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디자인
사와다 도모히로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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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만 보면 어떤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책이었다. 물론 제목에 사용된 단어야 익숙하지만, ‘이게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고?’ 하는 느낌. 저자는 일본의 한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카피라이터였다. 청춘의 나이에 입사해 몇 년 간 일에 몰두하며 살았던 그는, 입사 10년 만에 얻은 아이가 시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충격에 빠진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저자의 삶의 궤적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그는 우선 실제 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을 소개받는 식으로 20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한 후, 그는 비로소 약점은 다양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을 표준삼아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여기에 맞춰 구축되고 제작되고 유통된다. 만약 장애인들이 여기에 맞춰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꾼다면, 그래서 장애인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본다면 그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구부러지는 빨대라든지 한 손으로 불을 켜는 라이터는 모두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제작되었다가 이제는 널리 퍼진 발명품들의 예다.





광고전문가로서 저자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을 오랫동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과 같은 장애인들의 ‘약점’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보기로 한다. 이 때부터 소수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하나로 저자 자신의 약점이기도 한 스포츠(나와 비슷하게 몸으로 하는 운동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저자) 영역에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이른바 ‘유루스포츠’가 그것.


유루스포츠란 일본어로 느슨하게(유루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가리킨다. 손에 비누칠을 하고 하는 핸드볼경기인 핸드소프볼, 애벌레 모양의 침낭 비슷한 경기복에 들어가 구르고 기어가며 하는 애벌레 럭비, 강한 충격을 가하면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센서가 장착된 공을 사용해 아기울음소리가 나면 상대에게 공을 넘겨야 하는 아기 농구 같은 것들이 책에 소개 된 유루스포츠의 예다. 단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해 핸디캡을 마련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승리하는 방식을 자체를 바꿔 기존의 강자들과 약자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를 만들어보자는 개념이다.


물론 이 주장이 더 빨리 달리고,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들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엘리트 스포츠에 매몰되어 대중이 직접 참여해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좀 더 본질적인 체육활동에 집중해 만들어 본 또 하나의 스포츠 영역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이제까지 광고회사에서 더 많은(Scale) 사람들에게 더 빨리(Speed) 알리고, 짧은 기간(Short)에 그 역할을 마쳐왔다. 하지만 이제 눈을 돌려 좀 더 천천히(Slow), 작은 것부터(Small), 키워가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는(Sustainable)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라는 자기파괴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소진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래야 또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존재일까?


저자는 이 질문을 단지 자신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적용해 볼 것을 권한다. 책 후반에는 어떻게 하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며 살 수 있는지에 관해 간략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요새 유행하는 퍼스널 브랜딩과도 약간 맥이 닿아있는 느낌인지라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게다. 누군가는 틀에 박혀있지만 필요한 일을 해야만 사회라는 곳이 굴러갈 테니까. 하지만 그 안정된 틀이 누군가의 희생을 깔고 가야만 하는 거라면, 틀을 흔들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으면서도 좋은 메시지를 던져 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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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우리 가족뿐입니다
김민철 지음 / 죠이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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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책이다. 이천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교회, 그리고 부임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자녀들만 함께 예배하고 있는 상황(물론 중간에 함께 예배했던 분들이 계시긴 했다)이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자로서 참 낙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저자가 느끼고, 감당하고, 극복하고 있는지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상가 지하의 교회가 그렇듯,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추운 상황, 가끔은 배관에 문제가 생겨 예배실 한 가운데로 물이 흥건하고, 아마도 냄새도 심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는 예전을 따라 예배를 꿋꿋이 진행해 나간다. 일견 그게 무슨 고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애초의 교회의 사이즈라는 것이 어디 정해져 있는 게 아닌 이상, 매주 가족과 함께 예배한다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저자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해 본 것 같다. 교역자가 바뀌었으니 현수막도 걸어보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광고하기도 하고, 쓰레기봉투를 나누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나름 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해 봤지만, (책에 따르면) 저자가 오기 전 교회의 이미지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 (교회성장학과 관련해 반면사례로서도 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계속 현재 자리에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보통 이런 경우라는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들어가거나(나이 때문에 제한될 수도 있긴 하다), 현재 있는 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책 가운데에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적 소명은 내가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리키고, 외적 소명이란 그 일에 실제로 뛰어들었을 때에 어느 정도 열매가 보일 때를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저자의 (적어도 이천에서의) 목회사역은 외적 소명 부분을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를 좀 다르게 읽어낸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사역을 하면서 생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좀 더 해도 된다는 사인이 아닐까 하는. 뭐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와는 다르게 저자는 가족도 있으니...


