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노란 가방의 작은 책꽂이 (노란가방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책을 읽는 게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편하죠....</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1 Jul 2026 06:51:23 +0900</lastBuildDate><image><title>노란가방</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495781142170644.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노란가방</description></image><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저출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너진 정치다 - [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5723</link><pubDate>Tue, 30 Jun 2026 20: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57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035076&TPaperId=173657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06/78/coveroff/k6920350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035076&TPaperId=173657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a><br/>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br/></td></tr></table><br/>대한민국은 유래 없는 압축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 우리가 소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br>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출생률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0.7명의 아이를 낳는 상황은 당연히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여기에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대두로 무역수지 흑자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고, 에너지 전환 이슈 역시 우리 경제에 무리를 준다. 내부적으로는 부동산 거품과 가계 부채, 그리고 내수 경기도 좀처럼 크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br>역사적인 저출생과 더불어 기록적인 자살률은 우리 시대가 얼마나 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빠른 산업화를 위해 분배나 복지는 뒤로 미뤄졌고, IMF 사태 이후로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하게 드라이브 걸면서 각자도생이, 정확히는 개인적인 무제한적 탐욕의 경쟁이 열렸다.<br><br><br><br> 저자가 내놓는 해결책의 시작은 정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할 때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창일 때를 배경으로 쓰인 이 책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대해 그리 희망을 걸지 않는다. 여야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이른바 진보정당의 정통계보를 잇던 진보당은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br>(책이 쓰일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결국 친위 쿠데타로 자멸한 윤석열 정권은 말 그대로 최악의 이익 집단이었다. 아는 것이 없이 대통령까지 된 그가 할 수 있는 건, 수족인 검사들을 온 정부 기관에 보내서 감시하고 배후조종하는 방식뿐이었다. 앞서 말한 국가적 위기 상황 앞에서, 제대로 된 대책을 내 놓은 것은 없었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었다.(그 와중에 알뜰살뜰 뇌물을 받아 챙기는 영부인까지..)<br>저자는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책이 쓰인 지 몇 년이 지난 오늘, 과연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정치가 복원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대통령이 하는 일을 막고 발목 잡는 게 지상목표인 야당(혐오가 높아질수록 지지자들도 결집한다는 학습효과가 강하게 있다)은 이제 대놓고 음모론과 선동으로 정국을 대하고 있다. 박수는 양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아마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상대가 몰락한다면 기꺼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은 썩은 정치인들이 여기에 참여할 것 같지는 않다.<br><br><br><br><br> 그럼 결국 우리 앞에 남은 길은 소멸일까? 적어도 정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럴 것 같다. 이제 우리 사회는 혐오와 저주의 문화가 초등학생 레벨에까지 깊이 퍼져가고 있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수준을 넘어, 온갖 포털(예컨대 네이버 댓글창은 이미 일베에 거의 점령된 상태다.) 사이트에서도, 심지어 고등학교 야구 경기 중 일베 구호를 외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물론 언제나 시끄러운 쪽이 좀 더 크게 대표되는 면이 있긴 하다. 이 점에서 소망을 찾아야 할까.<br>압축 성장에 뒤따르는 압축 소멸 문제를 다룬 사회학 서적인 듯했으나, 책 중반 이후 주로 정치 상황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이 다뤄진다. 다만 이런 종류의 책들이 언제나 당위는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래서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을 지에 관한 방법론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역시 현실이라는 무거운 족쇄 때문이긴 하겠지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06/78/cover150/k6920350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306785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이제 기독교의 중심은 서구가 아니다 - [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 미국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1270</link><pubDate>Mon, 29 Jun 2026 00: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12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4201&TPaperId=173612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323/11/coveroff/89328142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814201&TPaperId=173612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 미국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가?</a><br/>마크 A. 놀, 박세혁 / IVP / 2015년 07월<br/></td></tr></table><br/>저자는 현대 교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난 세기 그리스도인의 표준적인(?) 모습은 서양 백인 남성이었지만, 이제 그 비율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의 수(물론 이 가운데는 다양한 유색인종들도 포함되지만)를 합쳐도, 나머지 대륙의 그리스도인들의 수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20세기 말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그리고 책에는 빠졌지만 아시아의) 여성이다.<br>이런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의 구성원 비율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그 내용의 변화도 수반하게 된다. 기독교적 개념이 새로운 문화 속으로 번역되어 들어갈 때,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생활은 북미나 유럽의 그들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저자는 이른바 복음주의 유형의 기독교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이유를, “지금 여기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지도자를 따르겠다는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br><br><br><br> 책의 중반부는 세계 기독교에 미국교회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다룬다. 이 역시 익숙한 설명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교회의 모델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리더십을 장악하고, 일종의 영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다는 비판적 견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조금은 다른 그림을 그려준다. <br>물론 미국의 영향력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가 되어가면서 수많은 적응과 해당 지역의 자치적 리더십들, 새로운 신학적 강조점들이 나타났다. 서구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는 말이다. <br>다만 이런 인식은 큰 그림을 볼 때에 비로소 갖춰지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지역적으로는 여전히 조금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온다. 몸의 어느 지체가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미국 교회들 역시 나머지 지체들을 의존하지 않고서도 혼자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적은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도, 나아가 그 지역 내의 공동체들 안에서도 귀담아 들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br><br><br><br> 마크 놀의 글은 언제나 새로운 통찰이 있다. 여전히 미국 중심의 사고, 서구의 신학 중심의 신앙생활만을 유일한 길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신앙의 전통들(이른바 ‘신학들’)에 공헌과 유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신학은 (그것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학은 계속 발전해야 하는 무엇이고, 단순히 예전 것을 붙잡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br>보수적 신앙 공동체에서는 이런 생각 자체를 불온하게 여기는 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금과옥조로 붙잡고 있는 신학적 명제들과 예배의 방식들도 역사적 기독교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라는 게 난센스다. 결국 우리의 눈이 좀 더 큰 맥락을 보지 못하면 계속해서 그냥 익숙한 것을 최고의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br>저자의 또 다른 책 제목처럼, 우리는 “세계기독교인”으로 살아야 한다. 겸손함으로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우리가 서 있는 곳에 맞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손질을 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성경에 대한 정직한 묵상과 연구가 필요하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323/11/cover150/89328142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23119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amp;quot; 해설</category><title>종교의 자유가 무너지면 모든 자유가 흔들립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0236</link><pubDate>Sun, 28 Jun 2026 18: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6023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3602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종교의 자유는 단순히 “교회에 다닐 자유”일까요?​오스 기니스의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2장 “진정한 치료책”은 종교의 자유를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기초로 설명합니다. 저자는 종교의 자유가 종교인만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양심과 신념을 보호하는 “첫 번째 자유”라고 말합니다.​종교의 자유는 나의 신앙을 지키는 권리인 동시에, 타인의 양심을 지켜 주는 책임입니다. 기독교인은 공적 광장에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요가 아니라 설득이어야 합니다.&nbsp;​이번 영상은 종교의 자유가 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전체의 문제인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이 자유를 어떻게 성숙하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해설입니다.​<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150/k302138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310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고백자들의 군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6697</link><pubDate>Fri, 26 Jun 2026 16: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669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72031296&TPaperId=173566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91/98/coveroff/k37203129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니케아에 집결한 주교들의 다수는 동방 정제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시절에 눈이 뽑히거나 다리 힘줄이나 팔이 잘린 자들로 구성된 고백자들이었고, 6월 초 니케아에 나타나 이 “고백자들의 군대”를 이끈 총지휘관은 리키니우스를 제압한 ‘전승자’ 콘스탄티누스였다. 