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의 연대기 - 지워진 믿음의 기록
이창익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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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이 재미있다. 새롭게 만든 건 아니고, 조선시대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던 일종의 부적 표상과도 같다고 한다. 세 마리의 물고기가 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하나의 머리를 만들고, 거기에 눈이 하나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이 세 개인 하나의 물고기,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다. 주로 눈에 뭔가 병이 생겼을 때 치유를 기원하며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물고기의 하나뿐인 눈에 못을 박아두고는, 내 눈의 병을 낫게 해주면 못을 빼주겠다고 위협하는 문구와 함께.



이 책은 20세기 초 우리나라(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서 유행했던 다양한 미신들을 신문이나 공식 기록물 등을 참고해 나름 정리해 준 책이다. 책에 소개되는 미신들의 수준이 꽤나 다이내믹하고 버라이어티하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동네 여성들이 나서 근처 산의 신성한 곳을 향해 오줌을 싸거나, 신성한 구역에 묻힌 시신을 파내버리는 건 오히려 약과였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이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신체를 먹었다는 신문 기사는 수없이 등장하고, 몇몇 지역에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그러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미신) 줄에 매어 공중에 달아놓는 풍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하드코어한 삶을 살았던 건지.


책의 후반 두 개 장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신흥종교들을 다룬다. 수십 명의 여성을 첩으로 삼고, 교인들이 바친 돈으로 주지육림에 빠져 살았던 대표적인 사이비종교 백백교의 교주 이야기(아, 요즘도 비슷한 광인이 만든 사이비가 있지 않나)와 그 자식들과 제자들이 만든 분파들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고 있으면 어질어질하다.





단순히 다양한 기사들을 항목에 따라 배열해 놓았을 뿐이지만,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그런 미신들이 당시 유행했는지에 대해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 보려고 애쓴다.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먹고, 간과 쓸개를 빼 먹는 나병 환자들의 모습에서는 그 만큼 병이 주는 절망감이 컸음(87-88)을 읽어내고, 시신을 공중애 매달아 두는 풍장은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으로 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상황(178-179)을 보는 식이다.


또,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신흥 종교에 대한 탄압에서는, ‘조선적인 종교’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추론(34)한다. 일견 나름 일리가 있는 추정들이다. 사람이 사람의 신체를 먹고(사실 이건 다른 맥락에서는 극진한 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신병을 치료하겠다면서 죽을 때까지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구로 때리고 하는 짓을 아무 이유 없이 한 거라고 넘어가기는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합리화하고 넘어가기엔 확실히 여기 소개된 사건들이 충격적이고 엽기적이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제당국에서 한 분석, 그러니까 당시 조선 민중의 비과학적이고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므로, 서둘러 개화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쉽게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판단을 오늘날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건 확실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오늘 우리의 판단에, 오늘날의 상식과 과학의 대답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한 사고의 결과가 도출되었다면, 과거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물론 그래도 인육은 좀...



조금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당시의 역사 자료를 잘 정리해 둔 책이다. 좋은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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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 / 돌베개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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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전체 국가 중 60%를 넘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왕정에서 식민지로, 다시 공화국과 군부독재를 넘어 결국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유일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 상황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요소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원칙으로 꼽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일 테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이 책의 저자는 다수결은 애초부터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럼 민주주의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그 중에서도 아테네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시 일반적인 정치 형태는 왕정(군주정)이나 귀족정, 혹은 그와 유사한 참주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목표는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에 있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참주는 일종의 독재자였다. 귀족정이나 왕정에서의 통치권은 핏줄이라는 나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소유한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한 합법적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참주는 그런 정통성이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건 어떤 참주들은 선거를 통해, 그러니까 다수결로 뽑혔다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뽑힌 거면 민주정이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만, 선거라고 해서 다 같은 선거가 아니지 않은가. 절차적인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선거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거에 제공되는 정보가 심각하가 왜곡, 오염되어서 유권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압적이어서 특정한 선거 결과가 유도되거나 하는 경우를 말한다.


