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컨슈머 -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J. B. 매키넌 지음, 김하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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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책의 장르나 내용에 대한 예상이 틀렸다.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는 부제 때문이기도 했는데, 애초에 짐작하기로는 현실 경제에서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경제학, 혹은 경영학 차원에서 분석한 내용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은 디컨슈머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더러 디컨슈머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를 어필하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던 또 하나의 포인트는 이 책을 낸 출판사가 “문학동네”라는 것. 내가 아는 그 “문학동네”가 맞는 건가? 뭐 “문학동네”에서 늘 문학만 내라는 법은 없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발견한 출판사명을 보고 살짝 웃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당위”를 주장한다. 우리는 지금 하는 것처럼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있어서, 더 이상 지구의 환경과 자원이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 부분은 직관적으로도 쉽게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회가 선택한 경제구조가 이런 과소비를 바탕으로 쌓아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비가 GDP(물론 이 의심스러운 계산수치는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를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누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지나가던 사람을 칼로 찌르고, 키우던 반려동물을 잔혹하게 죽인다고 해도 GDP는 올라간다. 그 때마다 우리는 새 유리창을 사고, 치료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하고, 새로운 동물을 살 테니까.

 

저자 역시 이런 우려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동의한다. 분명 디컨슈머가 늘어나면 경제는 침체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그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물론 경제의 성장률은 지금보다 떨어지겠지만,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장률은 거의 0에 수렴했었다. 우리는 그래도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소비에 중독된 채 불태워버리던 시간이, 이제는 좀 다른 일들을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잇고, 우리의 생활에 여유를 더해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어지간히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는, 당장 이 책의 조언처럼 소비를 줄인다면 꽤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열 개가 넘는 화장품을 화장대에 놓고 쓰고 있다면, 옷장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입을 게 없다고 푸념을 하고 있다면, 한 번만 보고 책장에 꽂아둔 책들이 20권이 넘어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불편함을 넘어 역시 관건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제안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기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이상적인 계획을 쉽게 좌절시킨다는 게 그동안의 역사가 아니었는가. 탐욕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여기는 천박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무엇인가 달라질 여지가 있을까.

 

아마도 곧 다가올 기후위기도,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인구감소도, 전 세계적인 청년층의 박탈감과 일탈도, 우리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티핑 포인트를 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이제까지의 삶을 방식을 바꿔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어쩌면 그 때는 디컨슈머로서 살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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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기도의 길 - 다시 깨어나는 거룩한 상상력 사회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사회
에스더 드발 지음, 이민희 옮김 / 비아토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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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켈트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아일랜드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외에도 켈트족이라는 고대 민족이 떠오른다면 역사덕후일 가능성이 높고, 셀틱 FC라는 축구팀을 떠올린다면 해외축구빠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축구팀에 셀틱(Celtic)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팀이라서 그렇다. 비슷한 케이스로 NBA에 있는 보스턴 셀틱스라는 농구팀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그 동네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두 팀 모두 메인 색상은 녹색이다.


신학 쪽에서는 켈트 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그 켈트 교회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켈트, 즉 아일랜드 지역은 유럽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장 멀고, 로마나 파리, 마드리드 같은 오래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들로부터도 멀다.


중세 초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니, 그 시기도 다른 데에 비하면 꽤 늦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더해지면서 켈트 교회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다른 지역과 왕래가 많지 않으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반대로 자체적인 문화가 깊게 발달했다. 물론 그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제법 잘 알려진 켈트 십자가나 클로버 모양의 상징, 그리고 녹색이라는 상징색 정도를 빼면 사실 나도 아는 게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켈트 교회의 여러 전통들을 다룬다. 분명 내용상으로는 신학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책으로 분류하기엔 또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 책 제목에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저자는 켈트 교회 전통 안에서 작성된 여러 기도문과 시(기도의 성격이 강한)들을 통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앙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를 제시한다.


저자가 켈트 신앙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 시나 시처럼 읽히는 기도를 선택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켈트 사회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장르를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71). 심지어 그들은 수도원 규칙조차 시의 형태로 작성했다. 여기서부터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논문에 닻을 내리고자 했던 중세의 주류 신학과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에는 켈트 교회 신앙의 다양한 양상들이 설명된다. 삶을 여행으로 보는 독특한 관점부터, 일상 속에서 삼위일체를 가까이 경험하는 방식, 시간의 흐름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시켜 인식하는 방법,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세상의 악을 피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 등등. 다분히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동행하는 법을 전수해 왔다.




서방의 주류 신학이 앞서 말했던 대로 이지적인 차원에 집중해왔다면, 켈트 교회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건 대체로 서방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앞서 이 책이 신학책이라기엔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켈트 신학을 담담하게 분석하고 서술하기 보다는 경탄의 자세로 바라보며 계속 닮고자, 그리고 닮아야 한다는 요청과 함께 길을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좀 과한 건 아닌가, 그들에게는 수만 명씩 모이는 복잡한 도시라는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 가끔 떠오르는 것도 사실.


