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보아 전투

 

     앞서도 언급했지만, 전투라는 건 양측이 서로 만났다고 해서 바로 이뤄지지 않는다. 소규모의 우발적 접전이 아닌 이상, 이런 전면전의 경우 실제 전투가 이뤄지기까지는 병력의 배치와 작전수립 등에 제법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실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전쟁의 승패가 단숨에 결정나버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은 무기의 살상력이 고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명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나 20여일 만에 끝난 제4차 중동전쟁 등을 제외하면 며칠 만에 끝나는 단기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적어도 몇 개월, 길면 수년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예사다.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작되었지만, 모든 부분에서 열세였던 남한은 전쟁을 3년이나 끌고 갔고 결국 휴전조약까지 이끌어냈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 역시 3년 만에 후세인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긴 했지만 그 후에도 5년 이상 이라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고대 전쟁도 비슷한 양상이어서 주요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수년의 포위전이 일어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다윗이 시글락에서 불타버린 집과 시설들을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동안에도 이스르엘 평야에서의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전투가 반복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양측의 전력 격차는 점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블레셋의 전차부대는 가나안 땅에서 드문 평지 지형이었던 이스르엘 평야에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에 비해 사울이 이끌던 이스라엘 군은 사울 자신의 지난 몇 년 동안의 실책들로 인해 결속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전세는 확실히 블레셋 쪽으로 기울었다.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는 아버지가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부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에서 적들을 막기 위해 나섰다. 어떻게든 왕만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병력을 재정비해 다시 한 번 일전을 기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들들의 활약으로 사울은 간신히 혼란스러운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세 아들은 그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20대 초반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선이래, 뛰어난 활솜씨로 여러 전장에서 활약해왔던 요나단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세 왕자들의 희생에도 전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울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블레셋의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설상가상 그는 블레셋의 궁수가 쏜 화살에 맞아 출혈까지 있었다. 마침내 사울도 자신이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되어버렸음을 깨닫고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왕으로서 적들에게 생포된다면 당장의 치욕도 문제지만 이후 전쟁과 협상에서 결코 이스라엘에 유리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정했다.

 

    사울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부관은 자신을 찌르라는 왕의 명령을 차마 수행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사울은 스스로 칼 위에 몸을 던졌고, 부관 역시 자신의 마지막 주인을 따라 함께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첫 번째 왕은 혼전 중에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친위부대도 전멸하고 말았다. 이 결정적인 패배에 인근의 주민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고, 전쟁의 승패는 그것으로 거의 결정되고 말았다.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길보아 전투', 1562년 작.

좌측 하단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사울과 그의 부관이 함께 자결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패전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확인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워낙에 난전중이라 왕의 신분을 확인할 수도 없었던 것 같다. 고대에는 전투가 끝나고 사후처리를 할 때 전상자처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적들의 무장을 해체하고 수거하는 일이었다. 일반 병사들의 무장이야 그리 값나가는 게 없었겠지만, 지휘관이나 중견 간부들의 무장 중에는 값나가는 물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색을 하던 블레셋 병사들 중 하나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의 무장을 보고 평범한 신분이 아님을 알아챘다. 블레셋의 영주들은 고대의 관례대로 사울의 갑옷을 벗겨 다곤 신전에 봉헌물로 바친 후, 목을 베어내 그것을 블레셋의 여러 성과 마을들에 순회하며 전시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길보아산에서 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벧산(벧 스안)의 성벽에 매어 달고는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는 시신에 대한 큰 모욕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중 누구도 감히 시신을 수습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나섰다. 그들은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후 가장 첫 번째로 나섰던 암몬과의 전투에서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은인의 시체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베스 주민들은 건장한 남성들을 뽑아 밤새도록 달려가 벧산 성벽에 매달려 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찾아 운구해왔다. 시신은 야베스에서 화장된 후 뼈만 추려져 야베스 인근에 묻혔다. 요세푸스는 이 때 인근에서 가장 좋은 땅인 아루라라는 곳에 매장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블레셋군이 이스라엘 평야 전투에서 승리한 뒤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은 곧 사울의 왕궁인 기브아로 전해졌다. 온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기에 소식은 빨리 전해졌을 것이다. 당시 왕궁에는 사울이 노년에 낳은 아들 에스바알과 요나단의 아들인 므립바알, 그리고 사울이 첩인 리스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 등이 남아있었는데, 일들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고 황급히 기브아를 떠나야했다. 이 때 요나단의 아들인 므립바알은 다섯 살이었는데, 유모의 등에 업혀 도망치던 중 사고를 당해 다리 한쪽을 절게 되었다.