권력을 잡은 참주는 이제 어떤 견제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 정적은 가차없이 탄압해서 반대파의 입을 막으려 하고, 딱히 정상적인 시스템을 따른 조언을 듣거나 하지도 않는다. 고대 아테네에는 이런 참주들이 여럿 존재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결국 아테네는 이런 참주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아마도 당장의 유익이 장기적인 유익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단지 제도만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 시민 개개인의 민주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다른 자연적 평등, 시민 지혜, 바른 추론, 교양 교육 등이 여기에서 중요해진다. 즉, 시민들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그들이 모여 내리는 합리적 결정에 따라 통치되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것.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의 이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고직 십 수 만 명이었던 고대 아테네와 수백, 수천 만 명이 속해 있는 현대 국가 사이의 물리적 차이를 고려하면, 옛 방식을 그대로 오늘날로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변용, 혹은 적용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이 책에선 그 부분이 깊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또, 저자가 찬탄해 마지않는 민주주의가 왜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답이 없다. 그저 민주주의는 옳다는 생각 뿐. 하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이 민주주의는 그 도시 안에서도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았고(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사법살해되었다), 아테네 제국 시기에는 그 범위와 강도가 훨씬 심각해지기도 했다. 저자는 그건 사람의 문제고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가려 하지만, 어떤 일이 어떤 제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그 제도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떤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제도를 바로 폐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단순한 해결책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니까. 그리고 인류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보다 나은 정치제도를 발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까. 어떻게 하면 이 하자 많은 제도를 좀 더 고장나지 않게 끌고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책 속의 참주에 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선거로 뽑힌 참주가 독재자가 될 때,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 소개되는 참주의 특징이 오늘 우리의 최고권력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고 씁쓸해진다. 결국 시민들의 무지함과 무능력이 이런 참주를 국가의 원수로 뽑아 놓은 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을 해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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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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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을 병원 생활을 하셨고, 소위 “중환자실”이라고 불리는 집중치료실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내셨었다. 수년 동안의 입원생활로 몸의 근육이 거의 사라지면서 건강하셨을 때와는 전혀 다른 외형이 되셨고, 위독한 고비를 몇 번이나 지나신 후, 결국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였던 지라, 이 책의 내용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이 지적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죽음이 상당히 “불친절”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편안한 곳(아마도 집)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되도록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해 찾는 곳은 병원이다.


일단 병원에 도착하면 바늘을 찌르고, 수액을 꽂고, 온갖 검사들을 돌아다니다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집중치료실(대부분의 병원에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종실을 따로 마련해 두지 않는다)에서 죽을 때까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버티다가 마침내 진이 빠져 숙는다. 이게 과연 존엄하고, 존중받는 죽음의 모습일까?





저자가 말하는 건 호스피스 의료의 중요성이다. 생애 말기에 이르러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무작정 영양을 공급하고.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약물투입으로 환자가 고통을 겪는 시간을 늘리기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환자가 남은 생을 최대한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처치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의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이 주장에 크게 동의한다. 오랜 병원 생활이 얼마나 사람을 초췌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의 의사들이 ‘최선’이라는 모호한 기치 아래 일종의 교조주의적 집착에 빠져, 환자에 대한 치료 아닌 치료를 고집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여러 번 반복되는데, 동료 의사들의 고집과 자존심 지키기에 대한 저자의 분통이 터져 나오는 부분이다.


물론 여기에는 법의 모호함으로 인한 책임추궁을 피하려는 의사들의 심리와, 죽음 자체에 대해 제대로 고민할 틈이 없는 일반적인 상황들, 그리고 완화의료(호스피스 의료)가 현재로서는 병원 운영에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사람(의사)과 문화와 결국 돈의 문제.




난 그렇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받은 것을 충분히 갚고 나면 남은 삶은 여유를 좀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뭐 그것도 경제력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가능한 일일 게다. 그렇다고 무슨 큰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이나 노력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잠언의 한 구절처럼, 너무 부자가 되지도, 너무 빈곤해지지도 않기만을 바랄 뿐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죽음에 관해서는 부디 큰 고통이 없이 맞이했으면 좋겠다 싶지만, 책에 묘사된 대로 일단 병원에 잡혀가고 나면 그런 기대가 실현되는 건 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에서 죽음은 점점 더 익숙한 일이 될 텐데, 이에 대한 좀 더 속 깊은 대화가 좀 더 빨리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좀 편안히 갈 수 있을 테니까.


책에서 지적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볼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모습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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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경제권의 이해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조은상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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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Zoom), 엔비디아, 킹스톤, 그리고 야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모두 미국 기업이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은 이들 회사가 모두 화교가 창업한 회사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원정, 황인훈, 손대위, 두기천, 양치원 같은 중국식 이름들을 보면 그 느낌이 좀 더 와 닿는다. 미국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화교의 힘을 보여주는 예다.


사실 화교들이 좀 더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은 동남아시아다.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고, 명청 시대에 일찌감치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이주가 시작되기도 했고, 제국주의 시대 서양에 의해 식민지의 중간관리자로 많이 채용되기도 했다. 각 나라마다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동남아 지역 상장사 중 화교가 운영하는 기업이 약 70%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난 비중이다.


단지 경제적인 비중만이 아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 베트남의 호치민, 캄보디아의 론 놀, 싱가포르의 리콴유, 미얀마의 네윈 같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인물도 모두 화교였다고 하니, 이 지역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도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책은 그런 화교의 상황에 관한 짧은 보고서다. 책 초반의 세 장에서는 화교가 누구인지, 그들의 네트워크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 같은 일반적인 사항에 관해 설명한 뒤, 이어서 동남아 각국의 화교들의 상황이 어떤지를 정리한다. 마지막 미국의 상황까지 살핀 뒤 우리나라를 포함한 기타 지역의 화교 상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친다.


