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방 - 남자-되기, 유흥업소, 아가씨노동
황유나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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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을 마시지 않는다정확히는 마셔본 적도 없다당연히 여기 나오는 것 같은 유흥업소에 가본 적도 없고그 생리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몰랐다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다양한 유흥업소들 간의 운영 방식의 차이(텐프로와 텐카페가라오케와 노래바노래방의 차이를 아는가?), 그리고 들어보긴 했으나 뭔지는 제대로 몰랐던 보도방이라는 조직의 정체였다.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내용상 두 개로 구분된다. 1장은 우리나라 유흥업소의 운영 방식에 짙게 배어 있는 남성위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고(사실 이 내용은 책 전반에 깔려 있다), 2장과 3장은 실제 유흥업소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충과 관련 업계의 구조적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유흥산업을 규제하는 법률이 지극히 남성 위주로 되어 있음을 지적한다예를 들면 유흥업소의 접대부는 항상 여성으로 전제하고 있다그리고 이들 많은 업소들에서 성구매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성병 검사를 요구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이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성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 불법적인 행위 가운데서 남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만 취하고 있었다그것도 공식적으로 공창제도를 인정하는 것도 아닌 나라에서 말이다.


또 하나저자는 얼마 전 큰 범죄가 일어났던 버닝썬 같은 클럽의 운영방식에도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다예를 들면 클럽에서는 일부 여성들에게 무료입장이라는 혜택을 준다그렇게 클럽에 여성들이 많아져야 테이블비와 술값을 지불하는 남성들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소위 물 관리의 한 방식이다.


더구나 그렇게 클럽에 무료로 입장한 여성들은 그들을 입장시켜 준 엠디가 소개하는 남성 게스트의 테이블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셔야 한다무료입장의 대가라고 해야 하는 걸까그런데 심지어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갔더라도 테이블 게스트가 아니라 플로어 게스트인 경우는 인형뽑기를 할 수 있는 규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이건 뭐 신세계다.


저자는 이런 환경을 여성에게 폭력적인남성 위주의 문화라고 분석한다일견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다그런데그런 유명한 클럽의 원칙과 운영방식이 이런 곳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그걸 알면서 플로어 게스트혹은 엠디를 통한 무료입장으로 굳이 그곳에 가는 여성들의 심리는 뭘까뭔가를 협박받아서 클럽에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부분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자기 돈을 내고 거액의 테이블을 잡아서 노는 것보다는이리저리 불려 다닐 정도로 자신이 인기 있는 (외모의여성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게 더 좋게 여겨진다는 것이다저자는 여기에서 성차별적 세팅을 읽어내지만만약 어떤 여성이어떤 강제도 없이(물론 저자는 여기서 비공식적인 강제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클럽의 규칙을 알면서 그런 식으로 논다면(이 과정에 어떤 범죄행위도 발생하지 않는다면그 자체로 문제 삼을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방식으로 노는 걸 좋아하는 여성도 있고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그게 여성의 객체화성적 대상화로 여겨진다면 그런 클럽은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그리고 이쯤 되면여성들이 인형뽑기나 테이블 초대를 받지 않아도 되는 페미니즘적 클럽혹은 여성친화적 클럽 같은 걸 누가 만들지 않는 이유도 살짝 궁금해 진다.



책의 두 번째 부분은 앞서 말한 것처럼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이야기다그들이 업소에서 일하면서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그것이 하나의 구조로서 어떻게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는지에 관한 분석서다유흥업소의 형태에 따라 여성 접대부의 역할이 달라지고가능한 성적 접촉의 수준도 정해진다는 내용은 새로웠다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행동들은 조금 인상이 찌푸려지고.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궁금증이 생긴다성범죄 관련 각종 법률이 강화되면서 이제는 예전과 같은 협박이나 납치감금선불금 따위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그 대신 떠오르는 게 보도방이라는 조직인데여성들을 모집해서 업소로 보내는 일종의 중계업체다여성들은 자유롭게 보도방으로 출근하거나 다른 보도방으로 옮길 수도 있고심지어 대부분의 종사자들은 월급제도보다는 자신이 일한 만큼 받아가는 현재의 방식을 선호한다고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보도방으로 출근하는 여성들은 자의에 의해서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인터뷰 내용 중에는 다른 일보다 시간당 보수가 높아서 선택했다는 대답도 있다그 일을 선택했다는 말이다저자가 문제시하는 건이 과정에서 정확한 업무에 관한 설명이 없다는 것업소에서 겪는 일에 관한 적절한 노동자 보호가 안 된다는 것그리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적강요 등이다.(돈을 떼어먹고 안 준다는 말은 아예 없다그러면 다시 그 보도방으로 출근하지 않을 테니까.)


