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안 책방 - 아직 독립은 못 했습니다만 딴딴 시리즈 2
박훌륭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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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약국에서 화장품도 팔았다. 사실 외국에선 드러그 스토어라고 해서 약국에서 온갖 것들을 파는 걸 보긴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뭐 그랬었다. 하지만 올리브영이니 뭐니 하는 화장품 멀티샵이 늘어나면서 이 기능을 거의 가져가 버렸다. 현직 약사인 이 책의 작가는 그렇게 (화장품이 빠지면서) 비어버리게 된 자리에 책을 채워놓기로 한다. 이른바 샵인샵 책방의 시작이다.


이 책은 그렇게 조금은 충동적(?)으로 시작한 책방 경영기다. 경영기라고 해서 무슨 전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소소한 작가의 경험들, 책방을 운영하며 있었던 일들 중 기억에 남는 장면들 등을 소소하게 엮어낸 책이다.





비슷한 종류의 작은 서점의 운영자들이 쓴 책을 몇 권 본적이 있는데, 이건 또 약국 안에 있는 책방이라는 콘셉트가 흥미로웠다. 작은 동네서점의 가장 큰 고민은 임대료 같은 고정비용지출 부분인데, 확실히 약국이라는 기본적인 시설이 바탕에 있어서 그런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적다. 이와 관련해 책 표지에도 적혀 있는 “아직 독립은 못 했다”는 문구는 아쉬움 보다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사실 저자는 굳이 서점을 독립시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요새 유행하는 일종의 부캐 느낌이랄까. 약국 안에 책을 들여놓고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조금 더 싸게 들여올 수 있다는 이득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 같다. 먹고 살 걱정만 없으면 책만 보며 책에 관한 일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에겐 그저 부러울 따름.




책 말미에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이 실려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방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위한 경영적 차원에서의 조언은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부업으로 시작한 동네서점 이야기라는 한계이겠지만, 뭐 이런 모양으로 또 하나의 책방이 만들어지는 것도 재미있긴 하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와의 공통점도 느껴진다. ‘역시 책 좀 보는 사람은 저런 데가 있지’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얇은 책이라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른다. 작가의 즐거운 도전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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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3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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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다. 이번 권에서는 드디어 삼두정치가 결성되는 장면이 나온다. 전직 법무관 신분으로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방해로 당시 로마 남자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늘 상식을 깨뜨리는 카이사르다.)


그렇게 수석 집정관에 당선되었지만, 하필 그의 동료가 카이사르가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하겠다는 작심으로 나선 비블루스였다. 그리고 이제 카이사르의 반대편에는 모든 면에서 원로원 계급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나선 보니파라는 정치적 파벌이 있었다. 애초에 집정관 당선이 자신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카이사르로서는 더 큰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이런 상황을 타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서 삼두정치가 등장한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업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태생적 한계 때문에 원로원파로부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전쟁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배분할 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또 새롭게 얻은 동방속주의 세금 징수업무에 나섰다가 큰 손해를 보게 된 기사계급은 크라수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크라수스 역시 원로원의 반대로 막혀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두 사람과 손을 잡고 현직 집정관의 힘으로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던 갈리아 정복을 위한 합법적 지위를 얻어낸다.






마침 유튜브 채널에 카이사르 시기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 읽기 영상을 올리는 중이라 같은 시기를 어떻게 다르게 써 내려가는지 비교하며 보는 맛이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삼두가 결성되자마자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고 보니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서술을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삼두 결성 이후에도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로마의 정치상황을 묘사한다. 아무래도 이쪽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갖는 글의 여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해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사 전체를 써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꽉 막힌 로마의 정치 상황을 한참 읽다 보면, 카이사르가 이런 뭐 하나 되는 일없는 체제를 뒤엎어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가 실감나게 와 닿는다. 겨우 1년 밖에 안 되는 집정관 임기를 오로지 동료 집정관인 카이사르가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쓰는 행태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도 그대로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원로원 계급이라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속셈이 있었으니...


결국 정치가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만 치달으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평민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섰던 포퓰리스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국가 정치는 좀 더 큰 공동체를 위해 운영되어야 하지만, 요새는 소위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 소수그룹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만이 정당하고 옳은 일인 양 착각하는 정치인들이 참 많다.





