이나 출신을 크게 따지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을 관료로 끌어올려 사회 전체에 유익이 되었다는 것. 물론 지역적으로 예외도 있었지만, 다수파가 전부를 차지하는 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급의 고착화와 부의 쏠림 현상이 일어나 사회적 불안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기억해 둘 만한 부분이다.<br>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잘 걸러서 읽으면 나름 유익한 부분이 있을 책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교양 지식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누어서 쓴 글이니 만큼 무게감도 좀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1639/67/cover150/k4826366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639676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그리스도인에게 친구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5768</link><pubDate>Mon, 14 Sep 2026 14: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576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6697&TPaperId=175157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760/52/coveroff/893281669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그래서 나는 네가 어려움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네가 직면하는 어려움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된 일에 반드시 따르는 어려움이기를 바란다. 그런 어려움을 감당하려면 많은 친구가 필요할 거야. 이 세상에서 친구보다 더 귀중한 선물은 없음을 네가 발견하면 좋겠구나. 우정에는 시간이 들지.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고 믿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친구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시간을 주셨단다. 서로 친구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게 돼.<br>-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760/52/cover150/89328166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7605282</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책방에서 논문읽기</category><title>보수 교단 목사는 왜 여성차별을 연구했을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5763</link><pubDate>Mon, 14 Sep 2026 14: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576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735311&TPaperId=17515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636/85/coveroff/k812735311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837160&TPaperId=17515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03/47/coveroff/k28283716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035324&TPaperId=17515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874/76/coveroff/k832035324_3.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1792&TPaperId=17515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896/71/coveroff/893281179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2798&TPaperId=175157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492/3/coveroff/8936472798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15763'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br>“나는 여성을 차별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현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수 교단에 속한 한 목사는 여성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모르고 있던 경험들을 마주했습니다.<br>구름책방의 새 시리즈 〈책방에서 논문 읽기〉 첫 시간입니다. 논문 저자인 나연수 목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여성 포용 목회」의 서론을 읽습니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역할 분담,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관계, 차별을 개인의 의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나눕니다. 서로의 우려와 경험을 짚으며, 여성차별이 왜 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목회의 문제인지 살펴봅니다.<br><br><br>&nbsp;&nbsp;<br>&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602/49/cover150/89328179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6024919</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타</category><title>의자병에 걸린 우리에게 필요한것 - [바디 가스펠 - 순리대로 세워지는 몸의 질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09551</link><pubDate>Fri, 11 Sep 2026 14: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095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139593&TPaperId=175095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50/46/coveroff/k4021395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139593&TPaperId=175095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디 가스펠 - 순리대로 세워지는 몸의 질서</a><br/>최진수 지음 / 올포워십 / 2026년 05월<br/></td></tr></table><br/>올해 초 오른쪽 어깨에 문제가 생겼었다. 평소에는 딱히 증상이 없는데, 팔을 위로 들려고 하면 극심한 통증이 있었다. 처음엔 그냥 잠을 잘 못 잤나 하고 넘어갔는데 며칠이 지나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결국 정형외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진단 결과는 오른쪽 어깨의 회전근개염. 생전 처음 도수치료라는 것도 받아보고, 주사와 먹는 약까지 처방받았다.<br>사실 어느 정도는 나이가 들면서 안게 되는 패널티 같은 것이지만, 근골격계 질환 같은 경우는 다분히 생활 습관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당장 나부터가 깨어있는 시간 거의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의자병”에 단단히 걸려 있는 셈이다.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우리 몸의 전반적인 균형에 관해 쓰고 있다.<br><br><br><br> 사실 어느 정도 건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 나온 이야기 대부분을 (세부적인 내용까지 정확하진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균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몸을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쓰지 않으면 결국 어딘가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 문제는 정보를 아는 것과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 사이에 언제나 거리가 크다는 것.<br>저자는 단순히 건강관리법만이 아니라, 이런 신체의 균형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따라 사는 삶으로 연결시키고자 한다. 책의 곳곳에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뭐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으니까.<br>다만 책의 장르가 조금 애매하다는 느낌은 든다. 기본적으로 괜찮은 건강관리 지침서로 읽고 있는데, 반복해서 저자의 “묵상”이 튀어나오니까. 사실 그런 부분은 서문이나 1장 정도에 충분히 설명을 하고, 나머지 장에서는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을 담는 게 구성상 좋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그 묵상 부분이 특별히 깊은 통찰을 담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감도 있다.<br><br><br><br>사람이라는 게... 일단 직접 큰 통증을 겪고 보니 이런 내용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책에서는 왜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지 원인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실천할 수 있는, 또 집에서 해 볼 수 있는 간략한 운동이나 지침들이 이미지와 함께 조금만 더 실려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50/46/cover150/k4021395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50468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C. S. 루이스</category><title>사순절, 다시 만난 루이스의 문장 - [부활의 자리로 - C. S. 루이스와 함께하는 사순절 묵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02877</link><pubDate>Tue, 08 Sep 2026 15: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5028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152399&TPaperId=175028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06/79/coveroff/89531523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152399&TPaperId=175028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부활의 자리로 - C. S. 루이스와 함께하는 사순절 묵상</a><br/>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6년 01월<br/></td></tr></table><br/>두란노에서 계속 내고 있는 C. S. 루이스 선집들 중 하나다. 이번에는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부활절 시즌을 겨냥한 책으로, 40일간 매일 루이스의 다양한 책들에서 뽑아낸 글을 하나씩(일부는 두 개씩)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 두란노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한 건 아니고, 알라딘 검색을 해 보니 2017년에 나온 외서가 보인다. 10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셈.<br>일부 서간집의 내용과 루이스의 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미 홍성사에서 출판되어 있는 루이스의 저작에서 읽어봤던 글들이다. 때문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면서 이 글은 어느 책에서 온 건지 맞춰가는 재미로 시작했고, 또 대부분은 비슷하게 맞았다.<br>하지만 책을 읽어나면서 그런 ‘놀이’는 점차 잊히고 역시나 루이스의 글이구나 하면서 푹 빠져든다. 