 

    한편 전쟁이 이렇게 마무리가 된 후에도 소규모의 저항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종의 사울왕국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투쟁을 이끈 것은 왕의 사촌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었다. 어쩌면 사울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스바알을 도와 왕국을 보전해달라는 유지를 남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브넬은 블레셋이 점령한 가나안 중북부 곳곳에서 활동하는 저항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이 일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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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추격

 

    아말렉족은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때문에 한 번 광야로 들어가버리면 그들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이전에 사울 왕이 대대적으로 아말렉 원정에 나섰을 때에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시내반도의 광야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었다. 다윗과 함께한 사백 명의 군사로서 그들을 추적하는 일은 처음부터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물러간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물론 다윗 역시 이를 알았겠지만, 영지인 시글락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브솔 시내를 건너 아말렉족의 자취를 탐색하며 추격을 계속하던 다윗의 부대는 한 이집트 소년을 만난다. 그는 아말렉 사람들의 시중을 들던 소년노예였다. 아마 빚 때문에 팔려간 채무노예나 약탈 과정에서 집을 떠나 끌려갔을 것이다. BC 10세기인 이즈음은 한동안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이집트도 힘을 상당히 잃어버리고 나일강 유역의 좁은 지역에서만 간신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말렉족이 이집트 영토를 침략해 약탈을 해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집트를 이렇게 쇠락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지중해를 통해 서아시아에 집단으로 이주한 해양민족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블레셋족도 이들 해양민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 꽤나 강한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한 병명을 알 수는 없지만 이집트 소년은 중병에 걸려 있었고, 그의 주인은 치료대신 그냥 길가에 버려두고 가는 쪽을 선택했다. 이번 원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재물과 노예들을 얻어냈기에 크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수색대에 발견된 소년은 심하게 굶주려 탈진한 상태였고, 다윗은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고 회복을 돕는다.

 

     소년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다윗은 그를 심문하기 시작했고, 그가 얼마 전 가나안 남부를 약탈했던 아말렉 부대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소년은 아말렉족이 평소 어느 길을 이용하는지, 그들이 자주 머무는 장소들이 어딘지를 모두 알려준다. 다윗으로서는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정보제공자를 만난 셈이었다.

 

     소년의 말에 따라 다윗과 그의 병사들이 아말렉 사람들의 주둔지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아말렉 사람들은 간만에 큰 전과를 올린 약탈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밤새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갑자기 찾아오는 긴장의 이완은 종종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까지 나타나곤 한다. 바로 이 때의 아말렉이 그랬다.

 

 

 

'포로를 구하러 가는 다윗'

마치에요프스키 성경(Maciejowskiego Biblia) 삽화 中. 1250년 경 제작.

   이건 단지 방심이라는 말로 탓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극도의 긴장된 상황에서 분비되었던 몸속 아드레날린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구나 그들은 지금 당대 이 지역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블레셋 영토 약탈에 나섰다가 돌아온 길이었다. 그 긴장도는 최고였을 것이다. 현대의 군대에서는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고안된 훈련 프로그램들을 운용하곤 하지만, 고대에는 아직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말렉 사람들은 제대로 된 경계도 없이 약탈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있었고, 다윗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새벽녘 가장 취약한 시기를 노려 쇄도했고, 아말렉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속절없이 당해버렸다. 실제 전투는 아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테지만, 약탈당했던 물품들을 되찾고 사로잡혔던 여인과 아이들을 안정시키고 신원을 확인하는 일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일을 마쳤을 무렵은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다윗의 두 아내들도 다행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습격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혼전 중 낙타를 타고 빠져나간 사백 여 명뿐이었다.

