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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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전반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이 발전의 열매가 세계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전반적인 발전의 양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적어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책의 첫 두 장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아지고 있는 지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몇몇 통계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 조금 달라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자 중 2/3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은 10% 이하라고 한다. 반면 194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을 시작했다. 또, 미국인의 14% 정도만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그 14%도 전혀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그에 반해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은 사실상 무너졌고, 의료보험 체제도 비참할 정도라는 식의 과장된 수사들을 쉽게 접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면 왜 현대인들은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도 그토록 불행하다고 느낄까? 저자는 다분히 심리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은 과거 사람들은 앞으로 좀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현실의 불편함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을 얻겠다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또, 이미 이룬 성과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붕괴 불안 심리도 작동하고.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불평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언론은 범죄 현황에 대한 과장된 보도를 즐겨하고,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사는 부자들의 생활에 관한 정보가 쉽게 퍼지는 것도 불평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다. 사람들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사치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당연히 모두가 그 기준치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사랑, 우정, 존경, 가족, 지위, 재미)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고, 어떤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면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통계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수입 증가는 행복감을 늘려주지만, 연간 약 1만 달러의 수입을 전후해서 그 효용감은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즉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저자는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좀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감사와 용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해결책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책의 후반 두 장 정도는 최저임금을 좀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대기업 CEO들이 악랄한 한탕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도 보인다. 또,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이른바 공정무역이나 저개발국가에 대한 관세 인하 같은 정책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판과 지적이긴 한데,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심리적인 것에 할애해 왔으니까 말이다.


“진보의 역설”이라는 책의 제목은, 경제적으로는 분명 크게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진보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을 느낀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발전을 하려고 하는 걸까?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온,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해 온 지난 한 세기 인류의 주류적 사고가 낳은 부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인 차원에만 집중하는 건(물론 우리는 물질적인 번영도 필요하다) 최종적인 답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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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차보람 옮김 / 비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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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신앙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신앙을 부정하는 동기가 될까. 이에 관해 세속주의자들은 모순되는 두 가지 입장을 보통 주장하곤 한다. 그들은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지만) 고대의 원시인들이 천둥이나 번개 같은 두려운 자연현상을 보고 신앙심이 생겨 종교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오늘날 일어나는 같은 현상들을 보면 세상을 다스리는 (선한) 신이라는 개념은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같은 현상이 정 반대의 두 가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이 모순적 입장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태도는 종교(와 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개념이라는 논지다. 이 입장의 가장 큰 약점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증명되지 않은 신화적 설명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약점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대에도 여전히 신앙을 갖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나아가 실천적 차원에서의 질문을 제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시작되었을 때부터 다양한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고, 당연히 이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일관된 논리적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 기독교회에 대한 외부의 비방과 논리적 공격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신정론이란 이 과정에서 생산된 다양한 신학적 논리들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종류의 신정론들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악과 고통의 문제와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섭리)라는 주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대 로마제국의 쇠퇴기, 기독교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자들에 대항해 최초의 역사신학적 논리를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신정론을 다룬다. 책의 볼륨 자체가 작기도 하고, 읽다 보면 곧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책의 배경이 되는 글은 저자가 한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이기도 해서(이 칼럼을 확대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게 이 책이다), 전반적인 논지가 복잡하지는 않다.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전선을 설정한다. 첫 번째 전선은 세속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그어진다. 그들의 공격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데, 이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가득하다면 전능하면서도 선한 신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식이다. 신이 선하다면 세상이 악과 고통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런 능력이 없거나, 애초에 그럴 의사가 없다는 식.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식의 사고를 신인동형론적 발상에 근거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신을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로 그의 선택과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보고 있는 물리적 우주에 국한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딱 자기들 수준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물론자는 누군가가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종의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혀, 현실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없으니 물질의 인과 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결론짓는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전선은 흥미롭게도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그어진다. 이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성급하고, 많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악과 고통이 어떤 식으로는 하나님의 더 큰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때 커진다. 이렇게 될 때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의 이 두 번째 전선의 하위 전선이 이른바 칼뱅주의와의 사이에 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중예정(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과 제한 속죄(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주장)라는 교리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적인 결론으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저자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히 의지하신다는 말과, 하느님은 영원부터 피조물을 선하게 청조하셨으며 악조차 은총이 작용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만물이 선을 향하도록 질서를 잡으심으로써 피조물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섭리란 후자 쪽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두 개의 전선에 걸쳐 저자가 하는 비판은 곱씹어 들을 만하다. 유물론자들이 감정적 논증에 빠져있다는 주장과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나머지 영역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둘 모두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책에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과정신학이라는 도구로 이 문제를 접근하려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쪽은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켜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면 저자의 대답은 무엇일까? 저자는 악과 고통에 어떤 종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신학적 이론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여기에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진술이 배경에 있다. 나아가 성경에서 죄와 악이 어떤 식으로는 선을 이루는 필수 조건이라는 뉘앙스조차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복음은 악과 그 결과인 죽음의 극복, 아니 전복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 대답은 앞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완벽하고 매끄러운 논리적 논증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하나님을 제1원리로 인정하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적극적인 결정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제안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아마도) C. S. 루이스 역시, 하나님이 매순간 우주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신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여기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보인다. 저자 역시 이게 “누군가의 눈에는 궤변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에 관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는 “신비”의 영역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 또, 여기에는 저자의 신학적 배경인 정교회의 분위기도 살짝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자가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두 번째 전선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당혹스러운 발언들이 우리를 늘 더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악과 고통, 큰 재앙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의 진짜 대답은 어쩌면 입을 좀 다물고, 주제넘게 설명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을 하려다 스스로 실책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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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크리스마스
김경형 감독, 김지수 외 출연 / 알스컴퍼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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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우주.