사실 두란노에서 이런 선집 시리즈를 내면서 기존의 홍성사 번역과 달리 경어체가 아닌 번역을 한 게 어색하다고 느꼈는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이번엔 좀 다른 식으로도(이제는 더 나오지 않는 새로운 글을 읽는 느낌?) 이해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br><br><br><br> 사순절에 맞춰 읽을거리를 만들다 보니, 죽음, 부활 같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글을 모은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루이스가 그런 목적으로 글을 쓴 것도 아닌지라, 정확히 그 분위기에 맞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br>또, 이런 선집의 특성상 매일 읽어가는 글들 사이에 연계라든지, 발췌한 부분 전후의 문맥을 알 수 없다는 점 등은 (시리즈 자체의)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이건 선집이라는 형식이 갖는 한계인 거고, 늘 말하지만 그 가운데서 좋은 글을 발견했다면 전체 책을 찾아 읽어보면 될 일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06/79/cover150/89531523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06791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우리는 왜 귀여움에 끌릴까? - [귀여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8672</link><pubDate>Sun, 06 Sep 2026 21: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86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033626&TPaperId=174986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898/2/coveroff/k5920336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033626&TPaperId=174986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귀여워!</a><br/>호규현 외 지음 / 인공위성82 / 2025년 11월<br/></td></tr></table><br/>제목도 그렇고 책의 판형도 딱 손바닥만 한 것이 귀엽다. 하얀 바탕에 “귀여워”라는 제목만 딱 앉혀 놓은 표지도 담대하지만, 제목의 'ㅇ' 두 개마다 귀여운 얼굴이 들어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확실히 눈길을 끄는 표지. 도대체 이 책은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 진다.<br>책은 “귀여움”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미학적, 역사적, 사회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귀여운 표지와 달리 꽤 묵직한 방향이다. 여섯 명의 저자들의 글을 담고 있는데, 귀여움이라는 주제는 공통적으로 갖되 각 저자마다 약간의 집중점이 다르다. <br><br><br> <br>물론 여러 저자가 쓴 글이니 만큼, 각 글마다의 수준이나 방향성이 제각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귀여움에 관한 미학적 분석을 시도한 첫 번째 글과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 두 번째 글이 가장 인상적이다.<br>우리가 어떤 것을 귀엽다고 느끼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제안 중 하나가 ‘킨첸슈마’라는 개념이다. 이는 몸에 비해 큰 머리, 통통한 체형과 뺨, 큰 눈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데, 마치 아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외형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에게 아이를 보호하고 돌보고자 하는 행동양식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 <br>정신영의 두 번째 글에서는 이 개념의 역사적 근원과 발전 과정을 추적해 간다. 귀여움 담론의 진원지는 일본인데, 70년대부터 대중문화 속 아이돌 가수나 만화 주인공들에게 특유의 귀엽고 순진하며 사랑스러움을 표방하는 존재들이 범람했다. “가와이이”라는 표현은 이들에 대한 찬사이자 감탄사일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인사가 되었다.<br>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를 읽어낸다. 가와이이라는 개념에는 상대가 명백한 약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1988년 중병을 앓던 일왕 히로히토에 관한 보도가 나오자 이부 10대 소녀들이 그를 ‘가와이이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데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타자를 귀여워할 수 있는 필수조건은 이쪽의 현저한 힘의 우위가 전제되었다는 것.<br>그러면서 일본 사회에서 이 개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앞서 첫 번째 글의 내용과 연결된다. 생물학적 기준에서 귀여움은 더 힘 센 존재로부터 부호를 받기 위한 절심함의 표출인데, 패전 후 일본은 그런 미숙함의 표출을 통해 절대 강자인 승전국 미국 앞에서 자진해 약자로 포지셔닝을 했다는 것. 역사적 맥락의 해석으로는 흥미로운데, 과연 정말로 일본인 개개인들이 그런 이유로 귀여움에 빠져들었을까 하는 의심은 든다.<br><br><br><br> 귀여움을 여성주의(3장)나 퀴어적 관점(5장)과 연결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다른 글들은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특유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서서 주변의 주제들을 줄 세우는 모습. 귀여움을 장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6장은 내용과는 별개로 귀여움과의 연관성이 조금은 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br>전 세계 수 억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귀여워하는 동물이 있다. 바로 고양이다. 하루에도 시시때때로 추천되는 짧은 고양이 영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간을 써버릴 때가 많다. 이건 무해한 취미가 아닌가 하며 애써 변명하지만, 아무튼 내 시간을 잡아먹는 건 사실이다.(또 각종 고양이 굿즈에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br>우리가 무엇인가를 귀여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다. 이런 게 인문학의 매력.]]></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898/2/cover150/k59203362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898022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전통교회 들어오면 숨막히고&amp;quot; 읽기</category><title> 전통이 문제일까, 소통이 문제일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7166</link><pubDate>Sun, 06 Sep 2026 07: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716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0613&TPaperId=174971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off/k76213061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교회는 왜 들어오면 숨이 막히면서도, 떠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질까요? 『전통교회, 들어오면 숨막히고 나가면 그립다』의 저자 이재면 목사와 함께 전통교회가 지닌 매력과 한계,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과 바꾸어야 할 관습에 관해 이야기합니다.​이번 1부에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 예배의 본질과 형식, 청년 세대와 장년 세대의 간극, 새가족에게 지나치게 서두르는 교회문화 등을 살펴봅니다.(1~4장) 전통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앙의 모습을 존중하면서 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대화입니다.​여러분의 교회에서 꼭 지켜야 할 전통과 이제는 바꾸어야 할 관습은 무엇인가요? 댓글로 함께 이야기해 주세요.<br><br><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150/k7621306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82858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죽음을 위한 노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5114</link><pubDate>Sat, 05 Sep 2026 0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511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72633726&TPaperId=174951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63/12/coveroff/k572633726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일본의 임종기 의료 전문가 나가오 가즈히로는, 사람들이 맛집은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선 무작정 의사에게 맡겨버린다고 꼬집었다. 정말 그렇다. 죽음을 위해 한 끼 식사 만큼의 노력도 안 하다니 한심하지 않은가?<br>-&nbsp;김이경, 『애도의 문장들』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463/12/cover150/k57263372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463122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이 달에 만난 책들</category><title>8월에 읽은 책 11권｜신앙·고전·역사·시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2213</link><pubDate>Thu, 03 Sep 2026 19: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221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7047&TPaperId=17492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9/coveroff/895379704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738380&TPaperId=17492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off/k56273838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9880064&TPaperId=17492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49/94/coveroff/893988006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99364&TPaperId=17492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06/93/coveroff/890129936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039117&TPaperId=17492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92/79/coveroff/k262039117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2213'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br>8월에는 신앙과 교회, 교육, 동양고전, 로마사, 국제정치와 성경의 역사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 11권을 읽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리, 전통교회가 바꾸어야 할 형식, 질문을 되찾아야 할 교육, 로마제국의 쇠퇴와 미중 경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함께 소개합니다.