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2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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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판사에서 앞서 나온 “바벨론의 역사”가 꽤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봤다가 결국 지금은 집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워낙에 오래된 나라이기도 해서 제대로 그 역사를 설명하는 책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같은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이 책 “비잔티움의 역사”도 데려왔다.


기본적으로 이 시리즈는 개론서다. 사실 족히 수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책 한 권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고, 또 그렇게 썼다고 해서 어려워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손에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에서 개론서는 분명 필요한 책이다. 특히 역사 분야 같은 건 좀 더 쉽게 접근해서 그 중 흥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또 개론서라는 데 있었다. 말했지만 개론서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반대로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선지식이 있다면, 개론서는 좀 시시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장르다. 정확히 내 경우가 그랬다.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만들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정리한 상황이기에, 적어도 책에서 간략히 서술된 내용보다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름에서부터 그리스 출신임을 물씬 드러내고 있는 저자가 쓴 이 책이 평범하다거나,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잔티움 사회사에 대한 다양한 최신 연구 결과가 곳곳에 실려 있고(물론 그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몇몇 포인트에서는 꽤 새로운 관점을 얻기도 했으니까.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잔티움”이란 동로마제국을 말한다. 한 때 지중해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적 문제와 외부적 요인들이 겹치며 점차 힘을 잃어 간다. 결국 제국의 방위를 위해 몇 명의 “황제들이” 동시에 자신이 맡은 구역을 방위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고, 이게 공식화된 것이 동서 로마의 분리다(물론 이 때도 공식적으로는 동등했으나, 상대적으로 동쪽의 황제가 서쪽에 비해 우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이 때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명칭 자체는 16세기에나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적절한 이름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서 로마의 분리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나라를 나눠 상속한 395년을 보통 기점으로 보고, 동쪽을 상속받은 아르카디우스를 동로마제국의 첫 황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이 책의 저자는 비잔티움 제국의 첫 황제를 콘스탄티누스 1세로 설명한다(의외로 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의 역사의 시작을 한참 과거로 밀어 올리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이곤 한다). 역시 그 주된 이유는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기 때문.


책은 그렇게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의 역사를 쭉 훑어간다. 다만 많은 서술이 단지 황제의 교체와 정치적 투쟁을 중심으로 하지만, 이 책의 경우 당대의 경제적 상황, 제도의 변화가 보여주는 사회적 상황 등에도 나름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사실 이 부분이 이 책이 갖는 고유의 가치다).





전체적으로 복잡한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한눈(300페이지를 한 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괜찮은 개론서다. 하지만 제국 말기로 들어가면 워낙에 잦은 정변과 복잡한 인척관계, 그리고 긴 이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아예 흥미가 없다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뭐 역사라는 게 그 정도의 문턱은 넘어가야 즐길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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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영성에 관하여
필 파샬 지음, 이숙희 옮김 / 죠이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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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려 50여 년 동안 무슬림들 사이에서 사역해 온 선교사다. 책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종교를 아홉 개의 항목에 걸쳐서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내용이다. 가장 먼저는 두 종교에서 믿는 신을, 그리고 경전, 예배, 고통, 죄, 신비주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지옥과 천국, 진리를 위한 추구라는 주제가 이어진다.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두 종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정도일 것 같다. 특히나 이 ‘공통점’은 실천적인 상황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반면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좀 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두 종교 안에는 공통적으로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고, 이는 정통주의와 긴장관계가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살짝 씁쓸한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무슬림을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미래의 심판을 별로 걱정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분명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하고, 궁극적이며, 무오한 계시임을 믿고. 무함마드가 참된 선지자였는지를 의심스럽게 본다(262). 또,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서 이사(예수)를 묘사하는 내용에 많은 왜곡과 편집이 들어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인정하듯 이 책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저자가 이슬람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12) 느껴질 만하도록 쓰였다. 저자는 이를 “십자군식 태도보다는 사랑으로 실수를 범하는 편”을 선택하려는 의도로 설명한다.


부분적으로 그런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엄밀한 의미의 학문적 접근만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굉장히 많이 담아내고 있다. 물론 그 경험 가운데는 고집 세고, 교만하고, 좁은 시야를 가진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이해심 깊고, 너그러우며, 배려할 줄 아는 친구도 있었다. 자연히 무슬림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적대심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 가운데는 교리적인 글보다는 다양한 필자들이 쓴 개인적인 신앙기록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설명하는 식인데, 자연히 호의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반면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신의 어조로 말하거나 쓰는 게 좀 꺼려질 수 있다. 심지어 비슷한 문제가 그 안에 많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책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무슬림들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좀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의 논조가 살짝 오락가락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보통 이런 책의 경우 이슬람교를 새롭게 보자는 취지로 호의적으로만 쓰거나, 반대로 완고한 교리적 정통주의에 입각해 상대를 악마화 하거나 하는 식이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슬람교라는 종교를 분석하기보다는, 그 종교를 믿는 무슬림이라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가 특정한 민족이니까, 혹은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으니까 이렇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납작한 서술이겠는가.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무슬림 또한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그래도 하나의 책을 쓸 때는 좀 더 명확한 게 머리에 잘 들어오긴 한다.)