고백자들의 군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이집트 테베에서 참석한 주교 파프누티오스를 맞아 막시미누스의 핍박 때 뽑힌 그의 오른쪽 눈 부위에 입맞춤하며 극진한 존경을 표했다.<br>-&nbsp;곽계일, 『니케아 신경 형성기』 중에서<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191/98/cover150/k3720312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191985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창조부터 승리까지, 성경을 한 편의 이야기로 읽다 - [이야기는 힘이 세다 -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나의 자리 찾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6235</link><pubDate>Fri, 26 Jun 2026 11: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62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530602&TPaperId=173562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35/29/coveroff/89325306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530602&TPaperId=173562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야기는 힘이 세다 -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나의 자리 찾기</a><br/>폴 바스덴.짐 존슨 지음, 정효진 옮김 / 성서유니온 / 2023년 02월<br/></td></tr></table><br/>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따분하고 케케묵은 율법 모음집 정도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은 이야기책이다. 수천 년을 배경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기록한 책이 성경이다. 하지만 또 그 분량이 적지 않으니 (재미있는 책은 길수록 좋긴 하지만) 도전할 엄두가 안 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나 청소년이나 어린이라면.<br>이 책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쓰였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한 교회의 공동 창립자인 두 저자는, 성경 전체에서 여덟 개의 장면을 뽑아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창조와 축복(아브라함), 구출(출애굽), 선택(다윗), 경고(선지자들), 구원(예수 그리스도), 파송(사도행전), 승리(요한계시록)이라는 여덟 개의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사항들이다.<br><br><br><br> 번역자는 문장들을 마치 이야기하는 것 같은 문제로 번역을 했다. 이게 영어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었을까 싶었는데, 중간 중간 나오는 유머나 예화 같은 걸 보면 뉘앙스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책은 어른이 청소년/어린이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으로 읽힌다. 내용이 또 가만 보면 기독교 세계관의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면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br>사실 성경을 이야기로 보고 여기에 집중하는 책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마이클 고힌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가 함께 쓴 두 권의 책(『성경은 드라마다』, 『세계관은 이야기다』)도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고, 성경을 거대 내러티브로 보는 기독교세계관의 관점에 따르면 이런 식의 소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br>그 중에서도 이 책의 장점이라면 역시 쉬운 문체로, 내용을 전개하면서, 종종 청소년들(또는 넓게 잡으면 사회초년생 청년들까지)에게 맞는 적용과 질문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권해 줄만한 책 자체가 적은 우리나라 기독교 책 상황을 생각해 보면 꽤 반가운 일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성경읽기 운동을 하는 성서유니온에서 냈으니 더욱 안심.<br><br><br><br> 그렇다고 단지 청소년들을 위한 쉬운 버전의 성경 이야기의 소개 정도라고만 보면 안 된다. 콘셉트는 그게 맞지만, 어른들도 성경을 읽으며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만한 질문과 통찰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 차분하게, 성경의 맥을 잡아보는 독서로 좋을 듯.<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35/29/cover150/89325306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1352960</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역사/인문</category><title>무당인가, 공무원인가? 음양사의 진짜 얼굴 - [음양사 해부도감 - 이능의 힘과 지식을 지닌 신비의 존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2165</link><pubDate>Wed, 24 Jun 2026 01: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21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72837424&TPaperId=173521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438/42/coveroff/k9728374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72837424&TPaperId=173521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음양사 해부도감 - 이능의 힘과 지식을 지닌 신비의 존재</a><br/>가와이 쇼코 지음, 강영준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05월<br/></td></tr></table><br/>영화나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나름 알려져 있는 아베노 세이메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른바 “음양사”라고 불리는, 우리로 치면 무당쯤 되는 일을 하는데, 또 고위 관직에 있기도 한 조금은 이색적인 일을 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는 식신이라고 불리는 요괴를 부리고, 부적으로 저주를 내리기도 하고, 도술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는 반쯤은 신선 비슷한 느낌으로 등장하기도 하고.<br>이 책은 그 ‘음양사’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을 흥미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다. 도서관에 갔다가 다른 책을 빌리는 김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빌려온 책. 그래도 나름 역사 파트에 들어가는 책인지라, 문헌 자료에 기초해 정리한 내용이니, 일본 중세 문화를 공부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볼 만하다.<br><br><br> 가장 먼저 음양사는 공식 관료였다. 중무성에 속한 음양료라는 기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던 것. 비슷한 직책은 중국에도,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관(日官)’이라고 불렀다. 천문을 관측하고, 기상을 측정하고, 때로는 별자리 등을 통해서 일종의 운을 점치기도 했던. 점을 친다는 것을 빼면 대체로 그 당시의 과학기술관료에 가까웠는데, 또 이 점이라는 것도 약간의 우연성이 개입된다는 것을 빼면, 그 해석에 있어서는 결국 통계와 맞닿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br>원래는 주금사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주술을 전문으로 하는 좀 더 무당에 가까운 조직과 관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10세기 경 이들 주금사들이 하던 일을 점차 음양사가 흡수하게 되었다고 한다.<br>중세 일본은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끊임없이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왕은 있었으나 실권을 가진 권신들이 국정을 주물렀다. 그런 시대에 관료로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 줄을 서야 했을 것이고, 그건 음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권력다툼의 여파로 밀려나거나 목숨을 잃는 음양사들도, 반대로 권력의 지원을 받아 단숨에 최고 지위인 음양두까지 올라가는 일도 생긴다.<br>초반에 언급했던 세이메이 같은 인물이 그렇게 성공한 음양사인데, 그 후손들이 자기 가문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다분히 과장된 다양한 설화들을 만들어 냈다. 세이메이의 어머니가 하얀 여우가 변한 여자라든가,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던가, 수많은 식신들을 부렸다던가 하는 전설들이 그것.<br><br><br><br> 한편으로 왜 일본은 인근의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달리 그렇게 음양사가 중요하게 여겨졌을까 하는 의문에, 저자는 흥미로운 설명을 제안한다. 기본적으로 헤이안 시대(8세기 말~12세기 말) 일본의 정치는 유교적 사고가 바탕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교에서 천재지변은 하늘이 통치자의 잘못을 벌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게 당대의 권신들에게 부담이었던 것.<br>그래서 그들은 천재지변을 귀신이나 원령의 저주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음양사들이 필요했다. 저주는 음양사들이 나서서 제사를 하거나 다양한 조치를 취하면 해결될 일이니까. 그 책임을 최고권력자가 져야 할 필요가 사라진다는 것.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음양사라는 직책이 통치에 중요했다는 건데, 왕으로서의 책임감까지는 갖출 필요가 없었던 권신들이 선택할 만한 선택지였던 것 같다.<br>물론 이런 공식적인 음양사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나 불러서 부탁할 수 있었기에(정원도 20여 명 밖에 안 됐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비공식적인 음양사들도 활동했다고 한다. 승려이면서 음양사 노릇을 했던 일들도 있었고(법사음양사), 음양사가 하는 일들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하인들도 음양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창문사). 그러나 후자 쪽은 일종의 예능인으로, 주술성을 지닌 다양한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br>음양사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메이지 정부에서였다고 한다. 주술은 미개한 사교라고 여겼고, 또 다른 주요 업무인 달력 제작은 서양력을 가져오면서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일종의 미신이나 금기로)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일단 신사문화가 생활 속 깊이 남아 있기도 하고, 다양한 운세뽑기 등등.<br><br><br><br><br> 재미로 보기에 딱 좋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판형은 작고, 글씨는 더 작다는 점이다. 기본 본문도 여느 책에 비해 1포인트 이상 작은데, 삽화와 함께 적힌 글씨는 그보다 또 작고, 삽화 영역에 들어가는 표라도 나오면 글씨는 더 작아진다. 깨알보다 작은 글씨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 슬슬 노안이 오는 나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br>이 정도 내용을 담으려면 아예 판형을 키우던가, 페이지 수를 좀 더 늘려서 가독성을 좋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데, 그러려면 책값이 또 올라가겠지. 근데 종이도 두꺼운 걸 쓴지라.. 적당히 타협이 안 됐으려나.]]></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438/42/cover150/k9728374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438428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오남용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 - [정치에 오염된 신앙의 언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1400</link><pubDate>Tue, 23 Jun 2026 19: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514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9513&TPaperId=173514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00/51/coveroff/k0021395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9513&TPaperId=173514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치에 오염된 신앙의 언어</a><br/>권연경 외 지음 / 야다북스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이제 한국교회의 극우정치세력화를 비판하는 책 분야의 대표주자(?)라고 할 만한 야다북스에서 또 다른 책이 한 권 나왔다. 전에 관계자분을 만나서 잠깐 대화를 하기도 했는데,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게 되는 출판사랄까.<br>이번 책은 ‘단어’에 집중한다. 총 여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각 신앙과 윤리, 예언과 선동, 정교분리, 자유와 평등, 국민저항권, 극우 기독교와 근본주의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교계를 아울러 분석한다. <br>대체로 어느 정도 내용이 예측이 되는 장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주제가 있다. 