<br><br><br>&nbsp;&nbsp;<br>&nbsp;&nbsp;<br>&nbsp;&nbsp;<br>&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99/57/cover150/k932130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99579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낯선 헬라어 구문 속, 예수는 누구인가 - [에고 에이미의 은혜 - 내 존재와 삶을 채우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0557</link><pubDate>Thu, 03 Sep 2026 00: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9055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6946&TPaperId=1749055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2/9/coveroff/89537969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6946&TPaperId=1749055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에고 에이미의 은혜 - 내 존재와 삶을 채우시는 하나님</a><br/>박순용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5년 10월<br/></td></tr></table><br/>책 제목이 조금 생소할 수 있다. 특히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헬라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더욱 그럴 터. 책 제목에 쓸 정도면 이 책의 내용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이 꽤 중요하게 다뤄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란, 영어의 I am과 비슷한 용법이다. “에이미”는 영어 be동사와 유사한 에이미동사의 1인칭 단수형인데, 영어로도 어떤 문장에서 I am 이라고만 끝마치면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헬라어에서도 마찬가지다.<br>저자는(그리고 여러 학자들은) 이런 조금은 어색한 구문에서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찾아낸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하셨던 “여호와”(저자는 또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래 발음에 더 가까운 건 ‘야웨’라고 쓰는데, 애초에 이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른다는 상황에서 야웨가 더 가까운 발음이라는 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에 기억과 전승을 통해서 단어를 발음하는데, 일부에서는 ‘야웨’의 모음은 ‘그 이름’이라는 뜻의 “하 쉠”이라는 단어에서 모음을 가져다가 붙였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라는 것. “여호와”라는 단어의 의미로 추정되는 것 중 하나가 “나는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데에서 의미적 유사성이 있다는 말.<br><br><br><br>그렇게 저자는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 주장을 읽어낸다. 다만 이 주장에는 한 가지 반론도 존재하는데, 요한복음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을 말한 예수님 이외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이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자, 그가 나서서 말한다. “에고 에이미”. 번역하면 “나야(나 맞아)”다.(요 9:9) 그렇다면 이 표현이 예수님만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라는 주장이 조금 헐거워진다.<br>물론 그것(요 9:9)과는 상관없이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의 신적 주장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도 크게 무리한 주장은 아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서는 이 구분이 반복되면서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양한 모습으로 계시하셨으니까.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br>다만 책에서 빠진 설명이 하나가 있는데, “에고 에이미”라는 구문이 갖는 또 한 가지의 독특한 점은 헬라어 동사에는 애초에 성과 수가 다 포함되어 있어서, 굳이 주어(이 경우에는 “에고”)를 붙이지 않아도 뜻이 통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에이미”라고만 써도 “나는 ~이다”라는 의미가 다 있다. 여기에 굳이 1인칭 주격 대명사인 “에고”를 붙이면 이중으로 “나”를 강조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조금 의역하면 “그게 바로 나다” 정도일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그렇게 시작한다.<br><br><br><br>책은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라는 아홉 개의 본문과 저자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또 한 가지 주제를 각 장에 펼쳐서 설명한다. 리뷰 초반에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에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았지만, 책 내용 자체는 표준적이고 안정적인 해석과 적용이 담긴 설교문이라는 느낌이다. <br>사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이니”라는 연속되는 구절들은 내용도 아름답고, 깊은 교리적 진리를 담고 있어 사랑받는 본문들이다. 이런 긴 강화는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특징적 본문이다. 책은 이 본문들을 너무 어렵지 않게 잘 설명한다. 누구에게 권해 줘도 나쁘지 않을 만한 책일 것 같다는 느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2/9/cover150/89537969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92090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기독교 신앙과 과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83988</link><pubDate>Mon, 31 Aug 2026 2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8398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3602966&TPaperId=174839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150/75/coveroff/896360296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기독교 신앙은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이며 우호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우리가 (모든 면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주신 지적, 이성적 능력으로 창조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적 노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의 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br>-&nbsp;강영안, 우종학, 『대화』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150/75/cover150/89636029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150758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사람을 낚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 [사람 낚는 어부의 기술 - 토머스 보스턴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을 얻는 목회와 전도의 원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82414</link><pubDate>Mon, 31 Aug 2026 09: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824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7047&TPaperId=174824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9/coveroff/895379704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7047&TPaperId=174824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람 낚는 어부의 기술 - 토머스 보스턴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을 얻는 목회와 전도의 원리</a><br/>토머스 보스턴 지음, 아가페 편집부 옮김, 이서용 감수 / 아가페출판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이 청교도의 향기가 짙게 묻어 있는 작은 책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문체부터 내용 전개 방식까지, 마치 오래된 오크통 속에서 숙성된 황금빛 액체처럼, 진한 맛이 배어 나온다.<br>저자가 이 책에서 살피는 성경구절은 딱 하나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에서 저자는 우리(특별히 목회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 전반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가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의무이며,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을 낚는 사명과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이며 이 모든 일은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고 말한다.<br>1부에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지에 관해 길게 설명한다. 목회자의 부족함에도,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확신 어린 결론이다.<br><br><br><br>청교도 특유의 담담함이랄까, 우직함이 느껴진다. 부족하면 어떤가, 능력이 없으면 어떤가, 이 일을 맡겨주신 분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해 낼 수 있다는 말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글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시대를 살았던 청교도들은 온갖 박해와 차별과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켜왔던 이들이다. <br>사역적인 면에서도 청교도들이 그 시대의 인플루언서는 분명 아니었다. 주류는 국교회였고, 사실 사람들의 신앙의 열의도 그리 높지 않았던 시대였다. 책 속에서 이를 반영하는 구절이 나온다. “목이 터지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간절히 설교한다 해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거나 영혼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기 전에 하나님이 생을 은혜롭게 마치게 하시고 그분의 품으로 데려가신 선배 사역자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가!”<br>악전고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성령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소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라는 권고는 저자 자신에게 하는 각오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명이라는 말의 무게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던 이들의 글은 언제나 울림이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9/cover150/895379704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56098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철학/종교</category><title>폭군은 왕이 아니다, 맹자의 급진적 정치철학 - [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9135</link><pubDate>Sat, 29 Aug 2026 18: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91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738380&TPaperId=174791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off/k56273838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738380&TPaperId=174791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a><br/>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01월<br/></td></tr></table><br/>이 달에는 동양 고전을 두 권 째 손에 든다. 