실제 무슬림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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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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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에게는 꽤나 불쾌하고 아픈 명칭일 수도 있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멸칭이다. 분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역시나 소위 기자라는 이들이 벌이는 행태 때문이다.

이미 정파적으로 한 쪽에 확고하게 줄을 선 기자들이 벌이는 낯간지러운 찬양쇼나 닥치고 까고 보는 걸 무슨 대단한 비판의식의 표출이라는 자아도취, 문제를 가리기 위한 물타기 기사나, 뻔히 돈을 받고 쓰는 게 보이는 광고성 기사들, 자신이 적대적으로 여기는 정치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몇 년 전 스스로가 썼던 기사의 논조를 180도 바꾸면서도 아무런 해명 따위도 하지 않는 뻔뻔함 뭐 이런 행태들이 모아진 결과일 것이다. 어디 재활용도 안 되는 악성 쓰레기.

물론 이 모든 것이 기자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마당에 위에서 시키는 걸 거부하는 건 여느 직장처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또, 일개 기자가 가질 수 있는 통찰의 한계도 분명하지 않은가. 때로 그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보이는 건, 몇몇 수준 이하의 개체들의 난동이 크게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최근 우후죽순 생겨난 온라인 신문과 무자격 기자들도 한 몫을 했을 수 있고.

이 책의 저자인 김인정 또한 기자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기자다. 기레기의 홍수 속에서,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이렇게 말하면 좀 박한 평가가 되려나) 애쓰는, 어쩌면 좋은 기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어떻게 하면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한 가득 채워져 있다.

책에 실려 있는 다양한 고민의 핵심에는 어떻게 고통을 기사로 써 내야 할까라는 질문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사로 접하는 사건들은 대개 누군가의 고통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맞고, 죽고, 학대당하는, 사기와 온갖 억울한 일들로 뉴스와 신문의 기사면이 채워져 있는 것. 그러니 저자의 고민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냥 보여주면 그만이 아니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는데, 대개의 사건은 연속적이라 어디서부터 들을지를 결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많은 경우 복잡한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보다는 그저 겉핥기식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데 그치곤 한다. 당연히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아니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제대로 된 인식을 갖추기도 어려워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전시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구도에서 지방의 뉴스는 늘 무슨 문제가 있을 때나 등장하는 특별출연자역에 한정되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기사에서의 논조의 문제 등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기사란 단순히 어떤 사건의 내용을 요약 서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게 금세 드러난다.

AI의 발달로 이제 기사 역시(신문기사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뉴스까지도) AI가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과연 탐사보도를 할 수 있을까? 비대칭적인 정보의 양을 가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능력이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편견어린 시선을 스스로 필터링하고 뭔가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AI의 객관성을 우리는 늘 신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역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단지 기자라는 명함만 파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저널리즘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며 오랫동안 준비한, 그리고 밥벌이라는 중요하고도 치열한 영역 가운데서도 소위 기자정신을 지켜내려는 배짱이 있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사실 무언가 해답을 제시해 주는 책은 아니다. 저자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 왔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해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물론 저자의 모든 관점에 동의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다면, 또는 기자라는 직업에 흥미가 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언론이 어쩌구 하면서 한 마디 얹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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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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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됐다. 시리즈 제목이 퍽 간결하다. 그냥 “카이사르”. 앞선 시리즈 제목이 “로마의 일인자”, “풀잎관”, “포르투나의 선택”, “카이사르의 여자들”처럼 나름 임팩트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냥 이름 네 글자만 떡 실려있다. 뭐 애초에 이 시리즈가 카이사르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구나 싶기도 하고.(하지만 또 바로 다음 시리즈의 제목은 멋지다)


이번 책의 주 무대는 갈리아다. 로마화 된 남부 갈리아가 아니라 일명 “장발의 갈리아”라고 불리는 북부, 군사적으로는 정복되었지만 아직 로마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호시탐탐 독립을 시도하던 땅이다. BC 54~53년의 일이니 갈리아전쟁이 5년째에서 6년째로 넘어간 시점인데, 사실상 갈리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시점인지라 화려한 전투 장면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물론 이 작가가 전술적 이해도는 좀 낮아서 전투 장면이 실감나지는 않다).