애초에 선거로 뽑힌 정치인들이 국정을 운영한다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그래서 그런지 밥 먹고 하는 일이 온통 이런 고민뿐이었던 고대 철학자들 중에 의외로 민주정을 혐오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또, 소위 표계산이 쉬운 소선거구제 아래서는, 어떻게 하든 상대 후보보다 1표만 더 받으면 이길 수 있으니, 진영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자기편에 더 강한 방식으로 소구하려는 정치인들이 나오기 더 쉬운 것 같기도 하다. 선거가 충성투표 쟁, 정체성 전투의 현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물론 그렇다고 카이사르의 삼두정치 같은 해결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삼두정치란 실력자들의 야합이었고,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는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으니까. 만약 그 중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카이사르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에 몰입하는 인물이었다면 로마의 상황은 훨씬 더 안 좋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카이사르가 만들어 낸 1인 중심의 체제에는, 그 1인의 자질에 너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떠났다. 그 유명한 갈리아 전쟁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풀려나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그 전에 읽어야 할 책들이 몇 권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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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신학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성경적 지침
폴 스티븐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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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크리스천 창업가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스타트업 대표들과 함께 독서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서 읽을 책을 찾던 중에 전부터 눈여겨보던 폴 스티븐슨이라는 저자를 선택했다. 사실 잘은 알지 못했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 한 구절을 적어둔 게 있었는데, 그걸 기회로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일터 신학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크게 보면 일과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에 관한 내용이지만, 좀 더 좁게 들어가면 사업가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이번 모임에 딱 맞는 책이었던 것.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인 1부에는 “의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비즈니스라는 영역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는 여전히 교계에 남아있는 성속 이원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사업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다음 끼니를 제공할뿐더러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게 돕는 최상의 장기 전략”이라고 말한다(25).


저자는 사업은 더 거룩한 어떤 일을 지원하기 위핸 도구적 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업 그 자체가(일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하고,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등의 그 모든 제반 업무가) 하나의 거룩한 일, 나아가 소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저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맞닿아 있다.


후반부에는 “동기”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제 사업이라는 영역을 기독교적으로 해 낼 수 있는지, 여기에 필요한 영적 조언들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때문에 신학적인(또 성경적인) 접근이 자주 보인다.


저자는 사업이라는 영역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기에 정기적으로 잠시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진실함과 창조성,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안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책에서 하는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올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원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종류의 신성한 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고.


물론 최근에는 목사와 선교사가 하는 일이 가장 거룩하고, 교회의 제단에서 하는 일만이 신성하고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고수하는 신자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바른 신학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세속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나타난 결과인 경우가 좀 더 흔하다. 결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매커니즘이다.


맨 처음 말했던 모임에서 함께 교제할 기회를 누리면서, “사업의 영역에서 신앙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구나,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팔팔한(?) 분들이” 하는 놀라움이 컸다. 그들이 신앙과 일터를 통합하는 관점에 얼마나 갈급해 있는지도 와 닿았고. 이 책은 바로 그런 독자들에게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좋은 신학적 바탕 위에 비즈니스라는 영역을 훌륭히 녹여냈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일터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경험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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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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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전반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이 발전의 열매가 세계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전반적인 발전의 양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적어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책의 첫 두 장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아지고 있는 지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몇몇 통계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 조금 달라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자 중 2/3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은 10% 이하라고 한다. 반면 194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을 시작했다. 또, 미국인의 14% 정도만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그 14%도 전혀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그에 반해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은 사실상 무너졌고, 의료보험 체제도 비참할 정도라는 식의 과장된 수사들을 쉽게 접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면 왜 현대인들은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도 그토록 불행하다고 느낄까? 저자는 다분히 심리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은 과거 사람들은 앞으로 좀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현실의 불편함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을 얻겠다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또, 이미 이룬 성과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붕괴 불안 심리도 작동하고.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불평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언론은 범죄 현황에 대한 과장된 보도를 즐겨하고,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사는 부자들의 생활에 관한 정보가 쉽게 퍼지는 것도 불평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다. 사람들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사치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당연히 모두가 그 기준치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사랑, 우정, 존경, 가족, 지위, 재미)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고, 어떤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면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통계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수입 증가는 행복감을 늘려주지만, 연간 약 1만 달러의 수입을 전후해서 그 효용감은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즉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저자는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좀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감사와 용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해결책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책의 후반 두 장 정도는 최저임금을 좀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대기업 CEO들이 악랄한 한탕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도 보인다. 또,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이른바 공정무역이나 저개발국가에 대한 관세 인하 같은 정책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판과 지적이긴 한데,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심리적인 것에 할애해 왔으니까 말이다.