실제 업소에서 일해 본 종사자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그려볼 수 있었다그들이 하나의 정당한 직업으로서 자신들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고그들에 대한 불쾌한 성적 접촉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그런 자리에 출근하는 건 아마도 다른 유형의 업소보다 높은 보수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수를 받으니 그런 성적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애초에 그런 일방적인 성적 착취가 이뤄지는 일 자체는 없어지는 게 맞다고 본다다만 누가 여성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었을까물론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처지가 다를 수 있다급히 돈을 벌어야 하는다급한 상황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런 특별한 케이스로 상황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저자는 기본적으로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남성 중심 구조에 대한 비판을 끄집어내려고 애쓴다심지어 자신이 직접 인터뷰를 했던 인터뷰이들의 입장을 착각으로 치부하고자신의 재해석을 대신 제시하기도 한다.


남성들이 업소에서 여성 종사자들에게 자신의 자랑과 과시를 끊임없이 하는 이유에 대해종사자들은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남성들의 인정욕구라는 인간적 동기라고 느꼈던 데 반해저자는 이것이 단지 사회에서 통용되는 논리의 답습이며실은 남성들이 자신이 여성 종사자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물론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결론을 내 놓고 짜맞춘다는 느낌을 받는다저자는 문제가 되는 현실을 열심히 취재해 보고하고 있지만그 배경과 인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현장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곳에서 배운 결론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남자들의 방이라는 책의 제목은유흥업소의 제한된 공간인 방에서 여성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를 과시하는 방식으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이론적인(이 책의 장점이 현장성에 있는데도 불구하고결과물이었다.


책 전체에 걸쳐 남성에 대한 인터뷰는 전혀 없으며심지어 참고하고 인용하는 책들도 여성 저자들의 것일 뿐이다그렇다면 저자는 남성들의 사고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남성 일반을 잠재적 성범죄자로우월주의자로 매도하면서도 합리적인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현실 속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분명 대답을 해야 한다다만 그 문제는신체의 자유에 대한 침해나 성을 대가로 비용을 지불하는 일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회적으로 공론화 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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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김인희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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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언론에 비친 중국인들의 몰상식한 행동들을 목격하곤 한다물론 몰상식이 어느 한 나라나 민족의 전유물만은 아니지만최근 보이는 중국인들의 행동 가운데는 확실히 그 도가 지나치다 싶은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사드 사태 즈음해서 중국의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롯데마트에 들어가서 식품들을 일부러 오염시키거나 상품을 훼손시키는 과정을 영상을 찍어 올렸다여기까지는 정신 나간 이들의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문제는 그런 영상을 보며 환호하고 응원하는 사람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얼마 전 방탄소년단이 미국을 방문해서 6.25 때 함께 싸우고 희생당한 한국과 미국 양국의 희생자들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었다그런데 이 장면을 두고 어떤 중국인들은 왜 자기들에게는 감사를 표하지 않느냐며 분노의 화살을 난사해댔다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인데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맞서 싸운 적이었다그런 자기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발상은그들이 이 전쟁의 성격을 철저하게 왜곡시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외에도 대만국적인 연예인 쯔위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대만국기를 들고 흔들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퍼붓거나 그 소속사인 SM 홈페이지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행동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개인적으론 덕분에 그 연예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은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단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그 배경에는 소위 분노청년이라는 중국 내 특정 세력이 짙게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들은 애국활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젊은이들이다.(명칭에 붙은 분노는 이들의 활동이 꽤나 적극적나아가 폭력적이라는 걸 암시한다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애국이 진짜 애국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사실 이건 소위 극우들의 전반적인 한계 같지만(아, 이쪽은 극좌인가).


