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로부터의 자유 - 남자의 뇌, 중독에서 거룩으로 회로를 바꾸다
윌리엄 M. 스트러더스 지음, 황혜숙 옮김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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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언제 내 책장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어디선가 이 책이 놓여있는 걸 보고 내용을 간단히 훑어보다가 한 권 중고로 구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담겨 있다가, 마침내 안 읽은 책 털기를 하던 차에 손에 들렸다! 조금 읽다 보니 왜 오래 전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금세 떠올랐다.


저자는 미국 휘튼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다. 행동신경과학, 중독 문제,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단순히 인문학적 접근만이 아니라 뇌과학이나 신경과 호르몬 같은 다양한 이과적 접근에도 익숙한 것 같다(책에도 그런 내용이 잔뜩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다. 때문에 책에는 다양한 내용의 기독교적 접근 또한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저자가 포르노그래피라는 주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뇌의 가소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 우리의 육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는 뇌의 작동 매커니즘에는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들이 작동하는데, 포르노그래피에 의존하는 남성의 경우(이 책은 주로 남성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된다) 그것이 분비시키는 내인성 아편 물질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이는 약물로 인한 중독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개인적으로는 이 내용이 담겨 있는 4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약물 중독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일단 그것이 주는 강력한 쾌락에 중독이 되어버리면, 점차 같은 수준의 쾌락에 이르는 역치가 높아지고, 점점 더 많은 약물을 사용하게 된다. 저자는 포르노그래피 중독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보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포르노그래피에 중독이 되어버린 사람은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면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물론 가소성에 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건, 이게 어렵긴 하지만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부분이다. 물론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신경화학적 흐름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이를 위해 현재의 문제가 되는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바꿔나가기 위한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책은 이런 내용 뿐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1~2장), 그것이 일으키는 문제들(3장)도 담겨 있고, 2부에서는 남성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조금은 다른 논의들도 진행된다. 마지막 장인 8장에서는 포르노그래피 중독으로부터 탈출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한다. 이 부분은 인지행동치료와도 관련되어 보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적인 조언과도 결합되어 있다.


애초에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별것 아닌 것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 기독교는 조금은 특별한 공헌을(특히 거룩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새 성교육이라는 게 고작 어떻게 “안전하게”(이 말이 ‘임신의 위험을 피하면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게 한심할 따름이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조언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물론 애초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뭐라고 설명해도 못 알아듣겠지만.


전반적으로 꽤 유용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다만 벌써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인지라, 현 시점에서는 이미 절판되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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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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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수는 12,906명이다. 그 중 남성이 9,019명, 여성이 3,887명으로, 남성 쪽이 두 배 이상 높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를 가리키는 자살률 평균은 24.1명으로, 같은 기간 OECD 평균인 11.1명을 두 배 이상 초과하는 압도적 1위를 마크하고 있다. 2위인 리투아니아는 지난 2017년까지는 우리보다 높았으나,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여서 2018년 이후로는 우리가 독보적인 1위라고 한다.


1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4, 50대의 경우에는 사망원인 2위에 해당한다. 사고나 질병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수가 이렇게 많다는 건, 개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당장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에서 국가적인 생산력 감소의 큰 위협이기도 하다.


물론 이 문제는 단순히 경쟁력이나 생산력 따위의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무엇 이상이다. 때문에 자살자에 관한 다양한 사회적 연구나 관심도 요즘엔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초점이 언제나 자살예방에만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예방은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 벌어지고 난 후에는 금세 또 다른 예방으로 넘어가버린다는 게 문제다. 자살 이후에는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들(자살 사별자)이 있고, 그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간과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자살 사별자들에 관한 내용이다. 심리부검이라는, 사망자가 어떻게 그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심리상태를 사후에 추정해 나가는 분야에서 일해 온 저자가, 실제 자살 사별자 다섯 명과 함께 여섯 번의 자조모임에서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이들의 회복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천천히 되 집어 본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없었기에,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할지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당연히 남겨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자살 사별자의 경우 이들은 그 이상의 죄책감까지 갖곤 한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많은 자살 사별자들은 그날, 특정 순간의 이미지, 신체감각, 기억들에 꽤 오랫동안 붙잡혀 산다는 것이다. 이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새 오랫동안 사별자의 삶을 억누른다는 것.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스스로에게, 또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도 생채기를 낸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더할 때가 있다. 때로는 무신경한 말로, 또 때로는 편견과 아집에 싸인 채로 그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그 위에 또 다른 돌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이 점은 안타깝게도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살 문제에 관련해서 교회에 속한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가지고 유가족들을 더 괴롭히기만 한다)