월초에는 논어를, 월말에는 맹자를 읽게 된다. 공자와 맹자, 뭔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주로 짧은 경구들 속 공자는 뭔가 심오하면서도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면모도 가끔 보여주는 친근한 면이 있었다면,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 시대를 말하면서도 종종 모순되는 행동(요순의, 또는 자기 자신의)을 변명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좀 보인다.<br>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공자와 맹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한계가 짙게 드리워있다는 느낌도 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상을 국정 운영에 반영해 보고자했던 정치이론가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 군자 같은 사상은 춘추시대가 저물어가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마당에 각국의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이었다. <br>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어디 산골에 틀어박혀 몇 안 되는 제자들하고만 지냈던 서생도 아니었으니, 난세일수록 인재는 더 필요한 법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맹자같은 사람들 주변에는 또 인재들이 모이는 법이라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였다.<br><br><br><br> 군자와, 인에 대한 강조는 공자와 비슷하지만, 요순, 또 우탕과 문무 등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지나친 숭배랄까, 윤색이랄까 그런 것도 좀 보인다. 어떻게든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덧칠하려는 시도. 이쯤 되면 거의 신앙인데, 문제는 누가 공자와 맹자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가가 의외로 불분명하다는 점. 일종의 유학의 신화가 아닌가 싶다.<br>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에 대한 옹호인데, 양혜왕 하편을 보면 은나라의 창업군주인 탕이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쫓아내고 왕이된 것을 가리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받고는, 걸은 인과 의를 해치는 인물이니 군주가 아닌 ‘한 사내’일 뿐이라는 논리로 이를 옹호한다. 왕이 왕 같지 않으면 내쫓아도 상관없다는, 꽤나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유학은 결코 점잖은 체 하는 샌님들의 학문이 아니었다.<br>흔히 말하는 측은지심도 여기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여기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과 사양할 줄 아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을 더해 사람의 사지처럼 반드시 가져야 하는 무엇이라고 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그릇이 안 되는데도 사양할 줄을 알지 못하는지, 그저 자리만 준다고 하면 덥석 받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예나 오늘이나 인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br>맹자는 신하된 가장 중요한 도리는, 단지 군주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간하는 것, 그리고 도무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물러서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트럼프니, 윤석렬이니 하는 무능하고 악한 지도자들 옆에 붙어서, 그저 자신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이나 일삼는 한심한 무리들은 맹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하 실격이다.<br>이 외에도 군자는 동물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구절에서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도 엿보인다. 다만 채식주의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고기는 공자님도 사랑했고, 맹자 역시 생선도 곰발바닥(!)도 좋아하는 요리 재료라고 말한다. <br><br><br><br>“맹자” 역시 다양한 번역과 버전으로 나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경우 여러 중요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대어로 번역을 했지만, 워낙 오래 전 글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해석이 붙어 있었더라면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br>사실 맹자의 시대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다 펼쳐본 인물이 누가 있을까 싶다. 시대적 한계와 상황의 제한 속에서 작은 뜻을 실현해 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터. 그래도 꽤 높은 관직도 경험해 보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공자와는 달리, 나름 큰 위기 없이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남겼다면,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은 꽤 괜찮았던 게 아닐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67/85/cover150/k56273838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678515</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무슬림 허깨비 때리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3302</link><pubDate>Wed, 26 Aug 2026 17: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330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142037&TPaperId=174733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70/coveroff/8994142037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무슬림 허깨비’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협, 즉 사회적 자원과 공적 기구들이 소수의 거대 기업체와 비즈니스 엘리트들의 손에 무더기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을 호도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자유화와 민영화의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는 유럽 연합에서,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테러, 이민, 난민을 둘러싼 불안감은 그보다 훨씬 다급한 (그러나 덜 이색적인) 쟁점들을 간과하게 만드는 유용한 수단일 뿐이다.<br>- 이언 아몬드, 『십자가 초승달 동맹』 중에서<br><br><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24/70/cover150/899414203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4707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비평적 관점에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이스라엘의 기원 - [신의 설계자들 - 이스라엘 민족의 비밀스러운 흔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1278</link><pubDate>Tue, 25 Aug 2026 18: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712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9880064&TPaperId=174712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49/94/coveroff/89398800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9880064&TPaperId=174712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신의 설계자들 - 이스라엘 민족의 비밀스러운 흔적</a><br/>이스라엘 크놀 지음, 정예중 옮김 / PCKBOOKS / 2024년 04월<br/></td></tr></table><br/>구약성경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역사를 기록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이 다층적인 배경을 가진 서로 다른 집단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고학적 발견 성과와 성경 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 독특한 상상력을 더해서 만들어 낸 민족 창시 신화다. <br>저자는 세 개의 집단을 이스라엘 민족 구성분자로 보는데, 첫 번째는 이집트 문헌에서 하비루(아비루)라고 불리던 떠돌이들이다. 저자는 이들이 BC 12세기 있었던 출애굽의 당사자들이었고, 가나안 산지에 정착하고 있던 초기 이스라엘 인들에게 뒤늦게 합류한 그룹이라고 말한다. 뒤늦게 합류했기에 따로 땅을 분배받지는 못했고 종교적 업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 출애굽의 기억은 이들을 통해 성경에 들어가게 되었다.<br>두 번째 그룹은 힉소스인들과 관계가 있다. 힉소스는 이집트 역사에서 두 번째 중간기(BC 19-16세기)의 주인공들로, 이집트 토착들을 지배했던 외래인들이다. 저자는 이들 힉소스 통치자들이 이집트를 지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요셉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이집트 토착 왕조가 힉소스 통치자들을 몰아낼 즈음 이집트 땅을 빠져나온 가나안인들이 ‘초기 이스라엘인’이라고 비정한다.<br>세 번째 그룹은 창세기에 ‘족장들’로 그려진 집단이다. 신명기 26장 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었다고 말하는데, 저자는 야곱으로 대표되는 초기 이스라엘인들이 전쟁 난민 신분으로 갈대아 우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왔다고 추정한다.(BC 13세기) 이들은 그 지역 고유의 제의의식을 가지고 내려왔고, 후에 합류한 하비루의 유일신 사상과 결합되어 이스라엘의 고유한 종교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br><br><br><br> 기존의 현대주의자들이 성경 속 이야기를 그저 신화로 치부하며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가공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그 이야기 속에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기억은 있는 그대로 정확히 기록으로 남은 것이 아니고, 일종의 편집을 거쳤다고 보기에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br>성경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퍼즐과 같은 역사적 재구성을 시도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 정도의 ‘학문적인’ 접근이라면 다분히 반종교적 성향이 짙은 학계에서도 의외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br>다만 이른바 비평적 접근이라는 것이 다분히 해석의 문제인 경우가 많아서, 같은 내용을 두고서도 학자들 사이에도 일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는 점, 고고학적 증거 역시 자칫 어떤 것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없는 것이라는 식의 ‘침묵의 증거’ 식으로 오용될 수도 있고, 책에도 언급되는 것처럼(62) 같은 증거를 두고서도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는 점 등은 이 책의 설명이 하나의 가설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기억해야 할 듯.