사실 어떤 감동이나 그런 것 보다는 염려가 더 많이 드는 독서였다. 왠지 모를 동질감, 그리고 이왕이면 이런 분이 좀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격려와 안쓰러움이 복합적인 그런 감정이랄까. N잡까지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의 표준 사이즈라는 게 어디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교회도 하나 존재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현재 교인은 없지만, 저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를 불러서 강사로 세워주시는 선배 목회자들, 그에게 기꺼이 일을 맡겨주신 출판사 사장님, 특히 교회에 물이 샌다는 말을 듣고 함께 와서 수리에 동참해 준 지역의 동료 목회자와 성공회 신부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저자를 만나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깊은 대화를 했던 여러 사람들도 아마 저자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에 가까운 책이지만, 그 가운데 날카로운 교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처음 고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감리교 교단의 지방 조직 내 알력다툼을 원만히 끝낸답시고 양쪽 파벌에서 지지하는 개척인가를 모두 허락하지 않기로 했던 사건이라든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교회들에서 은퇴를 해야 할 목사의 전별금을 후임 목회자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목사를 청빙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한국 교회 내 고질적인 악습이다.


그리고 저자와도 밀접하게 관계있는 소위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다. 저자가 속한 감리교단에서는 2016년 이중직을 금지하되 미자립교회에 한해서는 허락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애초에 미자립교회의 목사자들을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일까지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결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지적을 한다.


이런 결의는 교단에서 목회자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는 것. 차라리 이중직을 금지하고, 목회자들에게 최저생계비(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를 지급한다던가, 또는 생계에 곤란을 겪는 목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행정을 하는 대신, 그저 이중직을 풀어 줄 테니 알아서 먹고 살라는 식으로만 느껴졌나 보다(물론 꼭 그런 취지로 개정된 건 아니겠지만).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직영 신학교에서는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지만(물론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교육을 안 한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역의 진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두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식이다. 가톨릭처럼 그들의 거취를 중앙의 행정에서 조절하는 식이 아니라도, 근본적으로 목회자 수요와 교계 현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인데, 관련 논의가 등장한 지 2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어어 하다가 0.7 이하로 내려가 버린 출생률처럼, 아마 이 문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진 않을까.



저자의 선택에 완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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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심의 탄생 - 한 일본인의 삶에 드러난 일본 근현대 영욕의 민중사
오구마 에이지 & 오구마 겐지 지음, 김범수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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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중 하나였던 일제는 결국 패전을 하고 말았다. 이른바 전범국이 된 건데, 동경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일부 핵심 전범들은 법망을 빠져나와 심지어 이후 총리까지 해 먹는다. 얼마 전 암살당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그런 전범 출신 총리였다.


당연히 그 주요 피해당사국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민족적 상처이다. 여전히 친일파라는 말은 모욕적 명칭으로 사용되고, 정치인이 이토 히로부미를 인재로 치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우리 국민의 교양수준이 일본의 발톱의 때보다 못하다”는 식의 표현(솔직히 이건 중2병 느낌의 문장이긴 했다)을 쓰거나 하면 욕을 먹고 국회의원 공천까지 취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 혹은 일본 국민 전부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적절할까. 여전히 제대로 된 정부차원에서의 사죄를 할 생각이 없고, 분명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소위 혐한으로 벌어먹고 사는 버러지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그런 심의 혐오로 먹고 사는 잉여들은 어느 나라나 다 있다).


하지만 일본사회 역시 그 안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대단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투쟁가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혐한을 나불대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지하거나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그걸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는 건 과하다. 우리네 수많은 소시민들처럼, 그들 역시 당장 먹고 사는 게 바쁘지 않을까. 정치 선동과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인사들과 엮이는 것 자체가 좀 무섭지는 않을까. 나아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는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전쟁 말기 징집되어 만주 지역으로 갔다가 전투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온 한 일본의 젊은이(물론 지금은 노인이 되었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오구마 겐지가 바로 그 주인공.


사실 오구마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 시절 수많은 가난한 소농의 아들들 중 하나로, 국가의 징집령에 따라 동원되었다가, 그대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온, 하지만 이후에도 수많은 직장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 애써왔던 한 소시민이다.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바로 그런 오구마 겐지의 아들이다. 현직 대학교수인 아들이 아버지가 경험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아버지의 상세한 구술을 받아 적으며 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에는 그런 개인적인 감상은 따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흔히 역사적 기록이나 사회학 책 같은 경우는 공식적인 기록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든 개인의 구술을 중심으로 일부 공식자료들을 덧붙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진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보여줄 수 없는 것 같다. 언론이니 공식역사니 하는 것들에는 언제나 시끄럽고 큼직한 사건들만 나오는 법이니.