그들은 위대한 중국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나아가 이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제의 행동발언사상을 깨부수는 걸 목적으로 한다당연히 이 과정에서 온갖 비논리적인 주장과 선동이 난무한다심지어 중국은 제국주의적인 유전자를 갖고 있지 않기에중국이 일으킨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는 헛소리까지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정도.


이 책의 저자는 이들 분노청년의 사상적 근원에 마오쩌둥 시절의 홍위병이 있다고 진단한다마오쩌둥 개인을 우상화 해 숭배했던 광적 추종자들이었던 홍위병들은 대개 10대 초반의 어린 아이들이었다마오쩌둥은 그들을 이용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공산당 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절대군주의 자리에 올랐었다.


분노청년의 등장은 그들을 이용해 정권을 강화하려는 중국 내 기득권 세력들이 조장한 것이었다이미 중국의 교육과정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애국을 강조하는 내용이 잔뜩 채워져 있고이들의 활동에 대한 법적 제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까.


그런데 최근에는 이들과 과격한 행동이 정권에도 어느 정도 부담이 되나보다시진핑은 소분홍이라는 새로운 과격 친위 팬클럽을 새로 만드는 대신, ‘분노청년들이 일으키는 사회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유교사상의 충과 효를 강조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중국을 하나의 큰 가족으로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을 큰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은 모두 무죄라는 그들의 황당한 인식이 인상적이다하지만 이런 게 어디 그들만의 일인지는 모르겠다우리 곁에도 이런 식의 막가파식 주장을 하는 망나니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하니까차이가 있다면 중국은 그게 이미 국가적으로 양성되고 있다는 점이고우리는 그 양상과정이 아직 공식적인 교육과정으로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는 것뿐참고로 자민당의 반세기 집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도 교육 과정에서의 극우 양성의 제도화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책에서는 어떻게 하면 중국의 이런 분노청년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 번 그렇게 만들어진 왜곡된 정신이 어디 바뀔 수 있을까 싶다정권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낸 괴물집단은 결국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늪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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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 메타버스를 건너 디지털 대전환까지
이상직 지음 / 이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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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변호사가 인공지능이라는 주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변호사답게 인공지능의 법적인 지위를 고민해 보기도 하고, 관련 산업의 발전을 막는 규제들이나, 인공지능의 발전이 낳을 수 있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 등을 어떻게 방지/완화할 수 있을지에 관한 법률적 조치 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딱딱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보면서 최근에 인공지능이 이런 분야까지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고, 약간 연배가 있는 분들의 글쓰기 특성 가운데 하나인, 고사 성어를 인용하거나 유명한 역사적 장면들을 도입부에 배치한 후 본격적인 주제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쓰여서,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칼럼을 읽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옹호하는 편에 선다. 하긴 뭐 굳이 일부러 반대하며 과거를 고수하자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저자는 이 영역을 잘 발전시키기만 하면 한 번 더 국가적인 도약을 실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현실로 다가온 과업을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


물론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는 줄이면서, 그 부작용만을 골라서 방지한다는 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울까. 사실 저자도 ‘복잡한 규제는 줄여야 한다’, ‘이러이러한 부작용은 막아야 한다’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정도이기도 하고.


책에 인용된 몇몇 일화들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들이라 딱히 내용 전개에 좋은 빌드업을 제공하지 못한다. 예화는 새로운 것일 때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거지, 흔하디흔한 이야기로는 아무 새로움도, 주목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또,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같은 말은 실제가 아니기도 하다.



저자가 정보통신부에서 공무원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쪽의 전문가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관련 법조업무를 했다는 정도. 때문에 책에 인공지능에 관한 아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그런 내용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나 같은 사람은 읽어도 대충 감만 잡는 정도겠지만.


때문에 인공지능의 최신 동향이나 발전 방향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더듬어 보기에 이 책은 그리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다만 관련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인 관점을 살짝 엿볼 수 는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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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좌파생활 - 우리, 좌파 합시다!
우석훈 지음 / 오픈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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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좌파’냐고 물으면, (우선은 그 무례함에 한 마디를 할지 모르지만) 썩 흔쾌히 그렇다고 인정할지 모르겠다. 우선 그 용어에 담긴 오랜 역사적, 사회적 무게감을 함께 질 여유도 없고, 사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좌파’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우석훈은 자신 있게 스스로를 ‘좌파’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은 흔히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데,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구분이라는 거다. 좌파면 좌파고 우파면 우파지, 진보와 보수가 뭐냐는 말.