<br>저자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복층적 구성 가설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신학적 진화 과정에 대한 가설까지 제시한다. 사실 이 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건 아니고, 오랫동안 비교종교학 등에서 주장해왔던 내용을 조금 색다르게 정리했다는 느낌.<br><br><br><br> 저자의 재구성이 퍼즐을 맞추는 듯한 지적 즐거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한된 고고학적 자료와 논쟁적인 본문 해석 위에 세워진 하나의 가설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성경의 형성 과정을 밝혀 주는 최종적인 해답이라기보다, 우리가 익숙하게 읽어 온 성경의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역사성과 신학적 의미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도전적인 책으로 읽는 편이 좋을 듯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49/94/cover150/89398800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8499440</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굳어진 신앙에 던지는 믿음의 도전 - [숨겨진 모험 - 우리가 찾아내야 할 믿음의 열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8000</link><pubDate>Sun, 23 Aug 2026 23: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80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039117&TPaperId=174680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92/79/coveroff/k2620391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039117&TPaperId=174680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숨겨진 모험 - 우리가 찾아내야 할 믿음의 열쇠</a><br/>팀 한셀 지음, 한원선 옮김 / 아르카 / 2025년 06월<br/></td></tr></table><br/>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지 30여 년이 되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생이 내성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기에(요새는 극 I형이라고 표현하더라), 다른 사람 앞에 서서 뭔가를 하는 걸 전혀 내켜 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것부터가 놀라운 변화긴 하다.<br>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어느 순간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아마도 평생 동안 우리를 지속적으로 바꾼다. 그게 신앙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봐도 핵심적인 진리체계는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어오는 형식이나, 그 믿음의 실천 양식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었다. 2세기의 기독교인들은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꽤 신기하게 바라볼 지도 모른다.<br>그런데, 막상 실제로 신앙을 갖고 살다보면 오히려 점점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생각이 굳고, 행동이 굳고,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 더 이상의 변화나 발전은 중단된 것처럼, 그 자체를 지키는 것이 신앙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너무 일찍(신앙의 변화는 평생을 두고 일어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br><br><br><br>이 책은, 우리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모험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저자는 “교회 의자가 너무나 편안해졌고 진정한 모험이 사라졌기에,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나이와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모험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아브라함은 거의 100세에 모든 것을 건 모험 길에 나섰다)<br>책의 1부에서는 이 모험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측면에서 강조를 한 뒤, 2부에서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신앙적 모험의 삶을 살 수 있을 지에 관한 실천적인 제안들을 제시한다.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우리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단계적인 지침이 도움이 된다.<br>3부는 조금 전체 맥락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기도 한데, 이른바 “섬김의 리더십”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이를 체득할 수 있는가에 관한 설명이다. 굳이 이어본다면, 앞에서 말한 모험적 신앙을 되찾았을 때 자칫 우리의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조언일 지도 모르겠다.<br><br><br><br>오랜만에 강한 도전을 받고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제는 됐다고,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접은 채로 지루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다니엘의 믿음이 그를 사자 굴로 이끌었음을 모르는 우리는, 날마다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그저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 그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한다.<br>물론 믿음의 모험은 언제나 드라마틱한 상황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늘 하던 일상을 반복하게 될 수도 있다. 믿음이 모험임을 온 몸으로 깨닫고 그 모험에 뛰어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마치 삶은 계란과 날계란이 겉으로 보면 전혀 다른 점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똑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무엇인가에 부딪혀 깨지게 되는 날 비로소 그 안에 얼마나 다른 것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br>서울국제도서전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저자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등산 도중 추락해 몸의 일부가 마비된 채로 평생을 살아가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에 대한 영감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했던 대단한 인물이다. 편한 신앙생활에 젖어서 도전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해 줄만한 책.]]></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92/79/cover150/k2620391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492794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amp;quot; 해설</category><title>종교를 지우면 정말 중립적인 사회가 될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7316</link><pubDate>Sun, 23 Aug 2026 18: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731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4673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정교분리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에 근거한 정치적 의견을 말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오스 기니스의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5장을 통해, 모든 종교적 표현을 공적인 삶에서 제거하려는 ‘벌거벗은 공적 광장’이 왜 진정한 중립이 될 수 없는지 살펴봅니다.​국가는 특정 종교나 세계관을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에게 무종교인처럼 말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을 권력의 깃발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면, 한국 교회는 공적 광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설득해야 할까요?​<br><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150/k302138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310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서두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7044</link><pubDate>Sun, 23 Aug 2026 15: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704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6611&TPaperId=174670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458/90/coveroff/893281661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br>-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중에서<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458/90/cover150/89328166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4589080</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공학자 중심의 중국, 법률가 중심의 미국 - [브레이크넥 - 변호사의 나라 미국과 엔지니어의 나라 중국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4033</link><pubDate>Fri, 21 Aug 2026 17: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640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99364&TPaperId=174640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06/93/coveroff/89012993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99364&TPaperId=174640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브레이크넥 - 변호사의 나라 미국과 엔지니어의 나라 중국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가</a><br/>댄 왕 지음, 우진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02월<br/></td></tr></table><br/>한 때는 군사력을 두고 대립을 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중국이 미국과 맞서는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빠른 발전이었다. 미국이 두 차레의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거두었을 무렵, 중국은 국공 내전과 항일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었다. 