최종원 교수가 정교분리의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3장과 김동춘 교수가 극우 기독교의 신학적 배경을 분석하는 6장이이다.<br><br><br><br> 최종원 교수는 미국 헌법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교분리’가 실은 국교의 부인에 가까웠으며, 이는 종교의 자유를 보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 조항은 국가에 종교에 개입하지 말고, 나아가 종교(단체)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해야만 한다는 책임을 지운다. <br>결론부에서 저자는 심지어 극우 기독교의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동일한 기준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한국 교회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주장이지만, 이제까지 야다북스에서 나온 책들의 논조와는 살짝 다른 결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었다.<br>이 부분은 최근 읽었던 오스 기니스의 책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에서 좀 더 깊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책의 결론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진실이 언제나 우리의 구미에 완전히 맞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당파성에 매몰된 극단적인 무리로 분류될 수밖에.<br><br><br><br>6장에서도 꽤 흥미로운 분석이 등장한다. 우리는 보통 극우 기독교가 대체로 신학적인 근본주의자들인 것처럼 인식해 왔다. 보수적 신학이 보수적 정치관을 낳고, 그들은 쉽게 극우로 넘어간다는 간단한 그림이다. 하지만 김동춘 교수는 이런 그림이 얼마나 단순하고 왜곡된 그림인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br>우선 이미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주의화는 상당부분 진행되었으며, 개인의 자융적인 선택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대신 교리적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극우 기독교가 확산이 근본주의적 신앙의 증거와 매칭되지 않고 있다는 것. 저자는 근본주의적 신학보다는, 기득권 세력과 결탁해 정치권력 획득을 추구하고 있는 ‘세속주의 기독교’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본다. 흥미로운 분석이다.<br>저자는 이런 세속주의적 경향이 보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진보 자유주의에서도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주로 진보적 신학을 갖고 있는 비판자들은 모든 문제를 근본주의 신학과 묶어 폐기하면 될 것처럼 주장한다. 번짓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고, 당연히 그런 비판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br>챕터 후반부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붙들고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거나, 최소한 기독교가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부분은 앞서 3장에서 논의했던 종교의 자유 영역과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이 역시 앞서 언급했던 오스 기니스의 책에서 어느 정도 논의된다.<br><br><br><br> 이번 책은 피상적인 비판을 넘어, 문제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느낌을 준다. 보통의 예상과 달리 실제는 경계선이 울퉁불퉁하고, 종종 여러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어서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낙인찍기나 정체성 정치 같은 도구들이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갈등을 악화시키는 이유다. 소위 부수적인 피해들이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 <br>사안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제나 가장 단순한 답을 붙잡기 마련이다. 내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제이고, 그들의 입을 막고 제거(혹은 공론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신앙언어의 오남용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떤 해결책이든 그리 효과가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확장된 듯한 이번 책의 일부 내용들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00/51/cover150/k0021395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00519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의사의 자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9004</link><pubDate>Mon, 22 Jun 2026 15: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900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5961955&TPaperId=173490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992/81/coveroff/896596195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br>-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992/81/cover150/89659619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9928183</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제국을 바꾼 것은 명령이 아니라 설득이었다 -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8414</link><pubDate>Mon, 22 Jun 2026 09: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84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039571&TPaperId=173484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76/91/coveroff/k9820395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039571&TPaperId=173484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하여</a><br/>피터 브라운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5년 05월<br/></td></tr></table><br/>이 책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화된 4세기와 5세기 제국 내 기독교의 위치와 영향력에 관한 짧은 세 개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 분야의 걸출한 학자이다 보니, 그 간략한 글들에도 뛰어난 통찰들이 잔뜩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통찰은 이 시기 기독교에 관한 대중적 인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게 흥미롭다.<br><br> 1부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갑작스러운 개종으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는 황제가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면서, 제국 역시 단번에(최소한 매우 빠른 시기에) 기독교화 되었다고 추정한다. 황제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기독교로 갈아타는 게 좋지 않겠는가.<br>저자는 4-5세기의 다양한 ‘보통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이런 통설이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심을 던져준다. 4세기 브리타니아(잉글랜드)에 살던 한 사람이 자신의 돈을 도둑맞은 후, 한 여신과 관련된 우물에 가서 저주를 새긴 판을 세워두었다. 그 판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자신의 돈을 훔친 사람이 ‘이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저주를 받게 해 달라는 문구를 삽입한다. 그는 최소한 그 여신이 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br>신앙이란 (신앙과 거리가 먼) 학자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손바닥 뒤집듯 같단히 바꿀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위에서 누군가 강요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심층까지 바뀌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하나의 세계관이고, 우주를 이해하는 틀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좀 더 많은 (그리고 일반적인) 자료들을 취합하면, 이 시기는 기독교적인 것들과 이교적인 것들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nbsp;<br><br><br><br>2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관용이다. 많은 수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기독교는 배타적이었지만, 고대 다신교는 관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관용적이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은 개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공동체의 법과 관습을 준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작가들이 주구장창 물고 빠는 로마의 관용은 실은 그저 ‘적당한 무관심에 입각한 통치’였을 뿐이다.(64)<br>후기 로마 제국 시기에도 이런 ‘적당한 무관심’이라는 통치 기조는 계속 이어졌다. 비록 여러 문헌들에 다른 종교와 신앙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 빈도야 말로, 이런 탄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일 지도 모른다. <br>저자는 여기에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행정력이 떨어졌던 당시 제국의 통치는 지역민들, 특히 지역의 상류층들의 광범위한 협조가 필요했는데, 그건 강압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79) 대다수 지역에서 제국의 행정은 세금을 거두는 데 집중되어 있었지, 종교문제를 강요하는데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82)<br> 3장은 ‘성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성자’는 가톨릭을 비롯한 몇몇 기독교 교파에서 말하는 ‘성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지역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 대개는 수도사들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경건한 농부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저자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으로 실감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109)<br>이런 인물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일반인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그런 ‘성자들’의 신학적 견해는 전문가들(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134)는 걸 보면, 이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br><br><br><br>요약하면 책의 내용은 이렇다. 4~5세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우위는 아직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믿도록 하지 않았고(아니, 그럴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저술가들과(주로 문헌 작성을 통해) 비공식적인 성자들(주로 일반인들과의 접촉과 감화를 통해)이 나서야만 했다. 그럼에도 곳곳에 여전히 이교적 영향력은 남아있었고, 전체적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교가 중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br>이는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독단적이고, 배타적이어서 박해를 통해 강제로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는)이 (비록 그게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해도)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애초에 관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세계에는 희미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았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태도이다.<br>또 한 편으로 기독교인들이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식은, 단순히 황제가 명령을 내리는 식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물론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수많은 (이름이 알려지거나 그렇지 못한) 이들의 오랜 “설득”과 감화가 필요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고.