흔히 말하는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상대편을 비난하는 맥락에서 ‘좌파’라는 용어를 운운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보수’가 아니듯, 그들이 말하는 ‘좌파’도 진짜 좌파는 아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진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보수는 뭔가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진보는 어디로 나가야 할지 자신들도 모르는 것 같다는 거고, 보수는 뭘 지켜야 하는지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 재미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좌파는 거의 멸종 상태다. 정치인들 중에 (심지어 정의당 의원들도) 스스로를 좌파로 소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앞서 말한 ‘진보’가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좌파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집권을 해 본 적이 없고, 어떤 정치적 채무나 책임도 없다는 데까지 가면 살짝 웃음이 나온다.


좌파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나온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진보’는 그런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냥 적당히 고쳐 쓰자는 주의다. 그렇다면 그게 ‘보수’와 뭐가 크게 다르단 말인가.


여기에서 마침내 ‘개혁적 보수’라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한 이유를 깨달았다. 누군가 말했던 ‘극중주의’가 정치적 포지션의 표현일 수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애초에 보수와 진보는 서로가 서로를 향한 대응 포지션으로의 의미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최근 대선에서 민주당이 가장 민주당답지 않았던 이재명을 내세우고도 패배한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 정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도, 수단도 없는 데다, 대통령과 함께 들어온 공무원들은 자기 정치, 자기 밥그릇 챙기기, 자기 사람 꽂아 넣기를 수없이 하고 있었다는데, 뭐 말 다하지 않았나.



뭐 그게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소위 ‘한국식 민주주의’가 그런 모습이라면 어쩌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소위 진보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보수 정권은 당연하게 해결할 생각이 없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국 터져 나왔고, 그 결과가 최근 젠더 이슈에 과몰입해 극우화 되고 있는 1, 20대 남성들이다.(개인적으로는 여기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 10대 꼴통들은 곧 20대 꼴통이 될 것이고, 그들은 내가 죽기 전에 30대 꼴통이 되어 이 나라의 중추가 될 테니까.)


저자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꼭 집권 세력까지 되지는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는 문제 해결의 이론적, 실질적 기여를 해왔던 좌파가 사라짐으로써, 우리 정치판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저자의 조심스러운 바람을 살짝 엿보게 된다. 지금은 멸종된 좌파지만, 언젠가는 (그리 가깝지는 않겠지만)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이 그러하듯 좌파가 의제를 제안하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는 데 참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는 영원히 고도성장을 할 수 없고, 언젠가는(이미 우리는 그 지점에 거의 다 왔을지도 모른다) 방향전환을 해야 할 텐데, 지금의 진보와 보수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걸까. 언젠가 좌파가 지금보다는 폭넓은 공감을 얻을 날이 돌아올 것이고, 헤겔의 역사적 변증법의 그 날을 그저 기다리면 되는 걸까. 물론 사상이라는 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무에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누가 애써 그 일을 하려 하겠는가. 아무 보람도,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는데.


그래서 우석훈은 취미로서의 좌파생활을 제안한다. 무겁고, 심각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투쟁과 혁명으로서의 좌파 말고, 생활 속 좌파, 좀 더 즐겁고 명랑하고 슬기로운 좌파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자신은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쯤 되면 장기전 모드로 잔뜩 웅크린 자세다. 뭐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금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노력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막을 필요도 없고.


다만 책을 다 읽고도 저자와 같은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는다. 일단 신나게 현 정치계를 까긴 했는데, 왜 오늘날 좌파가 거의 멸종상태가 되었는지 그 내부적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게 한 때 좌파였던 사람들이 다 양지를 찾아 진보가 되었기 때문이라거나, 독재자들이 좌파세력을 탄압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다 설명이 된 걸까?


