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무선)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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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게 아마 대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지금과 표지도 달랐었다(지금이 훨씬 세련되게 변했다). 유진 피터슨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냥 다윗 이야기를 재미있게 썼구나 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아직 내 리뷰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이어서(아마 대학 2학년쯤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내 감상이 정확히 어땠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천 권이 넘는 책을 읽었고, 그 중에는 당연히 유진 피터슨의 책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보다 그가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도 알게 되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보이는 것도 많아지는 법, 오랜만에 다시 손에 든 이 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은 통찰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었다.




저자는 다윗의 인생에서 열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을 뽑아내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총 20개 장이지만, 첫 장은 일종의 서론 격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골리앗과의 대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 시글락 공동체와 블레셋에서의 삶, 마침내 왕이 되었지만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과 죽음까지, 다윗이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차근차근 재구성한다.


이 이야기의 기본은 성경에 나오는 기사들이지만, 그 행간에는 상상력이 들어갈 수많은 틈이 있다. 저자는 매우 능숙하게 이 빈자리를 멋진 이야기들로 채워 넣는다. 마치 책 초반에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해 주셨다는 다윗 이야기처럼 말이다. 물론 이 상상력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럼직한,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다.


또, 저자는 시인이었던 다윗의 삶에 걸맞게, 여러 편의 시편을 뽑아 다윗의 인생의 한 장면과 연결시킨다. 물론 이건 아주 새로운 시도는 아니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는 시도다.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일상’이다. 책 초반 저자의 흥미로운 발견이 소개된다. 바로 다윗 이야기에는 단 한 번의 기적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기적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적이란 소위 초자연적인 어떤 사건 같은 걸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렇다. 다윗은 직접 천사를 만난 적도, 강물을 멈추게 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이 말은 그가 살면서 한 번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도덕군자처럼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여러 번 죄를 저지르기도 했고, 청동기 말 살았을 다른 위대한 군장들처럼 오늘날 기준과는 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하나님을 붙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건 오늘 우리의 삶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우리 또한 매순간 수많은 사건과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 살아간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예배에 겨우 참여하는 것으로 가느다란 생명줄을 연장하곤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만나는 사람이 대개 같은 교인인 목사들만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있는 이례적 존재들이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이원론적 삶의 패턴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범이다. 그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속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능력이 바로 이런 능력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능력은 강의가 아닌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유진 피터슨이 성경을 이야기로 풀어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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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0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대학 때부터 읽어 천 권이요? 노랑가방님 책 많이 읽으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읽어도 아직 천 권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대단하신데요?
이책 저도 읽었나 읽다 말았나 했던 거 같은데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잘 지내시죠?^^

노란가방 2024-03-06 15:12   좋아요 2 | URL
그 때부터 쓴 리뷰를 세어 보니까 1000권은 넘더라고요 ㅎ
뭐 대단까지 할 일은 아닙니다..(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
네, 한 번 쭉 읽어보실 만한 책이네요.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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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볍게 생각해고 손에 들었는데, 생각보다 읽기가 어려웠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번역 투의 문체가 참 힘들다. 당장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이다. 무슨 말인지 뉘앙스는 이해가 되지만, 이게 우리말이 맞긴 한가? 보니 전문번역자가 아니라 박사학위까지 받은 관련 분야 전공자이다. 물론 모든 문장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좀처럼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는 문장들이 자주 보인다.


또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집필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점이다. 앞서의 부제를 보면서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일종의 대안자본주의를 제시하려는 것인가 싶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예컨대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미국 오리건주의 한 산지의 버섯채집인들로 구성된 캠프는 조금은 임금노동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러 사람들로 채워져 있긴 했지만, 그게 이 책의 저자가 찬양하는 어떤 목적이나 목표 같지는 않다. 애초에 이 송이버섯 채집 경제는 너무나 규모가 작아서 무슨 구조를 논할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또 송이버섯의 생태와 관련된 다양한 과정들을 추적하는 식물학적 접근이냐, 이 또한 책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게 또 중심인가 싶으면 그건 아니다. 환경보호나 생태학적 관점도 담겨 있긴 하지만, 그 역시 메인은 아니고.




책 말미에 붙어있는 해제를 보면, 저자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어떤 지역에 사는 특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송이버섯을 중심에 두고, 그걸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연구 주제가 독특하긴 하다. 여기에 포스트인문주의 같은 조금은 어려운 말을 사용해 설명을 하긴 하지만, 뭔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정도만 와 닿는다. 애초에 이 맥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은 유튜브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친 다큐 클립을 보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 경우엔 그런 걸 또 한참 들여다보며 재미를 느끼긴 한다.