그래도 월동지에 머물던 한 개 군단이 전멸되는 사건이 일어나긴 하는데, 곧 카이사르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갈리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큰 사건이 하나 남아있지만 아마도 그건 다음 권에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 시기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일과, 이듬해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마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전자 쪽이 좀 더 큰 영향을 준 일이었는데, 로마의 유력자 두 사람을 혈연으로 이어준 율리아가 죽음으로써, (물론 앞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미 깨진) 삼두정치는 사실상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책에서는 원로원의 보수 세력인 보니파가 정략결혼으로 폼페이우스를 포섭하는 과정만 나오는데, 결국 그렇게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보수파의 추대로 카이사르와 대결을 하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이 시리즈의 가장 치열하고 빛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추측.





이 시기 로마의 원로원파가 굳이 카이사르와 손잡고 있던 폼에이우스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사실상 당시 정국이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포퓰리스트에 가까운 클로디우스라는 인물과 보수파의 수하인 밀로라는 인물이 각각 자경단을 조직해 시도 때도 없이 폭력사건이 일어나고, 평민집회에서 뽑힌 호민관들은 자신을 당선되게 도와준 후원자들의 지시에 따라 거부권을 남발하며 고등정무관 선거를 막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밀로가 클로디우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해 진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폼페이우스를 경계하던 카토 같은 극 보수파조차도 폼페이우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주어서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어느 시기든 정치가 혼란해지면, 사람들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웅적 지도자를 찾게 되는 법이다. 문제는 그렇게 쫓기듯 선택하는 영웅이 제대로 된 영웅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지만.


여느 때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남은 책이 8권 밖에 안 된다는 게 아쉬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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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눈이 보여 주는 것 - 문학, 질문하며 함께 읽기
홍종락 지음 / 비아토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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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번역자로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에도 좋은 번역으로 여러 책을 통해 만난 홍종락 번역가의 신작(이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이다. 며칠 다시 도진 감기로 책 한 자 못 읽다가 복귀하는 첫 책으로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 내용도 그리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렵지도 않고, 책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성격상 여러 책들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있어서 부담도 덜하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저자가 읽었던 여러 책들 중 몇 권을 뽑아 소개하는 구성이다. 소개되는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이라는 점. 소설이다. 저자가 기독교라는 배경을 갖고 있지만, 여기 소개되고 있는 책들이 모두 기독교 소설인 건 아니다. 물론 그걸 어떻게 읽어내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저자 개인의 취향이 물씬 드러난다.


각각의 책에서 저자가 뽑은 핵심적인 내용들을 짤막하게 소개한 뒤에는,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할 만한 질문들이 덧붙여져 있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들을 가지고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만들었던 질문이었을까. 덕분에 여기 소개되어 있는 책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다음 독서모임에 사용할 때 도움도 꽤 될 것 같다.





책 제목이 특이하다. 전혀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제목인데, 알고 보니 C. 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다루는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루이스의 또 다른 대표작인 “나니아 연대기”도 소개되어 있고, 꼭 직접 루이스의 책을 다루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다른 책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책 속 한 구절들을 인용해 덧붙인다. 덕분에 이 책은 내 ‘루이스 컬렉션’에 들어가게 됐다.


역시나 이런 책을 보면 내가 읽어야 할 책이 아직은 한참 더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개의 장에 소개된 책들 중에는 물론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여전히 만나보지 못한 책들이 더 많다.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이 그렇듯, 책 전체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는 법이고, 책 내용의 일부만으로 전체의 흐름을 설명하되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결말을 스포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 전체 윤곽이 잘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내가 읽었던 책에 관한 소개 부분을 보니, 이 정도만 가지고는 전체 내용이 잘 안 잡힐 수도 있겠는데 싶은 생각이 몇 번 들었다.





글에서 얼마나 저자가 성실하게 읽었는지가 느껴진다. 문장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전달하려고 애쓴다. 뭔가 강한 맛이 살짝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문으로 꽉 채워내는 구성이 개인적으론 좋았다. 많은 책들이 무슨 후기 같은 것들을 넣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거기까지 가면 그닥 김이 빠져서 굳이 읽고 싶은 생각까지 안 들 때가 많지만, 이 책은 말 그대로 서지사항이 표시된 바로 앞 장까지 꽉 채워져 있다.


앞서 나왔던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읽어 볼만한 소설들의 목록을 얻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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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6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노란가방 2024-03-26 20:11   좋아요 0 | URL
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