영화는 세 명의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사실 영화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영화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 김지수가 연기하고 있는 38세의 우주는 미혼모로 어린 딸과 함께 시골로 내려와 카페를 차리려고 한다. 그리고 원래 골동품을 팔던 그 곳에서 자신의 옛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십대 소년과 소녀를 만나게 된다.


오래 전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사랑하던 남자도 있었다. 어느 날 프랑스로 가겠다는 그의 말에 우주는 함께 떠나기를 주저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 것. 그런데 자신이 카페를 차리고자 했던 곳에서 일하던 소년에게 자신과 똑같은 성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친구(윤소미)가 있었고, 두 사람 모두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며, 소년은 프랑스로 떠나고자 하는 꿈을 말하곤 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성우주가 등장하니, 골동품점에 얼마 전 팔았던 구체관절인형을 다시 찾으러 돌아왔던 20대의 우주(허이재)였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38세의 우주는 그녀의 사연에서 또 자신의 옛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밝혀지는 내용은, 놀랍게도 세 명의 우주는 모두 미술을 전공하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 중 남자는 프랑스로 떠났거나 떠날 예정이었으며, 그 남자는 사실 자신의 친구와 만났거나 친구가 좋아하던 남자였다는 것. 이 무슨...




같은 관계, 같은 선택?


20대의 우주(허이재)는 30대의 우주(김지수)가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의 남자친구와 만나고 있었고, 그가 만나던 남자는 그녀의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로 함께 떠나자고 말하고 있었다. 30대의 지수가 그랬듯 이 제안을 거절하면 어쩌면 그녀 또한 미혼모로서 어린 딸과 함께 살게 될 지도.. 나아가 10의 우주(윤소미) 역시.


바로 눈앞에 자신의 미래가 실제로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두 명의 젊고 어린 우주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당연히 그들은 우선 놀라거나 어이없어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30대의 우주는 이 사이에서 뭐라 구체적인 조언을 던지지는 않는다. 이미 자신의 삶(과 그 속의 선택)이 다른 두 우주들에게는 하나의 예로 제시되어 있고, 그녀들은 그녀들의 결정에 따른 삶을 살면 된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름과 약간의 에피소드가 겹친다고 해서 그녀들이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건 지나친 생각이니까.






여성영화.


영화는 여성을 중심인물로 두고 그녀들의 삶의 이야기를 펼치는, 여성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강조, 본인의 선택과 그 결과를 떳떳하게 감당하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들의 삶은 단순히 남자들에게 의존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영화는 딱 거기까지다. 영화 속 30대 우주처럼, 가만히 좀 더 어리고 젊은 우주들이 그들만의 인생을 그려갈 수 있도록 응원한다. 지나치게 호들갑스럽지도 않고, 곁에 선 남자들을 비난하거나 추궁하지 않는다. 요샌 워낙 사나운 사람들이 많아서 이 정도만 돼도 안심(?)이다 싶은 느낌이랄까.