게다가 최종적인 승리자였던 마오쩌둥의 잇따른 자살골로 중국 경제는 그대로 추락하는 듯했다.<br>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어느덧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빠른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찬탄하지만, 중국의 발전 또한 그 못지않은 놀라운 속도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중 중국의 지도층이 ‘공학자들’로 구성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br>흥미롭게도 중국의 지도부는 거의 전원이 공학자들이다. 중국 경제 발전의 기점이 되었던 덩샤오핑은 8, 90년대 공학자와 기술자들을 정부의 최고위층에 대거 입성시켰다. 그 결과 2002년에는 중국 공산당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9명 전원이 공대 출신일 정도였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칭화대 공대를 졸업하고, 10년 간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다른 지도급 인물들도 다양한 기술대나 공대를 졸업하고 실제 공장 등의 현장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현 주석인 시진핑 역시 칭화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br><br><br><br><br> 국가 운영의 핵심에 위치한 사람들이 모두 공학자라는 것은 자연히 국가 운영에도 그에 따른 스타일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사실 한 나라의 경제발전은 시장경제가 아니라 이른바 “개발 독재”에서 출발한다는 건 역사적으로 이미 거의 증명된 사실이다. 중국의 공학 전공 지도자들은 마치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거침없이 설계하고, 건설한다. 그 결과가 미국의 2배에 이르는 고속도로와 일본의 20배에 달하는 고속철도, 전 세계 다른 모든 국가를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 그리고 전 세계 제품의 거의 절반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력이다.<br>물론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합의 같은 것은 그리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팬데믹 사태 당시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었다. 심지어 한 도시(라고 하지만 우리 도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최소 천 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커다란 지역이다) 전체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한 자녀 갖기 운동’이 있다.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강제 불임수술 같은 인권유린적인 조치까지 있었다. 이 정도의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은 공학자 마인드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br>반면 미국은 법률가 중심의 국가가 되어버렸다. 소송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이기도 한 만큼, 모든 것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사업은 끊임없는 소송전으로 기약 없이 지체되고, 나중에는 아예 그런 사업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든다. 대규모 공장들도 사라져버렸고, 트럼프가 갖은 협박과 위협을 하며 동맹국들을 쥐어짜더라도,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br>저자는 오늘날 미국이 절차적 정당성애 매여서 진취적 기상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에 희망이 없는 건 아닌데, 미국 역시 공학의 전통과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도, 복잡한 지하철 노선과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도 모두 미국에 있었다. 물론 이미 법조인들에게 지배되고 있는 미국 정계가 쉽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br><br><br><br> 저자는 미국과 중국 모두 자신들의 약점에 발목이 잡혔다고 말한다. 공학 중심의 나라는 통제와 간섭에 대한 집착으로 사회의 창의성을 억누를 수 있다. 체제를 비판하는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훌륭한 문화적 결과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법률가 중심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과정의 정당성에 집착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남발하는 지리한 정치적 갈등이 사회의 발전을 지체시키는 경우가 많다.<br>우리나라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까?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만 보면, 철학(김영삼), 경영학(김대중, 이명박), 법학(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 등 인문계열, 특히 그 중에서도 법학이 주가 되고 있고, 전자공학(박근혜)을 전공한 경우가 한 명 있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법학 전공자나 법조인 출신이 66명으로 20%가 약간 넘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확실히 미국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br>물론 어느 쪽 하나가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다. 경제발전과 사회적 통합은 함께 가야 할 목표들이다. 문제는 국가운영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이들이 자기 관점에서 벗어나는 발상을 할 수 있느냐 일 텐데, 이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진보계열에서는 ‘당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고, 보수계열에서는 고인 물에서 나는 썩은 내를 좀처럼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br>세계 경제가 출렁이는 시대다. 단순이 이념과 관성에 충실하게 살다간 우리부터 얻어맞고 몰락할 지도 모른다.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상황과 단기적인 대처 사이에서 현명한 결론을 찾아갈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에겐 있을까. 이건 단지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쉽진 않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06/93/cover150/89012993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06931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가장 완전한 단백질 공급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6087</link><pubDate>Mon, 17 Aug 2026 18: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608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054135&TPaperId=174560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456/92/coveroff/898405413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동물성 식품은 가장 완전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우리가 최적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아미노산을 모두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크 110그램(181cal)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양을 다른 식품으로 얻으려면 강낭콩 340그램과 쌀 한 컵 분량의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총 칼로리는 638칼로리, 탄수화물은 122그램을 먹는 꼴이다.<br>- 다이애나 로저스, 롭 울프, 『신성한 소』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456/92/cover150/89840541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4569245</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십계명을 처음 읽는 이에게 - [십계명 : 삶을 세우는 10가지 기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4941</link><pubDate>Mon, 17 Aug 2026 0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49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0805&TPaperId=174549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36/35/coveroff/k7521308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0805&TPaperId=174549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십계명 : 삶을 세우는 10가지 기준</a><br/>박준호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6년 06월<br/></td></tr></table><br/>십계명의 각 계명들을 한 장씩 다루는 짧은 책이다. 구성 상 아마도 저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했던 연속 설교문들을 엮은 게 아닌가 짐작된다.(각 계명의 적용부분에서 그런 느낌이 많이 든다.)<br>사실 내용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익히 들어왔던 설명들이고, 비유이고, 적용이다. 워낙 오래된 내용들이라, 달라진 시대에는 조금 어색하거나 살짝 흠칫 하는 내용도 보인다. <br>대표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일부만 가지고서 전체를 논한다는 비유 같은 게 그 예인데, 사실 이 이야기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예화다. 천 몇 백 년도 더 전에는 시각장애인의 부족한 관찰력을 지적하는 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이제 이런 비유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 <br>(아마도) 설교다 보니까 내용을 충분히 깊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은 된다. 하지만 이건 책이니까, 어느 정도 좀 더 깊은 조사와 고민들을 담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그런 깊이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 설교를 위한 쉬운 구성과 전개, 적용 등이 중심이다.<br><br>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이상하거나, 나쁘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십계명에 대해 처음 차근차근 공부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권해 줄 수도 있을 듯하다. 내 경우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들을 너무 여러 권 봤다는 게 평가를 좀 박하게 내리는 요인이니, 확실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평가다. 하지만 세상엔 나 말고 사람도 많고, 그 가운데는 또 이 책이 필요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36/35/cover150/k7521308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363595</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일상적이고 평범한</category><title>최근 느는 팔로워 중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2402</link><pubDate>Sat, 15 Aug 2026 17: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2402</guid><description><![CDATA[<br><br>요새 페이스북 구름책방 페이지나, 인스타그램, 유튜브 채을 새로 팔로우하는 분들 가운데 이른바 극우성향인가 싶은 분들이 좀 보인다.