<br>분량도 많지 않으면서도 지적으로 흥미로운 자극을 주었던 독서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376/91/cover150/k9820395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3769163</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천국과 지옥의 이혼&amp;quot; 읽기</category><title>“네 뜻대로 되게 해주마”라는 무서운 말 |  『천국과 지옥의 이혼』 읽기 09</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7253</link><pubDate>Sun, 21 Jun 2026 18: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725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513702&TPaperId=173472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off/893651370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C. 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 9장은 이 책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질문들을 다룹니다. 왜 어떤 사람은 천국에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있을까요? 하나님은 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구해내지 않으실까요?​루이스는 자신이 스승으로 여겼던 조지 맥도널드를 작품 속에 등장시켜, 이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시도합니다.<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150/89365137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217041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미국의 빚을 코인이 해결할 수 있다고? - [더 코인 THE COIN - 스테이블코인이 이끄는 화폐 대격변의 시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5870</link><pubDate>Sat, 20 Jun 2026 2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58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563&TPaperId=173458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8/97/coveroff/k08213556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563&TPaperId=173458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더 코인 THE COIN - 스테이블코인이 이끄는 화폐 대격변의 시대</a><br/>성상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제목에 떡하니 The라는 단어를 넣은 건 자신감을 반영한 걸까? 부침은 있으나 코인 열풍이 가시지 않고 있다. 십 수 년 전 비트코인이라는 게 처음 등장했을 때, 이걸 어디에다 쓰나 싶었던 사람들 누구도 이제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현대 1비트코인의 가격은 9730만 원 정도다. 엄청나다.<br>물론 어떤 현물 자산이나 가치 표시가 된 화폐와도 연동되지 않은, 순수한 데이터일 뿐인 비트코인에 그렇게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게 정당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책 말미에 저자는 비트코인 채굴에 소요되는 에너지 등의 비용(8만~10만 달러)을 고려해 하한선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비용으로 무슨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지워지진 않는다.<br><br><br><br> 이 책의 전반부는 스테이블코인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은 둘 다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개념은 전혀 다르다. 비트코인이 채굴이라는 방식으로 복잡한 수식을 푸는 대가로 얻어진다면, 스테이블코인이란 발행액과 동일한(혹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가치의 담보를 잡고 발행되는 일종의 담보부증권과 비슷한 느낌이다.<br>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으로 운용된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은행 거래는 은행영업시간의 제한과 중앙집권적 시스템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해외 거래의 경우 며칠 씩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거의 즉시 거래를 할 수 있다. 거래 속도의 비약적인 향상이다.<br>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더 빠르고 편리해진 송금 서비스 정도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담보에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운용사는 발행한 코인의 금액 이상의 담보물을 보유해야 한다. 이 때 당연히 안정적이면서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담보로 잡아야 하는데, 담보로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이 미국 달러나 미국 국채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미국 정부가 왜 스테이블코인을 키우려고 하는지로 연결된다.<br>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는 미국은 끊임없이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 국채를 사줄 사람(국가/기업 등)이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정확히 그 금액만큼의(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국채가 팔리게 되는 셈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재정운용에 숨통이 트이게 되는 셈이다.<br>그뿐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통화의 이동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명목 GDP도 높아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부채의 실질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빚이 녹아버리는 것이다. 여러 모로 미국 정부로서는 부채질을 할 만한 도구다.<br>물론 우려스러운 면도 있다. 전통적인 재정 운용에서는 중앙은행과 재무부 등의 공식적인 기관을 통해서 어느 정도 통화에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완전히 민간에 주도권이 있다. 경제제재 같은 것을 우회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도 하는 것 같은데,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자체의 특성상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게 결국 어떤 쪽으로 흘러갈 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라는 것.<br><br><br><br> 사실 책은 칼럼형식으로 짧게 쓰인 글들을 여러 개 모아놓은 형태라서 하나씩 읽어나가기에 부담이 없다. 다만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단점. 스테이블코인이 뭔지 전혀 몰랐던 차에 그 개념과 기능을 조금은 알게 해 주었으니 나름 유익한 독서였다. 그 자체가 일종의 투자/혹은 투기인 비트코인과 달리,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의 편의성 쪽에 방점이 찍힌다. <br>그런데 그저 새로운 결제 수단처럼 보이는 스테이블코인이 국가 단위의 재정운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게 많다. 다만 책 후반으로 갈수록 애초의 주제에서 벗어나 경제 전반, 투자 같은 주제로 퍼져서 조금은 느슨해진다는 느낌도 준다. 뭐 그래도 교양으로 알아둘 만한 것이고, 스테이블코인에 관한 확장적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br>투자나 경제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양삼아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중요한 개념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언젠간 도움이 되더라.]]></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8/97/cover150/k08213556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8970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도파민 중독 시대의 기독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1000</link><pubDate>Wed, 17 Jun 2026 23: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410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039946&TPaperId=173410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41/12/coveroff/k48203994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브라이언 알쉬와 실비아 키이즈마트는 공저인 『제국과 천국』에서 오늘날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는 신은 더 이상 신전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은밀하고 더 광범위하게 삶을 지배하고 대중의 마음을 빼앗는다. 흥미와 자극만이 이 종교의 유일한 교리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의 도파민을 자극한다. 이 자극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느린 속도의 이야기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이야기에 더 이상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인간의 언어로 충분히 담아낼 수 없으며,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주일에 단 한 번 30분이라는 설교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br>-&nbsp;홍광수, 『넷플릭스가 삼켜 버린 기독교』 중에서<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41/12/cover150/k4820399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411280</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설교가 지루해졌다면, 이야기를 살려야 한다 - [스토리가 살아있는 설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8060</link><pubDate>Tue, 16 Jun 2026 14: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80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7020&TPaperId=173380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9/coveroff/89537970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3797020&TPaperId=173380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스토리가 살아있는 설교</a><br/>임도균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내가 들어본 가장 인상적인 내러티브 설교는 필리핀에서였다. 반 년 정도 머물렀던 기간 동안 몇 번 참석했던 현지 교회 예배였는데,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예배 시간에, 나이도 지긋한 해당 교회 담임목사님이 겨울에나 입을 것 같은 숄을 걸치고 등장하면서 설교가 시작되었다.<br>“나는 동방에서 온 박사입니다”로 시작했던 그 설교는 (영어로 진행되었던 탓에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도 종종 생각나곤 한다. 휙휙하는 바람소리도 (입으로) 내고,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물씬 안겨주었다.(주보에 설교의 요지를 미리 실어주는 교회여서, 영어가 좀 안 들려도, 혹은 설교 스타일 때문에 내용이 잘 안 들어와도 따라갈 수 있게 해두었다)<br><br><br><br> 이 책은 내러티브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책이다. 굳이 말하면 설교방법론, 실천신학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하면 흔히 떠오르는 주제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반해, 그게 그 것 같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어떤 본문을 가져와도 설교자의 스타일로 재가공되어 나오는, 레토르트식품 같은 느낌이 있다.<br>반면 내러티브 설교는 본문의 생생함을 전달하는 데 강점을 가지고 있다. 듣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주제식 설교가 조금 건조하고 딱딱한 강의 같다는 느낌을 준다면, 내러티브 설교는 청중의 흥미를 좀 더 자극한다. 사실 복음서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설교는 대개 이야기방식이기도 하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 중 하나다.<br>다만 내러티브 설교를 잘 못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남은 게 없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내러티브 설교를 준비할 때 단순히 이야기 구연이 아니라, 철저한 설계와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의 후반부는 열 가지 단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 과정을 연습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뭐든 차근차근 가르치려면 이런 식의 구분 동작이 필요하긴 한데,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놓으면 살짝 부담스러운 감이 있긴 하다. 마치 수영의 구분동작을 하나씩 글로 적어놓은 느낌이랄까.(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br>내러티브 설교가 무엇인지, 그 필요성과 장점을 장황하게 쓰는 대신, 실제로 어떻게 하면 당장 준비해 볼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면이 좋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라면 차근차근 연습해 보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두 달 정도(대략 8회의 설교) 해 보면 감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br><br><br><br> 사실 내러티브 설교의 가장 어려운 점은, 실제로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원고는 어찌어찌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강단 위에서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뭔가 어색하고, 좀 간질거리고 그런 느낌이 들게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조금은 엄숙해 보이는 목사의 이미지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테니까.