 

 

 

'포로를 구출하는 다윗'

마치에요프스키 성경(Maciejowskiego Biblia) 삽화 中. 1250년 경 제작

 

 

 

노략품의 처리

 

    아말렉은 시글락 만이 아니라 인근의 유다 지파의 마을들과 블레셋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성들까지 약탈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윗이 획득한 노획품들은 시그락 사람들이 빼앗긴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양이었다. 그는 내려왔던 길을 역으로 되 집어 다시 브솔 시내에 이른다. 그곳에는 지난 번 부상과 피로로 남겨두었던 이백 여 명의 사병들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이번에 획득한 노획품들의 분배에 관해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이백 명을 참여시킬 것이냐의 문제를 두고 잠시 이견이 있었으나, 다윗에 의해 모두를 포함해 분배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진다. 충분한 노획품을 얻었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은 약탈로 불타버린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가 획득해 온 재물들은 여기에 필요한 충분한 재원이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출신 지파인 유다 지파의 장로들을 불러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나눠주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아말렉에게 약탈을 성읍도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비록 블레셋 왕에게 의탁하고 있었지만 유다 지파의 장로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블레셋의 위협이 다시 강해지면서 유다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세력을 필요로 했다. 왕인 사울이 있었지만,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반역자로 쫓기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느낌이었다. 그런 유다 지파 사람들의 눈에 자연히 다윗이 들어왔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사집단을 이끌고 있었고, 블레셋의 가드 통치자와도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기에 유다 지파의 보호자가 되기에 가장 적절해 보였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꾸준히 다윗 쪽에서도 우호적인 선물을 보내곤 했기에 양측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편 이즈음 다윗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지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점점 노쇠해가는 사울과 그의 정신적인 문제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었고, 다윗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로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제외된 요나단 이외의 나머지 아들들은 딱히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시글락의 다윗은 나쁘지 않은 대안이었다.

 

     우선 사울 왕의 출신 지파였던 베냐민 사람들 중에도 다윗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이름 있는 사람은 사울의 왕궁이 있었던 기브아 출신의 아히에셀이었는데, 그는 훗날 삼십 용사로 불리던 핵심용사이자 다윗이 일 년의 각 달을 맡겨 복무하게 했던 열두 명의 장관 중 9월을 맡았던 아나돗 출신의 아비에셀이라는 인물과 동일인일지도 모른다. 기브아와 아나돗은 바로 이웃한 마을이었다. 한편 기록에는 다윗의 3용사 중 좌장이었던 야소브암(요셉 밧세벳)도 이 때 귀순한 것처럼 쓰여 있는데, 아마도 그가 베냐민 출신임을 밝히기 위한 서술이 아니었나 싶다. 사울 정권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다윗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약간의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들이 거짓으로 귀순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큰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마새라는 이름의 지휘관이 나서서 자신들의 여호와 신앙을 드러내며 다윗을 설득했고, 다윗은 그들을 받아들여 군지휘관으로 삼았다.

 

    요단강 동편의 지파들(므낫세, , 르우벤)은 비교적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북쪽의 아람세력과 남쪽의 모압과 암몬 등으로부터 상시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아마도 다윗이 사울의 군대에 있을 때 어떤 도움을 받지 않았나 싶은데, 이 불안한 시기 갓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 중 일부 역시 다윗에게 귀순을 청했다. 특히 므낫세 지파 출신의 사람들은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과의 싸움에도 일정한 공을 세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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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력비교

 

     지도상으로 보면 블레셋의 영역이 이스라엘의 영역보다 훨씬 작지만 양측의 전력은 막상막하, 혹은 블레셋 쪽이 약간 우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블레셋의 영향력은 그들의 본거지인 가나안 남서부 해안평야뿐만이 아니라 가나안의 주요 도시들에도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울의 활약으로 가나안 곳곳에 남아 있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요새들이 상당수 파괴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울이 상비군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영토를 보호해낼 수는 없었던 만큼 산발적으로 침략해 오는 블레셋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다시 가나안 곳곳에 머물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나 싶다.