(최근에는 신천지 교주 옹호하는 분도 있더랬...;;;)​이제야 나의 보수성이 인정(?)받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건 사실. 역시나 최근 아바서원에서 나온 책(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으로 만든 영상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nbsp;​기독교를 공적 광장에서 완전히 배제하려는 태도와 기독교가 공적 광장을 지배하려는 태도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책인데, 순서 상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영상이 먼저 나오다 보니 우리 편(?)이구나 싶으셨던 걸까.​뭐 일단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대놓고 욕만 하지 않으면 딱히 다른 조치를 하지는 않는다.(신천지 추종자는 과감히 차단) 정치적 견해다 달라도 대화와 토론은 가능해야 한다고 보긴 하는데 물론 이게 쉬울 리는 없다. 아무튼 욕 하기 전에는 오케이.​<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5/pimg_63922412988390215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52402</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amp;quot; 읽기</category><title>예언자들은 현대 이스라엘의 행태를 지지할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9002</link><pubDate>Thu, 13 Aug 2026 19: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900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52635844&TPaperId=174490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966/30/coveroff/k252635844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성경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합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현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정착촌을 확장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권리를 의미할까요?​개리 버지의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 6장을 통해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과 말라기의 목소리를 살펴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땅을 독점하고 이웃의 집과 밭을 빼앗는 행위를 강하게 꾸짖었으며, 이방 거주민도 함께 기업을 얻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966/30/cover150/k2526358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966306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열린 마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7980</link><pubDate>Thu, 13 Aug 2026 09: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798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45514&TPaperId=174479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6/75/coveroff/8932845514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학생들에게열린 마음을 품고 진리에 대해 나름대로 결정하라고아무리 열성적으로 격려한다 해도,수업 시간이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인지벨기에의 수도인지 물어 보는 교사를 향해,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자기는 그 문제에 대해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고 응답하면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br>-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중에서<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96/75/cover150/893284551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67522</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질문으로 교실을 깨운 10년의 여정 - [365일 교과 하브루타 - 질문 중심 수업으로 바꾼 지아쌤 10년의 기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6467</link><pubDate>Wed, 12 Aug 2026 1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646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498&TPaperId=174464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81/5/coveroff/k0221304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498&TPaperId=1744646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365일 교과 하브루타 - 질문 중심 수업으로 바꾼 지아쌤 10년의 기록</a><br/>김지아 지음 / 비비투(VIVI2) / 2026년 07월<br/></td></tr></table><br/>하브루타란 고대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학습 방식을 말한다. 토라를 공부할 때 교실에 앉은 학습자에게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짝을 이루어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해당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고, 나아가 종종 굉장히 창의적인 방식의 해석까지 낳는 교육방식이다. 탈무드니 학가다니 하는 유대 고전들은 은근 이런 형태의 교육방식을 권장하는 구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br>애초에 랍비들의 가르침이란, 어느 하나의 전통을 오랫동안 물고빠는 식이 아니라, 수많은 랍비들이 앞선 의견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고 하는 거대한 해석사적 전통의 모음이다. 그래서 랍비들 사이의 의견도 꽤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기독교 내 정통주의자들처럼, 우리 선생님의 의견을 절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식의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br><br><br><br>그런데 요새는 이게 질문, 창의력 같은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학습전술로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교실에서 질문이 사라졌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 다양한 교육학자들에게서 나왔던 문제제기다.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들을 읽으면서도 자주 들었던 질문이고, 미국에서는 마일스 호튼 같은 인물이 비슷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의 교육윤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확실히 질문은 교육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br>이 책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하브루타 방식의 교육활동을 진행해 온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눈 책이다. 경험 정리 중심이다 보니,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하브루타의 정의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본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감을 잡게 되겠지만. 아마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건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두에 간략하게 설명을 넣어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br>책은 이론보다는 실제에 집중한다. 어떻게 이런 방식의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실제로 진행했을 때 아이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예상되는 어려움과 그 대처법이라든가, 지역 교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이 방식을 연구하는 지 등등. 우선은 초등교사인 독자에게 관심이 갈 만한 내용들이 주가 되지만, 그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도 분명 있을 것이다.<br><br><br><br> 개인적으로는 비단 교실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질문이 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질문이 없는 교회는 딱딱하게 굳은 돌처럼 돼서 언젠가 깨지고 말 테니까. 적어도 교실에서는 (물론 일부라고 하겠지만) 나름의 고민과 실험이 진작 시작되었다. 교회도 좀 더 분발하자.<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81/5/cover150/k0221304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81055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전통을 존중하되 새롭게 될 순 없을까 - [전통교회, 들어오면 숨 막히고 나가면 그립다 - 복음으로 다시 정의하는 전통 교회 용어 사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2570</link><pubDate>Mon, 10 Aug 2026 1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25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0613&TPaperId=174425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off/k7621306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0613&TPaperId=174425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전통교회, 들어오면 숨 막히고 나가면 그립다 - 복음으로 다시 정의하는 전통 교회 용어 사전</a><br/>이재면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6년 07월<br/></td></tr></table><br/>제목이 좀 길다. 하지만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매우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저자는 전통교회의 답답함에 관해 겪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온라인에 나누었던 것 같고, 그걸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각 장마다 말미에 해당 글에 대한 ‘댓글’들 일부가 발췌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br>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다. 예배 순서, 청년부, 새신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 봉사에 대한 압박, 교제라는 이름의 부담(누군가는 준비하고 치우고 해야 하니까), 새벽기도의 압박, 수련회을 둘러싼 고생 등이 2부에, 직분과 목회자의 복장, 설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명이라는 이름의 압박이 3부에 실려 있다. 와우, 거의 뷔페상처럼 나올 만한 것들은 다 챙겼다.