앞서의 통계를 다시 생각해 보면, 한 해 13,000명이 자살을 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친구, 동료 등을 포함하는 자살 사별자들은 그 몇 배가 매년 생겨날 것이다. 대충 10만 명으로만 잡아도, 10년이면 100만 명의 사별자들이 생겨난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위한 충분한 배려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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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인역 입문 - 칠십인역의 정의, 역사적 배경, 기원, 번역 과정, 가치, 권위
그레고리 R. 래니어.윌리엄 A. 로스 지음, 이민희 옮김 / 북오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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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며, 제목이며 깔끔하다.(다만 앞뒤로 내지 한 장씩은 넣어주지 그러셨어요)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약자로 LXX라고 표기하는 칠십인역에 관해 들어봤을 것이다. BC 2~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이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청으로 온 72명의 유대 장로들이 72일 만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완성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져 온 고대 그리스어 구약 번역본이 바로 칠십인역이다.


이 책은 이 칠십인역에 대한 좀 더 학술적인 연구를 다룬다. 칠십인역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1부와 그것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2부로 나누어져 있고, 다시 1부는 번역의 역사와 그 작업의 특징들을, 2부는 칠십인역을 통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갖는 권위에 관한 문제를 간략히 다룬다. 전반적으로 이 책에 관한 학문적 개요를 잘 정리해 놓았다.





간만에 사본학에 대한 다양한 지적 도전을 맛보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사본학이란 뭔가 만져질 듯하면서도, 가까이 가면 잘 보이지 않는 무지개 같은 느낌을 주는 분야다. 물론 대부분의 인문학 작업들이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이 분야는 수많은 가정들과 추측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본들만 남아있을 뿐인데, 그 중에서도 약자로 MT라고 하는 “맛소라 사본”이 가장 중요한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본은 특정한 가문에 의해 보존되어 정리된 구약 사본인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 AD 9세기 경 편집된 판본이다.


그런데 칠십인역은 맛소라 사본보다 천 년은 더 이전에 번역된 버전이다. 어쩌면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마소라 사본의 필사자들이 보지 못했던, 보다 고대의 사본들을 보고 작업을 진행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칠십인역은 구약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라는 지적은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이 상당부분 바로 이 칠십인역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히 신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고대 그리스어 구약번역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칠십인역의 원래 사본이 한 권의 책으로 깔끔하게 장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히브리어 사본에도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듯, 이 그리스어 번역본 역시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사본학에서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기가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중에서 어떤 버전을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저자들 역시 이 명칭을 좀 더 폭 넓게 사용하려 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칠십인역에 얼마만큼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에 관해 논의하는 부분이다. 저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크게 규범적 권위, 파생적 권위, 해석적 권위로 구분한 뒤, 칠십인역을 구약에 대한 규범적 권위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정경적인 위치로까지 둘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본문이고, 번역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KJV만이 영감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화 있을 진저 ㅋ). 물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칠십인역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결과물이기에, 히브리어 사본의 좀 더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대신 저자들은 이 칠십인역에 파생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고, 신약에 인용된 칠십인역의 많은 구절들은 그 자체가 칠십인역의 영감을 증명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담긴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칠십인역은 해석적 권위도 갖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상당한 도움을 준다.


전반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방향을 잘 잡아주는 책이다. 물론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긴 하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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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법 - 듣는 형식과 표현하는 언어를 알면 감동이 더욱 커진다 음악의 즐거움 1
오카다 아케오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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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요새는 쉽게 구글링을 하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좀 더 진지하게 알고 싶을 땐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특히나 이번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문외의 영역인 경우 더더욱 괜찮은 책을 통해 기초를 닦아야겠단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가서 이 책을 골라 온 이유다. 제목부터가 (수영 할 줄도 모르면서 백과사전을 읽으며 수영에 관해 지식을 쌓은) 딱 나에게 맞아 보였다. “음악을 듣는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 나도 클래식 음악을 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져왔다.