 

     블레셋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가나안 남서평야를 지나는 길은 이집트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지나가는 대상들의 주요 통로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길은 일찍부터 블레셋 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마도 그들은 이 지역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일종의 통행세를 받아 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변변한 지하자원이나 천연자원이 없었기에 무역에 나서기 어려웠고, 주요 교통로로부터도 살짝 비켜나 있었다.

 

     한편 가나안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산지들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외부의 위협에 맞서 긴밀하게 협조하기에도 어려웠고, 심지어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옛 가나안 원주민의 도시들까지 있었다. 상당수는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 같지만, 여전히 적대적인 상황에 있는 경우도 많았다. 훗날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되는 여부스성도 그런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 중 하나였다.

 

     여기에 블레셋 사람들의 앞선 철기기술은 결정적인 차이를 이끌어냈다. 물론 이스라엘에도 철제 무기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경우 자체적으로 철광을 소유하거나 제련시설을 갖추지도 못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블레셋은 철제 전차까지 소유할 정도였다. 말단 병사들까지 철제무기와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 한참 후대의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로마군의 병사들도 그런 무장을 갖출 수는 없었다 - 이스라엘에 비해 우위를 점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전쟁이 누가 봐도 블레셋 쪽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우선 이스라엘은 사울을 중심으로 일원화된 지휘체계가 있었다. 앞서 객장인 다윗을 데려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두고 블레셋 내부에서 각 도시국가의 군주들 사이의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왕의 소집령에 의해 모인 이스라엘의 주력군은 기본적으로 사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 전장에서 일관된 의사결정 라인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점이었다.

 

     더구나 그는 지난 40여 년 동안 많은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내 온 역전의 용사이기도 했다. 백성들을 통합하고 국가의 조직을 정비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능력이나 제사장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통 신앙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진 국가와 조화를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숙한 선택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군사적인 재능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블레셋과의 충돌이 있어왔다는 것도 이스라엘 쪽에는 일종의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이 전쟁은 블레셋의 기습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블레셋과의 크고 작은 분쟁을 경험해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일종의 예비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전쟁은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기습이 아닌 이상 공격 측에 비해 방어측이 보급이나 지형의 활용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했다. 많은 병력은 많은 식량과 보급품을 필요로 했다. 부족한 부분은 다시 본국에서 가져오거나 약탈을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후자 쪽은 약탈을 당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초래했기에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요컨대 이 전쟁은 며칠 만에 끝나버릴 그런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분위기는 이미 주변의 작은 도시국가들과 유목민족들 사이에도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두 나라가 전면전을 벌이느라 온 신경을 쏟는 기간은, 주변의 작은 세력들에게 기회가 되기도 했다. 확실히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아말렉족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글락 약탈

 

    아말렉족의 정찰병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공격해 타격을 입혔던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돌아와 보고했다. 아마도 다윗은 육백 명에 달하는 그의 핵심 부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기스의 부대에 참여했고, 시글락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비롯한 소수의 수비대만을 남겨두었던 것 같다. 아말렉의 부족장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본거지를 약탈하기로 결정했다.

 

     약탈은 철저하게 복수심에 기초해 진행되었기에, 시글락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아말렉 사람들은 그 성 안에 남아 있던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노예로 삼기 위해 끌고갔고, 그들 중에는 다윗의 두 아내인 아비가일과 아히노암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나이가 들어 포로로 데려갈 가치가 없어 남겨두었던 사람들과 다윗과 함께 아기스를 지원하러 나갔다가 소득 없이 돌아온 시글락의 원주민들 사이에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한 다윗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치솟았다.