우선은 일본에서 송이버섯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자세한 서술이 눈에 들어온다. 송이버섯은 대규모로 재배할 수 없고 그저 채집할 수 있을 뿐이기에, 어떤 산업적인 구조라는 게 만들어지기 쉽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또 송이의 가치를 높여주는지라, 일본에서 (좋은) 송이는 단순한 금전적 보상과는 다른 차원의 선물로 여겨진다는 것.


한편으로 미국의 송이채집자들의 세계도 흥미롭다.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온 소수민족들이 대거 포진한 이들의 무리는, 저마다의 문화와 풍습을 가지고 있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버섯채집허가증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종종 사유지에도 들어간다)에서 송이를 채집하는 삶을 꾸려간다. 그러면서 이들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난 일종의 자유를 누리는데 그들이 채집한 송이를 판매해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판매 과정이 일종의 경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또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송이버섯의 생태 부분과 관련해서, 우리가 흔히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즉 인간이 개입을 덜 하고 알아서 각 생물들이 자라도록 하는 게 제일 좋다는 생각 또한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송이는 교란된 숲에서만 자라기 때문이다. 벌목이 이루어지고, 인디언들이 일부러 불을 내 화전을 일구고 떠난 자리, 겉으로만 보면 삼림이 훼손된 것 같은 그런 자리에서만 송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저 잘 ‘보존’된 숲은 ‘방치’된 숲일 수도 있다는, 그래서 오히려 생물의 다양성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지적은 꽤 새롭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결과적으로 이 책은 송이버섯을 둘러싼 수많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와 같다는 느낌이다.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 또 그들의 고향을 비롯한 다양한 지리적 내용들이 이리저리 섞여 풀려나온다.(알라딘에서 이 책의 분류는 인류학, 식물학, 생태학, 환경학까지 망라한다 ㅋ)


다만 버섯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경제가 뭔가의 대안이 될 수 있다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엄청난 찬사(대개 책의 추천사라는 게 그렇지만)가 오히려 살짝 부담스럽달까. 다만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어떤 변화를 주는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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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로부터의 자유 - 남자의 뇌, 중독에서 거룩으로 회로를 바꾸다
윌리엄 M. 스트러더스 지음, 황혜숙 옮김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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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언제 내 책장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어디선가 이 책이 놓여있는 걸 보고 내용을 간단히 훑어보다가 한 권 중고로 구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담겨 있다가, 마침내 안 읽은 책 털기를 하던 차에 손에 들렸다! 조금 읽다 보니 왜 오래 전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금세 떠올랐다.


저자는 미국 휘튼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다. 행동신경과학, 중독 문제,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단순히 인문학적 접근만이 아니라 뇌과학이나 신경과 호르몬 같은 다양한 이과적 접근에도 익숙한 것 같다(책에도 그런 내용이 잔뜩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다. 때문에 책에는 다양한 내용의 기독교적 접근 또한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저자가 포르노그래피라는 주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뇌의 가소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 우리의 육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는 뇌의 작동 매커니즘에는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들이 작동하는데, 포르노그래피에 의존하는 남성의 경우(이 책은 주로 남성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된다) 그것이 분비시키는 내인성 아편 물질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이는 약물로 인한 중독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개인적으로는 이 내용이 담겨 있는 4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약물 중독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일단 그것이 주는 강력한 쾌락에 중독이 되어버리면, 점차 같은 수준의 쾌락에 이르는 역치가 높아지고, 점점 더 많은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 저자는 포르노그래피 중독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보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포르노그래피에 중독이 되어버린 사람은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면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물론 가소성에 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건, 이게 어렵긴 하지만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부분이다. 물론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신경화학적 흐름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이를 위해 현재의 문제가 되는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바꿔나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책은 이런 내용 뿐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1~2장), 그것이 일으키는 문제들(3장)도 담겨 있고, 2부에서는 남성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조금은 다른 논의들도 진행된다. 마지막 장인 8장에서는 포르노그래피 중독으로부터 탈출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한다. 이 부분은 인지행동치료와도 관련되어 보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적인 조언과도 결합되어 있다.


애초에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별것 아닌 것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기독교는 조금은 특별한 공헌을(특히 거룩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새 성교육이라는 게 고작 어떻게 “안전하게”(이 말이 ‘임신의 위험을 피하면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게 한심할 따름이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조언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물론 애초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뭐라고 설명해도 못 알아듣겠지만.


전반적으로 꽤 유용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다만 벌써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인지라, 현 시점에서는 이미 절판되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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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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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수는 12,906명이다. 그 중 남성이 9,019명, 여성이 3,887명으로, 남성 쪽이 두 배 이상 높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를 가리키는 자살률 평균은 24.1명으로, 같은 기간 OECD 평균인 11.1명을 두 배 이상 초과하는 압도적 1위를 마크하고 있다. 2위인 리투아니아는 지난 2017년까지는 우리보다 높았으나,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여서 2018년 이후로는 우리가 독보적인 1위라고 한다.