물론 영화 자체가 약간 세 명의 인물이 환타지적으로 엮이는 그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신비한 원리가 정말 존재하고 그런 건 아니다. 어쩌면 극히 일어나기 힘든 수준의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을 뿐일 지도.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될 것이라든가, 너희는 이렇게 살지 말아라 라는 식의 이제는 좀 스테레오타입으로 느껴지는 교훈이 아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다만 뭔가 확 끌어당길 만한 요소가 부족하긴 했다. 영화 전체가 굉장히 잔잔하면서, 서로 다른 인물들이 처한 비슷한 상황이라는 소재 말고는 특별히 눈길을 확 끄는 부분은 부족했다. 그리고 인물들 사이의 감정적 교류도 좀 부족한 느낌. 애초에 드라마 장르로 만들 거였다면 이 부분에 좀 더 공을 들여야 하지 않았을까? 단지 이름이 같다고 해서,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토록 서로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될까? 심지어 30대 우주에게는 딸도 있는데, 어느 순간 딸은 보조인물 정도로만 여겨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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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G. K. 체스터턴 지음, 이은진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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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 고백(?)했던 것처럼, 체스터턴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고자 했던 건, 그의 글이 C. S. 루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물론 어린 시절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작가로 알고는 있었지만, 최근 아바서원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보면서 확실히 내공이 상당한 작가라는 걸 깨닫고는 어서 또 다른 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체스터턴이 다양한 자리에서 썼던 글 중 인상적인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 표지에도 아포리즘이라고 적혀 있는데, 물론 그 말처럼 아주 짧은 한두 문장만 실려 있는 페이지도 있지만, 한 페이지 가득한 글들도 있어서 정확히 아포리즘이라고만 부르기엔 살짝 어색하다. 하지만 그런 이름표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책에 실려 있는 내용만 좋으면 그만이지.


페이지를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부터 확실히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온다. 연신 손에 들고 있는 포스트잇을 붙여대다 보니 금세 떨어져 버렸다. 세상에 관한 탁월한 분석과 적당한 비판적 거리감, 그리고 깊은 신앙적 통찰까지, 체스터턴의 다양한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앞서도 언급했던 체스터턴의 두 권의 책(“정통”, “영원한 사람”)이 어느 정도 그의 글쓰기 방식의 특징들(짙은 반어적 유머 같은)을 이해하고 나서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진입장벽 비슷한 게 있다면, 이 책은 그런 것 없이 체스터턴이라는 인물의 생각을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책의 긴 제목은 여기에 인용해 놓은 한 글 속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일단 확실히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포인트를 잘 잡아냈다 싶긴 하지만, 너무 길긴 하다. 그래도 또 생각해 보면 은근 책 전체를 엮어낼 만한 부분도 없지 않아 느껴지기도 하고.


책을 읽고 나면 자연히 체스터턴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추리소설류를 제외하면 겨우 세 권쯤만 보인다. 루이스의 책을 모두 읽고, 반복 읽기를 계획하고 있는 이즈음, 괜찮은 광맥을 발견한 광부가 된 느낌이라 살짝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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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가 읽어주는 성경 - C.S. 루이스의 원작 소설에 숨겨진 성경 이야기
크리스틴 디치필드 지음, 김의경 옮김 / 크림슨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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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니아 연대기”는 다양한 해석을 하는 맛이 있는 책이다. 어떤 독자는 판타지 문학의 한 종류로 즐길 수도 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기독교 교훈에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 작품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너무 교훈에 집중하는 건 문학을 문학으로 읽는 방법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작품에서 성경과의 연관성을 외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루이스 자신이 이 책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쓰지 않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신앙이 묻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고. 사실 “사자와 마녀와 옷장” 같은 책 속에 등장하는 아슬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긴 한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나니아 연대기 해설서들에도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이 책이 갖는 기독교적 함의에 대해 반드시 언급하는 편이다. 크림슨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출판사에서 나온(놀랍게도 이미 이 출판사에서 나온 나니아 연대기에 관한 또 다른 해설서가 내 책장에 한 권 있었다!) 이 책도 이런 부분에 집중한다. 아니, 그 중에서도 성경과의 연계에 집중한다.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나니아 연대기 7권의 책들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주요 사건들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인용해 덧붙이는 식이다. 책 제목처럼 나니아 연대기와 성경 읽기를 밀접하게 연결시켜 놓은 형식이다. 무슨 심오한 해석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또 직관적으로 딱 의도한 내용만을 정확하게 담아냈다.



애초에 책의 방향성이 명확하기에, 이 책의 쓰임 역시 분명할 것 같다. 나나이 연대기의 각 장면을 성경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 이 책을 사용할 필요까지는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문학은 문학으로 읽는 게 우선이니까.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이 작품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한다면? 또, 문학을 읽은 후 해석의 차원은 언제나 넓게 열려 있으니까, 그 한 쪽에 분명 자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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