 

     상황이 급해진 다윗은 급히 핵심 참모들과 회의를 시작했다. 제사장인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 그리고 다윗과 초기부터 함께 했던 세 용사인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 등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물어 달라고 요청했고, 아비아달은 당장에 추격을 시작하면 아말렉을 쳐서 빼앗긴 사람과 물자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추격전에는 시글락의 원주민들을 제외하고 다윗의 친위부대 육백 명만이 참여했다. 추격전은 빠른 기동이 생명이다. 다윗으로서는 반감이 생기기 시작한 사람들까지 데려가는 것은 딱히 실익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즉각 아말렉족의 근거지인 남쪽의 광야로 향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이제 막 아벡에서 소득 없이 돌아온 상황이었다. 사흘을 쉬지 않고 행군해 왔기에 상당수가 이미 지쳐있었다. 브솔 시내 근처에 이르자 약 이백 여 명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다윗은 할 수 없이 그들을 그곳에 남겨둔 채, 나머지 사백 명과 함께 시내를 건너 추격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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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참전

 

    그러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정면충돌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블레셋의 보호 안으로 들어간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가드의 아비멜렉(군주) 아기스의 가신이 된 다윗은 당연히 아기스의 출정을 따라서 함께 출병에 동참해야 했을 것이다. 다섯 개의 도시가 중심이 된 연합체 형태로 구성되었던 블레셋은 큰 전쟁이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세력 아래 있는 도시와 마을들로부터 병력을 차출 받아 동원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시글락의 다윗에게도 병력차출 요청이 왔다.

 

     아기스가 내부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까지 다윗을 영입해 영지까지 하사한 것은 바로 이럴 때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울의 장수 시절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인 명성뿐만이 아니라, 그가 망명할 때 함께 왔던 육백 명의 용병단은 여러 유목민족과 약탈자들과의 실전을 통해 단련되어 온 집단이었다. 아기스는 다윗을 직접 불러 이번 전투에 참전해 자신의 곁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공을 세운다면, 여전히 다윗을 미심쩍게 보고 있던 아기스의 가신들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아기스를 다윗을 자신의 가까이에 둘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이 시절 아기스는 정말로 다윗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윗으로서는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오래 전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이후로 그는 내심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울의 군대에 들어가 공적을 세우고, 왕의 사위까지 되었던 것도 그런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울과의 관계가 크게 틀어진 이후 다윗의 행적을 봐도 이런 야망은 분명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사울과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이것은 단지 기름부음을 받은’(‘여호와가 선택한이란 의미의 관용어이자, 실제로도 기름을 머리에 붓는 의식을 하기도 했었다)

 

 

 

라파엘로,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 10세기 중반

 

 

     왕을 죽일 수 없다는 신앙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의 이런 행동은 크게 인정받을만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도 일종의 쿠데타에 의한 왕위 찬탈로 비춰질 수 있는 선택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피를 흘리지 않고 왕위를 얻어낼 수 있는 때를 기다렸고, 이것은 내전으로 인한 국력소모를 막을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왕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시글락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남부를 자주 침략해 약탈하던 아말렉을 비롯한 사막의 약탈자들을 주로 공격해왔던 것도 이런 차원의 일이기도 했다. 아기스에게 보고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그는 동족이자 장차 자신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이 이번 블레셋의 전쟁에 참여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공적을 쌓는다면 그동안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쌓아왔던 명성과 신뢰가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단 참전한 이후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블레셋 내에서 그의 입지가 급격하게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다윗은 육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는 아기스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원정은 일전을 각오한 채 블레셋의 힘을 거의 총동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병력이 적지 않았다. 작은 성읍에서는 다윗과 같이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왔고, 큰 성에서는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할 정도였다.