<br>학창 시절 채플 시간에 내러티브 방식의 설교를 하셨던 설교학 교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도 ‘이거다!’라는 느낌은 못 받았었다. 생각해 보면 초반에 언급했던 필리핀 목사님의 설교와 크게 다른 방식이 아니었는데도, 왠지 한국어로 그렇게 하는 건 어색하게 느껴진다. 물론 내러티브 설교라고 해서 하나같이 구연동화나 스킷 드라마처럼 하는 건 아니다. 설교의 진행 방식과 설명 방식의 문제인데, 그걸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또 회중과 교회의 분위기에 맞게) 잘 녹여내는 건 시행착오와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br>개인적으로 내러티브 형식의 설교를 좋아한다. 가장 중요한 건 회중을 성경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고, 여기에 이 형식이 꽤나 좋은 효과를 가져오니 말이다. 물론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와 평소 풍부한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쌓기, 그리고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훈련은 필수적이다. <br>책에 나오는 10가지 단계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게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고 귀찮을 수도 있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 원리들을 자유롭게 녹여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한 번쯤 정독하며 연습해 볼 만한 책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9/cover150/89537970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363983</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돈을 모을 수 있는 태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7050</link><pubDate>Mon, 15 Jun 2026 22: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705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6057262&TPaperId=173370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682/6/coveroff/894605726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돈을 모아봐야 어차피 적은 돈이라서 소용없다’와 같은 말이 앞으로 청년 솔로들의 주머니를 노리면서 점점 퍼질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인간의 매력이 통장에서 나오게 되는 시기가 온다면 어쩔 것인가? 돈 자체가 매력이 아니라, 돈을 모아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매력인 것이다.<br>-&nbsp;&nbsp;우석훈, 『솔로계급의 경제학』 중에서<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682/6/cover150/89460572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6820683</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단숨에 읽어버린 정통 변증서 -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5832</link><pubDate>Mon, 15 Jun 2026 10: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583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534033&TPaperId=1733583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917/93/coveroff/k9425340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534033&TPaperId=1733583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a><br/>폴 챔벌레인 지음, 김희진 옮김 / 소망 / 2019년 01월<br/></td></tr></table><br/>오랜만에 정통 변증론을 읽어본다. 기독교인, 무신론자, 진화론자, 인본주의자, 상대주의자라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기묘한 초청장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인다.(이 콘셉트는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본 듯하다) 그런데 하필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도덕과 윤리(정확히는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다.<br>몇 주간에 걸친 정기적인 만남 과정에서, 차근차근 각자의 주장들이 논파된다.(대화는 기독교인이자 아마도 논리학이나 윤리학 교수로 보이는 ‘테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도덕이 주관적일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지적되고, 그 도덕성은 단순한 합의나 사회적 계약, 또는 진화의 결과물로 세워질 수 없음이 드러난다.<br>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테드는 도덕의 기초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한다. 당연히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들 투성이였지만, 테드는 단순히 신앙을 가지라는 게 아닌, 이제까지 해 왔던 것과 같은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으로서 유신론을 고려해 보라고 설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br><br><br><br> 사실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매우 건조(?)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윤리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오히려 그런 ‘밀도’가 딱 내 취향에 맞았던 걸지도.<br>책을 읽는 내내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1부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동일한 작업을 70여 년 전 루이스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BBC 라디오 방송으로 시도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보면, 이 논의가 할 일 없는 이들의 시간 때우기 토론 정도가 아니라는 것, 죽음의 위협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어쩌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br><br><br><br>책에 실려 있는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다. 물론 책 속에 묘사되는 방식의 대화가 실제 생활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대개는 자신의 전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문제는 책에서처럼 “끝까지” 생각을 밀어붙이지 못하니 자신이 가진 생각의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변증의 효용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br>다만 변증이라는 건 오히려 일상 가운데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대화를 통해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알아둬야 한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함께 읽고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괜찮지 않을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917/93/cover150/k9425340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917938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문학/에세이</category><title>되살아난 한 남자가 깨달은 삶의 무게 - [공백을 채워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4746</link><pubDate>Sun, 14 Jun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47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1992&TPaperId=173347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39/27/coveroff/89546519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1992&TPaperId=173347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공백을 채워라</a><br/>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07월<br/></td></tr></table><br/>머리를 식히기 위해 늘 찾는 작가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주인공. 이번에도 동네 도서관에 가서 가볍게 그의 책을 빌려왔다(아니 빌려온 줄 알았다). 작가가 이번에도 꽤 흥미로운 주제를 물었구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고 나서 리뷰를 쓰려고 봤는데, 엇?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닌데?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 이름이 다르다. 이렇게 ‘히’와 ‘게’로 나를 혼동시킨 건가 싶지만... 뭐 김성훈이라고 분명히 썼는데 내 이름으로 착각하는 건 전적으로 읽은 사람의 잘못이다.<br>작가의 이름이 히가시노 게이고든, 히라노 게이치로든 중요한 건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 이름도 제대로 몰랐으니) 당연히 정보가 전혀 없이 펴든 소설은 매우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다. 그런데 의사와의 대화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작가는 단도직입적으로 첫 수를 찔러 들어온다. 주인공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것도 3년 만에.<br><br><br><br> 자 이렇게 되면 소설의 장르가 또 궁금해진다. 이건 미스터리, 혹은 호러인가? 하지만 안심하자. 전혀 그런 분위기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물론 죽을 당시의 기억이 없었던 주인공은, 자신이 자살한 것 같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극구 부정하면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나름 추적해 가기 시작한다.<br>그러나 소설의 좀 더 중요한 무대는 주인공 데쓰오의 집이다. 지난 3년 동안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온 아내 지카와의 관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주인공을 키워온 어머니, 그리고 지카와 그녀의 부모님(주인공의 장인 장모) 사이의 관계까지. 그러니까 작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 당사자 주변의 여러 관계들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br>지카는 남편의 죽음(자살)이 자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마음속에 큰 돌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일찍 남편을 잃은 데쓰오의 어머니는 또 다시 아들마저 잃고서 (티를 내지는 않지만) 큰 충격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며느리인 지카와의 관계를 삐걱거리게 만들었고. 사람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인 것 같다. <br>전국(아니 전 세계)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그들이 모여서 협력단체를 만들고, 당연히 그들을 의심스럽게 보고 나아가 혐오하는 이들까지 출현하면서 잠시 장르가 사회물로 가나 싶었지만, 작가는 다시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한다. 적어도 외부적인 위협은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자신의 죽음의 진실과, 그의 정신을 계속해서 헤집는 경비원 사에키(그의 말은 글로 읽는 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다)와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반전.<br><br><br><br> 결말부의 시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갑자기 살아난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건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 것이다. <br>이제까지 자신의 죽음에 관해 누군가의 탓을 하려고(원인을 찾으려고) 애썼던 테츠오는 비로소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를 진심으로 후회한다. 다시 살아와 보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더욱 실감했달까. 우리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 같다. <br>기발한 소재를 재로 삼아 우리의 (평범해 보이는)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괜찮은 작품을 써냈다. 이 작가도 기억해 둬야겠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39/27/cover150/89546519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4392714</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amp;quot; 해설</category><title>이미 문화전쟁은 시작됐습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4583</link><pubDate>Sun, 14 Jun 2026 20: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3458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3345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정치와 종교는 왜 이렇게 쉽게 위험한 관계가 될까요?