시야를 조금 넓혀 보면 세계적으로 극좌파들이 일으킨 테러라든지, 과격투쟁으로 인한 피해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 좌파의 유산을 상속 받으려면, 부채도 함께 받는 게 공평하지 않나. 물론 우리나라로 국한시켜 보면 우파 독재가 훨씬 큰 문제를 일으켜왔지만.



시종일관 한 발 물러서 있는 사람이 갖는 여유가 보여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으면 아무래도 투쟁적이고, 날카로워지기 쉬운데 그런 게 없다. 글도 최대한 명랑하게 쓰려고 애쓰고 있는데다, 재미있게 쓸 줄 아는 작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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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
앨러스데어 코크런 지음, 박진영.오창룡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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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동물을 학대하는 사건에 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고문하거나 죽이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보이는 인간들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열악한 상태에서 동물들을 사육하는 업자들, 각종 끔직한 동물실험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경우도 다양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불쾌한 감정이 들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막으려(적극적으로 나서든지, 누군가에게 알리든지) 할 것이고.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법적 처벌수위도 그다지 무겁지 않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법을 제정함으로써 일을킬 수 있는 변화에 집중한다. 동물보호, 혹은 동물복지에 관한 법인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입장이다.



저자는 현재의 동물복지 관련 법률이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처벌수위가 현저히 낮아서 제대로 된 범죄예방효과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저자는 여기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현재의 법률은 동물을 인간에 비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


방법은 동물들에게 일종의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예상되는 반대의견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간다. 예컨대 법적인 의무를 질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이런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지적) 장애인이나 어린 아이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의무를 묻지 않음에도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물론 동물들에게 법적 인격을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고라니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저자가 말하는 건 ‘성원권’이다. 동물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물론 이건 단지 법조문 몇 개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동물들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전담 입법위원(의원)를 배정하는 식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처음 책 제목인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을 처음 봤을 때, 문자 그대로 읽히지는 않았다. 뭔가 알레고리적 표현이나 우화적 문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동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일 줄이야.


동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저자의 깊은 공감력에는 박수를 치고 싶다. 특히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동물들에 관해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법적 논리로 동물들에게 ‘성원권’을 부여해야 하는, 정확히 말하면 부여할 수도 있는 근거를 제시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런 논리 전개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면도 있다.


다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그 정도로 희미한 것일까? 인간의 인간됨(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근거)은 그저 법조항을 만들기 나름일까? 물론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게 진화의 정도와 방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결론에 이르기가 좀 더 쉬울 것 같긴 하다. 언뜻 단지 법률 자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건 실은 세계관 차원의 문제다.

그리고 법이라는 게 생각만큼 정교하게 제정할 수도,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겠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수많은 ‘겹침’의 공간들이 존재하고, 해석을 통한 유보나 양보의 시간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운전자가 한 무리의 양떼와 한 사람의 인간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트는 것이 정당할까. 처벌의 선은 어디까지가 합당할까. 동물의 복지를 신장시키기 위한 전담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면, 같은 논리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의원이나 소상공인, 자영업자, 학생, 어린이, 학교 밖 청소년, 미혼모를 위한 전담 의원들을 뽑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책은 동물의 복지, 지위 향상에 관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좀 더 강하게 떠오른다. 여전히 동물에게 법적 지위, 특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주장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동물들이 ‘원하는’ 일인가? 우리는 쉽게 동물들을 의인화하지만, 사실 아직 동물들의 의식세계에 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에 대한 C. S. 루이스의 견해가 떠오른다. 루이스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기에, 앞서 일어난 고통과 지금 당하는 고통 사이를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동물에게 고통은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각 차원의 문제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회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건 그러니까 동물을 학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최근 벌어지는 동물 학대 사건들을 보면, 루이스의 추측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지옥 같은 경험을 날마다 겪고 있는지..


동시에 루이스는 어쩌면 반려동물, 혹은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의 경우에는 자아 비슷한 것이 형성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상상의 범위를 조금 넓히기도 한다. 이 점에서 그는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하는데, 마치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새로운 인식과 본질을 얻게 된 것처럼, 인간을 통해 자연이 구원 비슷한 것을 얻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동물들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사실 문제는 인간이 동료 인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게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동료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동물을 향해서는 잔혹하게 대할 가능성이 낮을 테니까(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다). 법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을, 다른 생명을 대하는 의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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