책 제목에 “양심”이라는 두 글자가 짙은 붉은 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고 오구마 겐지가 무슨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회운동가나 반전운동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에 끌려갔으니 변변한 기술 하나 제대로 배울 새가 없었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에도 밥벌이를 위해 십수 번의 직장을 옮겨가며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다행이 전후 복구 붐에 올라타 나름의 사업체도 만들어 말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무슨 대단한 비전을 위해 했다기보다는 그저 먹고살기 위한 한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했다는 기억은 그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던 것 같다. 전후 그는 꾸준히 전쟁의 책임을 승계하고 있는 자민당에는 단 한 번도 표를 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은퇴 후에는 지역사회의 봉사화동, 환경운동에 (본인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라도 채워주려고 애썼고,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회가 되는 대로 알려서 반전의 신념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마찬가지로 포로까지 되었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오웅근씨의 소송에 공동원고로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3연속 패소였지만, 이런 결심을 한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게는 아직 “양심”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 정부에 의해 자행된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에 관해 조금의 공식적인 책임도 지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곤 한다. 그런데 책 말미를 보면 일본정부의 이런 태도는 단지 외국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국민에게도 동일하게 취해지고 있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전쟁 피해는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뎌야 한다”는 희대의 막장 논리로 정부의 공식적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결국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너무 시끄러우니 입을 좀 다물게 하겠다는 의도로 위로금(그것도 정부 공식 예산보다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후원금을 바탕으로 한)을 지급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단골 대처방식이다. 이게 일본 국민들에게야 정부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 돈 보다 사과가 우선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전범국, 가해국의 국민이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국 정부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반대하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한 수많은 소시민들 중에서 누가, 얼마나 이런 일에 온 힘을 다해 참여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국의 전쟁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부터 조금이라도 애쓰기 시작한다면, 그 또한 양심적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작 전쟁의 최종적인 책임이 이들에게 잇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을 “일본 양심의 탄생”이라고 붙은 건 좋은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비단 일본에만 이런 양심이 필요한 건 아니다. 당장 우리 안에도 이런 양심들이 필요한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베트남전에 참여해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에 대해서도,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4.3사건, 보도연맹사건 같은 사상에 근거한 민간인 학살들, 심지어 며칠 전에도 대통령의 비서관의 주둥이를 통해 폄훼된 5.18 같은 데서 더 많은 가해자측에 섰던 이들의 양심이 필요하다.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고, 기억하지 못하면 힘 있는 이들이 멋대로 우리의 기억을 조작하려 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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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 - 주님을 사랑한 첫 여성 제자들 이야기
레베카 맥클러플린 지음, 김은홍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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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성도 장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 한 적이 있다. 꽤 보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댓글이 몇 개 기억에 남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더러 “성경을 바꾸려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며, 성경에 분명 장로는 “남편”이어야 한다고 써 있으니 여성은 장로도, 목사도(이 말은 하지도 않았지만, 논리적인 귀결이기는 했다) 될 수 없다고 홀로 선언하는 댓글이었다(지금은 삭제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체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화적 배경 아래 쓰이고, 특히 우리의 경우 (상징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번역의 번역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성경을 손에 들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자구 하나에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건 조금은 우스운 일이다. 그건 성경을 귀중하게 보는 태도가 아니라 우상시 하는 모습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보다 수천 년 전 성경이 쓰였던 당대의 문화에 집착하는 복고주의일 뿐이다(물론 이 둘을 가리는 게 때로 어렵기도 하다).


무식함이야 죄는 아니지만, 무례함은 분명 회개해야 할 악이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기 의에 충만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복음서 속 어떤 이가 떠올랐다. 교회의 직분이란 성별이나 인종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맡는 게 옳다. 내가 알기론 그게 바울 서신 속 핵심 주장이다.





이런 성경 속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시선, 처우,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여전히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는 여성에 대한 교회 내 지위나 역할에 차등을 두고 있다. 더더욱 황당한 건 자신들의 그런 태도가 마치 성경에 의해 지지되는 것인 양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기독교가 전성기를 맞았던 중세 이래로 교회 내 여성의 지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틀렸느냐,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느냐는 반문은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또한 판단착오와 오해로 많은 실수를 하듯, 그들 또한 자신들이 속했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오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다는 갈 3:28의 진리가 적어도 교회 안 삶 속에 실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최근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또 하나의 우려도 공감이 되긴 한다. 소위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 전체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이다.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의 발흥으로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 폐해를 목격한 사람들이 이쪽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론 이쪽 역시, 남성 중심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시대적 한계에 파묻힌 시도라고 본다. 하지만 일단 여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색안경을 끼게 만든 것도 사실이고.