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의 풍성한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영역만 강조하는 건 신앙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기도 한다. 믿음은 머리로만 갖는 게 아니니까. 특히 일상의 삶과 믿음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켈트 교회의 신앙은, 삶과 신앙이 유리되기 일쑤인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분명 좋은 자극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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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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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정보만 남는 현상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가늠할 틈이 없이 그저 눈앞의 뉴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의 큰 특징인 원격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전모를 파악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창 다음(Daum)의 카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얼마 후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옮겨갔고, 또 네이버 블로그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얼마 전 X로 이름을 바꾼)와 같은 매체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이 대세다. 이 흐름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데, 바로 “점점 더 짧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짧게 요약된 내용, 그나마 글이 아닌 영상, 혹은 해시태그가 포함된 사진 몇 장으로 모든 걸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짧은 정보뭉치로는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끝없는 자극만 있는 정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몽롱해진 채로 알고리즘에 예속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정보만 남은 사회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65)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배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마약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전후해 경찰은 큰 소리로 해당 배우의 혐의를 떠들어 댔고, 소위 사이버 렉카라고 불리는 저열한 유튜버들은 날마다 온갖 개인적인 사안을 폭로하며 돈을 구걸했다. 정보의 자극성, 그리고 그 자극을 위해 한 사람을 발가벗기고 구경하는 집단적인 관음증, 포르노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보와 소통에 취해버린 대중은 그럴 의지도, 사고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또한 서사의 위기가 낳은 결과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22)고 말한다. 오늘날 보이는 서사의 위기는 모든 것을 인과율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대 프로젝트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소위 과학주의가 절대적인 도그마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담긴 이야기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부정되고 잊혔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로지 인과율로만 만들어진 관계에서는 깊은 교류가 일어날 수 없다.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허무함을 토로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은 서사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그리 분명한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문제 제기 속에서 어느 정도 대안도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 세계에서 나와, 실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주류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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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IVP 모던 클래식스 11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박세혁 옮김, 강영안 해설 / IVP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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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다. 사실 작년 말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이런 저런 일들도 있었고, 책 자체도 쉽게 읽히지 않는 편이라 시간이 꽤 걸렸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2년 전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테러로 시작된 분쟁 역시 끝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는 우리나라 제1당 대표를 살해하려가 목 부위에 큰 상처를 입히고 끝난 사건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사방이 분쟁과 다툼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다. 물론 이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아마도 인류의 역사 내내 경험했던 상황이긴 하다. 대충 역사를 써놓은 대부분의 페이지가 전쟁사를 기술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




책의 첫 세 장은 배제와 포용이라는 핵심적인 내용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거리두기와 소속되기”라는 제목의 첫 장에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가 소속된 어떤 정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동시에 이 정체성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만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런 전제를 인정한다면 누군가를 완전히 배제하려고 시도하는 건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볼프는 누군가를 우리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과연 쉬울 리가 없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조금 복잡한 설명을 더하지만, 결국 진정한 포용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1부 마지막 장은 성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사실 앞선 세 개의 장과 성격은 살짝 다르지만, 그렇다고 2부에 넣기에는 또 애매한 주제다) 정확히는 남녀 간의 극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신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부분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남녀의 역할이나 지위를 성경에서 찾아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이 속한 문화, 나아가 성경의 저자들이 속한 문화에 짙게 배어있는 관습을 따온 것에 불과하다는 게 볼프의 생각이다. 그는 대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바람직한 모델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2부에서는 좀 더 거시적인 주제를 다룬다. “억압과 정의”, “기만과 진실”, “폭력과 평화”라는 제목만 봐도 대략 내용이 짐작된다. 오늘날 다양한 적대감과 갈등을 일으키는 관점들의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기독교적 기여가 가능할지를 살펴본다. 전반적인 논지는 책의 첫 세 장에서 펼쳤던 그대로다.




과연 우리는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국제질서에서의 근본적인 평화를 위해 국제연합이 창설된 지도 8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동안에도 단 한 순간 전 세계에 평화가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던 냉전이 끝난 지도 고작 30년 밖에 안 지났고, 20여 년 전 일어났던 9.11 테러의 기억은 여전히 전 세계에 생생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실은 저자 역시도 이런 문제가 (기독교인들의 바른 신학과 실천을 통해서라도) 온전히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다만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갈등을 조금 늦추고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현재로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소망인가 싶기도 하고.