1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4, 50대의 경우에는 사망원인 2위에 해당한다. 사고나 질병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수가 이렇게 많다는 건,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당장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에서 국가적인 생산력 감소의 큰 위협이기도 하다.


물론 이 문제는 단순히 경쟁력이나 생산력 따위의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무엇 이상이다. 때문에 자살자에 관한 다양한 사회적 연구나 관심도 요즘엔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초점이 언제나 자살예방에만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예방은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 벌어지고 난 후에는 금세 또 다른 예방으로 넘어가버린다는 게 문제다. 자살 이후에는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들(자살 사별자)이 있고, 그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간과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자살 사별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심리부검이라는, 사망자가 어떻게 그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심리상태를 사후에 추정해 나가는 분야에서 일해 온 저자가, 실제 자살 사별자 다섯 명과 함께 여섯 번의 자조모임에서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이들의 회복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천천히 되 집어 본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없었기에,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할지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당연히 남겨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자살 사별자의 경우 이들은 그 이상의 죄책감까지 갖곤 한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많은 자살 사별자들은 그날, 특정 순간의 이미지, 신체감각, 기억들에 꽤 오랫동안 붙잡혀 산다는 것이다. 이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새 오랫동안 사별자의 삶을 억누른다는 것.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스스로에게, 또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도 생채기를 낸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더할 때가 있다. 때로는 무신경한 말로, 또 때로는 편견과 아집에 싸인 채로 그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그 위에 또 다른 돌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이 점은 안타깝게도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살 문제에 관련해서 교회에 속한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가지고 유가족들을 더 괴롭히기만 한다)




앞서의 통계를 다시 생각해 보면, 한 해 13,000명이 자살을 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친구, 동료 등을 포함하는 자살 사별자들은 그 몇 배가 매년 생겨날 것이다. 대충 10만 명으로만 잡아도, 10년이면 100만 명의 사별자들이 생겨난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위한 충분한 배려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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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인역 입문 - 칠십인역의 정의, 역사적 배경, 기원, 번역 과정, 가치, 권위
그레고리 R. 래니어.윌리엄 A. 로스 지음, 이민희 옮김 / 북오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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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며, 제목이며 깔끔하다.(다만 앞뒤로 내지 한 장씩은 넣어주지 그러셨어요)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약자로 LXX라고 표기하는 칠십인역에 관해 들어봤을 것이다. BC 2~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청으로 온 72명의 유대 장로들이 72일 만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완성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져 온 고대 그리스어 구약 번역본이 바로 칠십인역이다.


이 책은 이 칠십인역에 대한 좀 더 학술적인 연구를 다룬다. 칠십인역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1부와 그것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2부로 나누어져 있고, 다시 1부는 번역의 역사와 그 작업의 특징들을, 2부는 칠십인역을 통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갖는 권위에 관한 문제를 간략히 다룬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 관한 학문적 개요를 잘 정리해 놓았다.





간만에 사본학에 대한 다양한 지적 도전을 맛보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사본학이란 뭔가 만져질 듯하면서도, 가까이 가면 잘 보이지 않는 무지개 같은 느낌을 주는 분야다. 물론 대부분의 인문학 작업들이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이 분야는 수많은 가정들과 추측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본들만 남아있을 뿐인데, 그 중에서도 약자로 MT라고 하는 “맛소라 사본”이 가장 중요한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본은 특정한 가문에 의해 보존되어 정리된 구약 사본인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 AD 9세기 경 편집된 판본이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맛소라 사본보다 천 년은 더 이전에 번역된 버전이다. 어쩌면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마소라 사본의 필사자들이 보지 못했던, 보다 고대의 사본들을 보고 작업을 진행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칠십인역은 구약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라는 지적은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이 상당부분 바로 이 칠십인역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히 신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고대 그리스어 구약번역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칠십인역의 원래 사본이 한 권의 책으로 깔끔하게 장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히브리어 사본에도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듯, 이 그리스어 번역본 역시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사본학에서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기가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중에서 어떤 버전을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저자들 역시 이 명칭을 좀 더 폭 넓게 사용하려 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칠십인역에 얼마만큼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에 관해 논의하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규범적 권위, 파생적 권위, 해석적 권위로 구분한 뒤, 칠십인역을 구약에 대한 규범적 권위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정경적인 위치로까지 둘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본문이고, 번역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KJV만이 영감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화 있을 진저 ㅋ). 물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칠십인역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결과물이기에, 히브리어 사본의 좀 더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대신 저자들은 이 칠십인역에 파생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고, 신약에 인용된 칠십인역의 많은 구절들은 그 자체가 칠십인역의 영감을 증명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담긴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칠십인역은 해석적 권위도 갖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상당한 도움을 준다.


전반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방향을 잘 잡아주는 책이다. 물론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긴 하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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