자, 서론이 좀 길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여전히 교회의 직분이나 의사결정구조, 지위 등에서 소외되고 있는 교회 내 여성들에 대한 위로, 나아가 복음서 속 여성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재발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예수를 동성애자나 흑인으로,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지 않고서, 오로지 복음서 내 기록에 근거해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그러니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안심하시라).


저자에 따르면 복음서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뺀다면 우리는 손에 들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예수의 탄생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증언 때문이었고, 그분이 자신을 처음으로 생수의 근원으로 소개하셨던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은(그래서 그 대화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 증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 한 명 뿐이었다.


사실 이미 복음서에도 열두 사도 뿐 아니라 여러 여성 제자들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유명한 여성 제자였고, 그분과 함께 여행을 다니지는 않았더라도 곳곳에 그분을 따르는 여성제자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것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도 모두 여성제자들/증인들이었다.


책 제목처럼 이미 복음서는 ‘여인들의 눈으로 본’ 증언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오직 여성들이 더 우월하다는 극단적 주장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자(저자는 그런 뉘앙스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고 억압되고 있는 상황에서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책은 복음서 속 여성이 등장하는 본문들을 골라, 그 행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풀어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논리적 전개에 큰 무리가 없고, 결론도 그리 과격하거나 하지 않다(책 제목이 ‘여성의 관점으로 본’이 아닌 것에 주목하자). 하지만 복음서 안에 이렇게 여성들의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가 하는 작은 놀라움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목에 ‘여인들의 눈으로 본’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어있지만, 책은 기본적으로 복음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꼭 여성이라는 주제가 아니라도 복음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충분히 선택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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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1 : 침묵의 언어 이상의 도서관 46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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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하면서 추천받은 책이다. 필리핀 선교사로 10년 넘게 사역하시던 분이었는데, 타문화권에서 일을 하는 게 어디 쉬울까. 우리에겐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관행들이, 실은 인류의 보편적인 관습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무엇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결코 이런 일은 제대로 해 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시니 한 번쯤 읽어 볼만하다.


책 제목인 ‘침묵의 언어’는 비언어적 언어(의사소통 수단)을 가리킨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표정으로 말할 수도 있고, 특정한 제스처는 거의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앞서도 말했듯,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무엇이지만, 그 영역 밖으로 나가면 전혀 다를 수 있다.




대학 시절 교양과목으로 한 학기 동안 수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 학기를 지나서는 딱히 쓸 데가 마땅히 없기도 해서 더 익히지 않는 바람에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는 게 몇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손위 남자 형제를 가리키는 수어였다. 가운데 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모두 접은 채로 손바닥을 자신 쪽을 향하게 해서 들어 올리는 거였다. 그렇다. 꽤 많은 나라들에서 욕으로 사용되는 그 제스처와 너무나 비슷하다(그래서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건지도). 당연히 수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동작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쉽게 부딪히곤 한다. 흔히 어떤 나라 사람들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고, 저 나라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속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것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편견들은 사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대로 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앞서 말한 선교사님과의 대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이 시간에 대한 다른 감각 부분이었다. 우리 달리 도심지를 제외하고는 교통수단이 지프니 말고는 거의 갖춰지지 않은 필리핀의 경우, 정확한 시간에 약속을 잡는 것이 애초에 무리라는 것. 이런 걸 모른 채로 필리핀인들이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 스텝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오해가 쌓이면 결국 의견 충돌로 이어지고 종래에는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





책은 이런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실제 사례들과 저자가 정리한 비언어적 언어의 다양한 양상들을 잘 제시하고 있다. 문화 간 차이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만 해도 2013년이니 벌써 10년 전이고, 원서는 무려 1959년에 나왔으니 그 사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이해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당시에도 미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두고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했다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싶다. 우리나라는 불과 1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이승만 정부의 극심한 정치 부패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인문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순한 사례들의 나열을 넘어, 저자 나름대로 이런 다양한 영역들의 정리를 통한 체계화까지 시도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책보다 좀 더 세련된 책들도 분명 있겠지만, 역시 근본을 손에 드는 게 주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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