 

 

 

 

 

시글락으로 복귀한 다윗

 

    ​아기스의 가드성에서 앞서 블레셋의 본진이 설치되었다고 했던 수넴까지는 족히 150km 이상을 행군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비교적 북쪽에 위치해 있는 가드성에서 출발해도 닷새는 걸릴만한 거리였고, 보다 남쪽에 있었던 성읍들로부터 온 블레셋 병력의 경우에는 하루내지 이틀을 더 걸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블레셋군은 아마도 중간 기착지에서 잠시 멈춰 병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곳이 바로 아벡이었다.

 

     아벡은 약 한 세기 전인 BC 1104년 경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자 선지자 사무엘의 스승이기도 했던 엘리의 두 아들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고 그들의 가장 소중한 보물 가운데 하나였던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블레셋으로서는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이스라엘 중부 지중해 연안의 샤론 평지의 한 지역이었던 아벡은, 많은 병력들이 주둔하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은 큰 전투를 앞두고 한 자리에 모여 그들의 신인 다곤에게 승리를 비는 의식을 열었을 것이다.

 

 

 

다곤(Dagon)

 

 

     그런데 여기에서 일이 터졌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블레셋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다섯 개의 성과 그 외의 작은 성들이 함께 모여 연합하는 성격이었고, 따로 전체에 권위를 가질만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의견충돌이 생겼을 때 어느 한 명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 비록 가드성이 블레셋 내에서 제법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의 직접적인 영향은 분명 제한적이었다. 블레셋에는 아기스 말고도 다른 아비멜렉들이 있었고, 그들 중 몇 명이 아기스와 동행한 다윗을 알아봤다.

 

     다윗은 에베스담밈 전투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사울의 장수 시절에도 이스라엘의 적국1호인 블레셋과 여러 차례 싸웠을 것이 분명하다. 블레셋의 다른 군주들이 그런 다윗이 자신들과 함께 다닌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고 불만을 제기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기스는 다윗이 자신에게 망명해 온 이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으며 나아가 이번 전쟁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변호했지만, 다윗에 대한 다른 군주들의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좀처럼 생각을 바꾸지 않는 아기스를 향해 점점 적대적인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아기스는 다윗을 참전시키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일로 혹시 다윗이 자신에게 불만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던지, 다윗에게 그가 참여할 수 없었던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이번에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명령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연기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로 다윗은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되도록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내색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랬다가는 아기스로부터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으니까. 때문에 다윗은 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굉장히 억울한 일인 것처럼 반응했고, 아기스는 여기에 깜빡 속아넘어간다.

 

     다윗은 본거지인 시글락으로 돌아갔다.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되돌아가는 데에는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이 기간 시글락에는 큰 일이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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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의 침공

 

    마침내 다시 한 번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물론 그동안도 두 민족 사이에는 끊임없이 소규모 충돌이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울이 즉위한 지 2년째인 BC 1048년 경 일어났던 믹마스 전투에서의 대승 이후 가나안 지역에서 블레셋 세력은 크게 후퇴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후 약 40년이 지난 이즈음 블레셋의 세력은 거의 다 회복되었고,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하기에 이른 것이다.

 

     블레셋 연합군은 수넴에 본진을 설치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지역은 블레셋의 본거지로부터 꽤나 북쪽으로 올라간 장소였다. 이들이 굳이 바로 동쪽으로 진격하지 않고 북쪽으로 한참이나 올라왔던 이유는 가나안 특유의 지형 때문이었다. 앞서도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가나안 땅은 전반적으로 높고 낮은 수많은 산과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얼마 되지 않는 평야는 지중해 쪽 해안을 따라서 좁고 길게 늘어서 있었고, 중앙지대는 남북 할 것 없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백 m에 달하는 산지들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장벽으로 가려진 것이 아닌 이상, 바로 동쪽의 산지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도 동서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수요는 늘 있어왔으니까.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의 시설공사가 불가능했던 고대 세계에서 그 길이라는 것의 수준은 뻔했다. 그리고 그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과 골짜기의 좁은 길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블레셋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인 전차부대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 공산이 컸다. 전쟁을 제대로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때문에 블레셋은 비교적 넓은 길이 나 있던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한 뒤, 므깃도를 거쳐 가나안땅 북부의 요충지인 이스르엘 평야로 진입했던 것이다.