<br><br><br><br> 기본적인 내용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달라진 상황에 맞게 변화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언급한 주제들은 사실 ‘진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담는 형식에 가까운 것들이니까. 상황이 달라진다면 내용을 담는 그릇도 바꿀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br>특히 저자는 예배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하는데, 이 부분은 평소 나 역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일예배 뿐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에 모이는 집회도 예배라고 불리고, 새벽마다 또 ‘새벽예배’를 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는 동시에 저녁예배도 진행하고, 365일 쉬지 않고 계속 예배를 이어간다는 걸 메인으로 자랑하는 선교단체도 있는 것으로 안다. 어디 그뿐인가, 이사예배, 개업예배, 장례예배, 신학교에 다닐 때는 무슨 교수 출판감사예배, 은퇴감사예배, 등등 온갖 사사로운 예배도 넘쳐나는 걸 봤다. 그냥 ~~식/예식이라고 부르고 기념하며 감사하면 될 일을 굳이 ‘예배’자를 갖다 붙인다. <br>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말을, 수요예배 없애면 큰일 나는 이유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것이다.(얼마 전 내 유튜브 채널에 실제로 달린 댓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나왔을 때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취해야 하는/취하게 되는 자기를 낮춤, 상대를 인정하고 경배하는 태도, 또는 상태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다. 수요예배, 주일예배 할 때 붙이는 의식이름이 아니라.<br>이른바 새벽예배는 성경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새벽에 기도했다는 몇몇 구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다가 20세기 조선의 신자들만 알았다는 의미가 된다), 20세기 초반 조선의 농경사회의 시간 단위에 맞춘 의식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의식이라도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다만 바뀐 상황으로 이제 사람을 갈아넣어야 유지되는 수준인데도 계속 고집한다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br><br><br><br> 저자는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교회’보다는 ‘과거 유지형 교회’가 되어” 간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조직이 날마다 모든 부분에서 새로운 걸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의외로 ‘안정감’이라는 요소는 조직을 유지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br>C. S. 루이스는 어떤 예배 형식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주 형식을 바꾸거나 변화를 꾀하지는 말아 달라고 쓴다. 익숙한 형식은 “훈련된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바뀌면 그런 훈련을 할 수가 없다. 사실 훈련이라는 것이 같은 작업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몸에 익히는 것이니까. 신앙은 ‘몸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br>다만 이런 안정성/보수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이 아니라, 내가 해 온 신앙 양식의 유일한 기준 됨을 고집하는 데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일탈을 겪게 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과 완전히 겹쳐진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교단 차원에서의 가이드라인은 필요하지만, 각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원만한 조율과 합의로 얼마든지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교회에게 주신 자유다.<br>물론 이런 합의가 쉽지는 않다. 책에도 저자가 교인들과 부딪히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고민이다. 목회자의 생각에 교인들의 습관을 바꿔 맞추는 게 최선일까, 아니면 그 공동체는 또 공동체대로 익숙한 방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도 자유의 일환은 아닐까.<br><br> 전반적으로 쉽게, 그리고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잘 쓴 글이다. 여기 실린 내용들이 딱히 새롭게 나온 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조금은 회의적인 예상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사실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미 쉴 새 없이 변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예배의 양식과 신앙생활의 모습도 10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굉장히 생소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단순히 옛 것을 반복하기만 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곰곰이 새기며 함께 대화를 해 보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82/85/cover150/k7621306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82858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amp;quot; 해설</category><title>“기독교를 지켜주겠다”는 정치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1282</link><pubDate>Sun, 09 Aug 2026 19: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12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4412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기독교가 정치권력과 손잡으면 기독교적 가치가 더 잘 지켜질까요?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4장을 바탕으로, 특정 종교가 공적 광장의 중심을 차지하는 ‘신성한 공적 광장’이 왜 해결책이 될 수 없는지 살펴봅니다.​오늘날 정치적 논쟁은 설득과 대화보다 조롱과 비난, 피해자 의식과 진영 대결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과 동일시되면, 정치적으로는 승리하더라도 복음의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지켜주겠다”는 권력의 약속이 어떻게 교회를 이용하고 신앙을 정치화할 수 있는지, 미국의 문화전쟁과 독일 교회의 역사적 사례를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풀어봅니다.​정치는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공적 광장에 참여하면서도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고, 적대가 아닌 설득과 사랑으로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봅니다.<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150/k302138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310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역사/인문</category><title>자동차를 타고 온 공자가 주는 교훈 - [공자의 말들 - 군자를 버린 논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1024</link><pubDate>Sun, 09 Aug 2026 17: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4410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938681&TPaperId=174410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322/48/coveroff/k17293868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938681&TPaperId=174410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공자의 말들 - 군자를 버린 논어</a><br/>임자헌 지음 / 유유 / 2024년 02월<br/></td></tr></table><br/>몇 번인가 논어를 읽어본 기억이 있다. 물론 한자를 다 읽고 이해할 수는 없으니, 우리말로 해설된 책들이다. 전주에 여행을 간 김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책도 그런 논어의 우리말 번역서다. 그런데 제목이 독특하다. “군자를 버린 논어”라니, 군자는 논어의 핵심 단어가 아닌가. 그걸 빼고 논어 읽기가 가능해?<br>언뜻 안티 논어, 혹은 논어 비틀기로 느껴지기도 하는 제목이지만, 실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다. 역자는 논어가 지나치게 어렵게만 번역되어 심각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현대어로 번역하는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 번역한 것은 아니고, 역자는 조선왕조실록 현대화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실력이 인정받은 인물.<br><br><br><br>책 전반에 걸쳐 현대적 번역이 눈에 띤다. 수레는 자동차로, ‘인(仁)’이라는 개념은 ‘사람다움’으로, 문제의 ‘군자’는 ‘지성인’ 등으로 번역된다. 말투도 ~니라 같은 예스러운 어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요(대중 앞에서), 또는 예사 낮춤(제자들에게) 등으로 바뀌어 있다.<br>예를 들어 논어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인 이인편 8절은 “아침에 내가 참답게 살 길을 깨달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지 뭐.”라고 번역되어 있다. 정말 가까운 제자들과만 있을 때, 스스럼없이 풀어놓는 속마음이라는 느낌이다. <br>역자는 모든 항목은 아니지만 일부 항목들에는 역자가 나름의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또른 단순히 자신의 감회 등을 적어놓았다. 대체로 읽을 만했는데, 일부 내용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상들이 가볍게 적혀 있다. 그런 건 일기장에 적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었지만. 대표적인 구절이 양화편의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힘들다”는 구절인데, 역자는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라는 일방적인 투정(?)을 적어놓고 넘어간다.<br><br><br><br>성경 또한 매우 자주 새로 번역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요새 읽고 있는 번역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인데, 성경 전체를 현대어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을 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딱 메시지 성경이 떠올랐다. 비슷한 취지니까.<br>리뷰를 쓰다가 “공자의 말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목차를 보니 일부 부록의 순서가 뒤에서 앞으로 옮겨진 것 같다. 논어를 케케묵은 옛날 성인들의 말씀으로 두고 멀리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좀 더 쉽고 가까이 두고 읽고 새겨보는 건 좋은 일인 듯하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언급하듯이, 사실 논어의 내용은 의외로 상식적인 내용들이 많다. 문제는 상식적인 교훈을 기적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세상이었을 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322/48/cover150/k1729386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322484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