<br>오스 기니스의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1장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계”는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의를 지키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서로의 가장 깊은 신념, 종교, 이념, 세계관이 다를 때 우리는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br>이번 영상에서는 1장의 핵심 내용 가운데 “미국인이 직면한 다섯 가지 도전”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깊은 종교적·이념적 차이와 더불어 사는 문제, 세속화 이론의 한계, 글로벌 공적 광장의 등장, 문화전쟁으로 흔들리는 미국의 모델, 그리고 종교와 공공생활의 새로운 분수령을 차례로 해설합니다.<br>이 책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쓰였지만, 그 문제의식은 오늘 대한민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진영화,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종교와 비종교의 긴장, 그리고 유튜브와 SNS에서 증폭되는 조롱과 혐오의 언어는 우리 사회의 공적 광장도 점점 약화시키고 있습니다.<br>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공적 광장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신앙의 확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양심과 자유를 존중하는 길은 가능할까요? 이 영상은 그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한 해설입니다.<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150/k302138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310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로마인 이야기&amp;quot; 읽기</category><title> 기독교를 지우려 한 황제, 율리아누스는 왜 실패했을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9265</link><pubDate>Thu, 11 Jun 2026 19: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926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54876&TPaperId=173292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1/91/coveroff/8935654876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율리아누스는 24살에 부제가 되어 갈리아 방어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단독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이후 강화되던 기독교 우대 정책을 되돌리고, 로마의 전통 이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그는 과연 정말 ‘배교자’였을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이교도 황제’였을까요? 또 그의 행정개혁과 종교개혁은 왜 현실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요?​이번 영상에서는 율리아누스의 개혁, 이교 부흥책, 안티오키아에서의 충돌, 페르시아 원정과 죽음까지 살펴보며, 한 황제의 이상이 현실 정치와 종교 지형 앞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이야기합니다.<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1/91/cover150/893565487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1915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해석학적 우상숭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5502</link><pubDate>Tue, 09 Jun 2026 17: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550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934849&TPaperId=173255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35/87/coveroff/k81293484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큰소리쳐 놓고는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나의 정략적 사설을 늘어놓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교회의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관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 있는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목적으로 써먹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일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실제 해석의 과정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해석학적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br>- 권연경,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에서<br><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35/87/cover150/k8129348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35877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천국과 지옥의 이혼&amp;quot; 읽기</category><title>수치심 때문에 천국에서 도망친다고? |『천국과 지옥의 이혼』 읽기 08</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1980</link><pubDate>Sun, 07 Jun 2026 19: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198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513702&TPaperId=173219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off/893651370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이번 장에서는 천국의 길 앞에서 계속 도망치려는 한 유령이 등장합니다. 그녀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고통 자체라기보다, 자신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루이스는 이 장면을 통해 수치심, 자기집착, 사생활에 대한 집착, 그리고 회피의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수치심은 피하려고 할수록 더 뜨거워지고,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오히려 우리를 회복시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150/89365137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217041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2세기 교회, 모든 것이 결정되던 갈림길 - [기로에 선 기독교 - 2세기 기독교는 어떻게 교회의 미래를 형성했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0733</link><pubDate>Sat, 06 Jun 2026 2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207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9396&TPaperId=173207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43/2/coveroff/k0221393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9396&TPaperId=173207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로에 선 기독교 - 2세기 기독교는 어떻게 교회의 미래를 형성했는가</a><br/>마이클 J. 크루거 지음, 송동민 옮김 / 너머서 / 2026년 06월<br/></td></tr></table><br/>“기로”란 우리말로 갈림길을 말한다. 몇 개의 길이 교차되어서 선택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 갈림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2세기 기독교의 상황이 꼭 그랬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발흥한 1세기와 사실상 로마의 공식종교가 되었던 4세기 사이의 시기에, 그 중에서도 2세기에 집중한다.<br>저자가 보는 2세기는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아직 기독교가 공인되려면 200년은 더 기다려야 했던 이 시기, 물론 여러 면에 있어서 아직 공고한 체계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이후 보이는 교회 내 다양한 요소들이 어느 정도 형성되던 시대라는 것.<br><br><br><br> 책의 첫 두 장에서는 당시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위치(사회적 하층민들이 많았지만, 일부는 잘 교육받은 상류층이었고, 여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다가왔을 기독교의 내용(기존 로마의 종교와 전혀 다른, 사회의 안정성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운동이라는)을 설명한다.<br>본격적으로 내용이 흥미로워지는 건 3장부터다. 3장에서는 2세기 당시 교회의 리더십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저자는 여전히 강한 이교문화(당시 로마는 최전성기였다) 속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교회들은 여러 크기와 형태로 가정교회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로 존재했고, 어느 지역의 지도자도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특별히 더 우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개별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매우 빈번한 소통이 있었다.(이 점은 오늘날 교회들도 좀 배웠으면 하는 부분이다)<br>4장과 5장에서는 이단과 정통의 문제를 다룬다. 이단과 정통은 단지 힘겨루기에서 이긴 쪽이 멋대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새 유행하는 수정주의적) 얄팍한 주장의 부족한 근거를 지적하면서, 이미 이 시기 어느 정도 교회들 사이에 공유되는 핵심적 교리들이 정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br>6장과 7장은 당시 교회의 특징 중 하나인 텍스트 중심의 문화 부분을 되짚어 보는 내용이다. 의례 중심이었던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경을 포함한) 다양한 문서들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동시에 새로운 종교적 문서들을 많이 생산해 냈다는 내용.<br><br><br><br> 다분히 학자다운 겸손함으로, 이 책이 개론서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적인 주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책은 2세기 지중해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관해 좋은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특히나 2세기 중심으로 그 전후의 다양한 1차 사료들을 풍성하게 이용하면서 학문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결과물을 보여준다.<br>특히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4장과 5장이었다. 역사학계 전반에 수정주의적 견해가 유행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관련해서도 무조건 통설을 뒤집는 신박한 주장을 하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이다. 특히나 일부에서는 반기독교 정서와 연결되어서 오늘날 정통으로 여겨지는 쪽을 깎아내리는 주장으로 전용되기도 한다.<br>저자는 정통과 이단의 기준 자체가 없었다는 나이브한 주장을 차근차근 반박하면서 당시 실제의 상황을 논리적 정합성을 갖춰 재구성해 낸다. 온통 구성주의에 기초한 파괴적 창의성이 남발하는 이 바닥에서 간만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43/2/cover150/k0221393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430288</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정치 환멸의 결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8424</link><pubDate>Fri, 05 Jun 2026 15: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842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936451&TPaperId=173184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71/46/coveroff/k09293645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이제 차분히 물어야겠지요. 정치 환멸이 퍼질 때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혹 그들이 정치 환멸을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를. 아울러 그 결과까지 종종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멀리할 때 결국 특권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되는 상황을 맞게 되니까요. 정치는 우리의 무시에 반드시 보복하거든요. '정치 무시의 정치'랄까요.