“진보의 역설”이라는 책의 제목은, 경제적으로는 분명 크게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진보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을 느낀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발전을 하려고 하는 걸까?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온,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해 온 지난 한 세기 인류의 주류적 사고가 낳은 부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인 차원에만 집중하는 건(물론 우리는 물질적인 번영도 필요하다) 최종적인 답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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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문들 - 상처입은 세계와 하느님의 구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차보람 옮김 / 비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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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신앙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신앙을 부정하는 동기가 될까. 이에 관해 세속주의자들은 모순되는 두 가지 입장을 보통 주장하곤 한다. 그들은 (한 번도 확인된 적이 없지만) 고대의 원시인들이 천둥이나 번개 같은 두려운 자연현상을 보고 신앙심이 생겨 종교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오늘날 일어나는 같은 현상들을 보면 세상을 다스리는 (선한) 신이라는 개념은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같은 현상이 정 반대의 두 가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이 모순적 입장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태도는 종교(와 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개념이라는 논지다. 이 입장의 가장 큰 약점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증명되지 않은 신화적 설명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약점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대에도 여전히 신앙을 갖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악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나아가 실천적 차원에서의 질문을 제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시작되었을 때부터 다양한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고, 당연히 이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일관된 논리적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 기독교회에 대한 외부의 비방과 논리적 공격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설명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신정론이란 이 과정에서 생산된 다양한 신학적 논리들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종류의 신정론들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악과 고통의 문제와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섭리)라는 주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대 로마제국의 쇠퇴기, 기독교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자들에 대항해 최초의 역사신학적 논리를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신정론을 다룬다. 책의 볼륨 자체가 작기도 하고, 읽다 보면 곧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책의 배경이 되는 글은 저자가 한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이기도 해서(이 칼럼을 확대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게 이 책이다), 전반적인 논지가 복잡하지는 않다.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전선을 설정한다. 첫 번째 전선은 세속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그어진다. 그들의 공격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데, 이 세상에 이렇게 악과 고통이 가득하다면 전능하면서도 선한 신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식이다. 신이 선하다면 세상이 악과 고통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런 능력이 없거나, 애초에 그럴 의사가 없다는 식.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식의 사고를 신인동형론적 발상에 근거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신을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로 그의 선택과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보고 있는 물리적 우주에 국한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딱 자기들 수준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공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물론자는 누군가가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종의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혀, 현실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도덕적 질서가 없으니 물질의 인과 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즉각적으로 결론짓는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전선은 흥미롭게도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그어진다. 이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성급하고, 많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악과 고통이 어떤 식으로는 하나님의 더 큰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때 커진다. 이렇게 될 때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의 이 두 번째 전선의 하위 전선이 이른바 칼뱅주의와의 사이에 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중예정(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과 제한 속죄(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주장)라는 교리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적인 결론으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저자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영원히 의지하신다는 말과, 하느님은 영원부터 피조물을 선하게 청조하셨으며 악조차 은총이 작용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만물이 선을 향하도록 질서를 잡으심으로써 피조물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섭리란 후자 쪽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두 개의 전선에 걸쳐 저자가 하는 비판은 곱씹어 들을 만하다. 유물론자들이 감정적 논증에 빠져있다는 주장과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나머지 영역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둘 모두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책에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과정신학이라는 도구로 이 문제를 접근하려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쪽은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켜 악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면 저자의 대답은 무엇일까? 저자는 악과 고통에 어떤 종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신학적 이론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여기에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진술이 배경에 있다. 나아가 성경에서 죄와 악이 어떤 식으로는 선을 이루는 필수 조건이라는 뉘앙스조차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오히려 복음은 악과 그 결과인 죽음의 극복, 아니 전복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 대답은 앞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완벽하고 매끄러운 논리적 논증은 아니다. 다만 저자는 하나님을 제1원리로 인정하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적극적인 결정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제안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아마도) C. S. 루이스 역시, 하나님이 매순간 우주의 원자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신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여기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보인다. 저자 역시 이게 “누군가의 눈에는 궤변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에 관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는 “신비”의 영역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 또, 여기에는 저자의 신학적 배경인 정교회의 분위기도 살짝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자가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두 번째 전선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당혹스러운 발언들이 우리를 늘 더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악과 고통, 큰 재앙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의 진짜 대답은 어쩌면 입을 좀 다물고, 주제넘게 설명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을 하려다 스스로 실책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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