 

 

 

 

 

     사울 역시 블레셋의 이번 침공이 이전과 같이 단순한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그는 급히 열두 지파의 땅에 전령을 보내 군대를 소집했고, 블레셋 사람들이 본진을 세웠던 수넴의 남서쪽 길보아 산 부근에 진영을 벌여놓고 마주했다. 전투라는 것이 양측의 군대가 마주했다고 해서 바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적지 않은 수의 군대를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행군해 온 병력을 재배치하고, 전술을 계획하는 것만 해도 족히 며칠은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사울은 크게 노쇠해 있었다.

 

 

 

쇠약해진 사울

 

    마흔 살에 왕이 되어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왔던 이 노병도 이제 여든에 이르렀다. 애증의 관계이긴 했으나,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함께 수행해왔던 동지이자 멘토였던 사무엘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나면서 이 늙은 왕은 급격히 기운을 잃었다. 이 시기 급격한 심리적 동요가 일어났던 사울은 평생 하지 않았던 일에 손을 대었다. 바로 초혼술을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William Sidney Mount, '사울과 엔돌의 무녀'. 1828년 作.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비록 사울과 사무엘 사이에 이스라엘의 국체를 두고 큰 의견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사울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가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능력과 지도력을 근거로 스스로 왕위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이 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권위로 선택되고 열두 지파의 장로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추대된 지도자였다.

 

    요컨대 그의 왕권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키지는 않는다. 왕의 능력이 크게 의심되거나, 현재의 왕보다 더 나은 잠재적 지도자가 나타났을 때라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 사울이 경쟁자로 여겼던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직 확고하지 않았던 왕위를 안정시키기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을 사전에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다행이 그는 꽤 유능한 지휘관이었기에, 아직 그의 군사적 지도력은 크게 의심받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그가 여호와 신앙을 버렸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을 따르던 사람들의 이탈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리고 사울은 그런 정치적인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여호와 신앙을 고수해왔던 것 같다. 그에 관한 많은 지적을 하던 사람들도 사울이 이방신들을 섬겼다는 고발만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은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왕국 안에서 각종 사술(邪術)을 부리는 이들을 모두 추방하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물론 놉의 성소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을 처형했던 일은 두고두고 큰 오점으로 남긴 했지만.

 

     그랬던 사울이 이제 블레셋의 큰 위협을 앞두고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이 시점에서 그의 주변에는 더 이상 그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 다윗처럼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해왔던 사울이었기에 아마도 길보아의 이스라엘 진영에는 사울의 세 아들들 -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과 사촌동생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 같은 친족들, 그리고 소수의 측근들만이 함께했을 것이다.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사장들을 처형한 이후 제사장들마저 그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자, 사울은 의지할 곳이 없어져버렸다. 결국 그는 자신이 쫓아냈던 사술을 부리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측근 중 하나를 시켜서 용한 초혼술사를 알아보게 한 그는, 한밤 중 변장을 하고 두 명의 신하들과 함께 엔돌에 있다는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초혼술은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와서 대화를 하게 만들어준다는 의식이다. 사울의 의뢰로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을 불러왔다는 여인의 말을 얼마만큼이나 믿어야 하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자리에 있던 네 명의 사람들 중 사무엘의 영혼을 봤다는 인물은 오직 그 여자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사울은 여자의 입을 통해 사무엘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여자는 사무엘이 사울의 잘못을 꾸짖으며 그와 그의 아들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적이었다. 안 그래도 노환으로 쇠약해져 있던 사울은 여인의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는 꼬박 하루를 움직이지 못했다. 사울은 지금 은밀하게 자리를 빠져나온 상황이었다. 적들을 코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이 자리를 비운 채로 돌아오지 않는 이 엄청난 상황은 길보아에 모여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사울은 진영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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