<br>-&nbsp;손석춘, 『손석춘 교수의 민주주의 특강』 중에서<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71/46/cover150/k0929364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714642</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그래서 우린 어떻게 혐오를 몰아낼 수 있을까 -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7276</link><pubDate>Thu, 04 Jun 2026 2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72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7315&TPaperId=173172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0/43/coveroff/k8721373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7315&TPaperId=173172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a><br/>기윤실 기독교윤리연구소 엮음 / 야다북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기윤실에서 윤리연구소라는 것을 운영하는가 보다. 그리고 연구소니까 정기적으로 연구의 결과물들을 일종의 논집 비슷하게 출간하는 것 같고. 이 책은 그 시리스의 세 번째라고 한다. 앞서의 두 권은 기윤실에서 자체적으로 냈고, 이번 책은 야다북스에서 출간한 모양.<br>이번 책의 주제는 “환대”다. 여덟 명의 저자들이 한 챕터씩을 맡아 같은 주제 아래 쓴 글을 모았는데, 대부분이 현직 교수들이고, 작가와 목사도 보인다. 교수진의 전공과목들은 철학, 인문학, 스포츠청소년지도학(이분은 청소년에 관한 글을 쓰셨다) 등으로 다양하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AI나 청소년정책, 심지어 영화 속 이주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동양사상 속 환대의 의미까지 꽤 다양하다. 말 그대로 문집 느낌.<br><br><br><br> 왜 “환대”일까 하는 질문의 대답은 너무나 쉽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대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기를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잠시 누군가 물을 뿌리면 뭉치는 것 같지만, 그나마 금세 건조한 바람에 날아가고 만다. <br>거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갈등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즈음(사실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지만) 교회도 이 문화전쟁에 참여해서 혐오를 확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조각내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세상의 갈등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지만, 교회가 이래도 되는지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개혁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br>다만 이 책이 구체적인 제안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청소년 정책을 다룬 5장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내용들이 주가 된다. 레비나스의 이론에서,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서 환대의 개념을 이끌어 내는 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힘을 더해줄까? 사실 각각의 글들 자체에도 실천적인 내용들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이제까지 읽어왔던 야다북스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결이랄까. 그리고 전체로 놓고 보면 환대라는 주제로 간신히 묶어놨구나 하는 느낌도 준다. <br><br><br><br>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봤던 건 영화 “미씽”을 소재로 해서 한국사회의 이주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6장이다.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추천하는 영화 목록에 넣어둘 정도로 좋은 작품인데(동명의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2026년에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새삼 반갑다.(영화는 2016년에 개봉했다) <br>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것 같다. 오히려 최근에는 2, 30대를 중심으로 혐중정서가 더욱 극성인 걸 보면 가까운 미래에도 우린 이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도 하고(젊은 세대의 극우화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조만간 우리 사회의 폭탄으로 작용할 것 같다).<br>주제 의식도 분명하고, 적절한 예시와, 실천적인 적용과 성경적 연결까지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글이었는데, 다른 글들도 이 정도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0/43/cover150/k8721373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6043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이 달에 만난 책들</category><title>상반기 베스트 후보 등장! | 2026년 5월에 만난 13권의 책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6960</link><pubDate>Thu, 04 Jun 2026 18: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696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4144&TPaperId=17316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55/11/coveroff/k26293414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316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535195&TPaperId=17316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865/34/coveroff/k632535195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035974&TPaperId=17316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02/15/coveroff/k76203597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030080&TPaperId=173169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655/50/coveroff/k222030080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6960'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br><br>■ 지난 5월에 만난 책들을 영상 하나로 총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직 한 달이 남긴 했지만, 어쩌면 상반기 베스트인 책을 만난 것 같기도 하네요.​■ 여러분은 어떤 책을 읽어보고 싶으신가요?<br><br><br>&nbsp;&nbsp;<br>&nbsp;&nbsp;<br>&nbsp;&nbsp;<br>&nbsp;&nbsp;<br> <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45/0/cover150/89537967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45001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사회/정치/경제</category><title>그 사과는 왜 진정성 없어 보였을까 -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2840</link><pubDate>Tue, 02 Jun 2026 12: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28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4144&TPaperId=1731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55/11/coveroff/k2629341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4144&TPaperId=173128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a><br/>에밀리 부틀 지음, 이진 옮김 / 푸른숲 / 2024년 11월<br/></td></tr></table><br/>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커피 체인에서 멍청한 광고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불매운동으로 매출도 꽤 줄어든 것 같고, 보다 심각하게는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워낙에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중은 더욱 의심을 하고 있다.<br>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건이 잠잠해지지 않자, 마침내 일주일도 더 지나서 회장이 공개석상에 나와 사과문을 읽었다.(대체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번에는 사과문의 내용도 지적을 당한다. 미안하기는 한데, 이 문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도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그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br><br><br><br>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과연 이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일까? 이 책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br>진정성이라는 무엇일까? 오늘날 이 단어는 각자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라”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라면 앞서 언급한 회장도 나름의 진실성/진정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온 것이다. 최소한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평소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으니까. <br>서문에서 저자는 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진정성 이전에는 성실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애초에 진정성이란 그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br>책은 이 진정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영역에서 얼마나 오염되고, 제멋대로 생각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셀럽 문화의 중심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그놈의 “킴 카다시안”!)과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기이한 반응들을 읽다 보면 이 진정성이 얼마나 많은 정의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br><br><br><br> 그러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진정성”이란, 결국 그냥 그가 우리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그 ‘우리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 한 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던 다양한 “제품들”(책에는 힙스터들의 아이템이 언급된다)은 시간이 지나면 또 그저 촌스러운 무엇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변덕스러움은 또 다른 증거이고.<br>물론 이렇게 보면 ‘진정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책에는 그런 뉘앙스가 좀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건 앞서 언급했듯, 진정성을 그저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모호하게 정의하는 현대적 견해에 따른 것이지, 진정성을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와 행동으로 보는 좀 더 오래된 전통적 견해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br>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진정성을 정의하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처럼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책에는 꽤 흥미로운 예시들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문화적 도용”, “성 정체성” 같은 것들. 애초에 이민 2, 3세대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화적 유산과의 유대는 이미 빈약해진 상황인데도 누군가 자신들이 전유하는 문화적 양식을 조금 따라한다고 도용 운운하며 비난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 <br>진정성이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어야지, 서로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켜 대립과 싸움만 일으키는 데 사용된다면,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그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가 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진정성 논의를 의미 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도를 넘는 태도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55/11/cover150/k2629341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551155</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기독교</category><title>혐오의 시대, 교회는 어느 광장에 서야 하는가 -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 다원주의 사회와 시민교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1141</link><pubDate>Mon, 01 Jun 2026 14: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111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3111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off/k3021384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8407&TPaperId=173111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 다원주의 사회와 시민교양</a><br/>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26년 05월<br/></td></tr></table><br/>오늘날 우리는 대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고 거의 전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난투극이다. 