물론 그런 심미안은 한 번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당장에 뭔가를 알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우선 책 자체가 시대별로 음악사를 훑어가면서 각각의 특징을 적어두는 식의 백과사전식 접근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일이란 무엇인지, 음악에 관해 말하는 건 또 무엇인지 하는 식으로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수많은 고전 시대 음악가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헤겔과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들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아, 책 제목은 왠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해 보였으나, 저자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물론 가끔은 역사적 접근과 시대상황 같은 요소들을 언급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최소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애호가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좀 더 잘 어울릴 듯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음악을 듣는 중 음악과 ‘공명’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소위 말해 감동이라든지, 뭔가 찌릿 하고 와 닿는 일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뭔가 분명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걸 적절한 표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그냥 음악은 느끼면 된다고 나무랄 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식의 태도 또한 음악에 대한 하나의 사조/경향일 뿐이다.


저자는 음악을 하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하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참여하는 걸 말하고, ‘듣는 것’은 말 그대로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감사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들은 음악에 관해 나름의 설명이나 해설, 감상을 하는 일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이 일들은 서서히 분리되어 왔다. 18세기까지의 많은 곡들은 사람들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꼭 잘 사는 집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었고, 가족끼리 함께 연주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브람스 이후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아마추어들이 간단하게 연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일과 듣는 일이 분리된 것이다.


그렇게 음악이 전문가들의 일이 되어버리면서 보통의 애호가들은 이제 직접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길이 적어져버렸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종의 틈새 산업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주는 중재자, 즉 비평가들이 등장했다. 다시 한 번 음악에서 말하는 것이 떨어져 나온 이유다. 흥미로운 설명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특히 세 번째 요소인 ‘말하는 일’을 보통의 애호가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몇 가지 접근 방식을 제안해 주고, 마지막 장에서는 직접 뭔가 악기를 연습해 보고 말해볼 것을 권유도 한다.




확실히 음악은 우리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내 어린 시절이 그랬듯,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나 어린 시절부터 악기 연주를 배우고 관련 문화를 향유하고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난점(일찌감치 아버지 사업이 망한 우리 집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어린 시절 그런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도 음악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도전해 볼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만 간만에 다시 좀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뭘 몰라도 저자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나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식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조금씩 빠져들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 일에는 이 책 말고 좀 다른 책의 도움이 또 필요할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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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로마 (지도 세트)
질 샤이에 지음, 정진국 옮김 / 이미지프레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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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도시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만난 책이다. 일단 그 그림체부터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이건 사야겠다 싶은 순간, 책값이 64,000원이나 된다는 걸 알았다. 대형 판형에 전면 컬러 도판에, 작가가 공들여 그린 그림이니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비싼 가격에 주저됐다. 개인 블로그에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온갖 할인과 마일리지 돌려받기를 해도 54,000원이라 너무 비싸 잠시 물러난다는 내용을 썼는데, 30분 만에 익명의 후원자님이 책값을 보내주셨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


책은 금세 읽힌다. 전체적으로 큼직큼직한 사진과 지도가 중심인 책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손으로 직접 그려낸 4세기 로마시의 모습인데, 책과 함께 딸려온 대형 브로마이드에는 이 모든 장면이 한 장에 담겨 있다(지금은 내 방 벽에 붙어 있다). 보는 맛이 있는 책.


이 정도 퀄리티로 로마의 곳곳을 묘사했으면 좀 더 흥미롭게 설명을 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은 가공의 한 인물이 황제에게 전하는 속주 총독의 편지를 들고 로마에 들어오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별 재미도 의미도 없었다. 그가 걷는 길을 따라서 보이는 것들을 설명하는 식인데, 빠지는 건 너무 많고, 설명도 좀 부실하다.

고대 로마에 대해 어느 정도 선이해가 없다면, 이게 어디를 말하는지, 무슨 이야기인지 거의 와 닿지 않을 만한 내용(물론 이런 책을 사는 사람치고 고대 로마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이다. 또, 길을 가면서 보는 모습이라면, 그 본문 옆에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지도의 일부를 넣어두는 센스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건 뭐 글 한 번 보고 지도 한 번 찾아보고 하는 식으로 보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모든 불평거리에도 불구하고, 일단 손에 넣고만 있어도 뿌듯해지는 책. 다른 책들을 읽으며 필요할 때마다 찾아 들춰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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