사실 어떤 이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이런 분쟁의 현장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현실일 것이다. 저자는 피치 못해 가해자들에 저항해 폭력을 가해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걸 신학적으로 지지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지한다. 이 또한 복잡한 심경이 담긴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새해에는 조금은 더 나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물론 연말엔 이 기대를 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살짝 두렵긴 하지만. 우리는 원수를 포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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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과학의 팔을 비트는가 - 기후 낙관론에 맞선 세계적인 환경과학자의 폭로
루이스 지스카 지음, 김보은 옮김 / 한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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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꽤 인상적이다. 정치가 과학의 팔을 비튼다라... 대략 이 책에 정치권력에 의해 과학적 사안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가 잔뜩 소개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제목이지만, 실은 책 내용의 대부분은 이산화탄소가 농업계에 미칠 영향에 관한 과학적 실험과 그에 근거한 전망들이다. 정치 비판보다는 과학 이야기, 그 중에서도 식물학, 농학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책 후반에 약간 제목에 실린 종류의 비판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말했듯이 이 책은 이산화탄소에 관한 내용이다. 어느 정도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중 하나다. 물론 이보다 더 큰 효과를 내는 물질들도 있지만, 그 양에 있어서 이쪽이 압도적이다. 우리가 배출하는 탄소의 대부분이 이산화탄소의 형태니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 이산화탄소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식물의 성장률을 높이는 요인에는 높은 온도와 적절한 양분, 그리고 충분한 이산화탄소가 포함된다. 쉽게 말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이 더 빨리 자란다는 뜻이다.


식물이 빨리 자라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고. 실제로 미국 보수 정치계에서는 이런 식의 주장을 하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중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 뒤에는 화석연료로 돈을 버는 기업들의 막대한 로비가 있고.


책에서 저자는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성장을 빠르게 한다는 요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디테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빠른 성장을 하는 식물들 중에는 우리가 애써 기르는 곡물류만이 아니라 잡초도 포함되어 있기에(그리고 이것들이 더 빨리 자라기에, 그 방해를 받아) 전체적인 곡물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제초제를 쓰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높은 이산화탄소 수치는 농약에 대한 잡초의 저항력을 높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빨리 자란 식물이 생산하는 열매에는 몇몇 영양소들이 부족하자는 증거도 있고, 나아가 식물과 연관된 생태계의 좀 더 넓은 범위(곤충의 식생이라든지,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라든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문제를 단편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과학의 영역에 정치가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저자 자신부터가 25년 가까이 미국 농무부 소속의 과학자로 다양한 연구를 해 왔던 인물이다. 몇 번이나 언급되는 수치인데 1달러를 (연구비로) 투입해 10달러를 벌어들이는 나름 유익한 작업들을 해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연구가 보수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업들의 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예컨대 트럼프는 후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후위기 관련 예산을 대폭 줄였고, 국제적 노력에서도 탈퇴를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과학적 연구를 하는 기관들을 억압하기도 했고. 결국 약 50%의 연구자들이 사직을 했다고 하는데, 저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트럼프가 벌여놓은 난장판이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미국이 가진 그 큰 국제적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그건 거의 전 세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책에는 그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반(反)환경 기업들의 로비만을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면 결국 그런 광고와 헛소리에 넘어가 공화당에 표를 준 무식한 미국 농부들과 블루칼라 노동자들 탓도 있지 않을까.(물론 미국 민주당이 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책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 재미있는 인터뷰가 하나 실려 있다. 한 농부와의 인터뷰였는데, 날씨가 극단적으로 변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농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파종하기 알맞은 날이 줄었고, 폭풍과 홍수가 늘고 있다고. 다시 진행자가 전에 못 보던 잡초나 곤충, 식물병을 본 적이 있냐고 묻자 농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새로운 시설에 돈을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 농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행자가 묻는다. 기후변화가 사실인 것 같냐고. 그러자 농부는 대답한다. “그럴리가요. 그건 앨 고어나 하는 말이죠.” 이런 수준의 유권자들이 있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환경정책이 나오긴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이게 어디 미국에만 해당될까.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자기는 보수정당(그게 한나라당이었는지 새누리당이였는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다. 하지만 뭐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그 자리에 자민당이나 나치당이 들어가도 별 위화감이 없는 인터뷰였는데)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꼭 찍을 거라고 했던 한 시장 상인의 인터뷰가 한동안 유명한 짤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짜로 나라를 팔아먹으면 애초에 투표할 권한 따위도 없겠지만, 이런 수준의 무식한 시민들이 서식하는 환경에서 좋은 정치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정치인들을 깐다. 마치 정치인이 온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선거철 종종 목격할 수 있듯, 결국 그들은 시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의 선택이 그들의 태도를 만든다. 그들의 오만함은 우리가 그들에게 굽실거렸기 때문이고, 그들의 당당함은 우리가 그들의 잘못에 눈을 감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범인은 바로 우리다.




과학을 다루다보니 어느 정도 전문적인 내용들, 그래프와 표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내용은 조금 미뤄두더라도 책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쓰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과학적 실험 데이터가 이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부분이니, 너무 금방 넘기지 말고 잠시 머리에 담아두는 게 좋다. 사실 그래야 이 책에서 지적하는 기후위기부정론자들의 이산화탄소 드립을 이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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