어쩌면 이미 제3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세 번째 대전쟁은 앞서의 두 전쟁과 양상이 다르다. 이전의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연합끼리 맞부딪혔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은 국가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br>사실 국가 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맹렬하게 대립하는 일은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 되어 온 일이긴 하다. 일부의 투쟁은 종종 내전이라고 불리며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무력을 사용한 대립은 일종의 대화이기도 했다. 대화가 끝나면 어쨌든 상황은 수습되었으니까.<br>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쟁은 도무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전 시대의 큰 진영들 사이의 대립은 조금 누그러진 듯하지만, 이제는 수도 없이 세분화된 수많은 정체성들이 각각의 참호를 파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리한 참호전을 벌이고 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깊이도 함께 깊이 패인 상황이다. 정치적 견해와 인종과 성별을 비롯한 수많은 차이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br><br><br><br> 이 책은 이런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소명”으로 유명한 저자 오스 기니스는 40여 년 간 살아온 미국 사회를 갈라지게 한 다양한 요소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갈등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유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논지의 중심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설정이 놓여있다.<br>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지만, 저자는 미국의 헌법 정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특히나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서 프랑스와 영국의 해결책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교회의 문에 못을 박아 매장하려 했고, 영국은 국가교회의 형태로 종교를 남겨두었으나 매우 제한된 형태의 의식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에서 교회는 정치에 종속되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도리어 종교의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br>문제는 오늘날 이런 미국 헌법의 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양편의 공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 편에서는 세속주의에 기반해 국가와 교회를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내지는 아예 종교의 영역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다시 한 번 교회와 국가(권력)의 일체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문화전쟁을 통해 서로를 맹렬하게 비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중이다.<br>저자는 양측의 주장의 연원과 현실을 충분히 살핀 후, 현재 양 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성한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밀착)’과 ‘벌거벗은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극단적 분리)’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양심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된 종교의 자유(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시민교양에 기초한 공적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br><br><br><br>양면 전쟁은 가장 어려운 전쟁 유형 중 하나다. 어지간한 강대국도 양면에서 강한 적과 마주하는 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힘든 전장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C. S. 루이스도 그의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딜레마다. 한 쪽을 상대하는 것도 벅찬 데, 이 쪽에 대응하다 보면 저쪽 편이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라 치열한 진영논리 속에서 고립되기 십상이다.<br>문제는 이런 입장이 언제나 두루뭉술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꼭 혼란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주장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끄는 법이니까. 그러나 극단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는다. 트럼프로 노골화된 미국의 문화전쟁이 민간인을 향한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무장 사병집단(ICE)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지난 친위쿠데타 사건을 겪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br>둘 다 단순히 똘아이 같은 대통령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광장을,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가 아니라,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자기주장만 되뇌는 집회장으로만 인식하는 강력한 집단적(이 쪽이나, 저 쪽이나) 사고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결국 돈과 권력이 있다.<br>확실한 건 우리의 광장에 필요한 건 거대한 돌덩이로 총 든 형상을 세우는 게 아니라,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지방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는 이 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코 낙관할 수 없을 것 같다. 온라인에 가득한 혐오는, 이제 누구도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나와 다른 진영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광장을 회복할 수 있을까.<br>저자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의 배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상황을 분석하고 풀어낸다. 훌륭한 솜씨다. 몇 번은 다시 읽으며 책 속의 논리를 깊히 익히고 싶은 책. 상반기 읽은 책 중에 베스트.<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3/10/cover150/k3021384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31016</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이 책을 소개합니다</category><title>성경 한 권 들고 조선을 누빈 여성들 (전도부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08715</link><pubDate>Sun, 31 May 2026 20: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0871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72730786&TPaperId=173087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673/88/coveroff/k97273078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전도부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오늘 소개할 책 《전도부인》은 한국교회 초기에 복음을 전했던 여성 사역자들의 잊힌 역사를 복원한 책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강단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남성 선교사와 목회자가 들어갈 수 없던 조선의 안방과 삶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갔습니다.​우리는 더 많은 정보와 시스템을 가졌지만, 과연 더 복음적으로 움직이고 있을까요? 성경 한 권 들고 사람을 찾아갔던 전도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체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673/88/cover150/k9727307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6738840</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로마인 이야기&amp;quot; 읽기</category><title>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 황실에 분 피바람 |『로마인 이야기』 읽기 (14-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02516</link><pubDate>Thu, 28 May 2026 2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30251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54876&TPaperId=173025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1/91/coveroff/8935654876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 제국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휘말립니다.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나누어졌던 제국은 곧 숙청과 반란, 내전 속에서 콘스탄티우스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하지만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촌, 젊은 철학도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합니다. 훗날 ‘배교자 율리아누스’라 불리게 될 인물의 등장이었습니다.<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1/91/cover150/893565487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19151</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좋은 글귀, 말귀</category><title>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299399</link><pubDate>Wed, 27 May 2026 09: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29939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513508&TPaperId=172993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617/69/coveroff/893651350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즉,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충만함과 빈곤함, 최고 권력과 비천한 신분, 정의와 회개, 무한한 능력과 도움의 호소만큼 서로 닮지 않은 것들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br>-&nbsp;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중에서<br><br><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617/69/cover150/893651350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6176947</link></image></item><item><author>노란가방</author><category>&amp;quot;천국과 지옥의 이혼&amp;quot; 읽기</category><title>유튜브로 다 안다고 착각하는 세대 | C. 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 읽기 07</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294827</link><pubDate>Sun, 24 May 2026 19: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9578114/1729482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513702&TPaperId=172948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off/893651370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C. 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 7장에서는 “다 해봤다”고 말하는 냉소적인 유령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도, 피라미드도, 타지마할도 보았지만 모든 것을 “별거 없다”고 말합니다.​문제는 그가 많은 것을 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것도 깊이 바라보지 못하고, 어떤 아름다움에도 머물지 못하며, 어떤 차이와 경이도 기뻐하지 못합니다. 결국 천국 앞에서도 그는 감탄하지 못합니다.​우리는 정말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요?아니면 대충 훑어보고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걸까요?<br><br><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217/4/cover150/89365137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217041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