여러 해 전, 36개월간의 군생활(장교로 전역했다)을 마치고, 필리핀의 한 선교사님 집에서 몇 개월간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 한 번의 일탈도 없이 16년을 학교와 군대에서 보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 정도 그 동안 모아둔 돈을 조금씩 아껴 써 가며 처음에는 마닐라 인근에서, 나중에는 나가라는 지방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어딜 가나 잘 사는 집은 화교들이었다.


특히 나중에 갔던 지방에서는 도시의 발전설비에 문제가 생겨서 매일 일정 시간 정전이 되곤 했었는데, 그 와중에 동네에서 정전을 피해가는 집들은 모두 화교들의 집이었다. 그들은 집에 아예 발전기를 두고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또, 그 동네에선 꽤나 비싼 스타벅스에 들어가면 온통 중국계 아주머니들이 잔뜩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반중정서 때문에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지역, 어느 동네에 가나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분명 그들의 강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지런하게 일하고, 단단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도 시기할 일만은 아니고. 어디에서나 끈질기게 살아남으면서 또 크게 번영하는 모습은 우리도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또 하나 흥미로운 포인트는, 그렇게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화교가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 화교가 해외로 한창 이주할 당시 청나라와 관계가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고, 우리나라는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서 대대적인 화교 탄압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은 무슨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고, 담담하게 현 상황을 조목조목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슨 보고서를 읽는 느낌도 살짝 들었지만, 평소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이란 기분을 가지고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재미있다. 일단 얇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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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4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2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24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3-24 18:52   좋아요 0 | URL
아, 내일 1시에 강남역 10번 출구 나오시면
지오다노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2023-03-24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스템 에러 - 빅테크 시대의 윤리학
롭 라이히.메흐란 사하미.제러미 M. 와인스타인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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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ChatGPT라는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가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치 사람처럼 대화를 할 수 있을뿐더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엄청난 자료를 거의 즉각적으로 찾아서 신문기사든, 논문이든, 에세이든 바로 만들어준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기술발전으로부터 놀라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해 전 알파고는 그 수가 너무나 복잡해서 인간을 이기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있었던 바둑으로 이세돌 기사에게 거푸 승리를 거두며 세상을 놀래켰고, 그 와중에 이세돌이 한 판을 승리한 것이 도리어 역사적인 일이 되어버리기도 했으니까.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 대부분은 그 정확한 매커니즘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 결과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 기술을 이용해 엄청난 힘을 획득한 사람들/조직(기업)이 생겨났다는 점이고, 그들은 제대로 된 견제 없이 자신의 힘을 키워가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권리와 사생활 침해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인데, 기업들은 이런 정보를 더 많은 이윤을 얻는 데 사용하고 있다. 책에서는 특정한 콘텐츠나 상품을 우리 눈앞에 들이미는 알고리즘의 구조 문제, 그리고 눈에 잘 띠지 않게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기업에 양도하게 만드는 약관 동의 버튼, 자동화 기계의 확산으로 인한 실업문제,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할 지도 모르는 사상과 발언들의 확산을 방조하는 문제 등이 지적된다.


사실 배경이 달라졌을 뿐이지, 이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 자체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것들이다. 개인정보의 소유권,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권리, 인간 생명의 중요성,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공정한 대우, 또 인간적인 삶을 지탱시켜주는 사회의 책임 같은 주제들이 그것이다. 다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런 것들을 보장하기 위한 상황이 크게 변했고, 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다움을 보전할 수 있을까에 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가 필요한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 기술발전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전문적이어서, 입법을 담당하는 의원들조차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또, 규제에 대한 노이로제적 반응을 보이는 반규제맹신도들도 적잖게 보이고.





문제가 복잡할 때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한 방법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실마리 찾기다. 저자들은 이 실마리를 민주주의라는 가치에서 찾는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는 케케묵은 개념쯤으로 여기는 그것 말이다.


민주주의는 어쩌면 오늘날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시장(만능)주의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복잡한 사항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종의 추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의제를 제안하는데, 첫 번째는 개인정보의 통제권에 있어서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권력의 불균형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고(기업에서 소비자 쪽으로), 두 번째는 기술변화로 인해 피해를 입을 사람들에게 좀 더 큰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단지 주주들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와는 다른 사회를 우리는 구성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대형 기술기업의 시장지배력을 억제하기 위한 적극적인 반독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기술발전계에 윤리라는 (오래된)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결국 윤리라는 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정해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 기준이 무너진다는 건, 더 이상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뜻인데, 기술발전의 목표가 사람의 안녕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굳이 그렇게 빠른 발전을 해야 할 이유도(그리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자산으로부터 나온 세금이나 인프라적 지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빅테크 기업들로 하여금 이런 윤리적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온갖 로비를 뚫고, 특정한 경제이론만이 절대진리라고 믿는 변종 광신자들의 반대를 넘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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